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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3권 합본 개역판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2014년 12월
평점 :
출판사 “까치”에서 찍은 책. 소싯적에 이 출판사 책 많이 읽었다. 당연히 역사, 철학으로 분류하는 것들로, 무슨 전공을 공부하든 관계없이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 무슨 주문呪文처럼 유행을 해서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막 읽어 치웠는데, 혹자는 당대의 젊은이가 지내온 시절을 “최후의 교양의 시대”라고 과대평가도 해주고 하는 모양이다. 그때 책 좀 읽었다는 젊은이, 지금은 초로의 늙다리들은 출판사 “까치”를 피해갈 수 없었다. 그런 회사에서 찍은 문학책이라 일단 눈이 번쩍 띄었다. 책의 제목도 참 멋있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책 표지를 보시면, 에곤 실레의 1910년 목탄화 <자기를 보는 자: The self-seer>. 표제 때문에 그림 전체가 보이지 않아서 구글 검색해 원래 그림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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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이한 남자를 그린 그림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책 <리고베르토 씨의 비밀노트>의 꼬마 주인공 폰치토의 주장(물론 작가의 감상이겠지만)을 믿으면, 이 그림은 나신의 화가가 거울 속에서 포즈를 취한 자기 모습을 보며 그린 자화상이다. 앞의 남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 뒤의 남자는 자화상을 그리는 실레의 거울 속 형상인 것이다. (근데 이거 맞아? 아 헷갈려!) 거울 속 남자의 왼손(실제로는 실레의 오른손)은 기형적으로 비틀어져 엄지가 감추어져 있으며 거의 뼈만 남았을 정도로 기괴하다.
실레의 이 그림이야말로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의 표지로 완전하게 합당하다.
책에는 한 쌍의 일란성 쌍둥이가 등장한다. 이름은 각 루카스와 칼루스. 영어로 쓰면 Lucas와 Calus. 다 같은 알파벳으로 순서만 달리 이루어진 이름이다. “세 가지 거짓말”이라고 했듯이 작품은 세 가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비밀노트”, 2부 “타인의 증거”, 그리고 3부는 “50년간의 고독”. “비밀노트”의 시기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의 헝가리. 혼자 대도시로 나가 결혼해 쌍둥이를 낳고 기르던 중에 전쟁이 터져 남편은 징집당해 동부전선으로 떠나버리고, 지독한 물자결핍 상황을 맞아 도저히 혼자 쌍둥이 아이를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한 엄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엄마한테 전쟁이 끝날 때까지만 아이들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우리나라 할머니들 의견을 들어보면, 친손자보다 외손자가 더 예쁘단다. 외손자는 내 딸이 낳은 아이고, 친손자는 남이 낳은 아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다. 그래 특히 외손자를 키우는 할머니들은 외가에서 자라 버릇 나빠졌다는 뒷말 듣기 싫어 더 엄하게 키우는 경향이 있었으나, 헝가리의 이 마리아 V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내 손자라고? 난 손자 같은 거 몰라. 애들은 몇이나 되냐? (중략) 암캐들은 한 번에 네댓 마리씩 새끼를 낳잖니. 그중 한두 마리만 건지고, 나머지들은 물에 빠뜨려 죽이고.”
입만 험한 게 아니라, 도시에서 가져온 아이들 옷도 시장에 내다 팔아먹고, 밭일, 가축 돌보는 일, 우유가공에다가 나무해오고 장작패고, 하여간 쉴 틈을 주지 않고 일을 시켜먹는다. 아이들 특유의 기질로 고생 견디기 훈련을 한답시고 이틀을 굶기로 했다니까 일 년 동안 한 번도 하지 않았던, 암탉 한 마리를 잡아 노릇노릇하게 구워 아이들 보는 앞에서 한 마리를 홀랑 다 뜯어먹는다. 집구석에 욕실도 없고 따라서 칫솔이나 치약, 비누도 없어 얼굴에 물 한 번 바르려면 얼른 여름이 와서 냇물에 몸을 담글 때뿐인 지독한 노랑이 외할머니. 일찍이 허튼 짓 서슴지 않던 남편을 독살한 전력이 있으나 증거를 찾지 못해 흐지부지 시킨 마녀라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절대 울지 않고, 굽히지도 않으면서 완강한 건강함과 성실로 돈을 벌고, 종이와 연필을 사서 몇 권의 이야기를 쓰는 어린 형제. 수틀리면 자갈을 잔뜩 넣은 양말을 무기로 휘두르고, 심지어 면도칼로 사람의 목을 스윽 그어버리기도 하는 따스함이 제거된 어린 쌍둥이. 그러나 따뜻하지 않다고 해서 비정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람으로 해야 하고, 하면 안 될 자신들의 기준이 있어 아무도 돌보지 않는 이웃을, 사랑 없이, 기꺼이 도와주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진 사람들을 야유하는 인간들을 징벌하기도 하는 이들.
완전히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 속에 블랙 유머와 엽기 달콤한 스토리를 군데군데 섞어 한 인간의 두 성격, 또는 정말로 두 객체의 상호 의존과 경쟁과 질투 같은 것들을 기묘하게 묘사하는데, 그건 1부 “비밀노트”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1부의 스토리를 이어가는 2부와 3부에서도 연속적으로 등장하니, 독자들은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 할 듯. 그러나 긴장하지 마시라. 내용이 하도 재미있고 작품을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정말로 풍부해 본문만 552쪽의 긴 장편이지만 어느 새 다 읽어치운 당신은 이 독특한 소설을 누구한테 추천할 것인지 궁리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난 이 책의 내용을 단 5%도 소개하지 않았다. 나머지 95%는 오로지 당신 몫이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