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우스키핑
메릴린 로빈슨 지음, 유향란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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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릴린 로빈슨의 처녀작. 이이가 쓴 <길리아드>를 읽고 기독교적 세계관에 아주 학을 뗀 적이 있었는데, 그때도 사실 <하우스 키핑>을 읽으려다가 마우스 클릭을 잘못해 <길리아드>를 샀던 거다. 그런데 <길리아드>를 너무 재미없게 읽어 정작 마음먹었던 <하우스 키핑>을 읽기 위해서 3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앞서 읽은 책이 얼마나 재미없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기 까지. 정확하게 기억하는데, 3년 전, 메릴린 로빈슨의 <하우스 키핑>이 타임지인가 어딘가에서 선정한 100대 문학작품에 포함됐다는 걸 알고 궁금증이 도졌었다는 거. 그런데도 <길리아드>에 관한 추억이 하도 험악해서 이거, <하우스 키핑>은 정가의 37% 가격인 5천 원 주고 헌 책 샀다. 지금, 후회막급. 이런 책은 새 것으로 사고, 3년 전에 산 새 책은 헌 것으로 사야했던 거다. 난 타임지 같은 기관의 100대 명작, 이딴 거 안 믿는다. 아니, 그런 평가가 내 취향하고 같지는 않다는 걸 이해한다. <앵무새 죽이기>와 <동물농장>을 어떻게 명작이라고 하는지, 난 도무지 이해 못하는 인종이다. 근데 <하우스 키핑>은 정말 대박.
 일반적으로 ‘하우스 키핑’을 한국말로 하면, 아니, 인터넷 뒀다 뭐하나, 네이버 검색해보니까, “살림, 집안일, 집안 돌봄, 시설관리” 등으로 쓰는데, 이 책에서 ‘하우스 키핑’은 흠, 물론 그런 의미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각개 단어의 뜻, 그러니까 하우스를 키핑하는 일, 집안을 간수하고 보살피는 일, ‘집안일’ ‘살림’ 대신, “집‘House' 및 집을 구성하는 가족을 지키고, 유지하고, 심지어 사라진 가족을 기다리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거 같)다.
 콩가루 집안을 소개한다.
 미국 중서부 지역에 에드먼드 포스터 씨가 살았다. 광막한 평야지대에 바람이 한 번 불었다하면 거칠 것 없이 몰아치는 거센 바람의 발톱을 막아낼 방법이 없어 땅을 깊게 파고 집을 지어 창문이 지표면과 같게 만든, 이른바 반 지하 집에서 살았는데, 이 양반이 하도 평야지대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평소에 산을 동경해 세상의 모든 유명한 산을 (사진이나 그림을 보며) 스케치하는 취미가 생겼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해 꽃피는 봄이 오자 에드먼드 씨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열차 정거장으로 냅다 달려가 매표소에 돈을 한 움큼 내밀더니, 산이 있는 곳으로 가는 차표를 달라고 했단다. 그래 그 길로 열차를 타고 떠난 곳이 미국 북서부 워싱턴 주의 시애틀 부근이라고 짐작하는 가상 소도시의 가상 촌 동네이자 넓은 호수가 있는 완전한 산골마을 핑거본이었다. 여기사 에드먼드 씨는 어여쁜 아내 실비아와 결혼을 하고,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핑거본에서도 높은 지역에 터를 골라 벽돌로 튼튼한 집을 지어, 깨가 쏟아지지는 않지만 그냥 덤덤하고 성실한 철도원으로 살며 딸을 셋 두었다. 첫째가 몰리요, 둘째가 주인공이자 화자 ‘나’ 루스의 친엄마인 헬렌이고, 셋째가 또 다른 주인공 혹은 주연급 조연 실비였다. 첫째가 16세, 둘째가 15세, 막내가 13세, 즉 세 딸이 자랄 만큼 자랐을 때, 에드먼드 씨가 타고 근무하던 열차가 핑거본의 넓은 호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웅혼하게 달리다 과감하게 호수 안으로 자유낙하를 시도하여 에드먼드 씨는 기어이 실비아를 과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잠수부가 며칠을 찾았지만 단 한 구의 시신도 건지지 못해, 과부가 된 동네의 여인(들)은 시신 없는 장례를 치룰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조금 지나자 맏딸 몰리는 과감하게 개종을 하고나서 선교사들을 따라 태평양을 건너 중국 땅으로 건너가 경리직원 정도의 자리를 잡았고, 둘째 헬렌은 도시로 가 일단 결혼부터 한 다음 딸만 둘을 두니 첫 아이가 화자 ‘나’루스요, 작은 애가 루실이다. 막내 실비 역시 머리 굵어지고 곧바로 도시로 가더니 결혼은 분명히 했는데 아이도 없고, 남편도 없고 그냥 정처 없이 떠도는 여자가 돼버렸다. ‘나’의 엄마 헬렌의 남편(그러니까 ‘나’ 루스와 동생 루실의 친 아버님)은 벌써 가정에서 도망해 새장가 가버리고 이제 도무지 혼자 두 딸을 키우기 벅찬 지경에 몰리니, 친구의 차에 둘을 데리고 핑거본의 엄마(‘나’의 외할머니)한테 찾아와 엄마가 없는 사이에 두 딸을 집에 둔 채로, 전속력으로 차를 몰아 아버지의 영혼이 헤엄치고 있을 거 같은 호수로 돌진해버린다.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하자. 이건 책의 앞부분, 전체의 10분의 1 가량만 읽으면 다 알 수 있는 내용이니까 그냥 전제사항만 일러두었다고 여기시면 된다. 그래서 ‘나’ 루스와 루실은 할머니하고 살게 되고, 할머니가 죽은 다음엔 전 재산을 상속받은 상태에서 할머니의 두 시누이들, ‘나’의 대고모 두 분의 보살핌을 받다가, 자기 엄마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냥 한 번 편지를 보낸 막내 이모 실비와 함께 살게 된다. 그런데, 잘 읽어보자.
 할머니 살아생전 호수의 영spirit이 소용돌이치며 열차를 빨아들였고, 몇 년 후 거의 같은 장소에서 둘째 딸이 또 호수 속으로 사라졌다고 하는데, 두 경우 다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신은커녕 열차와 자동차도 건져낼 수 없었다. 그럼, 정말 죽은 건가? 호수의 밑바닥엔 아버지와 둘째 딸의 유해가 서로 빈 동공을 바라보며 가라앉아 있을까? 혹시 할머니는 숨이 다 하기 전까지 남편과 딸이 어디선가에서 낡은 옷에 뭍은 먼지를 툭툭 털며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늘 창가의 소파에 앉아 들녘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던 건 아닐까? 중국으로 가버린 맏이 몰리는 이젠 거의 완전히 남이고, 어느 날 문득 집을 나가 도시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한 것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인식 망에서 사라져버린 막내 실비. 죽었다는 말은 없지만 정말 살아 있기는 한 것일까. 그리하여 할머니 실비아 포스터 여사께선 전 재산을, 직접 낳은 두 딸을 완전히 배격하고 둘째 딸이 낳은 두 손녀에게 유증해버린다. 직접 만져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혈육이 둘 말고는 없었으니까.
 여기에서 독후감을, 누구나가 읽을 수 있는 공간에서 쓴다는 조건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다. 몇 십 년 전 손으로 쓰던 독서일기라면 하고 싶은 얘기까지 다 하겠지만, 여기서 한 발만 더 나가도 이 책의 모든 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만인에 공개하는 서재에 독후감을 올리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소설이다. 미국 북서부 지방의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여성 3대에 걸친 가족과 가족애에 관한 이야기. 외로움의 피를 이어가는 여인들의 고독과 방랑과 기다림의 안타깝고 애잔한 엘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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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
존 치버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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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 존 치버라는 이름 자체가 영미 소설의 한 브랜드로 자리한 현대 영문학의 별. 이 정도면 <이 얼마나 천국 같은가>를 쓰고 몇 달 후 생을 마감한 치버에 대한 적절한 헌사가 되지 않을까싶다. 세월이란 참. 150쪽에도 미치지 못하는 짧은 장편소설이지만 스스로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임을 분명하게 알았을 치버는, 자신의 생을 바쳐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쓴다.
 “내가 맨 앞에서 말했듯이, 이것은 비 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일 뿐이다.” (143쪽)
 아직 거동이 불편하지는 않는 노인 레뮤얼 시어스, 어느 겨울의 일요일 아침, 대단히 실용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있고 심지어 여태 서로 사랑하기까지 하지만 신뢰하는 사이는 아닌 큰 딸에게 전화를 해, 딸의 집 벽장에 있는 스케이트를 들고 100년 만에 꽁꽁 언 비즐리 연못으로 향한다. 소설은 노인이 스케이트를 즐기는 비즐리 연못을, 도시의 쓰레기로 메워 그 위에 참전용사의 집을 건립할 계획인 도시의 시장과 폭력배 집단의 시도를 물리치고 이미 오염된 연못을 정상적인 습지로 보관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모습까지를 그리고 있다. 연못의 보존이란 굵은 줄기를 중심으로 자잘한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도 몇 개 첨가되어 읽는 재미를 준다.
 삶을 많이, 그리고 비교적 성공적으로 살아내 이제 부유한 은퇴자의 생을 즐길 수 있는 노인에게, 아직도 여인과 여인의 살에 대한 동경이 넘쳐 아름다운 여인을 유혹하고, 즐기고, 버림받고, 그래서 흐르는 슬픔을 눈물에 담는 시어스. 그는 작가 치버 자신이거나 치버가 상상 속에 스스로 되고 싶었던, 스스로이고 싶었던 한 등장인물로 나는 읽었다. 여전히 삶과 이성을 사랑하고, 아름다운 연못이 급격하게 더러워지면서 연못 속의 생명체가 사라지는 것에 분노하여 자신의 돈을 써 권력과 싸우려하는 것. 치버가 생각하는 노년의 모습이 비단 이 둘 뿐이겠느냐만, 개인으로서의 희망사항으로 사랑을, 사회적 희망으로 환경보전을 꼽아 그의 말대로 “비 오는 밤 낡은 집에서 침대에 앉아 읽는 이야기”로 만들지 않았을까.
 이미 시간은 23시 59분. 콩팥에 암이 생겨 전신에 퍼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라고는 단 1분밖에 남지 않았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며, 신장부전으로 인한 죽음에선 정상적인 뇌 활동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는 존 치버. 그 역시 사람이기에, 이 책이 자신의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진정으로는 믿지 않았다고 해도, 커튼콜이 없는 인간으로의 삶이 눈썹만큼 밖에 남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사람의 사랑과, 내일을 위한 지구환경을 남긴 것이다. 사랑과 환경이란 보편 주제에 대하여 마지막 작품으로 썼다고 해서 내가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걸 그저 소박한 읽을거리, 이야기 감으로 조근거린 것이, 나로 하여금 기껏 다 읽고 마지막에 헛기침을 하게 만들었다.
 짧은 작품이라서 더 이상의 책 이야기는 바람직하지 않기도 하고, 이쯤에서 그의 ‘이야기’를 접는 것이 또한 그의 겸양에 대한 예의 같기도 하여 짧은 독후감으로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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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레슬리 마몬 실코 지음, 강자모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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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슬리 마몬 실코, 비록 완전한 아메리카 인디언이 아니라 백인의 피가 조금, 사실 그리 적지는 않게 흐르지만, 어려서부터 뉴멕시코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온 작가로 데뷔작 <의식Ceremony>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소외와 몰락의 과정을 소설을 통해 그린 작품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민 아가씨가 백인의 꾐에 넘어가 아이를 낳으니 이 혼혈 아이는 혈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태생부터 종족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알고 있는 어린 엄마는 1920년대, 인디언이라면 오히려 흑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시기에 아이와 함께 살아내기가 너무 힘들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파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기설기 바람막이만 세워둔 움집에서 누더기에 갓 낳은 아이를 둘둘 말아 쓰레기장에 버리고 돌아와서는 혼혈 아이, 책의 주인공인 타요를 데리고 뉴멕시코 고향으로 돌아와 언니에게 양육을 부탁하고 떠난다. 엄마의 언니, 타요의 이모는, 이모의 건강하고 운동 잘하고 백인 식 학교공부도 빼어난 자랑스런 아들 록키와 함께 타요를 키우며 록키 대신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소와 양을 키우는 목축 일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는다. 록키는 백인의 성공 공식과 같은 코스의 가도를 걷도록 배려하고. 근데 뜻대로 되면 그게 세상살이야?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록키와 타요, 그리고 동네의 젊은이란 젊은이들은 모두 군대에 입대해버린다. 록키는 모병관에게 동생 타요와 같은 부대에 배속되는 조건으로 입대하겠다고 타협을 해 그렇게 되는데, 그게 타요로 하여금 최악의 조건이 될 줄은 미처 몰랐겠지. 둘은 필리핀 근처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해병으로 배속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한 명도 해치우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버리고 만다. 그것도 록키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백 퍼센트 가까운 습도와 송곳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록키가 누워있는 모포의 양끝을 포로병들이 들고 행군하는 밀림. 일본군의 개머리판이 관자놀이에 와 부딪는 것보다 비와 더위가 더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행군 속에 문득 타요는 일본인의 얼굴 속에서 사랑하는 외삼촌 조사이어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고통 속에서 기어이 록키는 절명해버리고.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타요를 비롯한 인디언 참전용사들. 인디언 부족 간엔 백인들의 전쟁에 나가 싸우고 온 것이 별로 자랑할 만하지 않지만 그래도 전쟁 중엔 캘리포니아에서 참전 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백인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고, 백인들이 드나드는 바에서 마음껏 술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유일하게 얻은 것이라고는 극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어려서부터 타요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모가 술에 잔뜩 취해 역시 만취한 타요의 엄마와 백인과의 관계를 모욕하자 인사불성의 상태에서 타요는 깨진 맥주병으로 에모의 배를 쑤시고 LA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백색의 사각형 안에서 서서히 황폐화되는 타요의 정신세계. 필리핀의 한 섬에서 그토록 내린 비를 저주했기 때문에 고향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에도 6년째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는 자책까지. 그리고 왜 조사이어 외삼촌은 다시 보이지 않을까. 수시로 불쑥 나타나는 일본군과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록키, 빗속에서 환영처럼 보이던 조사이어는 내리는 비처럼 술을 마셔야 다시 모습을 드러낼 뿐. 타요의 정신은 완전하게 황폐화되고,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다시 고향, 길쭉한 메사가 있는 뉴멕시코로 돌아간다. 이게 책의 거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1부.
 그저 그런 얘기 같지? 그러나 만일 내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작가가 직접 쓴 그대로의 작품을 읽고 싶은 책. 우리가 간혹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했던 말, 그들의 사상 같은 것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들의 자연과 동물과 한 포기 풀, 한 그루의 나무, 돌멩이, 돌멩이 위를 흐르는 냇물, 냇물소리 돌물돌 물돌물*, 이 모든 자연 정령과 인간의 합일된 모습에 감탄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책의 작가 마몬 실코의 글도 이 비슷한 정조情調로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위 문단의 끝 부분에 ‘메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로 설명하는 것보다 사진을 하나 보시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2부에서 (일종의)주술사 베토니 노인에게 성공적인 치유 의식을 받은 타요가 3부에선 외삼촌이 남긴 소들을 다시 찾아와 메사의 솟은 언덕 사이에 뚫린 굴에 기거하며 키우는 장면이 나온다. 4부는 결론이니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저 넓은 거친 황야에서 생존할 수 있는 소는 백인들이 외국에서 품종 개량해 들여와 키우는 살집 좋고 다리 짧은 종이 아니라 사슴처럼 가는 다리에 구운 선인장과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가며 생존할 수 있는 토종 소이듯이, 지금 완전하게 약탈당한 아메리카의 모든 비옥하고 깨끗한 물이 넘쳐흐르는 토지는 전적으로 원주민의 것이라는 건 슬프게도 사실이다. 희망이나 비전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에게 오직 허가된 것이라고는 술과 매춘과 오직 그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끝없는 폭력. 보호지역 안에선 국가가 보호를 해줄 테니 안에서 서로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는 FBI(로 대표하는 미국 정부). 그러나 백인들은 오직 한 군데, 도무지 생명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황무지만을 아메리카의 원래주인인 원주민에게 불하했으며, 모든 자연과 동식물의 생명과 인간성을 약탈당한 원주민들은 알콜과 약물과, 그걸로 다스릴 수 없는 절망과 빈곤 속에서 그나마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작가는 비록 참전 인디언들을 모델로 하긴 했으나 현재까지 유효하며, 모든 인디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소외와 절망과 몰락의 상태에 대한 치유의 의식ceremony이라고, 참으로 아름다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 의성어/의태어 "돌물돌 물돌물"은 서정춘의 시에서 가져왔음. 어떤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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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쌀알
민퐁 호 지음, 최재경 옮김 / 달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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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 당시 버마 출신의 중국인 민퐁 호. 자라면서 태국과 싱가포르 생활을 했고, 이 책의 무대가 되는 1974년 언저리엔 태국의 특정 대학에서 공부하며 당대 태국 농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권리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농촌운동에 투신한 적이 있다고, 지라난 쁘라셋쿨이 책의 서문을 통해 밝힌다. 작가가 화교 출신의 동남아시아 인이라는 얘기고, 그러면 보편적으로 국부의 90% 가량을 가진 부르주아 가정의 자제였다는 거다. 실제로 서문을 쓴 쁘라셋쿨과 호가 처음 만난 곳이 1973년~76년 사이에 대학생에 의하여 진행된 농촌활동이었으며, 두 번째 만나서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한 것이, 쁘라셋쿨이 1976년 10월 군부 쿠데타 이어 공산당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염증을 느껴 전향을 한 다음, 세상살이 다 잊고 미국의 코넬 대학에 공부하러 갔을 때였으니, 솔직히 말해서 책의 저자 민퐁 호나 서문을 쓴 쁘라셋쿨이나 부잣집 따님으로 완전 폭망해도 살아남기만 하면 남은 인생을 여유작작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유복한 가정’이 등 뒤에 있었던 종족들이다. 이렇게 구름 위의 신전 출신의 인간들이 젊은 한 시절에 농촌활동으로 농촌의 소작인들을 의식화 시킨 것까지는 바람직했지만, 아차, 소작인들은 자신들이 노동을 해서 소작료를 제하고 얻는 나머지 말고는 어디 의지가지가 없던 상태이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암만해도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다. 실제로 서문에서 고백하다시피 태국의 1973년 민주화 성공, 각 계층의 민주화 입법 및 빈민운동, 76년의 반동 쿠데타, 공산당 입당 및 저항운동, 전향, 여기까지는 청년 지식인들의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에 대해선 이해할 수 있으나, 공산당 탈당 및 전향에 이어 이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대신,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미국 유학을 통한 실력배양을 주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농촌과 지식인들의 간극을 더 벌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이런 운동소설의 맹점은, 작년에 독후감을 쓴 <건너간다>의 이인휘, 박노해, 백무산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지식인, 아니 먹물들에 의하여 씌어 진다는 점(물론 이인휘, 백무산, 박노해 같은 작가가 지식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현장에서 스스로 의식화한 진정한 지식인 그룹이다). 따라서 젊은 지식인이건 이젠 나이 좀 먹어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지식인이건 하여간 먹물들의 시각으로 굴절된 작품일 수밖에 없어서,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결국 인텔리겐치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서로 이해 또는 협력의 약속을 하는 것으로 마감하는 작품들이 많다는 안타까운 사실. <아버지의 쌀알> 역시 마찬가지다. 소득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만 소작인이 갖는 구조. 이것이 무슨 계약이 아니라 그냥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몇 백 년이라는데, 땅을 빌려주고 빌려준 대가로 소작료를 받는 일 자체를 두고 그게 착취니 수탈이니 할 수는 없다. 정식으로 계약하지 않고 과다한 소작료를 지불해야 하는 체계가 아쉬운 것이지. 태국의 입법부에서도 이를 직시하고 소작료를 일정 수준(약 33% 정도) 이상으로 정할 수 없다고 법안을 발의 또는 심의 중임에도 굳이 학생 운동가들이 각 지방을 순례하면서 지금까지 절반의 소작료를 내고 있는 것을, 당장 삼분의 일만 내라고 추동한 것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실제로 “정부가 소작료를 수확한 곡식의 삼분의 일로 줄이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150쪽) 농촌운동가이자 책의 남자주인공이자 진짜 주인공 아가씨 진다의 인텔리겐치아 애인 네드가 스스로 말하면서 말이다. 이건 정말 웃긴 일이다. 입법부가 소작료로 책정하고자 하는 것이 33%, 농촌활동에 나선 학생들이 소작인들에게 지주한테 곡식의 삼분의 일만 내라고 하는 거하고 도대체 뭐가 달라? 입법부에서 추진하는 결정 역시 농민들이 자기 손으로 뽑은 대표들이 하는 거 아닌가? 꼭 투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건가 말이지. 70년대 초중반 태국의 대학에서는 민주주의에 관한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거다. 당시 대한민국은, 얘기도 말자.
 문제는 ① 위에서 말했듯이 지금 정부(입법부겠지 행정부가 무슨 근거로 소작료율을 정하는가)가 법안 심의 중이고, 시국이 거의 완전히 민주정치 단계인데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고작해야 1년을 기다리지 못해 농촌을 들쑤셔서 기어이 소작료 투쟁을 벌였어야 했으며, ② 소작료 투쟁이 벌어진 숱한 농촌에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한 소작인들 다수가 체포에 의한 또는 체포 중 도주과정에서 생명을 잃었다는 것까지 다 아는 상태에서 시도를 해야겠는가 하는 것과, ③ 진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해 실행한 주인공의 아버지는 결국 잡혀가 옥사를 하는데 이제 남은 집안 건사는 남은 딸이 할머니, 동생, 언니, 언니가 갓 낳을 조카까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반면 ④ 어느 날 도시에서 무턱대고 찾아와 농촌활동을 시행한 학생들은, 남자 주인공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별다른 추가적 고통 없이 무난히 학업을 계속한다는 거. 이것들 뭐야? 책에서 민퐁 호는 남자 주인공 네드를 농촌 출신 고아에다가 머리만 무척 똑똑해서 기관 출신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장학금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특출난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태국 북동부 지역의 소작인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딸 진다와 계속적인 정신적(오직 정신적으로만) 유대를 맺게 하는 결말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네드를 진짜 이 책의 작가 민퐁 호와 비슷한 캐릭터로 만들었다면, 운동이 괴멸한 후 결코 두 연인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코넬 대학으로 유학 가는 형식을 취해 집안에서 안전하게 추방해버렸을 테니까. 이 책이 2018년 현재 절판이니 결말 부분도 막 말해버린다. 이렇게 가리지 않고 얘기해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다.
 책의 절정을 어디로 볼 것인가는 좀 논의가 필요한데, 그걸 위해서 이 책을 읽어보시라 권할 수는 없고, 그냥 말씀을 드리자면, 1976년 10월의 쿠데타 장면이 나오는데, 책의 헌사 “1976년 10월 6일. 태국 탐마샤트 대학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이 책을 바칩니다.”에서 보듯이 어느 나라든 당시 군인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어 탐마샤트 대학에 소작료 투쟁을 위해 모인 전국의 소작인 대표들과 학생들과 학교 근처 소년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해버린 장면일 수도 있고, 한 생명의 죽음과 거의 연달아 찾아온 또 한 생명의 탄생, 푸른 벼 이삭이 누런 벼로 늙어 가면서 쌀알을 만들어내는 생명력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을 텐데, 1976년 쿠데타 장면이라면 그까짓 것, 1979년의 부마항쟁에 이은 이듬해 광주에서 너무 충분히 익숙한 대한민국 국민한테도 동의를 얻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역시 생명력의 발현 장면이 책의 절정이라고 봐야 한다는데 한 표를 던진다. 이 장면에서 오해하지 말기. 한 생명이 죽고 이어서 다른 한 생명이 탄생하는 것 모두 다 소작인들이다. 단 한 명의 도시 인텔리겐치아나 부르주아도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소작인들. 심지어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사진을 벽에 걸어둔 가난한 먹물이자 남자 주인공 네드도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히려 굳이 넣자면 소작인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지주계급의 하수인이자 마름이자 이제 태어날 새로운 소작인의 유전적 아버지인 두싯. 그래, 농촌은 농촌 안에서 알아서 풀어야 하는 거다. 거기서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계급이 섞이기도 하고 역전도 생기고, 서로 싸워 코가 깨지기도 하고 지지고 볶다가 어느 날 자연스럽게 풀려야 하는 것이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엄하게 끼어들어와 감 놔라 대추 놔라, 따따부따해서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시간차가 좀 날 뿐이지 큰 줄기가 민주화되기만 하면 다른 분야도 비슷한 수준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다.
 절판. 구태여 찾아 읽고 나처럼 이거 뭐야, 할 필요 없는 책. 한국인들한테는 전혀 새롭지 않다.
 도대체가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쌀알, 농촌에서 높은 소작료에 쪼들려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 소작인들을 위한 책인 것처럼 가면을 쓰면서, 정작 책은 “1976년 10월 6일. 태국 탐마샤트 대학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바치는 거. 물론 현장에 농민도 있었겠지만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먹물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 빼어나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황석영의 <객지>, 마지막으로 남은 동혁이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무는 거하고 비하면 정말 수준 차 난다. 제 삼 세계 국가의 소설이라 특별한 관심으로 읽었다가 염병, 시간만 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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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엔 원년의 풋볼 (무선)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4
오에 겐자부로 지음, 박유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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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사기 오래 전부터 ‘만엔’이 무엇일까, 생각 좀 했다. 만 엔萬円, 즉 ¥10,000 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 근데 ¥10,000 이면 ¥10,000 이지 또 거기에 원년元年은 뭐야. 만일 이 책을 읽는다면 제목이나 내용, 이런 것보다, 오에 겐자부로가 쓴 소설이라서, 그의 말년 작 <익사>에 숱하게 인용하던 대표작이라서 읽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제목의 의미 같은 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10,000을 처음 얻은 해에 풋볼 시합 어쩌고, 이런 되지도 않은 추리를 했을 뿐이었다. 결국 모든 착각의 원인은 바로 ¥10,000일 것이라고 단정한 것이 제일 큰 문제였다.
 책을 사 표지를 보니 ‘만엔’이 한문으로 쓰면 万延, 일만 년을 이어간다는 뜻이었다. 근데 원년元年은? 검색해봤다. 이런, 만엔이 서기 1860년 당시 일본 정부의 연호란다. 만엔 시대는 1860년부터 1861년까지 딱 1년 동안 사용했기 때문에 만엔 원년이면 1860년을 콕 집어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해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면, <익사>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장면, 농민반란이 발생한 해라는데, 이 책의 주인공 미쓰의 증조부와 증조부의 동생(그러면 ‘종증조부’라고 쓰면 간단한데 책 끝날 때까지 계속 ‘증조부의 동생’이라 표현한다)이 깊숙하게 관련되었단다. 100여 년 전 사건의 주인공 증조부와 종증조부가 민란에 어떻게 간여를 했고, 사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정식 사료에선 거론을 하지 않고 이른바 민담 또는 향토사학 형식으로 많이 왜곡되어 전해지고 있지만 전혀 정확한 것도 아니며 심지어 형이 아우를 죽이고 그의 허벅지 살 한 점을 베어 물어 삼킴으로 해서 자신이 민란에 참여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는 식으로 전해지기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확실한 건 증조부의 동생, 종증조부는 자신을 따르는 친위대들을 이끄는 민란의 지도부였으며, 민란이 진압되어 친위대 전원이 살해되었을 때 자리를 극적으로 피해 죽음을 면했다는 것. 이들 극렬한 친위대 혹은 행동대원들이 마지막 무렵 민란에 참여한 농민들이 등을 돌림으로 해서 죽창을 들고 증조부의 곳간으로 밀고 들어올 때, 증조부는 총을 쏘며 이들에게 저항했다는 정도.
 세월은 흘러 소설의 일인칭 화자 ‘나’ 미쓰사부로의 형제로 넘어가면, 미쓰사부로는 4남 1녀 가운데 3남으로, 첫째 형은 당시 대학을 졸업한 인텔리로 졸업하자마자 입대해 중국에서 냉혹한 장교로 이름을 떨치다 금방 전사해버리고 만다. 둘째 형은 (아마도 가미가제를 육성하던)해군비행교육단에서 교육을 받고 실전에 투입되기 전에 종전이 되어 고향에 돌아왔으나 동네 아래쪽에 있던 조선인 집단과의 패싸움 끝에 조선인들에게 얻어맞아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셋째 미쓰사부로가 정식 상속인이 되고, 넷째 다카시는 1960년 6월에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한 학생운동에 적극 참여했다가, 극적으로 전향하여 마치 학생운동이 “우리 자신의 치욕”이었던 것처럼 심지어 미국을 순회하며 연극 <우리 자신의 치욕>을 공연하기 위해 미국에 도착한 다음(이 정도면 '배신'을 넘어 '반역'의 수준이다), 증발해버렸다가 시간이 조금 흘러 다시 귀국한 상태다. 막내로 어여쁜 여동생을 두었으나 이른바 유로지비, 즉 백치 비슷한 상태로 스무 살이 되지 못해 농약을 벌컥벌컥 마시고 화장실에서 죽고 말았다. 아버지는 사업을 하느라 동아시아를 떠돌다가 객사해버리고, 어머니는 정신에 문제가 좀 있는 환자였다. 그러니 남은 미쓰와 다카시의 혈관 속에는 친가 쪽으로 증조부와 종증조부의 성향, 즉 집단을 이끄는 능력과 폭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기질이, 외가 쪽에서 온 정신 이상의 기질이 함께 흐르고 있어서, 어느 형질이 형제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셋째 아들이자 화자인 ‘나’ 미쓰는 아내가 읽던 소세키의 일기에 나오는 영어 단어 몇 개로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 “languid stillness, weak state, painless, passivity, goodness, peace, calmness(나른한 고요, 약한 상태, 고통이 없는, 수동성, 선량함, 평화, 평온)”(221쪽). 그러니 미쓰는 다분히 외가를 탁한 반면, 진짜 주인공 다카시는 형 부부와 고향 시코쿠 산골에 도착해 풋볼을 매개로 적극적으로 젊은이들을 규합하는 것이 완전히 종증조부와 빼박이다.
 다카시는 책을 읽으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니 여기다 구태여 써놓을 필요 없는 이유로 고향 시코쿠 산골로 향하지만, ‘나’ 미쓰는 왜? 여기에 오에 겐자부로의 평생을 규정하는 사건이 개입한다. 스물아홉 살, 비교적 초기에 발표한 <개인적인 체험>에 고통스럽게 고백을 하고 일흔네 살에 발표한 <익사>에서도 작가의 삶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아들이 뇌 헤르니아 상태로 태어나 수술을 받은 다음 젊은 부부가 ‘관리’하기엔 도무지 역부족이라 소정의 기관에 유치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다. 거기다 책을 열자마자 비극적 자살 사건이 벌어지는데, 미쓰의 가장 친한 친구가 머리와 얼굴에 온통 붉은 페인트를 뒤집어쓰고, 항문에 오이를 박은 상태에서 알몸으로 목을 매 자살을 한 사건이 벌어진다. 장모의 기질을 받았으나 여태 완벽하게 자제해오던 아내 나쓰코는 자신의 어머니처럼 하루 종일 위스키에 전 알콜 중독의 상태로 빠져버렸다. 완전한 구석으로 몰린 미쓰가 난데없이 다카시로부터 귀향을 권유받고 상속받은 토지 일부를 처분하여 새 삶을 모색하고자 한 건 당연한, 아니, 당연할 수 있는 일이다.
 여기에 소개하지 않을 수 없는 중요인물이 조선인 백승기. “흰 백(白), 되 승(升)에 기초 기(基)입니다.” 라고 517쪽이나 되어야 등장하는 이 조선인은 완전한 산골 깡촌의 촌놈보다 훨씬 못한 노예 노동에 시달리던 조선인 부락 출신이다. 1945년 종전 후에 벌목공으로 징용을 살던 이들이 돈이 없어 떠나지도 못하고, 쫄딱 망한 일본 정부가 보내주지도 못해 발목이 묶이자 시코쿠 분지 마을의 저편에 집단인 촌을 만들고 토지 일부를 불하받아 살고 있으면서 수시로 시코쿠 촌놈들에게 박해를 받아온 무리. 그것도 급기야 시코쿠 촌것들이 쳐들어와 조선인을 죽이고 무슨 일을 했던지, 다음 싸움에서 일본인, 화자 미쓰의 친형 S가 죽고도 그걸로도 모자라 토지 일부를 정식으로 불하받게 해줄 정도의 패악을 당했던 조선인 부락 출신의 백승기. 그는 조선인이 떠난 토지를 다 수용한 다음, 읍내에 수퍼마켓 체인점을 세워 ‘수퍼마켓 천황’이란 별호를 얻어내는데, 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수퍼마켓에 일정한 채무가 있으며, 이러저러한 이유로 주민들을 눈에 보이지 않게 지배하는 것도 모자라 지역의 랜드마크인 미쓰네 집안의 곳간채까지도 헐어버리는 상황이다. 시코쿠 일대를 장악하고 경제적 패권을 쥔 수퍼마켓 천황과 한 바탕 풋볼 게임을 벌이는 것이 책의 스토리다. 그러면서 지역과 역사 사실과 한 가족의 연관관계를 밝히는 일.
 유독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수퍼마켓 천황과 한 판 풋볼 게임을 벌이기로 일을 꾸미고, 젊은이들을 규합하고, 정말로 한 판 잘 때려먹은 진정한 주인공 다카시가 하필이면 학생운동의 투사 출신으로 전향하여 타도의 대상이었던 미국에까지 가서 반성하는 의미의 연극 <우리 자신의 치욕>을 공연하려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생각해보면, ① 미일안전보장조약에 반대한 학생운동의 놀랄 만큼 용감한 투사였다가, ② 전향해 미국에 대고 잘못했다고 반성하러 가서 몇 번 공연을 하고서는 이탈해, 흑인 거주 우범지역을 배회하다 가벼운 임질에 걸린 경험만 갖고 귀국해서, 다시 ③ 지역의 권력자인 수퍼마켓 천황과 한 판 풋볼 시합을 벌이는 캐릭터.  이런 과거 경력으로 인해서 풋볼 시합이 예상보다 훨씬 격렬해질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하는 궁리가 페이지를 넘길수록 강하게 들었다. 변곡점을 지날 때마다 성향이 더욱 고착되는 경우를 흔히 보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치열한 학생운동의 '가장 폭력적 투사'였던 것마저 깊숙한 곳에 원인이 있었다. 다카시의 모든 행동의 근본적 원인이 되는 숨어 있는 비밀. 그건 정말로 알려줄 수 없다. 책을 읽다보면 다카시가 스스로 밝히기 전에 (조금씩, 조금씩, 그러다 마침내) 다 알게 되는데, 진짜로 주인공이 비밀을 이야기할 때 독자의 짐작이 맞아 떨어지는 경우에 가질 수 있는 내밀한 즐거움, 그 즐거움을 느끼기에도 조금 과하게 비극적이라는 정도만 말하고 스토리 소개는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그런데 참 문제적 인간 다카시의 인간적 번뇌가 왜 그의 형이자 화자인 미쓰를 통해서만 밝혀질까. 물론 타인에 의한 정의야말로 근본적으로 오류를 포함하기 때문에 마지막 결정을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기 위한 장치이기도 할 것이다. 어쨌거나 인간의 마음속에 깊숙하게 내재한 죄의식이 어떻게 한 인간의 인생을 거덜 내는지 참 치밀하게 묘사해놓은 역작이다. 위에서 내가 인상 깊게 생각했다는 조선인 백승기와 완전하게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이 주인공 다카시다. 백승기는 거의 불가촉천민과 유사했던 ‘부락’ 출신 조선인으로 자신의 출신이란 커다란 핸디캡을 발판 삼아 기어이 그 지역을 정복하는 ‘수퍼마켓 천황’, 일본인을 지배하는 천황이 되는 거 아닌가. 조선인 백승기의 등장이야말로 다카시의 불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오에 겐자부로의 기막힌 보색대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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