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밀밭의 파수꾼
J.D. 샐린저 지음, 김욱동 옮김 / 현암사 / 1994년 2월
평점 :
절판


기대치가 높았던 소설이었다. 방황하는 젊음을 그리는 성장소설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다른 독자들의 평가도 대단히 높아서, 도대체 어떤 소설일까 궁금했다. 이승하(시인, 평론가)의 '출간 50년이 지나도 여전히 세계 청소년의 사랑을 받고 있는 소설 『호밀밭의 파수꾼』을 쓴 J.D.샐린즈는 성장기 소설의 전형을 우리에게 제시했습니다. 신랄하고 해학적인 문체로 그린 그의 소설은 방황하는 청춘이 송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은 나를 호밀밭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난 뒤의 감동은 그 기대치에 충분히 미치지 못했다.

나는 우연히 도서관에서 아무 생각 없이 책을 빼어들어 읽기도 하지만, 책을 읽기 전에 대체로 그 책에 대한 기존의 평가와 내 개인적인 관심사 등을 고려해서 읽는 편이다. 고백하자면, 실제로는 자유롭게 아무 책이나 읽어대는 것이 내 취향에 맞는 것이지만, 그런 방향 없는 독서의 즐거움만큼이나 그 독서의 문제점들을 인식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방향성을 갖춘 독서를 하려고 노력하는 편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학교 교재가 아닌 이상, 자유롭게 책을 고를 때에는 내 개인적인 취향과 욕망이 강력하게 개입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면, 그런 방향성 있는 독서로의 전환도 '체계성과 고전적인 가치'에 대한 신뢰의 취향으로 바뀐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소설을 읽게 된 계기는 1) 성장 소설이라는 매력 : 나 자신은 외적으로는 안정적이지만, 내적으로 방황을 겪는 청춘이란 점에서 숱한 타자들의 청춘의 방황이 타산지석과 동일감의 매혹으로 다가온다는 점. 2) 앞서 말했던 바, 높은 평가와 고전적인 가치.

그렇다면, 왜 이 소설은 나를 감동의 늪 속으로 빠뜨리지 못했을까.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이른바, 방황하는 불량학생일 것이다. 어른들의 위선과 가식의 세계에 대해서 냉소와 경멸의 태도를 보이고, 피비나 앨리로 상징되는 어린이들의 순수하고 정직한 세계에는 다정하고 따스한 눈빛을 보낸다. 한편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학교 친구들(바로 그 자신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에 대해서는 한편으로는 비난하고 깔보면서도 마지막으로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못한다.

이렇게 홀든 콜필드의 인간에 대한 이해를 세 범주로 나누어 본 것은 무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어린이의 순수한 세계에서 성인들의 가식적 세계로 입사하고 있는 청년기의 혼란은 나 스스로 경험한 것이기에 그렇게 받아들인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성인들의 세계에 대해서 냉소와 경멸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그것을 저항하는 것으로 청년기의 혼란기의 가치를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의미한 것일까. 이미 정신적, 그리고 생물학적 17세를 지나온 탓에 나는 홀든 콜필드와 온전히 동일감을 느낄 수가 없는 모양인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