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저마다의 향기가 있다면 나의 뇌리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향기는 아버지의 향기다냄새라 말하는 것이  어울리는 그것은 부연이 필요 없는 아버지 자체이다 벌어진 어깨와 쩌렁쩌렁한 목소리호탕한 웃음소리 때로는 한없이 여리셨던 마음.

오늘 아침 출근길에 아버지가 몸담았던 회사 앞을 지나다  냄새를 맡았다들큼한 페인트 냄새였다여태껏 모를  없었을 텐데  냄새가 새롭게 느껴진   새삼스러움의 크기만큼 내가 아버지의 냄새를잊었기 때문일 것이다아버지의 작업복에선 바닷바람과 페인트 냄새가 나곤 했었는데 이제는  작업복을  수도 느낄 수도 없으니 무뎌짐과의 싸움은 점점 패색이 짙어지고 있다.
 

# 말린 수건  장과 달걀 프라이 

아버지는 28  울산에 오셨다그리곤  세월 모두를 조선소에서 보내셨다조선소 깊은 도크에 거만하게 들어앉은 배에게 아버지는 넘치도록 부지런한 친구였다아침 6시면 집을 나섰고  순간부터 오직 친구만을 위했다천직이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그건 무난한 핑계였고정든 친구를 떠날  없어 하루하루 지내다 보니  세월 속에 아버지의 젊음이 고스란히 녹은 것이다.

조선소  위에서 청춘을 보낸 것이 후회되지는 않으셨는지 겨울의 매서운 바닷바람과 한여름 철판 더위가 버겁지는 않으셨는지 지금은 누구도   없지만 분명한  아버지가  시간을 지나왔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르바이트할  경험한 조선소의 겨울바람은 매섭고 짐승 같은 바람이었는데 바람을 안고 일했던 아버지의 작업복에선 시원한 바람 냄새가 났다공포감마저 느껴지던 한겨울의 바닷바람이 어떻게가을바람의 향취를 가질  있었는지 아이러니하지만 어렴풋이 추측하고 있다그건 아버지의 따뜻함 때문이었다고아버지의 온기가 오롯이 작업복에 스몄기 때문이라고아버지는 따뜻한 분이셨다

아버지유난히 더위를 많이 타셨다여름에는 땀을 훔칠 수건이 필수여서 어머니는  말린 수건  장을 아침마다 아버지께 건네셨고아버지가 돌려주는 저녁의 수건은 더없이 축축했었다퇴근길 벌겋게달아오른 얼굴을 마주하면 아버지의 하루가 눈앞에 그려지고 붉음의 강도에 따라 그날의 더위가  머릿속 한구석에 정확히 각인되었다.

언젠가 여름에 달궈진 철판 위에 달걀을 풀면 기다릴  없이 프라이가 된다는 말씀을 하셨다어린 아들에게 어마한 더위를 말하려 농담처럼  말이었겠지만 달걀 프라이는 아버지 자신을 가리키는 기막힌 은유법이었고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겨울이었다그렇게  아버지를 이해하는 것에  박자가 느렸다.
 

#만년필

아버지는 필체가 좋으셨다정연하게 글자가 쓰인 아버지의 사무용 수첩이 미술작품 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좋은 필체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으셨는지 아버지는 만년필을 소중히여기셨다고등학교를 졸업한 아들에게 대학 입학 선물로  비싼 파커 만년필을 선물하신  보면 아버지에게 만년필은 필기도구 이상의 어떤 상징이다

내겐 아버지가 쓰시던 만년필이 있다 쓰지도 나오지도 않는 만년필이지만  양복 안주머니에는 항상  만년필이 꽂혀있다내가  만년필을 꽂고 다니는 것은 엉뚱하게도 그리운 아버지의 필체가 만년필을 통해 나오리라는 바람 때문이다언젠가는 만년필도  주인의 손길을 잊지 못해 필체를 흉내  것이다.
 

#여진과 노영심

  전까지만 해도 음악이라곤 트로트  자락밖에 모르셨던 어머니께서 요즘 음악을 즐겨 들으신다처녀 시절 들었던 양희은의 노래들을 소리 높여 부르기도 하시고 CD플레이어가 없던 차에  오디오까지 다시는  보면 어머니의 음악사랑은 마땅히 인정해 줘야  특별한 것이 되었다월요일  텔레비전채널 선택권은 전적으로 어머니가 행사하셔서 우리 가족은 월요일 밤마다 가요무대를 보고 있다

이런 어머니께 최근 들어 애창곡이 생겼다누구의 노래인지 나와 실랑이를 벌이다가수는 중요치 않다말하며 부르시는 노래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이다실제로 여진이든 노영심이든 누가 불렀는가는어머니께 중요하지 않다어머니는 감미로운 멜로디나 가수의 젖은 목소리보다  노래의 가사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그리움만 쌓이네 힘주어 따라 부르며 그리움을 가슴 한쪽에 차곡히 쌓고 계시는것이다.
 

나는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있다아버지의 흔적이 바래지는 않을까 걱정하고  감정의 무뎌짐이  순간 안타깝다몇몇 사람들은 무뎌짐을 받아들이라 충고하지만 아버지의 흔적을 잃는  내게 잔인한 일임을  알기에 나는 아버지의 냄새만년필어머니의 노랫소리를 새기며 아버지를 그리워할 것이다.

아버지의 흔적이 늘어날수록  가슴은 감당하기 벅찬 기운을 추슬러야 하겠지만 나는  추스르고 이겨내리라 믿는다그것들의 존재가 아버지를  곁에 머물고  쉬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 하루도 그리움이 쌓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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