현재 21권 세트로 나와 있는 토지는 읽다가 중도에 포기한 적이 있다. 그래서 소심하게 선택한 것이 청소년 토지 12권. 김현주가 최서희로 나왔던 드라마도 재미있게 봤었다. 극이 진행될수록 김현주 보다는 악한 김두수 역할을 실감나게 해냈던 유해진이라는 배우를 눈여겨보게 되었지만. 비록 작가가 아닌 다른 이들에 의해 재구성된 책이긴 하지만 새벽을 환히 밝히면서 읽을 정도로 흥미진진했다. 토지를 모두 읽고나서 그 감동이 채 가시지 않았을 무렵 묵혀두었던 이상문학상 전집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지만 활자들은 핑그르르 두서없이 떠다녔고 급기야 신경질이 나려고까지 했다. 모든 책은 각자 가치가 있고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전단지 한 장 속에 있는 짤막한 어구들조차 누군가의 고민이 녹아있다고 생각하며 지내다가도, 이렇듯 숨막힐 듯한 대작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그래도 똑같을 순 없지, 라는 확신이 생기기도 한다.
평소에 시나 소설을 좋아하긴 했지만 하도 잡식성이다보니 원래 특별히 꼬집을만한 취향은 없었는데 근래 들어 역사소설이 좋아진다. <상도>를 찬찬히 다시 읽고 싶어졌고 최인호의 <유림>이 완간되었다는 소식이 반가웠다.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나로부터 벗어나리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점점 더 아빠를 닮아가는 내 얼굴과 엄마의 말투와 생활습관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 때마다 부모님과 부모님 위의 더더 오래된 조상들, 나 개인의 역사보다 훨씬 오래된 민족의 역사, 그 민족의 역사보다 훨씬 더 오래되었을 인류의 역사, 그러한 것들이 궁금해진다. 뭔가 근원적인 것, 변하지 않고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무엇인가를 찾아낸다면 내가 나를 이해하고 전망하는 일이 더 쉬워지진 않을까 하는 기대감 같은 것에서 말이다. 토지를 읽으면서도 그랬다. 엄마는 차디차고 고고한 윤씨 부인의 모습에서 엄마의 할머니를 보았다 하고 나는 최서희의 강하고 질긴 모성애를 보며 엄마를 떠올렸다. 임명희와 양현이의 갈등과 고민 속에서 나 자신의 모습을 보기도 했다. 각자 땅을 향한 강한 집념을 보였지만 최서희에게서는 스칼렛 오하라에게선 느낄 수 없었던 기품이 느껴졌고 그것은 한국 여성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오롯한 자부심마저 들었다. 토지에 대해서는 감히 리뷰를 쓸 수 없을 정도로 손을 놓고 있지만 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 어딘가에 한국 여성의 끈기와 기품이 서려있지는 않을까, 하는 허튼 희망을 걸어보는 경험은 매우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