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네 명의 미국 출신 흑인 여류작가들을 읽어보았을 따름입니다. 수백년간 피부색 때문에 노예로 살았고, 내전을 거쳐 신분의 해방을 맞았지만 여전히 차별을 당해온 흑인들. 또 그 가운데 여성들. 이들이 쓴 소설이라면 그냥 얼핏 생각해보기만 해도 뭔가 슬픈, 아니면 적어도 아린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고요. 왜 비오는 봄날의 휴일에 그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라 닐 허스턴

 

 1891년 생입니다. 1960년에 죽을 때까지 극심한 차별을 당한 세대이며, 모르긴 몰라도 문학행위를 한 1세대 흑인 여성 아닐까 합니다. 만년에 빈민 구제소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하니 그리 행복한 일생은 아니었을 거 같습니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조라 허스턴의 피부색만 밝히지 않으면 굳이 흑인 여성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질기고 독한 사랑, 주인공 커플 제니와 티 케이크가 만들어가는 맹목적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살고 사랑하고, 싸우고, 악담하고 다시 사랑하고 또다시 물어 뜯었던 과거의 사랑을 오늘 떠올리는 일, 그것이 행복이라는 우울한 진실. 아름다운 건 자주, 슬프기도 합니다.

 

 

 토니 모리슨

 토니 모리슨한테 조라 닐 허드슨은 큰 이모뻘입니다. 40년 차이가 나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모리슨 부터 진짜 "흑인"에다가 "여성" 문학이 나오지 않느냐, 라는 의견입니다만 제 의견을 믿지는 마세요. 완전 딜레탕트 수준입니다.

 

<빌러비드>

 

 제일 유명한 작품으로 읽어보신 분 꽤 많을 겁니다. 저도 사실 이 책을 시작으로 흑인여성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아주 일천한 경험으로 겁없이 이리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환상소설 적인 면도 보이는데, 그걸 아프리카 취향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아프리카 흑인 문학에서도 비슷한 묘사가 곧잘 등장하니 말입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탈출에 성공한 노예들의 생존기라고 짧게 얘기해도 좋겠습니다. 심금을 울리더군요.

 

<재즈>

 

 남자 흑인과 여자 백인 간의 혼혈은, 백인들 입장에서 가장 극렬하게 꺼리는 경우랍니다. 백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이 아이는 자신이 백인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다 자란 후 피의 반이 흑인의 것임을 알고는 흑인 아버지를 살해한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거 다른 작가에서도 봤습니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로스는 여기에다가 유대인의 정체성도 덧붙여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짓궂음을 보여주긴 합니다만. 세월이 흘러 제이디 스미스의 <온 뷰티>에선 흑백 혼혈의 두 가정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묘사되니 이 <재즈>와 견주면 뽕나무 밭이 빨리도 망망대해로 변한 느낌입니다(오늘은 제이디 스미스 얘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그러나 기본적으로 독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해서도 질투해야 하는 맹렬한 사랑 이야기.

 

 

 엘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과 13년 차이가 납니다. 작은 이모뻘인가요? 백인 인권운동가와 결혼해서 유럽으로 이주해 살았다고 합니다. 이이가 쓴 <어머니의 정원>은 사서 읽어보려고 했더니 수필집이더라고요. 전 에세이는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의 대표작입니다.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어 1982년이던가 하여간 그 즈음에 열린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후보로 올랐다가 영광의 준우승을 먹었던 작품입니다. 서간체 소설입니다. 서간체 소설이 생각보다 재미 없는데,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흑백문제 뿐 아니라, 여성문제에도 초점을 맞추고, 제3 세계들의 소외도 잠깐 언급합니다. 이런 책을 "양서"라고 하는데 아쉽게 품절입니다. 다른 출판사에서라도 빨리 간행해주기 바랍니다.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

 

 192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소작농에 관한 책입니다. 말이 해방이지 백 년 전 흑인 소작인 신분이란 건 노예와 거의 다르지 않는 질곡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계급에 키 크고 잘 생긴 흑인이 하나 등장하니 바로 그레인지 코플랜드입니다. 당시 빈부, 남녀, 인종 간 겪을 수 있는 모든 차별과 벽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키 크고 잘 생겼지만 못 배워먹은 인간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1920년대에 말입니다) 마누라 두드려 패고, 바람 피우면서 집구석 기둥뿌리 뽑는 일이었다네요.

 

 

 글로리아 네일러

 

 1950년 범띠 아줌마네요. 구글 검색해보니까 에휴, 재작년 2016년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답니다. 이이의 작품은 딱 하나만 읽어봤을 뿐입니다.아직 얼마든지 활동한 나이인데 참 아깝습니다.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이제 드디어 무대가 미국 남부에서 북동부 공업지대로 옮겼습니다. 그래봤자 흑인들이 살 수 있는 곳은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시의 가장 험악한 지역일 뿐입니다. 백인들은 한때는 자유롭게 왕래했던 곳에다 높은 벽을 둘러쳐 흑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지역을 페쇄시켜버린 곳에 브루스터플레이스가 있습니다. 이 극빈의 지역에 모인 여자들을 옴니버스 식으로 그리는 매우 훌륭한 소설입니다. 흑백, 여성, 동성애 등을 소재로 화해 불가능한 폭력에 노출된 흑인 여성들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글로리아 네일러의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이 여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입니다. <바람과...>에서 착한 남자 주인공 애슐리를 KKK단에 가입시켜 살아있는 흑인의 신체를 절단한 다음에 불에 태워 죽이게 한, 그러니까 KKK단의 테러를 지지할 정도의 노골적인 인종주의자로 위의 네 여인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인종주의자까지 포용하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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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여자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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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영화 안 봤다. 게을러서. 역자 김화영 씨 유학시절 지도교수였던 레몽 장. 또 이 양반을 사사한 우리나라 대표적 불문학자가 김치수와 최현무. 최현무 선생은 아시지? 소설 쓰는 최윤 씨. 같은 사람이다. 나는 그이가 번역한 뒤 라스를 읽고도 최현무崔賢茂라는 사람이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쓰고, 몇 년 후에 <겨울, 아틀란티스>를 발표할 최윤과 같은 인물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여간 우리나라에서 현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레몽 장의 도움을 받았다는 거. 그리하여 드디어 한국을 방문해 성황리에 강연회도 하고 그랬던 모양이다. 작품 가운데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대상도 받고 그랬던 모양이다. 난 안 봤지만.
 서른네 살 먹은 마리-콩스탕스라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유부녀가 주인공이다. 목소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코끝이 조금 굽었기는 해도 입술이 도톰하고 아주 포동포동하며 피부 빛은 아무리 생각해도 깃털보다는 복숭아를 더 연상시키는 편”이고, “목은 어깨 위로 시원하게 솟아나 있고 팔은 가늘고 허리는 날씬하다. 두 개의 젖가슴은 잘 분리되어 있으며 상체의 크기에 비해서 분명히 너무 풍만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이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아주 큰 이점이 되고 있다.” 즉 잘 생기고 약간 풍성한 듯싶게 잘 빠진 몸의 소유자이면서, 그러나, “치골과 사타구니에 난 털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곱슬곱슬하고 지독하게 촘촘히 나 있다”는 치명적 함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왜 이게 함정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책 사서 읽어보시라. 보시면, 웃다가, 웃다가, 너무 웃어서, 자.빠.진.다.
 마리-콩스탕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 시절 같이 연극 동아리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도 했던 프랑수아즈의 아이디어로 자신이 갖고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목소리를 이용하여 원하는 사람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3주에 한 번씩 신문광고를 한다. 그리하여 곧 열네 살이 될 운신이 매우 어려운 장애 소년, 장군의 부인이기도 하고 원래부터 헝가리의 백작부인이었던 여든 살의 노파, 워낙 바빠 함께 놀아줄 시간도 없는 커리어 우먼을 엄마로 둔 꼬맹이 소녀아이, 파티 같은 데 나가 문화적 대화에 한 자리 끼고 싶어 하지만 책 읽을 여유가 없는 상당한 규모의 금속/비금속 광산업체의 사장. 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받게 된다. 여기에 끼어드는 인간이 글쎄, 레몽 장 본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마리-콩스탕스의 대학시절 지도교수 롤랑 소라. 마리-콩스탕스는 소라 교수한테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직업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이어서 어떤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지 자주 방문해서 귀찮게 물어본다. 자상한 노교수는 책 선택을 비롯한 몇 가지 그녀의 고민에 대해 정성껏 답변을 해주고.
 그리하여 이 책은 마리-콩스탕스가 각각의 고객들에게 읽어주는 텍스트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끔 만드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책을 읽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지 뭐 더 이상이 있을 수 있나? 이 <책 읽어주는 여자>에서도 나오는 작가들을 나열해보면, 모파상, 졸라, 마르크스, 페렉, 클로드 시몽(이 양반의 한국어 번역본은 한 권도 없다), 사드 등을 들 수 있다. 심지어 졸라의 <작품>을 딱 꼽기도 한다. 책 속에 정말로 19세기까지 있었던 직업으로서 “책 읽어주는 여자”가 등장해 주인공 클로드와 동거하기 때문에. 그래서 소라 교수가 마리-콩스탕스한테 딱 그 이야기를 해준다. 비가 죽죽 내리는 어느 깜깜한 밤, 열차에서 내려 집에 오다가 한 구석에서 시커먼 뭉텅이가 놓여있다. 뭔가 봤더니 젊은 여자. 그래 클로드는 이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 연을 맺으면서 시작하는 <작품>. 모파상, 졸라 등 자연주의 작가들은 소라 교수가 추천한 책이고, 페렉과 시몽은 마리-콩스탕스가 이 사람들은 어때요, 소라 교수한테 자문을 구한 책들이고, 마르크스와 사드는 고객께서 읽어주기 바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남자 고객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성적 판타지 속에 빠져있다. 아직 대가리가 제대로 크지도 못한 소년은 책을 읽어주는 내내 마리-콩스탕스의 무릎만 바라보고 있고, 다리를 조금만 더 벌려 보실래요? 다음에 오실 땐 빤쓰를 입지 않고 오시면 안 될까요? 이 따위 건의사항이나 제출한다. 광업회사 사장은 페렉의 <W>를 읽어줄 때는 침을 흘리며 자고 있더니 읽기를 마치자마자 그냥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아내하고 합의이혼 했고 너무 바빠 여자의 품에 들어본 지 벌써 아홉 달이나 돼서 미치겠어요, 나하고 결혼해주세요, 타령을 하며, 이젠 은퇴해서 부유한 노년을 즐기는 전직 대법관은 고급 장정을 한 고서 <소돔 120일>을 꺼내 남성 동성애 장면을 읽어달라고 근엄하게 지시한다.
 반면에 여성고객들은 전부 자식들을 과잉보호하기에 눈알이 벌겋게 충혈된 상태. 아이가 평상 상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완전하게 이성을 잃어버리는 일차원적 광경이거나, 이미 옛 시절의 유물이 된 과거에 함몰되어 있다. 원래 소설에서 정상적인 사람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지만 해도 조금 너무 하는 듯. (사실 이 표현도 말이 안 된다. “조금” “너무”하다니 말이야!)
 하여간 역경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마리-콩스탕스. 나는, 처음부터 직업이라고 해도 나쁠 건 없는데, 프랑스라는 선진국에서 소득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딴지를 언제 걸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결코 이런 쪽으로는 시도하지 않고 우리의 주인공 마리-콩스탕스가 책을 읽어주는 직업을 때려치우고 다시 실직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억제장치로 마감하고 있다.
 <불운의 미덕>이라는 사드의 소설 한 권을 읽고 사드는 더 읽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책 읽어주는 여자>를 비롯해 생각보다 많은 작품이 <소돔 120일>을 언급하고 있어서, 별 기대 없이 <소돔 120일>을 읽어보기로 작정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리 많은 작가들이 설레발을 푸는지 직접 좀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좀 그렇긴 그런가 보다. 주문하는데 성인 인증하란다. 거 참 은근히 기대되네 그려.
 역자 김화영이 은사의 책을 번역해서 그런지 주례사가 난만하다. 난 그냥 그랬다. 그래서 레몽 장의 소설을 딱 한 권 더 읽어보고 더 읽을지 말지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뒤져보니까 <카페 여주인>이란 책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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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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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까치”에서 찍은 책. 소싯적에 이 출판사 책 많이 읽었다. 당연히 역사, 철학으로 분류하는 것들로, 무슨 전공을 공부하든 관계없이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무슨 주문呪文처럼 유행을 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막 읽어 치웠는데, 혹자는 당대의 젊은이가 지내온 시절을 “최후의 교양의 시대”라고 과대평가도 해주고 하는 모양이다. 그때 책 좀 읽었다는 젊은이, 지금은 초로의 늙다리들은 출판사 “까치”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런 회사에서 찍은 문학책이라 일단 눈이 번쩍 띄었다. 책의 제목도 참 멋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책 표지를 보시면, 에곤 실레의 1910년 목탄화 <자기를 보는 자: The self-seer>. 표제 때문에 그림 전체가 보이지 않아서 구글 검색해 원래 그림을 가져왔다.

 

 


 이 기이한 남자를 그린 그림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책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노트>의 꼬마 주인공 폰치토의 주장(물론 작가의 감상이겠지만)을 믿으면, 이 그림은 나신의 화가가 거울 속에서 포즈를 취한 자기 모습을 보며 그린 자화상이다. 앞의 남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뒤의 남자는 자화상을 그리는 실레의 거울 속 형상인 것이다. (근데 이거 맞아? 아 헷갈려!) 거울 속 남자의 왼손(실제로는 실레의 오른손)은 기형적으로 비틀어져 엄지가 감추어져 있으며 거의 뼈만 남았을 정도로 기괴하다.
 실레의 이 그림이야말로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표지로 완전하게 합당하다.
 책에는 한 쌍의 일란성 쌍둥이가 등장한다. 이름은 각 루카스와 칼루스. 영어로 쓰면 Lucas와 Calus. 다 같은 알파벳으로 순서만 달리 이루어진 이름이다. “세 가지 거짓말”이라고 했듯이 작품은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비밀노트”, 2부 “타인의 증거”, 그리고 3부는 “50년간의 고독”. “비밀노트”의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헝가리. 혼자 대도시로 나가 결혼해 쌍둥이를 낳고 기르던 중에 전쟁이 터져 남편은 징집당해 동부전선으로 떠나버리고, 지독한 물자결핍 상황을 맞아 도저히 혼자 쌍둥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엄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엄마한테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우리나라 할머니들 의견을 들어보면, 친손자보다 외손자가 더 예쁘단다. 외손자는 내 딸이 낳은 아이고, 친손자는 남이 낳은 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 특히 외손자를 키우는 할머니들은 외가에서 자라 버릇 나빠졌다는 뒷말 듣기 싫어 더 엄하게 키우는 경향이 있었으나, 헝가리의 이 마리아 V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 손자라고? 난 손자 같은 거 몰라. 애들은 몇이나 되냐? (중략) 암캐들은 한 번에 네댓 마리씩 새끼를 낳잖니. 그중 한두 마리만 건지고, 나머지들은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입만 험한 게 아니라, 도시에서 가져온 아이들 옷도 시장에 내다 팔아먹고, 밭일, 가축 돌보는 일, 우유가공에다가 나무해오고 장작패고, 하여간 쉴 틈을 주지 않고 일을 시켜먹는다. 아이들 특유의 기질로 고생 견디기 훈련을 한답시고 이틀을 굶기로 했다니까 일 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암탉 한 마리를 잡아 노릇노릇하게 구워 아이들 보는 앞에서 한 마리를 홀랑 다 뜯어먹는다. 집구석에 욕실도 없고 따라서 칫솔이나 치약, 비누도 없어 얼굴에 물 한 번 바르려면 얼른 여름이 와서 냇물에 몸을 담글 때뿐인 지독한 노랑이 외할머니. 일찍이 허튼 짓 서슴지 않던 남편을 독살한 전력이 있으나 증거를 찾지 못해 흐지부지 시킨 마녀라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절대 울지 않고, 굽히지도 않으면서 완강한 건강함과 성실로 돈을 벌고, 종이와 연필을 사서 몇 권의 이야기를 쓰는 어린 형제. 수틀리면 자갈을 잔뜩 넣은 양말을 무기로 휘두르고, 심지어 면도칼로 사람의 목을 스윽 그어버리기도 하는 따스함이 제거된 어린 쌍둥이. 그러나 따뜻하지 않다고 해서 비정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으로 해야 하고, 하면 안 될 자신들의 기준이 있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웃을, 사랑 없이, 기꺼이 도와주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진 사람들을 야유하는 인간들을 징벌하기도 하는 이들.
 완전히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 속에 블랙 유머와 엽기 달콤한 스토리를 군데군데 섞어 한 인간의 두 성격, 또는 정말로 두 객체의 상호 의존과 경쟁과 질투 같은 것들을 기묘하게 묘사하는데, 그건 1부 “비밀노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1부의 스토리를 이어가는 2부와 3부에서도 연속적으로 등장하니, 독자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할 듯. 그러나 긴장하지 마시라. 내용이 하도 재미있고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정말로 풍부해 본문만 552쪽의 긴 장편이지만 어느 새 다 읽어치운 당신은 이 독특한 소설을 누구한테 추천할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난 이 책의 내용을 단 5%도 소개하지 않았다. 나머지 95%는 오로지 당신 몫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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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0
세스 노터봄 지음, 김영중 옮김 / 민음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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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인께선 아래 독후감이 불편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들께 미리 사과드립니다.

 


 

 노터봄의 책은 예전부터 읽어봐야지, 읽어봐야지, 하면서도 여간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책 디자인 때문이다. 민음사 세계문학시리즈에 그의 책이 두 권 있는데, 둘 다 표지에 에곤 실레의 그림을 올려놨다. 아시다시피 그가 그린 것들의 공통점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건 그로테스크하다는 거. <의식>의 표지에 쓴 실레의 자화상 역시 벽에다 걸어놓으면 밤에 잠 못 잘 거 같다. 정말 그런 엽기적, 적어도 심히 그로테스크한 내용 아닐까 싶어 선뜻 읽지 않은 것. 노터봄 아니더라도 읽을 책은 얼마든지 많으니까.
 그러나 드디어 읽었다. <의식>. 몇 달 전 같은 제목을 한 레슬리 마몬 실코의 책 <의식>을 읽었는데 그 책은 표지에 영어로 “Ceremony”라 써놓았었다. 그래서 의식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노터봄의 <의식>은 네덜란드 말 “Rituelen"이라고 적혀 있다. 네덜란드 말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말이야. 한글2010에 의식이라 써놓고 한자변환 해보자. 衣食(입고 먹는 거), 意識(뇌에서 벌어지는 화학작용), 儀式(행사를 치루는 법칙). 솔직히 책 읽어보기 전에 난 두 번째 의식, 즉 意識인줄 알았다.
 초장부터 왜 이리 삐딱하냐고? 책의 마지막에서 두 번째 쪽을 보면 “제행무상”이란 단어가 나온다. 제행무상. 불교에선 이걸 “우주의 사물은 늘 돌고 변하여 한 모양으로 머물러 있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는 모양이지만, 책에선 모든 것이 다 허무하다, 무상하다. 이런 뜻으로 사용한 건데, 그냥 놔두지, 왜 괄호를 치고 안에다가 諸行無裳, "모든 행동엔 치마가 없다", 라고 헛소리를 하느냔 말이다. 이거 여성 차별 아냐? 치마가 없으니 모든 행동은 바지 입은 인간들, 즉 남자들의 것이란 뜻이라고 이해하겠다고 주장하면 어쩔 건데. 번역서를 읽으면서 내가 주구장창 주장하는 거. 한국말과 한국의 문자를 제대로 사용해주라. 읽는 내내 조금 불편한 것이 있었으나, 전체적인 라인을 따라가는 데 큰 문제가 없어서, 그리고 눈 침침해 일일이 따따부따하기 피곤해서 그냥 넘어갔지, 할 말 무지 많았다. 그래, 말을 말자.
 왜 열을 내냐 하면, 세스 노터봄의 <의식>이 내가 짐작했던 것과 달리, 매우 마음에 드는 작품이었기 때문. 물론 좀 마음에 들지 않는 것도 있었지만 그건 차차 이야기하자. 이 책의 의식은 儀式ceremony를 말한다. 가톨릭 성당에 가면 사제가 붉은 포도주가 든 금잔을 번쩍 들고 “이것은 내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피의 잔이니, 너희는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라고 하는 걸 들을 수 있고, 사제는 (내가 구경해본 미사에 한해 말하자면)그걸 혼자서만 쪽 들이켜고, 거기다 성수를 좀 부은 다음 휘휘 휘둘러 대충 설거지를 하더니 또 홀랑 마셔버린다(유물론자인 내가 보기에, 아 드러!). 그 전이던가 후던가, 하여튼 흰 밀떡을 성체,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스스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몸이라고 하며 신자들의 입 속에 넣어준다. 물론 나 같은 속인들은 밀떡을 얻어먹을 수 없다. 수개월 동안 도 닦고 공부하고, 국영수 시험 치뤄 합격해야지 자격증이 나오고, 자격증이 나와야 비로소 기독교 동포, 즉 형제, 자매로 불리는데, 형제자매들만 맛도 없는 밀떡을 먹을 수 있다는 거다. 물론 공짜는 아니다. 성당 갈 때마다, 옛말로, ‘연봇돈’을 내야하니 절대적으로 교회가 남는 장사다. 이게 현재 좀 사는 지구인들 사이에 가장 널리 알려진 “의식”이다. 이 의식을 행함으로써 나를 기념하라는 거. 불과 지난 세기까지 이 형제자매에 등록된 인간들의 연맹은 자기들을 제외한 모든 인류를 이교도라 지칭하며 사람취급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형제자매로 만들기 위한다는 핑계를 대고 무차별적으로 식민지를 개척해온 거 아냐? 그러니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의식이며 자격증이냐고. 예수의 피와 살을 먹을 수 있는 흡혈과 식인의식 말이지.
 세스 노터봄은 여기다가 한 번 삽질을 해버린다. 일본의 다도. 다도는 무슨 뜻인지 아시지? 혹시 해서 한문으로 茶道라고 추가한다. 내 의식意識이 참 독특한 것이, 난 다도마저도 정말 개뿔로 아는 인간이다. 사람 몇 명이 풍로, 또는 사모바르를 둘러앉아서 물을 끓이고 별 희한하고 겁나게 비싸고, 하나도 편리하지 않은 기구를 써, 뜨거운 물로 찻잔을 데우고, 데운 물을 따라 버린 다음, 차를 적당한 온도(섭씨 약 80도)의 물에 넣어 우려서 찔끔 따라 마시는 거. 그 몇 잔 마시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이 차 마시는 의식ceremony가 다 끝날 때까지 무릎을 꿇고 한없이 앉아 있어야 하는 생고생. 별 맛도 없는 차 한 잔 마시고 일어나면 다리가 풀려 팽그르르, 지구의 중력이 이렇게 막강한 힘이 있었구나,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의 경험까지. 차 한 잔 마시자고 진짜 별 지랄을 다 한다. 차라는 거, 그거 누가 마셨나? 일본에선 사무라이도 아니고 쇼군과 그의 바로 아래 계급, 칼을 잘 갈았는지 잘 못 갈았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지나가는 백성 아무나 무작위로 한 명 불러놓고 단 칼에 목을 쳐볼 수 있었던 개자식들이나 마셨던 거다. 전체 인구의 99.5%한테 차 마실 여유가 어디 있어, 다 굶어죽어 나가는 판국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눈 밖에 나 할복을 해야 했던 리큐는 자기 수하들과 이 다회茶會(차 한 잔씩 하려고 인간들 모아놓고 별 우습지도 않은 짓을 하는 의식)를 연 다음, “불행의 입술로 더렵혀진 이 잔을 다시는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기를”(258쪽) 바라면서 찻잔을 박살을 낸다.


 (위 인용, 따옴표 안의 문장 보시라. ‘이 잔’에 붙어있는 조사. 이상하지 않으셔? “잔을 다시는 인간이 사용하지 않기를” 또는 “잔이 인간에게 사용되지 않기를”이 맞는 거 아냐(물론 앞의 문장이 더 바람직하지만)? 이렇게 시비걸기 애매한 자잘한 삽질이 책 전체에 숱하게 깔려있음을 참고 바람. 저 위에서 얘기한 '제행무상'은 하다 하다 너무 해서 한 번 예를 든 거 뿐이다. 어쨌든)


 가톨릭 성당에서 신부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성수로 헹궈 홀랑 마시는 예수의 피는 모든 인간의 죄를 덮어쓰고 죽은 예수를 기념하기 위한 부활의 피인 반면에, 일본의 성배 파괴는 죽음의 전조 의식.
 좋다. 여기까지. 아니, 하나 더. 여태까지 말한 의식 말고, 다른 의식. 살과 살이 맞붙는 의식의 장면도 등장해 읽는 재미까지 더해주니 이를 어려운 말로 하면 금상첨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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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08 1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6-08 13: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국은 섹스를 한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지음 / 자작나무 / 1996년 8월
평점 :
절판


 

책은 이렇게 생겼다.

 

 


 

 출판사 ‘자작나무’가 뽑은 것이 거의 확실한 제목, “미국은 섹스를 한다.” 아,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넌 안 하고 사냐? 원 참. 원래 제목이 “Diana o la cazadora solitaria". 당연히 스페인 말을 모르니 구글 번역기 돌렸다. 그랬더니 이렇게 나온다. ”Diana or hunter lonesome". 우리말로 하면 “다이아나 또는 외로운 사냥꾼.” 이걸 뭐라? “미국은 섹스를 한다”? 그래서 책 좀 팔아먹었을까? 저번에도 이 출판사 한 번 얘기한 거 같은데, 마지막으로 책 낸 것이 1997년. 망하지 않았으면 다른 회사로 넘어갔다.
 세 번째 읽은 푸엔테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통해 아주 매력적인 환상소설 <아우라>를 읽고 나서 이런, 이런 작가를 아직도 몰랐다니, 감탄을 하고 곧바로 재미난 스릴러 <의지와 운명>을 거쳐 그의 이름이 머릿속에 콱 박히게 된다. 카를로스 푸엔테스. 만일 푸엔테스가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미국은 섹스를 한다>라는 제목의 소설을 읽기는커녕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다음 페이지로 커서를 옮겼을 것이다. 다행히 패스하지 않고 읽어보니, 이 책도 대박!
 <미국은 섹스를 한다>. 한국어 제목이 너무 후져서 더 쓰기가 싫다. 앞으로 원 제목과 비슷한 <다이아나>라고 부르겠다.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이 책을 쓴 시점이 위키피디어엔 1995년이라고 나온다. 그러면 이이의 나이 만 67세. 와우! 1995년에 1970년을 염두에 두고 썼다는 말이지? <다이아나>는 1969년 12월 31일에서 1970년 1월 1일로 넘어가는 60년대 쫑파티를 무대로 작품을 시작한다. 1960년대. 미국에 국한한 1960년대를 말하자면, 마틴 루터 킹, 케네디, 지미 헨드릭스, 재니스 조플린, 말콤 X를 잡아먹었고, 닉슨과 레이건 같은 잔인한 계부들을 우상화시켜 놓았을 뿐만 아니라 한쪽 발은 달(하늘에 떠 있는 달, 또는 달과 사냥의 여신 디아나Diana?)에다 걸쳐놓고, 다른 발은 베트남의 정글에 걸쳐놓은 상태에서(여기까지는 책의 224쪽 구절을 조금 변경해 인용) 70년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모든 미국인은 위대한 미국이 동남아시아의 키 작고 비쩍 마른, 거기다가 피부색도 황갈색인 인간들이 복닥거리는 가난한 나라 베트남에게, 위대한 미국의 군대가, 유사 이래 처음으로 얻어터질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으며, 그들의 군대의 최전선엔 백인이 아닌 흑인들과 중국인들(혹시 한국군 아니었을까?)을 세웠던 건 미군 작전장교 말고는 세상 누구도 눈치 채지 못했다. 1968년엔 전쟁에 반대하는 학생, 언론인, 시민이 펜타곤을 향해 전진하다가 헌병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피떡이 되기도 했고, 같은 시기의 프랑스, 멕시코, 일본 기타 등등의 나라에서도 젊은이들은 자유의 기치를 높이 든 채 미국의 젊은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얻어터지고 있었다. 물론 멕시코 같은 개발도상국에선 다른 나라들하고 조금 달리 박달나무 육모방망이 대신 기관총 세례를 받기도 했지만. 이런 60년대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밤. 화자 ‘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지만 문학을 위한 기재임을 주장하면서 언제나 새로운 연인을 쫓아다니기에 바쁜 카를로스 푸엔테스가 아내와 함께 자리를 빛내주고 있었는데,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국의 여배우, (스페인 말고 멕시코에 있는)산티아고에서 서부영화를 촬영하고자 날아온 다이아나 소렌이 등장해버리는 거다. 직감적으로 남편새끼가 저년에게 넋이 나갔음을 알아챈 아내가 “너무 늦지 않게 오세요.” 먼저 자리를 피해줌으로 해서 ‘나’는 다이아나에게 접근했고, 다이아나가 묵고 있는 스위트룸을 방문했으며, 샹파뉴 한 잔을 마신 다음, 했다.
 이후 두 달 동안 다이아나와 푸엔테스가 벌이는 엽색행각. 그리고 이 책 <다이아나>를 쓴 1990년대 초반에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으로 책은 구성된다. 이렇게 얘기하니까 간단하겠다고 생각하시지? 천만의 말씀.
 조금 추운 기가 있는 깜깜한 밤. 미국 중서부 아이오와 주 제퍼슨빌의 원형극장에 달과 사냥의 여신 다이아나는 이렇게 속삭였다. 잠깐만 기다려. 응? 그래, 자 내 치마를 들어 올려봐. 아래를 부드럽게 만져줘. 이제 달이 뜨면, 너는 나의 처녀성을 빼앗아가는 거야. 그녀의 첫 경험은 다이아나에게 평생의 그림으로 박혀있으며, 수렵의 여신답게 세상의 많은 남자를 사냥하면서 언제나 처음, 달이 뜨기 시작할 때를 상상한다. 다이아나. 말 그대로 외로운 사냥꾼으로 인생을 살았던 것. 근데 이게 다? 한 번 더, 천만의 말씀. 다이아나가 ‘나’에게 바랐던 것은 작가 또는 교수의 모습이 아니었던 것. 작가 또는 교수는 자신의 법적 남편인 프랑스 사람 이반 그래배트에게서 너무 많이 봐왔고, 그래서 애당초 질린 상태. 그녀는 마치 앙드레 말로 같은 능동적 ‘진영’을 동경해왔던 것이었는데 ‘나’는 모든 것을 문학적 기재로만 관찰할 따름일 뿐이다. 그러니 속궁합이 아무리 좋을지언정 그게 오래 가겠느냔 말이지. 원래 잘 쓴 연애소설치고 관계가 행복하게 끝나는 거 별로 없다. 그러니 독자가 이해해야할 밖에.
 혹자는 주인공 ‘나’의 이름이 작가의 본명인 카를로스 푸엔테스인 것을 보고 이 책이 자기 이야기일 것이라 짐작하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읽기엔 꼭 그렇게만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자기 얘기를 뼈대로 하겠으나 작가는 별로 길지 않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과 미국과 멕시코의 정치상황과, 문학에 관한 “진지한” 논의를 다 풀어내고 있는, 다분히 문화비평적 서술로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비록 책 속에 노골적인 성애 묘사가 몇 군데 있지만 그렇다고 한국어 제목을 <미국은 섹스를 한다>로 뽑는 거 자체가 야만스럽다. 원래 제목이 얼마나 좋으냐 말이지. <다이아나 또는 외로운 사냥꾼>. 책 좋아하시는 분들, 책 좀 읽어보려 하시는 분들에게 요새 말로 강추할 목록 속에 올려야할 재미난 소설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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