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쌀알
민퐁 호 지음, 최재경 옮김 / 달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1951년 당시 버마 출신의 중국인 민퐁 호. 자라면서 태국과 싱가포르 생활을 했고, 이 책의 무대가 되는 1974년 언저리엔 태국의 특정 대학에서 공부하며 당대 태국 농민들의 생활상과 그들의 권리와 평등을 구현하기 위한 농촌운동에 투신한 적이 있다고, 지라난 쁘라셋쿨이 책의 서문을 통해 밝힌다. 작가가 화교 출신의 동남아시아 인이라는 얘기고, 그러면 보편적으로 국부의 90% 가량을 가진 부르주아 가정의 자제였다는 거다. 실제로 서문을 쓴 쁘라셋쿨과 호가 처음 만난 곳이 1973년~76년 사이에 대학생에 의하여 진행된 농촌활동이었으며, 두 번째 만나서 우의를 더욱 돈독하게 한 것이, 쁘라셋쿨이 1976년 10월 군부 쿠데타 이어 공산당 파르티잔 활동을 하다가 염증을 느껴 전향을 한 다음, 세상살이 다 잊고 미국의 코넬 대학에 공부하러 갔을 때였으니, 솔직히 말해서 책의 저자 민퐁 호나 서문을 쓴 쁘라셋쿨이나 부잣집 따님으로 완전 폭망해도 살아남기만 하면 남은 인생을 여유작작하게 보장해줄 수 있는 ‘유복한 가정’이 등 뒤에 있었던 종족들이다. 이렇게 구름 위의 신전 출신의 인간들이 젊은 한 시절에 농촌활동으로 농촌의 소작인들을 의식화 시킨 것까지는 바람직했지만, 아차, 소작인들은 자신들이 노동을 해서 소작료를 제하고 얻는 나머지 말고는 어디 의지가지가 없던 상태이고,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선 암만해도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질렀을 수 있다. 실제로 서문에서 고백하다시피 태국의 1973년 민주화 성공, 각 계층의 민주화 입법 및 빈민운동, 76년의 반동 쿠데타, 공산당 입당 및 저항운동, 전향, 여기까지는 청년 지식인들의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에 대해선 이해할 수 있으나, 공산당 탈당 및 전향에 이어 이들은 다시 농촌으로 돌아가는 대신,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미국 유학을 통한 실력배양을 주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농촌과 지식인들의 간극을 더 벌려놓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한다).
 이런 운동소설의 맹점은, 작년에 독후감을 쓴 <건너간다>의 이인휘, 박노해, 백무산 같은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 지식인, 아니 먹물들에 의하여 씌어 진다는 점(물론 이인휘, 백무산, 박노해 같은 작가가 지식인이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야말로 현장에서 스스로 의식화한 진정한 지식인 그룹이다). 따라서 젊은 지식인이건 이젠 나이 좀 먹어 젊었던 시절을 회상하는 지식인이건 하여간 먹물들의 시각으로 굴절된 작품일 수밖에 없어서, 실제로야 어떻든 간에 결국 인텔리겐치아와 프롤레타리아는 서로 이해 또는 협력의 약속을 하는 것으로 마감하는 작품들이 많다는 안타까운 사실. <아버지의 쌀알> 역시 마찬가지다. 소득의 절반을 지주에게 주고, 나머지 절반만 소작인이 갖는 구조. 이것이 무슨 계약이 아니라 그냥 관습적으로 이루어지기를 몇 백 년이라는데, 땅을 빌려주고 빌려준 대가로 소작료를 받는 일 자체를 두고 그게 착취니 수탈이니 할 수는 없다. 정식으로 계약하지 않고 과다한 소작료를 지불해야 하는 체계가 아쉬운 것이지. 태국의 입법부에서도 이를 직시하고 소작료를 일정 수준(약 33% 정도) 이상으로 정할 수 없다고 법안을 발의 또는 심의 중임에도 굳이 학생 운동가들이 각 지방을 순례하면서 지금까지 절반의 소작료를 내고 있는 것을, 당장 삼분의 일만 내라고 추동한 것이 옳은지 나는 모르겠다. 실제로 “정부가 소작료를 수확한 곡식의 삼분의 일로 줄이는 새로운 법을 통과시킬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150쪽) 농촌운동가이자 책의 남자주인공이자 진짜 주인공 아가씨 진다의 인텔리겐치아 애인 네드가 스스로 말하면서 말이다. 이건 정말 웃긴 일이다. 입법부가 소작료로 책정하고자 하는 것이 33%, 농촌활동에 나선 학생들이 소작인들에게 지주한테 곡식의 삼분의 일만 내라고 하는 거하고 도대체 뭐가 달라? 입법부에서 추진하는 결정 역시 농민들이 자기 손으로 뽑은 대표들이 하는 거 아닌가? 꼭 투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건가 말이지. 70년대 초중반 태국의 대학에서는 민주주의에 관한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던 거다. 당시 대한민국은, 얘기도 말자.
 문제는 ① 위에서 말했듯이 지금 정부(입법부겠지 행정부가 무슨 근거로 소작료율을 정하는가)가 법안 심의 중이고, 시국이 거의 완전히 민주정치 단계인데 법안이 통과되기까지 고작해야 1년을 기다리지 못해 농촌을 들쑤셔서 기어이 소작료 투쟁을 벌였어야 했으며, ② 소작료 투쟁이 벌어진 숱한 농촌에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한 소작인들 다수가 체포에 의한 또는 체포 중 도주과정에서 생명을 잃었다는 것까지 다 아는 상태에서 시도를 해야겠는가 하는 것과, ③ 진짜 소작료 인하를 주장해 실행한 주인공의 아버지는 결국 잡혀가 옥사를 하는데 이제 남은 집안 건사는 남은 딸이 할머니, 동생, 언니, 언니가 갓 낳을 조카까지 전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반면 ④ 어느 날 도시에서 무턱대고 찾아와 농촌활동을 시행한 학생들은, 남자 주인공 같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별다른 추가적 고통 없이 무난히 학업을 계속한다는 거. 이것들 뭐야? 책에서 민퐁 호는 남자 주인공 네드를 농촌 출신 고아에다가 머리만 무척 똑똑해서 기관 출신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장학금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니는 특출난 인물로 설정함으로써 태국 북동부 지역의 소작인의 건강하고 아름다운 딸 진다와 계속적인 정신적(오직 정신적으로만) 유대를 맺게 하는 결말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네드를 진짜 이 책의 작가 민퐁 호와 비슷한 캐릭터로 만들었다면, 운동이 괴멸한 후 결코 두 연인은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코넬 대학으로 유학 가는 형식을 취해 집안에서 안전하게 추방해버렸을 테니까. 이 책이 2018년 현재 절판이니 결말 부분도 막 말해버린다. 이렇게 가리지 않고 얘기해버리니 속이 다 시원하다.
 책의 절정을 어디로 볼 것인가는 좀 논의가 필요한데, 그걸 위해서 이 책을 읽어보시라 권할 수는 없고, 그냥 말씀을 드리자면, 1976년 10월의 쿠데타 장면이 나오는데, 책의 헌사 “1976년 10월 6일. 태국 탐마샤트 대학에서 죽음을 당한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이 책을 바칩니다.”에서 보듯이 어느 나라든 당시 군인들은 무식하기 짝이 없어 탐마샤트 대학에 소작료 투쟁을 위해 모인 전국의 소작인 대표들과 학생들과 학교 근처 소년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해버린 장면일 수도 있고, 한 생명의 죽음과 거의 연달아 찾아온 또 한 생명의 탄생, 푸른 벼 이삭이 누런 벼로 늙어 가면서 쌀알을 만들어내는 생명력의 발현으로 볼 수도 있을 텐데, 1976년 쿠데타 장면이라면 그까짓 것, 1979년의 부마항쟁에 이은 이듬해 광주에서 너무 충분히 익숙한 대한민국 국민한테도 동의를 얻을 수 있겠지만, 나는 역시 생명력의 발현 장면이 책의 절정이라고 봐야 한다는데 한 표를 던진다. 이 장면에서 오해하지 말기. 한 생명이 죽고 이어서 다른 한 생명이 탄생하는 것 모두 다 소작인들이다. 단 한 명의 도시 인텔리겐치아나 부르주아도 개입하지 않는 순수한 소작인들. 심지어 마르크스, 레닌, 모택동의 사진을 벽에 걸어둔 가난한 먹물이자 남자 주인공 네드도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다. 오히려 굳이 넣자면 소작인들의 고혈을 빨아먹었던 지주계급의 하수인이자 마름이자 이제 태어날 새로운 소작인의 유전적 아버지인 두싯. 그래, 농촌은 농촌 안에서 알아서 풀어야 하는 거다. 거기서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계급이 섞이기도 하고 역전도 생기고, 서로 싸워 코가 깨지기도 하고 지지고 볶다가 어느 날 자연스럽게 풀려야 하는 것이지 다른 동네 사람들이 엄하게 끼어들어와 감 놔라 대추 놔라, 따따부따해서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했다. 시간차가 좀 날 뿐이지 큰 줄기가 민주화되기만 하면 다른 분야도 비슷한 수준으로 갈 수밖에 없는 거다.
 절판. 구태여 찾아 읽고 나처럼 이거 뭐야, 할 필요 없는 책. 한국인들한테는 전혀 새롭지 않다.
 도대체가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버지의 쌀알, 농촌에서 높은 소작료에 쪼들려 생존권을 위협받는 농민, 소작인들을 위한 책인 것처럼 가면을 쓰면서, 정작 책은 “1976년 10월 6일. 태국 탐마샤트 대학에서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바치는 거. 물론 현장에 농민도 있었겠지만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먹물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이다. 너무 빼어나 차라리 아름답기까지 한 황석영의 <객지>, 마지막으로 남은 동혁이 다이너마이트를 입에 무는 거하고 비하면 정말 수준 차 난다. 제 삼 세계 국가의 소설이라 특별한 관심으로 읽었다가 염병, 시간만 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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