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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ㅣ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이 책을 사기 오래 전부터 ‘만엔’이 무엇일까, 생각 좀 했다. 만 엔萬円, 즉 ¥10,000 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근데 ¥10,000 이면 ¥10,000 이지 또 거기에 원년元年은 뭐야. 만일 이 책을 읽는다면 제목이나 내용, 이런 것보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소설이라서, 그의 말년 작 <익사>에 숱하게 인용하던 대표작이라서 읽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제목의 의미 같은 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10,000을 처음 얻은 해에 풋볼 시합 어쩌고, 이런 되지도 않은 추리를 했을 뿐이었다. 결국 모든 착각의 원인은 바로 ¥10,000일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책을 사 표지를 보니 ‘만엔’이 한문으로 쓰면 万延, 일만 년을 이어간다는 뜻이었다. 근데 원년元年은? 검색해봤다. 이런, 만엔이 서기 1860년 당시 일본 정부의 연호란다. 만엔 시대는 1860년부터 1861년까지 딱 1년 동안 사용했기 때문에 만엔 원년이면 1860년을 콕 집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익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 농민반란이 발생한 해라는데, 이 책의 주인공 미쓰의 증조부와 증조부의 동생(그러면 ‘종증조부’라고 쓰면 간단한데 책 끝날 때까지 계속 ‘증조부의 동생’이라 표현한다)이 깊숙하게 관련되었단다. 100여 년 전 사건의 주인공 증조부와 종증조부가 민란에 어떻게 간여를 했고,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정식 사료에선 거론을 하지 않고 이른바 민담 또는 향토사학 형식으로 많이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지만 전혀 정확한 것도 아니며 심지어 형이 아우를 죽이고 그의 허벅지 살 한 점을 베어 물어 삼킴으로 해서 자신이 민란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는 식으로 전해지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건 증조부의 동생, 종증조부는 자신을 따르는 친위대들을 이끄는 민란의 지도부였으며, 민란이 진압되어 친위대 전원이 살해되었을 때 자리를 극적으로 피해 죽음을 면했다는 것. 이들 극렬한 친위대 혹은 행동대원들이 마지막 무렵 민란에 참여한 농민들이 등을 돌림으로 해서 죽창을 들고 증조부의 곳간으로 밀고 들어올 때, 증조부는 총을 쏘며 이들에게 저항했다는 정도.
세월은 흘러 소설의 일인칭 화자 ‘나’ 미쓰사부로의 형제로 넘어가면, 미쓰사부로는 4남 1녀 가운데 3남으로, 첫째 형은 당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로 졸업하자마자 입대해 중국에서 냉혹한 장교로 이름을 떨치다 금방 전사해버리고 만다. 둘째 형은 (아마도 가미가제를 육성하던)해군비행교육단에서 교육을 받고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종전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동네 아래쪽에 있던 조선인 집단과의 패싸움 끝에 조선인들에게 얻어맞아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셋째 미쓰사부로가 정식 상속인이 되고, 넷째 다카시는 1960년 6월에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극적으로 전향하여 마치 학생운동이 “우리 자신의 치욕”이었던 것처럼 심지어 미국을 순회하며 연극 <우리 자신의 치욕>을 공연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한 다음(이 정도면 '배신'을 넘어 '반역'의 수준이다), 증발해버렸다가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귀국한 상태다. 막내로 어여쁜 여동생을 두었으나 이른바 유로지비, 즉 백치 비슷한 상태로 스무 살이 되지 못해 농약을 벌컥벌컥 마시고 화장실에서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느라 동아시아를 떠돌다가 객사해버리고, 어머니는 정신에 문제가 좀 있는 환자였다. 그러니 남은 미쓰와 다카시의 혈관 속에는 친가 쪽으로 증조부와 종증조부의 성향, 즉 집단을 이끄는 능력과 폭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기질이, 외가 쪽에서 온 정신 이상의 기질이 함께 흐르고 있어서, 어느 형질이 형제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셋째 아들이자 화자인 ‘나’ 미쓰는 아내가 읽던 소세키의 일기에 나오는 영어 단어 몇 개로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languid stillness, weak state, painless, passivity, goodness, peace, calmness(나른한 고요, 약한 상태, 고통이 없는, 수동성, 선량함, 평화, 평온)”(221쪽). 그러니 미쓰는 다분히 외가를 탁한 반면, 진짜 주인공 다카시는 형 부부와 고향 시코쿠 산골에 도착해 풋볼을 매개로 적극적으로 젊은이들을 규합하는 것이 완전히 종증조부와 빼박이다.
다카시는 책을 읽으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여기다 구태여 써놓을 필요 없는 이유로 고향 시코쿠 산골로 향하지만, ‘나’ 미쓰는 왜? 여기에 오에 겐자부로의 평생을 규정하는 사건이 개입한다. 스물아홉 살, 비교적 초기에 발표한 <개인적인 체험>에 고통스럽게 고백을 하고 일흔네 살에 발표한 <익사>에서도 작가의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아들이 뇌 헤르니아 상태로 태어나 수술을 받은 다음 젊은 부부가 ‘관리’하기엔 도무지 역부족이라 소정의 기관에 유치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다. 거기다 책을 열자마자 비극적 자살 사건이 벌어지는데, 미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머리와 얼굴에 온통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항문에 오이를 박은 상태에서 알몸으로 목을 매 자살을 한 사건이 벌어진다. 장모의 기질을 받았으나 여태 완벽하게 자제해오던 아내 나쓰코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하루 종일 위스키에 전 알콜 중독의 상태로 빠져버렸다. 완전한 구석으로 몰린 미쓰가 난데없이 다카시로부터 귀향을 권유받고 상속받은 토지 일부를 처분하여 새 삶을 모색하고자 한 건 당연한, 아니, 당연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인물이 조선인 백승기. “흰 백(白), 되 승(升)에 기초 기(基)입니다.” 라고 517쪽이나 되어야 등장하는 이 조선인은 완전한 산골 깡촌의 촌놈보다 훨씬 못한 노예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 부락 출신이다. 1945년 종전 후에 벌목공으로 징용을 살던 이들이 돈이 없어 떠나지도 못하고, 쫄딱 망한 일본 정부가 보내주지도 못해 발목이 묶이자 시코쿠 분지 마을의 저편에 집단인 촌을 만들고 토지 일부를 불하받아 살고 있으면서 수시로 시코쿠 촌놈들에게 박해를 받아온 무리. 그것도 급기야 시코쿠 촌것들이 쳐들어와 조선인을 죽이고 무슨 일을 했던지, 다음 싸움에서 일본인, 화자 미쓰의 친형 S가 죽고도 그걸로도 모자라 토지 일부를 정식으로 불하받게 해줄 정도의 패악을 당했던 조선인 부락 출신의 백승기. 그는 조선인이 떠난 토지를 다 수용한 다음, 읍내에 수퍼마켓 체인점을 세워 ‘수퍼마켓 천황’이란 별호를 얻어내는데, 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수퍼마켓에 일정한 채무가 있으며,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민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것도 모자라 지역의 랜드마크인 미쓰네 집안의 곳간채까지도 헐어버리는 상황이다. 시코쿠 일대를 장악하고 경제적 패권을 쥔 수퍼마켓 천황과 한 바탕 풋볼 게임을 벌이는 것이 책의 스토리다. 그러면서 지역과 역사 사실과 한 가족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일.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수퍼마켓 천황과 한 판 풋볼 게임을 벌이기로 일을 꾸미고, 젊은이들을 규합하고, 정말로 한 판 잘 때려먹은 진정한 주인공 다카시가 하필이면 학생운동의 투사 출신으로 전향하여 타도의 대상이었던 미국에까지 가서 반성하는 의미의 연극 <우리 자신의 치욕>을 공연하려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①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한 학생운동의 놀랄 만큼 용감한 투사였다가, ② 전향해 미국에 대고 잘못했다고 반성하러 가서 몇 번 공연을 하고서는 이탈해, 흑인 거주 우범지역을 배회하다 가벼운 임질에 걸린 경험만 갖고 귀국해서, 다시 ③ 지역의 권력자인 수퍼마켓 천황과 한 판 풋볼 시합을 벌이는 캐릭터. 이런 과거 경력으로 인해서 풋볼 시합이 예상보다 훨씬 격렬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궁리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강하게 들었다.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성향이 더욱 고착되는 경우를 흔히 보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치열한 학생운동의 '가장 폭력적 투사'였던 것마저 깊숙한 곳에 원인이 있었다. 다카시의 모든 행동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숨어 있는 비밀. 그건 정말로 알려줄 수 없다. 책을 읽다보면 다카시가 스스로 밝히기 전에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마침내) 다 알게 되는데, 진짜로 주인공이 비밀을 이야기할 때 독자의 짐작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에 가질 수 있는 내밀한 즐거움, 그 즐거움을 느끼기에도 조금 과하게 비극적이라는 정도만 말하고 스토리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그런데 참 문제적 인간 다카시의 인간적 번뇌가 왜 그의 형이자 화자인 미쓰를 통해서만 밝혀질까. 물론 타인에 의한 정의야말로 근본적으로 오류를 포함하기 때문에 마지막 결정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기 위한 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하게 내재한 죄의식이 어떻게 한 인간의 인생을 거덜 내는지 참 치밀하게 묘사해놓은 역작이다. 위에서 내가 인상 깊게 생각했다는 조선인 백승기와 완전하게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주인공 다카시다. 백승기는 거의 불가촉천민과 유사했던 ‘부락’ 출신 조선인으로 자신의 출신이란 커다란 핸디캡을 발판 삼아 기어이 그 지역을 정복하는 ‘수퍼마켓 천황’, 일본인을 지배하는 천황이 되는 거 아닌가. 조선인 백승기의 등장이야말로 다카시의 불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기막힌 보색대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