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날개’를 다시 읽다 보니 잘못 알았고 또, 오독이라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과거의 미숙한 독해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한편으로는 현재의 내 심리가 반영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잘못 알고 있었던 사실은 주인공 아내의 이름이다. 나는 언급이 없거나, 있다면 당연히 금홍이겠거니 여겼다. 아니었다. 소설에서는 단 한번 아내의 이름이 나온다. 주인공은 아내가 외출한 틈을 타 아내의 화장품 냄새를 맡다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체취가 전해져 속으로 아내의 이름을 불러본다. ‘연심이!’ 하고...... 


오독이라 생각한 부분은 소설의 말미다. 소설 말미에 주인공은 혼란 속에서 날개를 갈구하며 날고자 한다. 난 지금까지 그 공간이 옥상이라는 이유로 주인공의 투신을 상상했었다.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라는 마지막 구절과 날개로 상징되는 현실 탈출 의지는 자연스럽게 투신으로 연결되었었다.


그런데…… 잠깐만…… …… 이상하네……’


소설 어디에도 투신하는 주인공은 없었다. 날고자 하는 사내만 있었다아내와 자신이 숙명적으로 절름발이라 생각하면서도 각자의 행동에 논리가 필요하거나 굳이 변할 필요는 없다 말하고, 사실은 사실대로 오해는 오해대로 그저 끝없이 발을 절뚝거리며 세상을 걸어가면 된다는 사내에게서 죽음의 그림자를 찾을 수 없었다. 또한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는 말은 현실의 무참함을 환상으로 접한 뒤 뱉는 의지로 말로 들렸다.


더불어 주인공이 묘사하는 정오에서 니체 말을 떠올렸다.


“이때 뚜-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니체는 정오를 인간이 가장 자유롭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순간으로 묘사했다. 태양이 대지의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는 순간, 아무런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는 순간, 이 정오의 순간에 인간은 그림자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소설 속 주인공의 정오는 아내의 자정과 대립한다. 아내는 사내에게 늦은 귀가를 종용하고 사내는 그 기준점을 자정으로 정한다. 사내는 낯선 거리에서 멀미를 느끼지만 자정을 넘기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아내의 자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정오의 사내는 달랐다. 현실의 어지러운 모습 속에서도 사내의 겨드랑이는 가려워 왔고 날개를 원했다. 그리고 말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라고. 태양빛이 가장 풍요롭고 그림자 하나 만들지 않는 정오의 순간에 사내는 겨드랑이가 가려워왔던 것이다. 과거 인공의 날개가 돋았었던 겨드랑이가.


……’


삶이 온갖 그림자에 침범 당하고 그 상태에 무뎌진 우리가 정오를 맞이하고 날개를 펼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정오는 고통에 신음하고 체념하며 삶의 중력에 의해 꼼짝달싹 못하는 바로 그 순간일지 모르니까, 말이다. 어쩌면 11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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