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그리고 그때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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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삼스레 킨케이드를 위키피디아 검색해보니까 재미있는 가족사가 나온다.


  “킨케이드는 1979년에 작곡가이자 베닝턴 컬리지 교수인 앨런 숀과 결혼했는데, 그는 (킨케이드가 1976년부터 전속작가로 일하고 있던) 뉴요커의 오랜 편집자 윌리엄 숀의 아들이며, 극작가 월리스 숀과 형제이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다. 어쩌구저쩌구… 킨케이드와 숀은 2002년에 갈라섰다.”


  저메이카 킨케이드는 <루시>에서 뉴욕 근처에 입주 보모, 오페어로 들어간 이야기를 한 바 있고, <미스터 포터>는 생물학적 아버지, <내 어머니의 자서전>은 좀 냉정한 어머니에 대하여 말했다. 이제 <지금, 그리고 그때>를 쓰면서 자신의 결혼생활을 이야기한다. 이 작품이 2013년에 나오면서 앞에 인용한 위키피디아 내용 때문에 미국 안에서는 조금 구설에 올랐던 모양이다. 작중 부부의 남편 미스터 스위트가 누가 보더라도 앨런 숀하고 너무 닮았기 때문에.

  앨런 숀이 작곡가이자 컬리지 교수. 미스터 스위트는 집에 부속한 차고 위에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를 둔 작업실에서 음악에 전념하는 작곡가. 뉴욕주의 주도 올버니에서 관객 스물 댓 명을 모시고 쇼스타코비치의 피아노 협주곡도 연주하는 모양이다. 듀크 앨링턴의 재즈와 현대 음악, 주로 안톤 베베른, 아널드 쇤베르크, 알반 베르크 류의 음악을 연결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장르를 불문해 교향곡, 성악, 현악, 피아노곡 등을 망라하지만, 현대음악이 거의 다 그렇듯 대중의 호응이 거의 없는 불운한 작곡가. 무대가 20세기 말부터 21세기 초로 보이는데 집안이 뻑적지근하고, 아프리카계 이민자인 미시즈 스위트와 결혼을 반대하는 시어머니는 결국 성대한 결혼식을 끝내고 저지 맨해튼 건물의 옥상에서 자유낙하로 생을 마감해버렸다. 물론 이 불행한 죽음은 앨런 숀의 경우와 다르리라 믿는다. 하여간 이런 맥락으로 보아 아프리카계 이민자인 미시즈 스위트의 남편 미스터 스위트는 백인 인텔리겐치아일 것이다.


  처음엔 미시즈 & 미스터 스위트도 좋아서 죽고 못 살았겠지. 하는 짓마다 예뻐 보이고, 잘나 보였을 테지. 그렇게 살다가, 사실 결혼하자마자 시어머니가 투신자살 해버렸으니 사랑과 행복의 시기가 지극히 짧았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맏딸, 아름다운 페르세포네를 낳을 때까지는 다른 부부와 크게 다르지는 않았던 거 같다. 하지만 다음에 어린 헤라클레스를 낳았을 때, 미스터 스위트는 벌써 아내를 몹시 미워하는 상태였고, 미움을 넘어 그녀가 얼른 죽어버렸으면 하고 바랄 때가 허다했다. 아내가 미우면 아내가 낳은 아들도 미울까? 미스터 스위트가 갓난 헤라클레스의 탯줄을 끊자마자 품 안에 안았을 때, 자기도 모르게 헤라클레스를 손에서 놓치는 바람에 “도끼다시”한 시멘트 바닥에 거꾸로 떨어져 두개골이 박살이 나 죽어버리는 광경을 머리 속에서 그리기도 한다. 저메이카 킨케이드, 이혼한지 10년이 넘은 전 남편이 얼마나 미웠으면 이렇게까지 악담을 서슴지 않았을까? 이 책에서 작가는 전작에 비해 유달리 입이 험하다.

  “신생아인 아들을 바라보았는데 아기를 품에 꼭 안기가 두려웠다. 품에서 놓쳐 아기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을 보고 싶은 더없이 강렬한 열망이, 몸은 멀쩡하지만 머리가 깨져, (중략) 분만실 바닥 사방에 아이의 뇌가 흩뿌려지는 걸 보고 싶은 강렬한 열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p.77)

  미스터 스위트가 본 미시즈 스위트는 출신부터 바나나보트를 타고 미국에 들어온 유민. 바나나보트? 칼립소의 황제이자 내 우상이기도 한 해리 벨라폰테의 노래 중에 <Banana Boat Song>이 있는데 이 바나나보트가 아니다. 미스터 스위트가 말하는 건, 서인도제도에서 거렁뱅이들이 사람이 타는 여객선이 아니라 바나나 수송용 화물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입국한 불법 행위자를 말한다. 그러니까 애초에 자기는 마누라하고 씨가 다르다는 건데, 이런 혼인은 시한폭탄 하나를 품에 안고 시작하는 꼴이다. 언젠가 한 번은 터질 폭탄. 다만 시간이 문제일 뿐.

  그러면 미스터 스위트는 여태 왜 살았느냐고? 킨케이드 가라사대, “미움은 사랑의 정반대이고 그래서 사랑과 가장 유사한 형태”란다. 그러니 미움을 사랑이라 오해하면서 살 수 있었다는 뜻이겠지.

  웃기네. 웃기지?

  처음엔 자기와 다른 피부색도 좋아 보였고, 계급이 다른 것도 오히려 그래서 매력적이고, 부모가 특히 엄마가 극렬하게 반대하는 것도 재미있었을 수도 있고, 이것 저것 다 합해 남들 앞에서 후까시 잡기도 괜찮은 거 같았는데 살면서 보니까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가 너무나 많이 서로 다르니까 처음에 싫다가 결국 미워졌겠지. 이러다 보면 결국 사고 친다. 그리하여 저 뒤로 가면 아름다운 페르세포네와 어린 헤라클레스를 앞에 두고 미스터 스위트가 고백을 해버린다. 자기한테 진정한 사랑이 찾아 왔노라고. 꼴값하는 거지 뭐.


  그래서 결국 미시즈 & 미스터 스위트는 혼인의 불행한 종말을 맞는데, 이게 주된 내용이 아니라 작품의 핵심은 이런 문장이다.

  “현재는 그때이자 지금이고, 과거도 그때이자 지금이며, 미래도 그때이자 지금이 될 것.”

  쉬운 이야기로 하자면, 과거에 있었던 모든 일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며, 지금 벌어지는 모든 것도 영원히 남을 거란 뜻이다.

  이 정도면 미시즈 스위트도 깔끔하게 자기 이름에서 “스위트”를 싹 지워버리고 당연히 위자료 넉넉하게 챙겨 아이들하고 오붓하게 살면 될 것을, 서인도제도 사람들의 정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지난 이야기, 심지어 자기 모국 엔티카 바부다의 인정머리 없는 어머니와 얼굴만 아는 아버지 생각까지, 그것만 딱 끄집어 내기 뭐하니까, 괜히 지구가 탄생한 40억년 전부터 무슨 대, 무슨 기, 무슨 세 등을 망라하면서 독자들 해골 흔들리게 만드느라 열심이다.

  이 작품 속 최근 미시즈 스위트의 나이가 52세. 만일 미시즈 스위트가 작가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분신이라면 이혼 과정이 완료되기 1년 전이다. 사는 곳은 뉴잉글랜드의 작은 마을 셜리 잭슨 하우스. 즉 이혼 소송을 하면서 위자료 명분으로 집은 미시즈 스위트 혹은 킨케이드 소유로 한 모양이다. 요즘 세상에 그거면 됐지 무슨 감정이 남아서. 어차피 처음부터 시한폭탄을 가지고 시작한 결혼이었으니 말이지.



4별은 좀 과한 기분이지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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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인의 노래 1 - 서부의 목소리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7
노먼 메일러 지음, 이운경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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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먼 메일러. 소설가인 건 확실한데 이이의 작품을 읽어보면 이게 소설인지, 논픽션인지, 저널리즘 기사인지 헛갈린다. 이 책이 내가 읽은 세 번째 메일러의 작품인데, 다른 것들의 소감도 마찬가지였다. 1923년생인 메일러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참전하기에 딱 좋은 나이였다. 하버드를 우등졸업해 애초 장교 임관이 가능했으나, 전쟁에 관한 실화 같은 소설을 쓰기 위하여 스스로 사병 입대를 지원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 수십 차례 작전에 투입된 바 있고, 승전 후 일정 기간 동안 일본에 주둔하기도 했다.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 이이의 초기 대표작 <나자裸者 와 사자死者> 즉 <벌거벗은 자와 죽은 자>. 이때 메일러의 나이 스물다섯. 이 책이 뉴욕의 종잇값을 치솟게 만들 정도로 히트를 치는 바람에 젊은 메일러는 일찌감치 돈벼락을 맞아 버렸다. 그래서 평생 여섯 번 장가드는 게 가능했을까?

  1968년, 마흔다섯 살 때에는 1967년에 있었던 반 베트남전 시위, 펜타곤까지 행진을 다룬 책을 써서 퓰리처 상을 받았고, 1979년 쉰여섯 살에 오늘 독후감을 쓰는 <처형인의 노래>로 두번째 퓰리처 상을 받았다. 이게 내가 읽은 메일러의 전작인데, 이것 말고도 베스트셀러 작품들이 와장창 있지만, 이 세 편을 읽을 소감으로 말씀드리자면, 소위 저널리즘 픽션 또는 논픽션 소설이란 장르에 그리 흥미를 느끼지 못해 이제 메일러는 그만 읽기로 결정했다. 다큐멘터리면 다큐멘터리고, 소설이면 소설이지, 논픽션 소설이 뭐 말라빠진 장르야? 대개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말씀.

  근데 이건 전적으로 내 취향에 입각한 의견일 뿐, 당신 입맛에 맞으면 메일러 만큼 현장 취재를 실감나게 소설 형식으로 쓰는 작가도 별로 없으니 그냥 꾸준히 읽는 편이 좋을 듯하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메일러가 “게이 탈레즈, 트루먼 카포티, 헌터 S. 톰슨, 조안 디디언, 톰 울프와 함께 사실 저널리즘에서 문학 소설의 스타일과 장치를 사용하는 장르인 '창작 논픽션' 또는 '신저널리즘'의 혁신가로 평가받고” 있다는데, 다른 작가들은 별개로 하고,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은 ‘톰 울프’를 예의 주시하시압. 우리나라에 번역해 나온 소설은 <허영의 불꽃> 한 편밖에 없는 것 같은데 그것도 절판. 하지만 아휴, 진짜 타의 모범이 될 만큼 재미있는 B급 대중소설이니 우연히 눈에 띄면 주저하지 마시라.


  작품의 주인공은 개리 마틴 길모어. 역시 실재 인물이었다. 포틀랜드에서 출생해 유타 주 프로보 시에 살았다. 길게 말고 짧게. 개리는 어디에서도 길게 살아본 적이 없다. 한 군데 빼고. 교도소. 열세 살 때, 이땐 엄마 베시 길모어와 함께 포틀랜드에 있을 때였는데, 처음 소년원에 들어가 엄마의 속을 뒤집어 놓은 이후 그의 주민등록초본은 주 소년원에서 오리건 주립 교도소와 일리노이 메리언 교도소 주소로 진화,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그의 사촌 여동생 브렌다. 브렌다가 여섯 살 때 사과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다. 이때 나무 아래에서 일곱 살 게리 오빠가 떨어지는 브렌다를 붙잡아 무사한 적이 있어 가까이 지냈다. 브렌다가 매사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잘대는 성격이었던 반면, 게리는 조용하고, 정중했고 이후에도 사촌 누이가 곤경에 처하면 기꺼이 도와주었다는데 어떤 일로 어떻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게리가 오리건 교도소에 있을 때 브렌다가 편지를 썼다. 답장에서 게리가 말하기를, 자기 때문에 가족이 곤란한 일을 당하게 되어 마음이 아프다며, 출소하면 조직 폭력배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이 자기 꿈이라고 했다. 중학교 졸업의 학력이지만 교도소 안에서 상당한 독서를 한 듯 어려운 단어를 자유롭게 사용했으며 편지지 여백에 작은 그림을 그려 보내기도 했다. 사실 게리는 어릴 적부터 그림에 상당한 소질을 보였지만 아빠도 교도소를 이웃집 다니듯 했기 때문에 국민교육헌장에 나오는 것처럼 “스스로의 소질을 계발”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게리한테 편지가 왔다. 이번에 가석방이 있을 예정인데 브렌다하고 다른 한 명이 연대보증을 서 주면 자기도 가석방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였다. 어릴 때부터 게리가 좋은 사람이라고 믿어온 브렌다는 자기 친동생 토니도 설득해 연대보증을 서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별 생각없이 인감도장을 찍어준 후에야 문득 깨달은 바가 있었으니, 30년 가까이 만난 적 없는 남자의 보증인이 되었다는 것.

  그러나 때는 늦었다. 게리는 악명높은 일리노어의 메리언 교도소에서 나와, 예정대로라면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솔트레이크를 거쳐 프로보로 와야 하건만, 그간의 오랜 교도소 생활을 벌충이라도 하듯 비싼 비행기를 타고 도착했다. 술을 약간 마신 상태로.

  일단 교도소라는 우물 안에서 나왔으니 당장 먹고 사는 게 문제다. 김선우의 “폴짝인” 운운하는 시에서 내가 말한 적 있다. 개구락지가 우물에서 뛰쳐나와 넓은 세상을 보고 “빌어먹을, 하늘이 저렇게 커다랬어?” 놀라면서 세상을 향해 폴짝폴짝 뛰어가기 시작했을 때, 황새, 너구리, 뱀 같은 포식동물이 그걸 얼마나 목이 빠지게 기다렸는지 몰랐느냐고. 머리통이 커진 이후 거의 대부분의 세월을 교도소에서 보내는 바람에 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아주 사소한 것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하거늘, 세상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게리 역시 일일이 《공통수학의 정석》 첫 장부터 열어볼 생각도 없다.

  하여간 어떻게 해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니, 기껍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흔쾌하게 손을 내민 사람이 제화점을 하는 큰이모부 벅. 구개파열 수술 자국이 남아 있는 강골의 사나이 아주 강한 사람이라서 오히려 늘 온화할 수 있지만 어린 시절에는 자신의 구개 수술 흉터를 놀리는 아이하고는 무한 싸움을 불사했다. 벅이 게리한테 자기 제화점에 일자리를 만들어주고 일단 자신의 집에서 아내이자 게리의 큰이모인 아이다와 함께 셋이서 살자고 제안해 그렇게 한다.

  게리의 교도소 기간이 너무 길었다. 정상적이 아니고, 일상적인 사회 생활을 하기 위한 절제와 조심 같은 것이 전혀 몸에 익숙하지 않다. 주급을 받으면 거의 전부 맥주 마시는 데 사용하고, 벅 이모부한테 따로 돈을 요구하여 냉장고에 맥주를 쟁여 놓고 상습적으로 들이켠다. 벅의 제화점이 말이 제화점이지 구두수선을 주업으로 하는 작은 점포에 불과하여 게리의 식대와 용돈을 대기가 힘든다. 게다가 술이라는 것이 비록 크지 않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사로를 치게 만든다. 절제를 모르는 게리가 치는 사고는 좀 더 크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차근차근 기초공통수학의 정석부터 풀 수밖에.


  게리에게 애인이 생겼다. 아이 둘이 있는 이혼녀 니콜. 어린 시절에 아빠 친구한테 성폭행 당한 상처가 있어 그게 살면서 마음의 흉터로 남은 것처럼 보이는 스무 살 미인. 게리는 서른 다섯. 둘은 서로에게 빠진다. 빠져도 심각하게 빠진다. 게리가 숙소를 번의 집에서 니콜의 집으로 옮긴다. 화르륵 타버리는 사랑. 니콜이 견디지 못하고 엄마 집으로 간 사이, 여러가지로 갈등에 싸인 게리는 정신 건강이 별로 좋지 않은 니콜의 여동생 에이프릴과 함께 무리를 해서 산 소형 중고 트럭을 타고 드라이브를 하다가 주유소에 가서, 별 생각 없이 총을 들고 사무실에 진입해 현금 수납기를 털고, 당번 중인 20대 건실한 유부남을 화장실로 끌고 가 엎드리게 한 다음, 뒤통수에 대고 두 발을 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린다.

  신발과 바지에 피를 묻힌 상태로 차를 몰고 에이프릴과 함께 모텔로 가서, 다시 모텔을 지키고 있던 또다른 20대 건실한 유부남도 같은 방법으로 살해한다. 현장을 빠져나오다 권총을 풀숲에 던져 버렸는데, 워낙 예민한 자동권총이라 관목에 걸렸는지 격발이 되어 게리 역시 왼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 총을 맞는다. 이 살인강도 행위의 직접적 원인은 중고 소형트럭의 잔금을 지불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런 방법 말고는 게리의 생각으로 돈이 생길 구멍이 없으니까. 트럭을 사지 않으면 되는데 그것 역시 생각이 닿지 않는다. 그렇게 살아본 적이 없어서.

  근데 직원 두 명은 왜 죽였을까? 돈만 가져 나오고 그들을 꽁꽁 묶어 두면 안 됐을까? 그냥 죽인 거다. 정말로 이렇게 진술한다. 전형적인 사이코패스. 다른 사람, 죽은 자와 죽은 자의 가족들한테는 전혀 관심이 닿지 않으니까 별 생각 없이 죽일 수 있었겠지.

  게리는 당연히 체포당해 사형 선고를 받는다. 여기까지가 1부. “서부의 목소리들.”


  나는 2부 “동부의 목소리들”에서는 다른 사건이 등장해서 서로 먼 연결고리가 있을 줄 알았다. 근데 아니다. 2부로 접어들면 이제 미국내 사형제도와 사형집행을 둘러싼 법정 다툼과 10년 만에 재현하는 사형집행을 두고 저널리즘 사이의 추한 비즈니스 다툼, 사법부 내의 복잡한 의사결정 같은 것을 상세하게 묘사한다. 상세해도 너무 상세하게. 그래서 읽는 독자는 숨 넘어갈 정도로 지루하게 만든다. 두 권 합해서 1,760쪽이 넘어가는 길고 긴 장편 소설. 노먼 메일러는 그의 주특기 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별의 별 등장인물을, 거의 전부 실명이라고 하는데 그건 뭐 알 거 없고, 다 등장시켜 인터뷰하고, 녹음한 거 타이프하고, 미주알고주알 말이 많아도 너무 많아 사람을 콱 질리게 한다.

  한 글자도 빼지 않고 다 읽었다. 읽다가 지루해서 환장하는 줄 알았다. 과하게 상세하다. 처음부터 다큐멘터리라고 써 놓았으면 아예 읽을 시도를 하지 않았을 것을. 다큐면 다큐고 픽션이면 픽션이지 이게 뭐람.

  이 책에 관해 할 말이 많다. 아직 반도 안 했다. 사형 집행 반대의 대의를 외치다 보니, 사이코패스가 틀림없는 게리 길모어를 어쩌면 당연히 과하게 분식시킨 것, 피해 가족이 순식간에 작품에서 실종되는 일 등등.

  그리고 생명권. 세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것이 자기 목숨. 맞지? 게리 길모어는 1심에서 사형 판결을 받은 후 항소를 포기하고 법적으로 명시한 시일 내에 사형이 집행되기를 원한다. 하지만 사형 반대 집단은 집행을 멈추기 위하여 갖은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 이를 방해한다. 법적으로 사형을 받은 사형수가 법적 하자 없이 죽겠다는데 왜 그걸 말려? 목숨보다 온전히 사적인 것이 어디 있다고? 사형수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개별적 사람을 뜻하는 자유인들의 생명 포기권, 즉 자살한 권리는 왜 정당하게 취급받지 못하는지 나는 조금 의아하다. 임신중단이 당연히 임신한 사람의 권리이듯, 자기 생명의 포기 권리도 인간의 천부 권리 아닌가 싶다. 자기 생명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게 마감할 수 있도록... 그만 하자. 조금 더 하면 정말 오지게 얻어 터질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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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리마 이야기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76
바를람 샬라모프 지음, 이종진 옮김 / 을유문화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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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를람 티호노비치 샬라모프는 1907년에 러시아 블로그다에서 러시아정교 세습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에 나름대로 유명한 도시 야로슬라브가 있다. 거기서 정북 방향으로 모스크바에서 온 만큼 더 가면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는 도시가 블로그다. 이곳에서 세습 사제를 했다니까 팔자 좋은 집안이었다고 생각하지? 조금은 맞는다. 하지만 1907년생 샬라모프가 열 살이 되자마자 러시아 혁명이 터져, 채 3년이 지나기도 전에 볼셰비키들이 모스크바에 있던 대성당을 폭파시키는 일이 벌어졌을 만큼 인민의 적인 종교를 거덜내기 시작했으니 이이의 팔자는 일찌감치 찌그러졌을 수밖에.

  1920년이면 샬라모프의 나이 열세 살 때. 그는 과감하게 신앙을 잃고 무신론자가 되었다고 선언했다. 러시아 정교 사제인 아버지가 벌컥 화를 냈을 거 같지? 그러지 않았단다. 이 사제님도 직업이 사제일 뿐 속마음은 왼쪽으로 팍 치우쳐 심지어 10월 혁명도 지지했다니까 말 다 한 거다.

  그러나 혁명으로 집권한 소비에트는 이제 전세계 공산주의의 어머니로 우뚝 서서, 무엇을 했느냐 하면 세상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권력투쟁에 돌입, 70년 후, 실패한 건 공산주의요, 성공한 건 1인 독재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열세 살에 무신론자를 주장한 샬라모프는 아빠가 교회 사제라서 국가로부터 교육지원을 받지 못해 모스크바 근교의 가죽공장에서 2년 동안 무두장이 일을 배우기도 했고, 이후 드디어 모스크바 대학에 진학 법학을 공부했다. 이 와중에 틈 나는 대로 시도 쓰고 러시아와 유럽, 미국 등의 문학작품도 탐독했다.

  좀 자세하게 말하는 이유는, 《콜리마 이야기》에서 작중 주인공급 등장인물이 콜리마의 산악지역에 있는 금광에서 채굴 작업자로 강제노동을 하는 먹물 출신 법학도 정치범이며, 굳이 법을 공부했다고 고백해 차별을 받을 필요가 없을 것 같을 지경을 만났을 때 하필이면 둘러대는 전 직업으로 무두장이를 선택한 일과 딱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건 절대 우연이 아닐 걸?


  그런데 샬라모프가 기껏 고른 정파가 하필이면 트로츠키파. 이러니 뭐 되는 게 있겠어? 급기야 소련혁명 10주년 기념 연설회에서 “스탈린 타도”를 외치다 잡혀 3년형을 받았는데, 스무 살의 젊디젊은 청년 샬라모프는 끝내 판사의 판결문을 인정한다고 서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1931년에 석방되어 식민지 개척을 위해 콜리마에 가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받았을 때, 배포 좋게 호송인들에게 강제로 호위를 받지 않는 한 가지 않을 거라고 고집을 부렸다. 입이 방정이지, 그래 결국 1937년 자기가 말한 대로 그대로 됐다.

  1937년이면 1년여에 걸친 스탈린에 의한 대숙청 기간. 여기에 용코 없이 걸려들었다. 하물며 천재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조차 거의 언제나 한밤중에 체포하는 관행이 자신한테 닥쳤을 때 잠옷바람으로 달려가는 걸 바라지 않아 늘 외투 차림으로 침대에 들었을 때, 샬라모프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죄목은 당연하게도 반혁명 트로츠키주의자. 그나마 사실상 처형을 의미하는 “가족과 연락할 수 없는 10년 유배형”이 아닌 5년 유형이었지만, 아뿔싸, 호송인들에 의하여 콜리마에 끌려가 금광에 투입되었던 것.

  그런데 《콜리마 이야기》를 읽어보면 모든 단편이 그의 두번째 투옥 때의 이야기는 아니다. 수용소에서 나온 후에 아직 모스크바에는 가지 않은 상태에서 1943년에 소련 출신 노벨문학상 수상자 이반 부닌을 “위대한 러시아의 작가”라고 했다가 스탈린 정부에 의해 다시 한 번 10년 교화형을 받아 다시 금광의 채굴꾼으로 끌려가 죽기 일보직전, 염라대왕 전에 들렀다 온 것까지를 망라한다. 영양실조와 발진티푸스가 겹쳐 샬라모프 본인은 깨어날 때까지 자기가 쓰러진 줄도 몰랐다고 하니 그것 참, 세상에 그런 일도.


  콜리마가 러시아의 어느 동네인가 하면, 일단 극동지역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북쪽으로 한참 올라가 캄차카 반도보다 더 높은 위도에서 시작해 북극해까지 잇는 콜리마 강과 콜리마 산맥 지역을 통틀어 말하는데, 이 지역은 몇 개의 코뮌이 나누어 관리하고 있을 만큼 넓다. 게다가 강제노동을 한 산악 지역은 평야 지대보다 섭씨 몇 십 도 정도 낮은 기온을 기록, 1년에 아홉 달이 겨울인데, 보통 영하 40도, 호흡하기 좀 거시기하면 영하 45도, 침 뱉으면 땅에 닿기도 전에 얼음으로 변했다 하면 영하 50도, 현지 사람들은 온도계가 없어도 거의 정확하게 현재 기온을 맞춘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가장 조심할 것은? 졸면 죽는다. 근데 추우면 잠의 침략은 더욱 매섭다.

  열량 확보를 위하여 잘 먹어야 하지만, 기본으로 제공하는 부식이 워낙 하찮을뿐더러, 죄수 입에 들어가야 하는 정량의 대부분을 이놈이 떼 먹고, 저놈이 떼먹고, 다른 놈이 훔쳐가 거의 대부분은 아사 일보직전이다. 죽은 사람의 고기도 먹고, 덜 자란 병아리도 산 채로 뜯어먹는다. 그런 것이 다 용인되는 사회. 수감자들끼리 별 다툼도 없이 그냥 때려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집단. 하물며 호송원이나 관리병들은 그러지 않기 망정이지 여차하면 살인을 취미생활로 할 수도 있는 곳.

  하지만 제일 중요한 수용자 살해는 수용자들 집단에서 자동적으로 지배 계급으로 떠오른 깡패 수감자들. 샬라모프의 유배지는 도스토옙스키 시대의 유배지가 아니다. 표도르 D. 선생이나, 네흘류도프가 졸졸 따라간 카추샤의 유배처와는 비교 자체가 힘들다. 우두머리 깡패 집단은 숙소에서 카드 도박을 하며, 최상위의 두목 깡패는 곧 숱한 무지렁이 수용자들의 생사여탈은 물론이거니와 그들에게 도착한 소포 등의 소유권까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둘째 손가락으로 지목하기만 하면 지목당한 죄수가 누구든지 간에 얼른 달려와 발뒤꿈치 각질을 살살 긁어주면서 감언이설을 속삭여야 한다. 소리 한 마당 해보라 하면 또 거절하지 못하고 쑥~대머리, 한 곡조 뽑아야 명을 보존할 수 있다. 그야말로 무소불위.


  이런 모든 광경이 적나라하게, 그러나 이런 비인간의 벌판에서 그곳에 떨어진 한 지식인의 감정은 모두 배제한 채 그냥 그런 광경을 드라이하게 묘사한다. 이런 측면에서는 또 같은 세대인 유형자의 아버지 솔제니친과도 다르다.

  혹시 이런 이야기에 흥미있는 분이라면 읽어보실 만하지만, 이제 지난 시절의 큰 슬픔을 다시 되돌아보는 일이 그리 탐탁하지 않다. 동상과 괴혈병 상처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고름, 솔기마다 득실거리는 이, 닫은 문을 거칠게 두드리는 동안 문이 열리기 전에 죽지도 않은 어린 닭을 산채로 뜯어먹는 배고픈 죄수 이야기 같은 건, 거대 비극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그만 읽으면 안 될까 하는 마음이 드는 솔직한 심정을 이해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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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긴 사연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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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 독립만세사건이 있던 1919년에 프랑스 지중해 연안 칸 말고, 파리에서 서북서 쪽에 있는 캉에서 태어난 작가, 저널리스트, 라디오 애니메이터. 19년생이면 2차 세계대전이 터진 1939년에는 전쟁하기 딱 좋은 나이였던 스무살. 소설집 《짧은 이야기 긴 사연》에도 전쟁 발발 직후 곧바로 징병 대기하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이 터진 다음해, 난공불락의 마지노 방어선을 우회 돌파한 독일군에 의하여 1940년 6월에 파리가 함락되는 치욕을 겪고, 같은 달 22일에 페텡이 항복을 선언, 어쨌든 그르니에는 총 한 방 쏘지 않고 전쟁을 통과한다. 물론 나중에 좀 험한 꼴은 당했다지. 44년에 프랑스 저항군 활동도 하고 뭐 그랬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전쟁 중에 소르본에서 가스통 바슐라르한테 배웠다 하니 전쟁 중에 20대 젊은 남성이 그 정도면 호강했다고 봐도 되지 뭐. 애먼 미국 젊은이들이 프랑스 땅에 들어와 픽픽 죽어간 걸 생각하면 말이지.

  열세 편의 단편소설을 실으면서 편집도 자간, 행간 널럴하게 해 쉽게 읽힌다. 본문이 194쪽에서 끝나 분량도 많지 않다. 그래서 단편소설과 꽁트의 중간 정도, 분량이나 장르 양쪽을 감안해서 중간 정도의 작품도 제법 있다. 즉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작품집.


  이 책을 출간한 2012년에 이이는 벌써 아흔 두셋. 한 해에 열세 편의 소설을 화르륵 불 태우듯 썼다고 보기 힘들지만, 어쨌든 80대 후반과 90대 초반에 쓴 작품을 모은 책이라 봐야겠다. 책을 다 읽고 생각해보니 노 작가들이 쓴 작품은 대개 노인들의 기억 속 자잘한 삶의 흔적을 픽션 또는 반half픽션-반half다큐멘터리 형식인 경우가 많은데, 이 책도 그렇지 않은가, 실제 경험한 또는 기억한 과거의 것들 것에 픽션을 가미해, 줄리언 반스의 표현대로, 하이브리드 픽션으로 쓴 건 아닌가 싶었다.

  근데 문제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는 점. 웃기게도, 이 책을 번역한 사람이 김화영. 이상하게 김화영 선생이 번역한 책을 읽고 좋은 독후감感을 느낀 적이 별로 없다는 거. 이번에도 “옮긴이의 말”이 웃기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프로방스 학파의 일원이면서, 자기 자랑을 화려하게 펼치는 데 빈틈이 없다. 또다른 프로방스 학파 최현무, 필명 최윤이 <부영사> 해설을 통해 독자를 ‘오독을 마다하지 않는’ 집단으로 단칼에 선을 그어 버린 것처럼 악마 같이 거만한 '소위' 프로방스 학파 선생들. 다행히 이젠 전부 다 꼰대 가운데 꼰대가 되어 버렸다. 세월 만세!

  분명히 말하자. 나는 김화영 선생의 번역의 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게 아니다. 그가 번역한 책 가운데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이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그렇다는 거다. “옮긴이의 말”도 워낙 인상깊게 웃겼던 것도 많고. 어느 작품인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역자 후기 타이틀에 왜 자기가 페테르부르크 역전 시계탑 앞에 앉아 급하게 역자 후기를 쓰고 있다는 얘기를 하냐고? 솔직히 나는 김화영이 좀 밉다.


  여든 후반, 아흔 초반에 쓴 짧은 픽션. 애초에 큰 걸 바라지 않았다. 기대가 크지 않았고, 딱 생각했던 것만큼의 차분한 픽션들 모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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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치백 - 2023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이치카와 사오 지음, 양윤옥 옮김 / 허블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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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에 일본 도쿄 남쪽, 가나가와현에서 나서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선천성 근병증으로 인한 척추측만증을 앓고 있는데, 이게 하도 심각해 뼈 혹은 근육이 호흡기관을 압박하는 모양이다. 정확한 거 아니다. 소설과 위키피디아 내용을 읽고 짐작하는 것뿐이다. 코를 통한 호흡이 힘들어져 결국 목의 인후에 구멍을 내 카테터와 부속 장비를 삽입해 그곳으로 호흡을 한다. 이건 근(육)병증 뿐만 아니라 중환자들 대부분의 경우도 마찬가지. 나 어릴 적 동네에 한국전쟁 참전한 노병 한 분이 평생 이런 상태로 살았다. 근병일 경우에는 필터링을 거치지 않은 외부 오염 공기가 곧바로 호흡기 점막과 접촉해 담, 즉 가래가 많이 낀다. 와병중인 환자는 석션 장치로 얇은 고무관을 기관지와 폐 입구까지 밀어 넣어 제거하지만, 아치카와는 기침 같은 것을 통해 스스로 가래 배출을 했던 것 같다. 이 장면이 소설에 몇 번 등장한다.

  33세 때인 2012년에 가나가와의 요코하마에 있는 야스 학원 대학에 특수학생으로 입학해서 2019년에 와세다 대학 e-스쿨 인문 및 환경과학과에 편입, 언제인지는 모르겠는데 졸압했다. 2023년에 단숨에 써내려간 소설 <헌치백>이 “문학계” 신인상을 받아 소설가로 데뷔했으며, 그걸로 모자라 그해 아쿠타가와 상을 받아 일약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다.


  내가 왜 이 책을 읽었는가 하면, 현대 일본 작가들의 작품 가운데 마음에 드는 걸 도무지 찾을 수 없어서. 일본에서도 유명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품이면 그래도 방귀 한 번 제대로 뀌었다고 볼 수 있으니, 그거 한 번 찾아보자, 싶어서 골랐다. 이것 말고 또 골라 놓은 아쿠타가와 수상작품이,

  구단 리에, <도쿄도 동정탑>

  아사히나 아키, <도롱뇽의 49재>

  마쓰나가 K. 산조, <베리에이션 루트>

  다카야마 하네코, <슈리의 말>

  이 정도인데, 지금 <헌치백>을 읽고 정말 이것들을 읽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망설이고 있는 중이다. 이키가와가 그동안 SF, 판타지 등 장르문학과 라이트 노벨을 쓰다가 비장한 마음으로 처음 집필한 순문학이 <헌치백>이라는데, 그건 알겠고, 하지만 내 기준에는 맞지 않는 것을 어찌하랴. 암만해도 골라 놓은 네 권의 책 가운데 딱 한 권만 더 읽어봐야 하겠다.

  일본도 대단한 문화 강국이다. 그런데 많고 많은 작가들 중에서 내 입맛에 맞는 현대소설 작가 찾기가 이리도 힘들다. 비단 위에 나열한 작가/작품이 아니더라도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작가나 작품 있으면 귀띔해주시면 좋겠다.


  <헌치백>의 주인공 이자와 샤카도 책을 쓴 작가 이치카와 샤오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장애인이다. 부모가 별세하면서 재산 전부를 이자와 샤카가 물려 받았다. 엄마는 죽기 전에 원룸 맨션 한 동을 통째로 개조한 장애인 시설 그룹홈 <잉글사이드>를 만들어 샤카한테 증여했다. 각각의 원룸은 다섯 평짜리 방, 주방, 화장실, 욕실로 되어 있고, 샤카 말고 당연히 다른 환자도 입주해 지내고 있다. 이 가운데 몇 명은 원룸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의 중증. 아마도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할 듯하다.

  샤카도 자기 발을 딱딱한 바닥에 딛고 몸을 움직여 본지 30년은 되는 거 같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근육병증 때문에 얼굴이 오른쪽으로 돌아가지 않아 왼편을 보는 데 익숙해져 있다. 특별한 장애가 없는 독자 나는 이해하기 힘든, 특정한 장치로 종이책을 읽고, 글도 쓴다.

  작품의 첫 장면은 포르노 바로 직전까지 수위를 올린 일본의 성 해방구역 “해프닝바” 잠입 수기로 시작한다. 3층에 있는 룸으로 두 명이 아니고, 세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 들어가 두 쌍이 성 또는 유사 성행위를 벌인다. 나머지 한 명은 기록자. 웬만하면 조금 인용해볼까, 했다가 차마 그러지 못하겠다.

  이 장면은 그냥 한 시절 이런 글을 청탁 받아 써서 잔돈 푼이나 만졌으며, 원래 부잣집 딸로 태어나 못해도 수십억엔의 재산을 가지고 있어, 잠입수기로 번 돈은 자선단체에 기부한다. 같은 장애인이라도 저 유럽, 오스트리아의 크리스티네 라반트하고는 달라도 많이 다르다.


  이치가와 샤오가 주인공 이자와 샤카의 입을 통해 세상에 알리고 싶어하는 것은, 물론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책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와, 여성으로 임신했다가 임신중단을 해보고 싶은 마음.

  앞의 것은 종이책에 과하게 집중되어 있어서 근병증인 샤카는 읽기가 매우 곤란하는 것이고, 헌치백이며 호흡을 기관지를 뚫어 카테터를 이용해 해야 하지만 남들과 같이 섹스도 하고 임신도 하고, 출산은, 출산은, 출산은 차마 바라지 못하겠지만, 그렇다면 대신 중절수술이나마 받아보고 싶다는 거.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세상에서 가장 비싼 창녀가 되고 싶을 정도라는 것.

  작가의 마음이 이럴진대 어찌 독자가 책을 읽으며 가벼울 수 있을까.

  그러나 표현이 과하다. 경쾌하면 조금 언짢았을까? 예를 들면 천쓰안처럼. 이이가 쓴 <제일 가까운 장애인 화장실이 어디죠?> 같이.

  장애의 정도는 훨씬 덜 하지만 샤카와 마찬가지로 전동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중국 여성 청즈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키 큰 젊은 여성이 청즈를 내려다보더니 아무 생각 없이 한 마디 한다.

  “다리가 참 가느시네요….”

  청즈, 대답하기를,

  “네. 다 열심히 운동한 결과랍니다.”

  그러면 여자가 갑자기 알아차리고 입을 막으며 놀란 눈을 하는 거다. 어때, 이렇게 가볍게 치고 나가는 거 하고, 젊은 중증환자 돌보미 남자에게 1억5천5백만 엔을 줘 임신 한 번 해보려 하는 것하고?

  그냥 해본 말이다. 나는 이제 비장한 게 별로 좋지 않아서, 그래서 천쓰안이 더 좋아지게 된 지도 모른다. 다들 자기 취향대로 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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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6-07-27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일본 현대 작가들 소설 읽을 때마다 지뢰여서... ㅋㅋㅋ 소개드릴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네요. <정욕> 쓴 작가 아사이 료, <인 더 메가처치>까지는 읽어볼까 싶어요. 믿음이나 구원? 신앙에 관한 이야기 같아서 좀 관심이 갑니다.

Falstaff 2026-07-27 16:03   좋아요 0 | URL
아, 치매예요, 치매. 알라딘 비밀번호를 잊다니... 이게 가당한 일입니까? ㅎㅎㅎ
일본 현대, 말고 요즘 소설가들한테 기대가 컸는데 아휴, 적응하기가 쉽지 않네요.
얘기하신 책들 찬찬히 읽어보겠습니다. 크게 기대하지 않고 읽는 게 좋겠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