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
레슬리 마몬 실코 지음, 강자모 옮김 / 동아시아 / 2004년 10월
평점 :
절판



 

 레슬리 마몬 실코, 비록 완전한 아메리카 인디언이 아니라 백인의 피가 조금, 사실 그리 적지는 않게 흐르지만, 어려서부터 뉴멕시코의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살아온 작가로 데뷔작 <의식Ceremony>은 아메리카 인디언의 소외와 몰락의 과정을 소설을 통해 그린 작품이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원주민 아가씨가 백인의 꾐에 넘어가 아이를 낳으니 이 혼혈 아이는 혈족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아메리카 인디언에게 태생부터 종족의 수치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알고 있는 어린 엄마는 1920년대, 인디언이라면 오히려 흑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던 시기에 아이와 함께 살아내기가 너무 힘들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자신의 몸을 파는 것 말고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얼기설기 바람막이만 세워둔 움집에서 누더기에 갓 낳은 아이를 둘둘 말아 쓰레기장에 버리고 돌아와서는 혼혈 아이, 책의 주인공인 타요를 데리고 뉴멕시코 고향으로 돌아와 언니에게 양육을 부탁하고 떠난다. 엄마의 언니, 타요의 이모는, 이모의 건강하고 운동 잘하고 백인 식 학교공부도 빼어난 자랑스런 아들 록키와 함께 타요를 키우며 록키 대신 인디언 보호구역 내에서 소와 양을 키우는 목축 일을 시키려고 마음을 먹는다. 록키는 백인의 성공 공식과 같은 코스의 가도를 걷도록 배려하고. 근데 뜻대로 되면 그게 세상살이야? 어느 날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록키와 타요, 그리고 동네의 젊은이란 젊은이들은 모두 군대에 입대해버린다. 록키는 모병관에게 동생 타요와 같은 부대에 배속되는 조건으로 입대하겠다고 타협을 해 그렇게 되는데, 그게 타요로 하여금 최악의 조건이 될 줄은 미처 몰랐겠지. 둘은 필리핀 근처에서 일본군과 싸우는 해병으로 배속되어 치열한 전투 끝에 적군을 한 명도 해치우지 못하고 포로로 잡혀버리고 만다. 그것도 록키가 중상을 입은 상태에서. 백 퍼센트 가까운 습도와 송곳처럼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록키가 누워있는 모포의 양끝을 포로병들이 들고 행군하는 밀림. 일본군의 개머리판이 관자놀이에 와 부딪는 것보다 비와 더위가 더 끔찍하고 지긋지긋한 행군 속에 문득 타요는 일본인의 얼굴 속에서 사랑하는 외삼촌 조사이어의 얼굴을 발견하는 순간 고통 속에서 기어이 록키는 절명해버리고. 전쟁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타요를 비롯한 인디언 참전용사들. 인디언 부족 간엔 백인들의 전쟁에 나가 싸우고 온 것이 별로 자랑할 만하지 않지만 그래도 전쟁 중엔 캘리포니아에서 참전 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백인 여자들과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고, 백인들이 드나드는 바에서 마음껏 술도 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거의 유일하게 얻은 것이라고는 극적인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어려서부터 타요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에모가 술에 잔뜩 취해 역시 만취한 타요의 엄마와 백인과의 관계를 모욕하자 인사불성의 상태에서 타요는 깨진 맥주병으로 에모의 배를 쑤시고 LA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백색의 사각형 안에서 서서히 황폐화되는 타요의 정신세계. 필리핀의 한 섬에서 그토록 내린 비를 저주했기 때문에 고향 뉴멕시코의 황량한 벌판에도 6년째 지독한 가뭄에 시달리고 있다는 자책까지. 그리고 왜 조사이어 외삼촌은 다시 보이지 않을까. 수시로 불쑥 나타나는 일본군과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지르는 록키, 빗속에서 환영처럼 보이던 조사이어는 내리는 비처럼 술을 마셔야 다시 모습을 드러낼 뿐. 타요의 정신은 완전하게 황폐화되고, 별로 나아지지 않은 상태로 다시 고향, 길쭉한 메사가 있는 뉴멕시코로 돌아간다. 이게 책의 거의 절반 분량을 차지하는 1부.
 그저 그런 얘기 같지? 그러나 만일 내가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수준이면 작가가 직접 쓴 그대로의 작품을 읽고 싶은 책. 우리가 간혹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했던 말, 그들의 사상 같은 것을 읽을 기회가 있으면, 그들의 자연과 동물과 한 포기 풀, 한 그루의 나무, 돌멩이, 돌멩이 위를 흐르는 냇물, 냇물소리 돌물돌 물돌물*, 이 모든 자연 정령과 인간의 합일된 모습에 감탄한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책의 작가 마몬 실코의 글도 이 비슷한 정조情調로 참으로 아름다운 문장들을 만들어낸다. 위 문단의 끝 부분에 ‘메사’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떤 것을 말하는가 하면, 그로 설명하는 것보다 사진을 하나 보시는 것이 훨씬 좋을 것이다.

 

 

 2부에서 (일종의)주술사 베토니 노인에게 성공적인 치유 의식을 받은 타요가 3부에선 외삼촌이 남긴 소들을 다시 찾아와 메사의 솟은 언덕 사이에 뚫린 굴에 기거하며 키우는 장면이 나온다. 4부는 결론이니 여기서 설명하지 않겠다.
 저 넓은 거친 황야에서 생존할 수 있는 소는 백인들이 외국에서 품종 개량해 들여와 키우는 살집 좋고 다리 짧은 종이 아니라 사슴처럼 가는 다리에 구운 선인장과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가며 생존할 수 있는 토종 소이듯이, 지금 완전하게 약탈당한 아메리카의 모든 비옥하고 깨끗한 물이 넘쳐흐르는 토지는 전적으로 원주민의 것이라는 건 슬프게도 사실이다. 희망이나 비전이 전혀 없는 원주민들, 그중에서도 젊은이들에게 오직 허가된 것이라고는 술과 매춘과 오직 그들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끝없는 폭력. 보호지역 안에선 국가가 보호를 해줄 테니 안에서 서로 죽이든 살리든 알아서 하라는 FBI(로 대표하는 미국 정부). 그러나 백인들은 오직 한 군데, 도무지 생명이 살아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황무지만을 아메리카의 원래주인인 원주민에게 불하했으며, 모든 자연과 동식물의 생명과 인간성을 약탈당한 원주민들은 알콜과 약물과, 그걸로 다스릴 수 없는 절망과 빈곤 속에서 그나마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다.
 작가는 비록 참전 인디언들을 모델로 하긴 했으나 현재까지 유효하며, 모든 인디언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처한 소외와 절망과 몰락의 상태에 대한 치유의 의식ceremony이라고, 참으로 아름다운 글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 의성어/의태어 "돌물돌 물돌물"은 서정춘의 시에서 가져왔음. 어떤 시인지는 기억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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