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프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랐습니다. 알지 못했던 아픔들에 닿을 수 있기를. 그 바람이 서툰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 ‘지은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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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계시지요내일이면 저희를 두고 가신 12년째 되는 날입니다. 12년이라는 시간은 헛헛한 시간이었습니다삶의 조각들이 구멍  풍선처럼 떠다니다 소리 없이 시들어간 시간이었다고 할까요남은 자의 이면에서 풍화되길 거부하는 굳건한 그리움은 침묵만 끓게 하였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흩뿌려진 초록빛에 감화되지 못하고 만선의 깃발을 올리지 못한 낡은 고깃배의 어깨를닮아가며 바닥만 들여다보았습니다조그맣게 펄떡인 생에 대한 의지로 고개 들었을  플라타너스가누런 잎사귀를 떨구고 있었으니그렇게 반쪽의 시간을 살았습니다제가 아버지를 이해함에  박자가늦어  반쪽이었듯이 말입니다.

저는 언제나  박자가 늦었습니다엇박자가 아님에 안도하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면 늦은  박자와 엇박자는 동어라는 생각이 듭니다어쩌면 영원히 닿지 못할 공간을 만드는 늦은  박자가  무서운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려운 말과 사실을 깨달을 무렵 아버지의 시간이 멈추었습니다.

아버지의 시간이 멈춘  흐른 12년과 해마다 잃어버렸던 6개월의 시간이 얽혀 아버지와  사이에 심연으로 존재했던 불가해한 공간이 좁혀지고 있습니다어느 소설가는 닿을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 부르겠다선언했지만  닿고자 하고 닿고야 마는 것을 사랑이라 부르려 합니다아버지께 닿고자 함을 어찌 사랑이라 부르지 않을  있을까요?

아버지.

조선소 노동자로  앞에 겸손하고 순간에 치열했던 아버지를 존경합니다아버지와  사이에 변방의메아리처럼 남은 미극의 불가해도 서서히 사라질 것입니다 틈이 사라질 때면 제가 미처 깨닫지 못한아버지의 힘겨움과 권태허무외로움까지 이해할  있겠지요?

폐염전에  적이 있습니다수많은 소금 알갱이들이 여물던 염전에 풀들만 무성하고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서글펐습니다폐염전에서 5월의 초록빛으로 소금 알갱이가 여물고  내가 진동하길 바라는마음으로 아버지께 닿고자 합니다.

사랑합니다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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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에게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면 나의 뇌리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향기는 아버지의 향기다냄새라 말하는 것이  어울리는 그것은 부연이 필요 없는 아버지 자체이다 벌어진 어깨와 쩌렁쩌렁한 목소리호탕한 웃음소리 때로는 한없이 여리셨던 마음.

오늘 아침 출근길에 아버지가 몸담았던 회사 앞을 지나다  냄새를 맡았다들큼한 페인트 냄새였다여태껏 모를  없었을 텐데  냄새가 새롭게 느껴진   새삼스러움의 크기만큼 내가 아버지의 냄새를잊었기 때문일 것이다아버지의 작업복에선 바닷바람과 페인트 냄새가 나곤 했었는데 이제는  작업복을  수도 느낄 수도 없으니 무뎌짐과의 싸움은 점점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
 

# 말린 수건  장과 달걀 프라이 

아버지는 28  울산에 오셨다그리곤  세월 모두를 조선소에서 보내셨다조선소 깊은 도크에 거만하게 들어앉은 배에게 아버지는 넘치도록 부지런한 친구였다아침 6시면 집을 나섰고  순간부터 오직 친구만을 위했다천직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그건 무난한 핑계였고정든 친구를 떠날  없어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세월 속에 아버지의 젊음이 고스란히 녹은 것이다.

조선소  위에서 청춘을 보낸 것이 후회되지는 않으셨는지 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과 한여름 철판 더위가 버겁지는 않으셨는지 지금은 누구도   없지만 분명한  아버지가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르바이트할  경험한 조선소의 겨울바람은 매섭고 짐승 같은 바람이었는데 바람을 안고 일했던 아버지의 작업복에선 시원한 바람 냄새가 났다공포감마저 느껴지던 한겨울의 바닷바람이 어떻게가을바람의 향취를 가질  있었는지 아이러니하지만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다그건 아버지의 따뜻함 때문이었다고아버지의 온기가 오롯이 작업복에 스몄기 때문이라고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셨다

아버지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셨다여름에는 땀을 훔칠 수건이 필수여서 어머니는  말린 수건  장을 아침마다 아버지께 건네셨고아버지가 돌려주는 저녁의 수건은 더없이 축축했었다퇴근길 벌겋게달아오른 얼굴을 마주하면 아버지의 하루가 눈앞에 그려지고 붉음의 강도에 따라 그날의 더위가  머릿속 한구석에 정확히 각인되었다.

언젠가 여름에 달궈진 철판 위에 달걀을 풀면 기다릴  없이 프라이가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어린 아들에게 어마한 더위를 말하려 농담처럼  말이었겠지만 달걀 프라이는 아버지 자신을 가리키는 기막힌 은유법이었고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겨울이었다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에  박자가 느렸다.
 

#만년필

아버지는 필체가 좋으셨다정연하게 글자가 쓰인 아버지의 사무용 수첩이 미술작품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좋은 필체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셨는지 아버지는 만년필을 소중히여기셨다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에게 대학 입학 선물로  비싼 파커 만년필을 선물하신  보면 아버지에게 만년필은 필기도구 이상의 어떤 상징이다

내겐 아버지가 쓰시던 만년필이 있다 쓰지도 나오지도 않는 만년필이지만  양복 안주머니에는 항상  만년필이 꽂혀있다내가  만년필을 꽂고 다니는 것은 엉뚱하게도 그리운 아버지의 필체가 만년필을 통해 나오리라는 바람 때문이다언젠가는 만년필도  주인의 손길을 잊지 못해 필체를 흉내  것이다.
 

#여진과 노영심

  전까지만 해도 음악이라곤 트로트  자락밖에 모르셨던 어머니께서 요즘 음악을 즐겨 들으신다처녀 시절 들었던 양희은의 노래들을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하시고 CD플레이어가 없던 차에  오디오까지 다시는  보면 어머니의 음악사랑은 마땅히 인정해 줘야  특별한 것이 되었다월요일  텔레비전채널 선택권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행사하셔서 우리 가족은 월요일 밤마다 가요무대를 보고 있다

이런 어머니께 최근 들어 애창곡이 생겼다누구의 노래인지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가수는 중요치 않다말하며 부르시는 노래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이다실제로 여진이든 노영심이든 누가 불렀는가는어머니께 중요하지 않다어머니는 감미로운 멜로디나 가수의 젖은 목소리보다  노래의 가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그리움만 쌓이네 힘주어 따라 부르며 그리움을 가슴 한쪽에 차곡히 쌓고 계시는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아버지의 흔적이 바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감정의 무뎌짐이  순간 안타깝다몇몇 사람들은 무뎌짐을 받아들이라 충고하지만 아버지의 흔적을 잃는  내게 잔인한 일임을  알기에 나는 아버지의 냄새만년필어머니의 노랫소리를 새기며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이다.

아버지의 흔적이 늘어날수록  가슴은 감당하기 벅찬 기운을 추슬러야 하겠지만 나는  추스르고 이겨내리라 믿는다그것들의 존재가 아버지를  곁에 머물고  쉬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그리움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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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가 방정맞은 소리로 나를 깨운 11시가 넘어선 때였다. 며칠째 연이은 야근으로 방에 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어 있던 터였다. 방바닥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겨우 집었지만 감긴 눈은 떠지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가슴에 얹고 소리를 듣고 있으니 누구냐? 밤에. 제발 끊어줘라는 생각과 함께 한숨만 흘러나왔다. 한숨을 푹푹 내쉬다, 평소와 같은 톤으로 여보세요? 밖에 자신이 없어 휴대전화를 머리맡 너머로 던져버렸다. 괜히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아 예민한 사람이 되기보단 차라리 받지 않는 편이 나을 같았다.


11시에 걸려온 전화가 반가운 소식을 전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난 월요일, 회사에 저주를 퍼부으며 구입하신 연금복권이 당첨되었습니다. 수령하시기 바랍니다.혹은 현직물산 과장님이시죠? 이직물산 인사팀입니다. 과장님 명성 듣고 전화 드렸습니다. 제발 우리 회사로 주십시오. 눈물로써 말씀드립니다.같은 전화가 오겠냐는 말이다. 그나마 반가운 것이 있다면 헤어진 애인의 전화 정도? 이것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참히 버린 상대가 반성이 아닌 감성 때문에, 그러니까 깊어 가는 가을밤에 버스커버스커 노래를 듣다 흘러넘친 감성을 주체 하고 자니?라는 문자를 보내려다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러 걸려온 전화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진심으로 애인의 취침 여부가 궁금해 걸려온 전화라 할지라도 마지막 연애가 5 전인 나와는 무관했다.


휴대전화는 집요하게 울렸다. 소리에서 집요함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토록 집요한 인간이 있었던가 곱씹으며 힘을 다해 머리맡의 휴대전화를 집었다. 가열하게 울려대던 휴대전화는 상대방을 확인하려는 순간 잠시 숨을 고르는 잠잠해졌다. 힘주어 화면에는 성훈이 7통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놈, 이거, 먹고 우리들의 좋은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숨은 걸까? 찾아낼 있을까? 친구야, 친구야.같은 말로 속을 뒤집어 놓는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욕이 입에 달리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인마!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호냐?

갑자기 그건 ? 오늘 마실 기운 없다.

미친놈아! 호수나 불러!


성훈의 말에 풀이 죽어 순순히 호수를 불러 주었다.


1004.

꼴에 천사네. 지금 간다.


성훈은 무언가 다른 말을 덧붙이려다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성훈의 앙칼진 목소리에 지금 거야,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들하고 놀아, 밤에 홀아비 냄새나는 방에는 오려고?같은 말은 하지 못했다. 도로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 친구야. 우리의 좋은 시절은 내일 찾아보자꾸나. 오늘은 쉬고 싶구나. 번만 봐주라.읍소라도 해볼까 했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잠결에 느낀 성훈의 정체 모를 비장함은 어떤 읍소도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오너라. 들어와, 들어와. 유명한 영화 대사를 중얼거리다 깜빡 잠이 들었을 즈음 성훈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이놈아, 형님 왔다. 아우, 꼴이 이게 뭐냐. 이러니 네가 복을 받는 거다. 받을 놈아.


예상과 달리 웃음이 묻은 말투였다.


친구야, 자자. 오늘은, 오늘만은, 제발, 조용히 자자.

이노오오옴. 형님께서 왕림하셨는데 자빠져 잠이나 자고. 고오오얀놈. 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대학 시절부터 해오던 사극 말투였다. 말투로 인해 수많은 여자에게 모진 수모를 당하거나 비참한 이별 통보를 받았음에도 아직 버릇을 고치고 있었다.


예에에이. 오셨나이까? 오늘은 웬일로 누추한 곳에 행차를 하시고. 영광이옵니다.

과인이 빈과 다툼이 커지어 스스로 궁을 나왔소. 침소가 마땅치 않아 그대의 우리에 며칠 머물려 하니 영광으로 알고 모시도록 하시오.

? 뭐야? 쫓겨났냐?

어허.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소인의 발로 나왔다 하지 않았소.


성훈의 난데없는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켜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성훈의 뒤에 높이가 허리춤에 다다르는 거대한 은색 하드케이스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온갖 마초적인 짓거리를 하고 다니던 성훈이 집에서 쫓겨나 앞에 멀뚱히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타의에 의한 퇴출이든 자의의 가출이든 웃음이 나는 매한가지였다. 칼로 베기라는 대책 없는 부부싸움에 엮이기 싫어 집으로 돌려보낼까 잠시 고민했지만, 여행 가방의 크기가 그건 불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빨리 재우려 급하게 이부자리를 해주자 성훈은 벌렁 누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록 기지개를 켜고는 때가 꼬질꼬질한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머리와 어깨를 대고 함께 누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신, 멀어졌거나 사라졌거나 혹은 강제로 지워진 것만 같았던 기억들이 하나, 생각났다. 어딘가 분명 존재할 테지만 찾거나 추억할 없었던 토막 기억들. 성훈이 술에 취한 밤이면 흔적이라도 찾아보자던 시절의 기억들이었다.


불쑥 날아든 기억들에 촉촉하다 못해 급기야 축축해진 나에게 성훈은 험담인지 자랑인지 모를 아내 이야기를 했다.


수진이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험한 세상 어찌 살려고…… 걱정이다, 걱정. 만날 손해 보면서 살면 누가 알아준대? 이용하려고 달려들지. 내가 있어 망정이지……. 그리고 남들한테는 둘도 없는 천사면서 나한테는 이렇게 빡빡한 건데. , 정말.

……


일장 연설에도 대꾸를 하지 않자 성훈은 옆구리를 찔렀다.


내관. 듣고 있는 것이오?

예에에에이. 듣고 있나이다. 어느 안전이라고 경청치 않겠사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생각나시옵니까?

말이오?


내가 받아쳐 사극 말투에 성훈은 신이 보였다.


우리 학교 다닐 …….

?

, 고향 다녀오는 수진 보려고 기차 시간 맞춰 앞에서 기다리고, 숨어서 얼굴 한번 보고는 기숙사까지 택시 타고 와서 여자 앞에서 몰래 기다렸던 말이야. 기억은 나냐? 연애할 때는 밤길 걱정된다면서 수진 회식하는 날마다 안에서 삼각 김밥 먹으며 기다린 거는?

캬야아. 기억나지, 나고말고. 시절을 어떻게 잊겠냐? …… 좋은 시절이었다.

좋은 시절이었지. 데리고 다닌 거냐?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라며? 천사랑 함께 있다면 충성을 다하겠다며? 어이구, 인간아. 천사에게 쫓겨나올 정도면 봐도 뻔하다, 뻔해.


옛이야기를 꺼내자 성훈은 나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반쯤 벌린 -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때 성훈의 전화가 울렸다. 슬쩍 화면을 성훈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바꾸고 1시간 전의 나처럼 휴대전화를 머리맡 너머로 던졌다. 그리곤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


봐봐. 발로 나온 거라니까. 이제 믿지? 천사님께서 아주 똥줄이 타신다.


끊임없는 진동 소리에 성훈은 정체가 불분명한 자신감을 얻은 같았다.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그러다 완전히 퇴출당하는 수가 있다, 천사님 숨넘어가기 전에 어서 받아라, 제발 받아라, 같은 말로 달래 봤지만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성훈의 자신감만 키워준 같았다. 진동 소리에 성훈의 어깨는 부풀었고 얼굴에는 조악한 웃음이 번졌다.


성훈의 꼴사나운 모습에 입맛이 달아날 즈음 여간해서 멈출 같지 않던 휴대전화의 진동이 성훈의 웃음을 되레 비웃는 멈췄다. 진동 소리가 요란하던 방에 적막이 감돌았다. 성훈과 나는 서로 멀뚱히 바라보았다.


, 이상하네.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을 허리에 두고 휴대전화를 뚫어지라 보던 성훈은 무심히 쳐다봤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힘이 풀리고 초점이 흐려있었다. 깊은숨을 내쉬며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듯했지만 눈빛에 담긴 초조함은 호주머니에 숨긴 송곳 같았다.


한참을 전투태세로 있던 성훈은 맥이 풀린 주저앉아 아내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험담 속에 녹아있던 자랑은 자취를 감추고 수진이 걔는 자면서 발바닥을 그렇게 비벼 대는지 모르겠어. 쓱쓱. 소리가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모를 거다.같은 말을 했다. 남의 마누라 발바닥 비비는 버릇까지 듣고 있자니 차라리 한바탕 자랑을 듣는 마음 편할 같았다.


거듭되는 험담에 지쳐 내가 , 그래, 맞아, 그래? 싱거운 대답만 돌려주자 성훈은 아내 험담에도 흥미를 잃어가는 듯했다. 성훈은 , 입맛을 다시고 휴대전화를 들어 아내가 걸어온 통화 건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 , ……. , 대단하지 않냐? 25통이나 했어. 정도면 내가 이겼다고 봐야 하는 아니냐?

……

근데 25통에서 멈췄지? 세어가면서 전화했나? 만도 한데. 자는가? 아니야. 바로 잠드는 스타일 아닌데. 한번 해보자는 건가? 참나. 어디 한번 해보자. 이래 봬도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야.


성훈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주상. 빈의 기별을 기다리시는 것이옵니까?

어허, 무엄하도다. 누가 누구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말이냐. 연애에 무지한 내관이 밀당의 묘미를 어찌 알겠소.

미친놈. 내가 보기에 네가 졌어. 이기기는 개뿔. 애가 타기 시작했는데 . 얼른 전화기가 부르르 떨었으면 좋겠지? 전화기에 대고 큰절이라도 하고 싶지? 보니 천사 제수씨가 쫓아내고 약해져 연거푸 전화하는 거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어이구, 인간아. 휴대폰 앞에 두고 108 하다가 제수씨 연락 오면 얼른 집에 들어가라. 완전히 퇴출당하기 전에.


몸에 남은 힘을 다해 정신없이 성훈을 몰아붙이고 나니 힘이 빠져 스르르 눈이 감겼다. 성훈이 목소리를 높여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 “내가 ……같은 말만 드문드문 들려왔다.


*

 

익숙한 알람 소리에 깨어보니 간밤에 아내의 연락은 없었던 성훈은 몸을 한없이 웅크린 잠들어 있었다. 커다란 벌레 같은 모습에 마음이 짠해져 몸을 바로 뉘고 이불을 목까지 올려주자 성훈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수진아……라고 말했다. 나는 참을 없어 크게 한번 웃었다.

 

퇴근해 방문을 열었을 어젯밤 모습 그대로 처량히 놓여 있는 은빛 여행 가방이 보였다.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 같아 휘둘러보니, 우렁각시가 다녀간 바닥에 머리카락 없고 빨래 건조대에 너저분하게 걸려있었던 와이셔츠들은 말끔히 다려져 있었다. 얼룩이 문신 같았던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도 반질반질 윤을 내고 있었다.


친구야. 덕에 내가 복을 받겠구나. 그런데 집에는 들어갈 작정이냐?


성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렁각시냐? 수진 씨한테나 잘해, 인마. 오늘도 집에 들어갈 거냐?

몰라. 연락 없네. 만도 한데. 하루만 있어 보고…….

성훈은 기가 죽어 있었다.

하하하. 역시나 기다리는 거였어. 쫓겨나서 살림하는 자여, 언제 들어오시나?

퇴청하겠소. 기별 드리리다.


간절히 아내 연락을 기다리는 성훈의 목소리를 들으니 같은 베개를 베고 좋은 시절을 추억할 있는 밤이 생각보다 일찍 끝날 같은 예감이 들었다. 원인을 없는 초조함이 일었다. 나는 성훈과 함께 나눌 기억들을 끄집어내 차곡차곡 쌓아보았다. 장면마다 많은 사람이 얇은 종이에 강조된 활자처럼 볼록 솟아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로 촬영된 영화를 보는 어지럽고 몽롱한 기분이 나는 추억 속을 헤매다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을 잤을까. 정신을 차리고 확인한 시계가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12 50분이었다. 성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아직 ?

아직 잤냐? 오늘 갑자기 약속 생겨서. 먼저 자라.


성훈은 태연히 대답했다.


늦으면 연락을 해야지.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 하냐?

미안. 깜빡했다. 빨리 자라.

그래, 잔다. 많이 먹지 말고.

. 근데, , 기다렸냐?

? 기다리긴 기다려. 븅신아.

일찍 들어오라, 많이 먹지 마라, 잔소리에 늦게까지 기다리고. 수진이 같네. 살림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자여, 끝난다. 바로 들어갈게.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받지 않은 전화 25, 짙은 기다림만이 계속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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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날개’를 다시 읽다 보니 잘못 알았고 또, 오독이라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과거의 미숙한 독해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내 심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은 주인공 아내의 이름이다. 나는 언급이 없거나, 있다면 당연히 금홍이겠거니 여겼다. 아니었다. 소설에서는 단 한번 아내의 이름이 나온다. 주인공은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맡다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체취가 전해져 속으로 아내의 이름을 불러본다. ‘연심이!’ 하고...... 


오독이라 생각한 부분은 소설의 말미다. 소설 말미에 주인공은 혼란 속에서 날개를 갈구하며 날고자 한다. 난 지금까지 그 공간이 옥상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의 투신을 상상했었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는 마지막 구절과 날개로 상징되는 현실 탈출 의지는 자연스럽게 투신으로 연결되었었다.


그런데…… 잠깐만…… …… 이상하네……’


소설 어디에도 투신하는 주인공은 없었다. 날고자 하는 사내만 있었다아내와 자신이 숙명적으로 절름발이라 생각하면서도 각자의 행동에 논리가 필요하거나 굳이 변할 필요는 없다 말하고,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며 세상을 걸어가면 된다는 사내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는 말은 현실의 무참함을 환상으로 접한 뒤 뱉는 의지로 말로 들렸다.


더불어 주인공이 묘사하는 정오에서 니체 말을 떠올렸다.


“이때 뚜-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니체는 정오를 인간이 가장 자유롭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으로 묘사했다. 태양이 대지의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순간, 아무런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는 순간, 이 정오의 순간에 인간은 그림자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소설 속 주인공의 정오는 아내의 자정과 대립한다. 아내는 사내에게 늦은 귀가를 종용하고 사내는 그 기준점을 자정으로 정한다. 사내는 낯선 거리에서 멀미를 느끼지만 자정을 넘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내의 자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오의 사내는 달랐다. 현실의 어지러운 모습 속에서도 사내의 겨드랑이는 가려워 왔고 날개를 원했다. 그리고 말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라고. 태양빛이 가장 풍요롭고 그림자 하나 만들지 않는 정오의 순간에 사내는 겨드랑이가 가려워왔던 것이다. 과거 인공의 날개가 돋았었던 겨드랑이가.


……’


삶이 온갖 그림자에 침범 당하고 그 상태에 무뎌진 우리가 정오를 맞이하고 날개를 펼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정오는 고통에 신음하고 체념하며 삶의 중력에 의해 꼼짝달싹 못하는 바로 그 순간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어쩌면 11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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