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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전화가 방정맞은
벨 소리로 나를 깨운 건 밤 11시가 막 넘어선 때였다. 며칠째 연이은 야근으로 방에 들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어 있던 터였다. 방바닥을 더듬어 휴대전화를 겨우 집었지만 감긴 눈은 잘 떠지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가슴에 얹고 벨 소리를 듣고 있으니 ‘누구냐? 이 밤에. 제발 끊어줘’라는 생각과 함께 한숨만 흘러나왔다. 한숨을 푹푹 내쉬다, 평소와 같은 톤으로 “여보세요?”를
입 밖에 낼 자신이 없어 휴대전화를 머리맡 너머로 던져버렸다. 괜히 짜증스럽게 전화를 받아 예민한 사람이 되기보단 차라리 받지 않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밤
11시에 걸려온 전화가 반가운 소식을 전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는가. “지난 월요일, 회사에 저주를 퍼부으며 구입하신 연금복권이 당첨되었습니다. 꼭 수령하시기 바랍니다.” 혹은 “현직물산 최 과장님이시죠? 이직물산 인사팀입니다. 과장님 명성 듣고 전화 드렸습니다. 제발 우리 회사로 와 주십시오. 눈물로써 말씀드립니다.” 같은 전화가 오겠냐는 말이다. 그나마 반가운 것이 있다면 헤어진 옛 애인의 전화 정도? 이것도 애매하기는 마찬가지다. 날 무참히 버린 상대가 반성이 아닌 감성 때문에, 그러니까 깊어 가는 가을밤에 버스커버스커 노래를 듣다 흘러넘친 감성을 주체 못 하고 ‘자니?’라는
문자를 보내려다 실수로 통화 버튼을 눌러 걸려온 전화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진심으로 옛 애인의 취침 여부가 궁금해 걸려온 전화라 할지라도 마지막 연애가 5년 전인 나와는 무관했다.
휴대전화는 집요하게
울렸다. 벨 소리에서 집요함을 느끼기는 처음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이토록 집요한 인간이 있었던가 곱씹으며 힘을 다해 머리맡의 휴대전화를 집었다. 가열하게 울려대던 휴대전화는 상대방을 확인하려는 순간 잠시 숨을 고르는 듯 잠잠해졌다. 힘주어 켠 화면에는 성훈이 건 7통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놈, 이거, 또 술 먹고 “우리들의 좋은 시절은 어디로 갔을까? 숨은 걸까? 찾아낼 수 있을까? 친구야, 친구야.” 같은 말로 내 속을 뒤집어 놓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욕이 입에 달리려던 찰나, 휴대전화가 울렸다.
“왜 인마!”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희 집 몇 호냐?”
“갑자기 그건 왜? 나 오늘 술 마실 기운 없다.”
“미친놈아! 호수나 불러!”
성훈의
말에 난 풀이 죽어 순순히 호수를 불러 주었다.
“1004호.”
“꼴에 천사네. 나 지금 간다.”
성훈은
무언가 다른 말을 덧붙이려다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성훈의 앙칼진 목소리에 “나 지금 잘 거야, 여우 같은 마누라랑 토끼 같은 자식들하고 놀아, 이 밤에 홀아비 냄새나는 내 방에는 왜 오려고?” 같은 말은 하지 못했다. 도로 전화를 걸어 “미안하다, 친구야. 우리의 좋은 시절은 내일 찾아보자꾸나. 오늘은 쉬고 싶구나. 한 번만 봐주라.” 읍소라도 해볼까 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잠결에 느낀 성훈의 정체 모를 비장함은 그 어떤 읍소도 통하지 않을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
오너라. 들어와, 들어와. 유명한 영화 대사를 중얼거리다 깜빡 잠이 들었을 즈음 성훈이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이놈아, 형님 왔다. 아우, 방 꼴이 이게 뭐냐. 이러니 네가 복을 못 받는 거다. 이 복 못 받을 놈아.”
예상과
달리 웃음이 묻은 말투였다.
“친구야, 자자. 오늘은, 오늘만은, 제발, 조용히 자자.”
“이노오오옴. 형님께서 왕림하셨는데 자빠져 잠이나 자고. 이 고오오얀놈.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더냐.”
대학
시절부터 해오던 사극 말투였다. 그 말투로 인해 수많은 여자에게 모진 수모를 당하거나 비참한 이별 통보를 받았음에도 아직 버릇을 못 고치고 있었다.
“예에에이. 오셨나이까? 오늘은 웬일로 이 누추한 곳에 행차를 다 하시고. 영광이옵니다.”
“과인이 빈과 다툼이 커지어 스스로 궁을 나왔소. 침소가 마땅치 않아 그대의 우리에 며칠 머물려 하니 영광으로 알고 잘 모시도록 하시오.”
“응? 뭐야? 쫓겨났냐?”
“어허. 무슨 말을 그리하시오. 소인의 발로 나왔다 하지 않았소.”
성훈의
난데없는 말에 나는 몸을 일으켜 허리를 곧추세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성훈의 등 뒤에 높이가 허리춤에 다다르는 거대한 은색 하드케이스 여행 가방이 놓여 있었다. 온갖 마초적인 짓거리를 다 하고 다니던 성훈이 집에서 쫓겨나 내 앞에 멀뚱히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왔다. 타의에 의한 퇴출이든 자의의 가출이든 웃음이 나는 건 매한가지였다. 칼로 물 베기라는 대책 없는 부부싸움에 엮이기 싫어 집으로 돌려보낼까 잠시 고민했지만, 여행 가방의 크기가 그건 불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있었다.
빨리
재우려 급하게 이부자리를 해주자 성훈은 벌렁 누워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록 기지개를 쭉 켜고는 때가 꼬질꼬질한 내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머리와 어깨를 대고 함께 누운 것은 오랜만이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생각해 봐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신, 멀어졌거나 사라졌거나 혹은 강제로 지워진 것만 같았던 기억들이 하나, 둘 생각났다. 어딘가 분명 존재할 테지만 찾거나 추억할 수 없었던 토막 난 기억들. 성훈이 술에 취한 밤이면 흔적이라도 찾아보자던 시절의 기억들이었다.
불쑥
날아든 기억들에 촉촉하다 못해 급기야 축축해진 나에게 성훈은 험담인지 자랑인지 모를 아내 이야기를 했다.
“수진이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이 험한 세상 어찌 살려고……
걱정이다, 걱정. 만날 손해 보면서 살면 누가 알아준대? 다 이용하려고 달려들지. 내가 있어 망정이지……. 그리고 남들한테는 둘도 없는 천사면서 나한테는 왜 이렇게 빡빡한 건데. 아, 정말.”
“……”
일장
연설에도 대꾸를 하지 않자 성훈은 내 옆구리를 푹 찔렀다.
“최 내관. 듣고 있는 것이오?”
“예에에에이. 듣고 있나이다. 어느 안전이라고 경청치 않겠사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혹시 생각나시옵니까?”
“뭐 말이오?”
내가
받아쳐 준 사극 말투에 성훈은 신이 난 듯 보였다.
“우리 학교 다닐 때…….”
“응?”
“너, 고향 다녀오는 수진 씨 보려고 기차 시간 맞춰 역 앞에서 기다리고, 숨어서 얼굴 한번 보고는 기숙사까지 택시 타고 와서 여자 동 앞에서 몰래 기다렸던 거 말이야. 기억은 나냐? 연애할 때는 밤길 걱정된다면서 수진 씨 회식하는 날마다 차 안에서 삼각 김밥 먹으며 기다린 거는?”
“캬야아. 기억나지, 나고말고. 그 시절을 어떻게 잊겠냐? 아……
좋은 시절이었다.”
“넌 좋은 시절이었지. 난 왜 데리고 다닌 거냐? 그리고 세상에 둘도 없는 천사라며? 천사랑 함께 할 수 있다면 충성을 다하겠다며? 어이구, 인간아. 천사에게 쫓겨나올 정도면 안 봐도 뻔하다, 뻔해.”
옛이야기를 꺼내자
성훈은 나의 타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반쯤 벌린 채 “아-” 소리만
내고 있었다. 그때 성훈의 전화가 울렸다. 슬쩍 화면을 본 성훈은 요란하게 울려대는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바꾸고 1시간 전의 나처럼 휴대전화를 머리맡 너머로 던졌다. 그리곤 애써 무관심한 척했다.
“봐봐. 내 발로 나온 거라니까. 이제 믿지? 천사님께서 아주 똥줄이 타신다.”
끊임없는
진동 소리에 성훈은 정체가 불분명한 자신감을 얻은 것 같았다. 뒷감당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그러다 완전히 퇴출당하는 수가 있다, 천사님 숨넘어가기 전에 어서 받아라, 제발 받아라, 같은 말로 달래 봤지만 별 소득이 없었다. 오히려 성훈의 자신감만 키워준 것 같았다. 진동 소리에 성훈의 어깨는 부풀었고 얼굴에는 조악한 웃음이 번졌다.
성훈의
꼴사나운 모습에 입맛이 달아날 즈음 여간해서 멈출 것 같지 않던 휴대전화의 진동이 성훈의 웃음을 되레 비웃는 듯 뚝 멈췄다. 진동 소리가 요란하던 방에 적막이 감돌았다. 성훈과 나는 서로 멀뚱히 바라보았다.
“어, 이상하네. 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양손을 허리에 두고 휴대전화를 뚫어지라 보던 성훈은 무심히 날 쳐다봤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힘이 풀리고 초점이 흐려있었다. 깊은숨을 내쉬며 평정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듯했지만 눈빛에 담긴 초조함은 호주머니에 숨긴 송곳 같았다.
한참을
전투태세로 서 있던 성훈은 맥이 풀린 듯 주저앉아 아내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험담 속에 녹아있던 자랑은 자취를 감추고 “수진이 걔는 자면서 발바닥을 왜 그렇게 비벼 대는지 모르겠어. 쓱쓱. 그 소리가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모를 거다.” 같은 말을 했다. 남의 마누라 발바닥 비비는 버릇까지 듣고 있자니 차라리 한바탕 자랑을 듣는 게 마음 편할 것 같았다.
거듭되는
험담에 지쳐 내가 어, 그래, 맞아, 그래? 싱거운 대답만 돌려주자 성훈은 아내 험담에도 흥미를 잃어가는 듯했다. 성훈은 쩝, 입맛을 다시고 휴대전화를 들어 아내가 걸어온 통화 건수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야, 대단하지 않냐? 25통이나 했어. 이 정도면 내가 이겼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니냐?”
“……”
“근데 왜 25통에서 멈췄지? 세어가면서 전화했나? 또 할 만도 한데. 자는가? 아니야. 바로 잠드는 스타일 아닌데. 한번 해보자는 건가? 참나. 어디 한번 해보자. 이래 봬도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사람이야.”
성훈은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며 모노드라마의 주인공처럼 혼잣말을 구시렁거렸다.
“주상. 빈의 기별을 기다리시는 것이옵니까?”
“어허, 무엄하도다. 누가 누구의 연락을 기다린다는 말이냐. 연애에 무지한 최 내관이 이 밀당의 묘미를 어찌 알겠소.”
“미친놈. 내가 보기에 네가 졌어. 이기기는 개뿔. 애가 타기 시작했는데 뭘. 얼른 전화기가 부르르 떨었으면 좋겠지? 전화기에 대고 큰절이라도 하고 싶지? 딱 보니 천사 제수씨가 너 쫓아내고 맘 약해져 연거푸 전화하는 거네. 무슨 잘못을 했길래. 어이구, 인간아. 휴대폰 앞에 두고 108배 하다가 제수씨 연락 오면 얼른 집에 들어가라. 완전히 퇴출당하기 전에.”
몸에
남은 힘을 다해 정신없이 성훈을 몰아붙이고 나니 힘이 쭉 빠져 스르르 눈이 감겼다. 성훈이 목소리를 높여 여러 이야기를 했지만 “내가 뭘……” “내가
왜……” 같은 말만 드문드문 들려왔다.
*
익숙한
알람 소리에 깨어보니 간밤에 아내의 연락은 없었던 듯 성훈은 몸을 한없이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커다란 공 벌레 같은 모습에 마음이 짠해져 몸을 바로 뉘고 이불을 목까지 올려주자 성훈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수진아……”라고 말했다. 나는 참을 수 없어 크게 한번 웃었다.
퇴근해
방문을 열었을 때 어젯밤 모습 그대로 처량히 놓여 있는 은빛 여행 가방이 보였다. 방 분위기가 묘하게 달라진 것 같아 휘둘러보니, 우렁각시가 다녀간 듯 바닥에 머리카락 한 올 없고 빨래 건조대에 너저분하게 걸려있었던 와이셔츠들은 말끔히 다려져 있었다. 얼룩이 문신 같았던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도 반질반질 윤을 내고 있었다.
‘친구야. 네 덕에 내가 복을 받겠구나. 그런데 집에는 안 들어갈 작정이냐?’
성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렁각시냐? 수진 씨한테나 잘해, 인마. 너 오늘도 집에 안 들어갈 거냐?”
“몰라. 연락 없네. 올 만도 한데. 하루만 더 있어 보고…….”
성훈은
기가 죽어 있었다.
“하하하. 역시나 기다리는 거였어. 쫓겨나서 두 집 살림하는 자여, 언제 들어오시나?”
“곧 퇴청하겠소. 기별 드리리다.”
간절히
아내 연락을 기다리는 성훈의 목소리를 들으니 같은 베개를 베고 좋은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밤이 생각보다 일찍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초조함이 일었다. 나는 성훈과 함께 나눌 기억들을 끄집어내 차곡차곡 쌓아보았다. 장면마다 많은 사람이 얇은 종이에 강조된 활자처럼 볼록 솟아올랐다. 처음부터 끝까지 핸드-헬드로 촬영된 영화를 보는 듯 어지럽고 몽롱한 기분이 된 나는 추억 속을 헤매다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한참을
잤을까. 정신을 차리고 확인한 시계가 브이 자를 그리고 있었다. 12시 50분이었다. 성훈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왜 아직 안 와?”
“아직 안 잤냐? 오늘 갑자기 술 약속 생겨서. 먼저 자라.”
성훈은
태연히 대답했다.
“늦으면 연락을 해야지. 기다리는 사람은 생각 안 하냐?”
“미안. 깜빡했다. 빨리 자라.”
“그래, 나 잔다. 술 많이 먹지 말고.”
“응. 근데, 너, 나 기다렸냐?”
“응? 기다리긴 뭘 기다려. 븅신아.”
“일찍 들어오라, 술 많이 먹지 마라, 잔소리에 늦게까지 기다리고. 딱 수진이 같네. 두 집 살림하는 남자를 기다리는 자여, 곧 끝난다. 바로 들어갈게.”
난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받지 않은 전화 25통, 그 짙은 기다림만이 계속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