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네 명의 미국 출신 흑인 여류작가들을 읽어보았을 따름입니다. 수백년간 피부색 때문에 노예로 살았고, 내전을 거쳐 신분의 해방을 맞았지만 여전히 차별을 당해온 흑인들. 또 그 가운데 여성들. 이들이 쓴 소설이라면 그냥 얼핏 생각해보기만 해도 뭔가 슬픈, 아니면 적어도 아린 공통점이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고요. 왜 비오는 봄날의 휴일에 그들이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조라 닐 허스턴

1891년 생입니다. 1960년에 죽을 때까지 극심한 차별을 당한 세대이며, 모르긴 몰라도 문학행위를 한 1세대 흑인 여성 아닐까 합니다. 만년에 빈민 구제소에서 생을 마감한다고 하니 그리 행복한 일생은 아니었을 거 같습니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

조라 허스턴의 피부색만 밝히지 않으면 굳이 흑인 여성문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질기고 독한 사랑, 주인공 커플 제니와 티 케이크가 만들어가는 맹목적인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살고 사랑하고, 싸우고, 악담하고 다시 사랑하고 또다시 물어 뜯었던 과거의 사랑을 오늘 떠올리는 일, 그것이 행복이라는 우울한 진실. 아름다운 건 자주, 슬프기도 합니다.
토니 모리슨

토니 모리슨한테 조라 닐 허드슨은 큰 이모뻘입니다. 40년 차이가 나니까 그렇게 볼 수 있겠지요. 모리슨 부터 진짜 "흑인"에다가 "여성" 문학이 나오지 않느냐, 라는 의견입니다만 제 의견을 믿지는 마세요. 완전 딜레탕트 수준입니다.
<빌러비드>
제일 유명한 작품으로 읽어보신 분 꽤 많을 겁니다. 저도 사실 이 책을 시작으로 흑인여성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아주 일천한 경험으로 겁없이 이리 글을 쓰고 있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환상소설 적인 면도 보이는데, 그걸 아프리카 취향이라고 하면 안 될까요? 아프리카 흑인 문학에서도 비슷한 묘사가 곧잘 등장하니 말입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탈출에 성공한 노예들의 생존기라고 짧게 얘기해도 좋겠습니다. 심금을 울리더군요.
<재즈>
남자 흑인과 여자 백인 간의 혼혈은, 백인들 입장에서 가장 극렬하게 꺼리는 경우랍니다. 백인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이 아이는 자신이 백인임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다 자란 후 피의 반이 흑인의 것임을 알고는 흑인 아버지를 살해한 생각에 빠지고 맙니다. 이런 거 다른 작가에서도 봤습니다. 필립 로스의 <휴먼 스테인>. 로스는 여기에다가 유대인의 정체성도 덧붙여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짓궂음을 보여주긴 합니다만. 세월이 흘러 제이디 스미스의 <온 뷰티>에선 흑백 혼혈의 두 가정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묘사되니 이 <재즈>와 견주면 뽕나무 밭이 빨리도 망망대해로 변한 느낌입니다(오늘은 제이디 스미스 얘기는 하지 않을 겁니다).그러나 기본적으로 독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이미 죽은 자에 대해서도 질투해야 하는 맹렬한 사랑 이야기.
엘리스 워커

토니 모리슨과 13년 차이가 납니다. 작은 이모뻘인가요? 백인 인권운동가와 결혼해서 유럽으로 이주해 살았다고 합니다. 이이가 쓴 <어머니의 정원>은 사서 읽어보려고 했더니 수필집이더라고요. 전 에세이는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도서관에 기증했습니다.
<컬러 퍼플>
앨리스 워커의 대표작입니다. 스필버그가 영화로 만들어 1982년이던가 하여간 그 즈음에 열린 아카데미 영화상에서, 최우수 작품상 후보로 올랐다가 영광의 준우승을 먹었던 작품입니다. 서간체 소설입니다. 서간체 소설이 생각보다 재미 없는데, 이 책은 재미있습니다. 흑백문제 뿐 아니라, 여성문제에도 초점을 맞추고, 제3 세계들의 소외도 잠깐 언급합니다. 이런 책을 "양서"라고 하는데 아쉽게 품절입니다. 다른 출판사에서라도 빨리 간행해주기 바랍니다.
<그레인지 코플랜드의 세 번째 인생>
1920년대 미국 남부의 흑인 소작농에 관한 책입니다. 말이 해방이지 백 년 전 흑인 소작인 신분이란 건 노예와 거의 다르지 않는 질곡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계급에 키 크고 잘 생긴 흑인이 하나 등장하니 바로 그레인지 코플랜드입니다. 당시 빈부, 남녀, 인종 간 겪을 수 있는 모든 차별과 벽에 대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키 크고 잘 생겼지만 못 배워먹은 인간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1920년대에 말입니다) 마누라 두드려 패고, 바람 피우면서 집구석 기둥뿌리 뽑는 일이었다네요.
글로리아 네일러

1950년 범띠 아줌마네요. 구글 검색해보니까 에휴, 재작년 2016년에 심근경색으로 죽었답니다. 이이의 작품은 딱 하나만 읽어봤을 뿐입니다.아직 얼마든지 활동한 나이인데 참 아깝습니다.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이제 드디어 무대가 미국 남부에서 북동부 공업지대로 옮겼습니다. 그래봤자 흑인들이 살 수 있는 곳은 리처드 라이트의 <미국의 아들>에서도 볼 수 있듯이 도시의 가장 험악한 지역일 뿐입니다. 백인들은 한때는 자유롭게 왕래했던 곳에다 높은 벽을 둘러쳐 흑인들이 드나들지 못하게 지역을 페쇄시켜버린 곳에 브루스터플레이스가 있습니다. 이 극빈의 지역에 모인 여자들을 옴니버스 식으로 그리는 매우 훌륭한 소설입니다. 흑백, 여성, 동성애 등을 소재로 화해 불가능한 폭력에 노출된 흑인 여성들을 아주 리얼하게 그려놓았습니다. 그래서 글로리아 네일러의 이른 죽음이 더욱 안타까울 정도입니다.

이 여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거릿 미첼입니다. <바람과...>에서 착한 남자 주인공 애슐리를 KKK단에 가입시켜 살아있는 흑인의 신체를 절단한 다음에 불에 태워 죽이게 한, 그러니까 KKK단의 테러를 지지할 정도의 노골적인 인종주의자로 위의 네 여인들과 완전히 반대편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사람입니다.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하지만 인종주의자까지 포용하라는 뜻은 아닐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