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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여자
레몽 장 지음, 김화영 옮김 / 세계사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이 영화 안 봤다. 게을러서. 역자 김화영 씨 유학시절 지도교수였던 레몽 장. 또 이 양반을 사사한 우리나라 대표적 불문학자가 김치수와 최현무. 최현무 선생은 아시지? 소설 쓰는 최윤 씨. 같은 사람이다. 나는 그이가 번역한 뒤 라스를 읽고도 최현무崔賢茂라는 사람이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를 쓰고, 몇 년 후에 <겨울, 아틀란티스>를 발표할 최윤과 같은 인물이란 걸 나중에야 알았다. 하여간 우리나라에서 현대 프랑스 문학을 공부한 많은 사람들이 레몽 장의 도움을 받았다는 거. 그리하여 드디어 한국을 방문해 성황리에 강연회도 하고 그랬던 모양이다. 작품 가운데 영화로 만들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대상도 받고 그랬던 모양이다. 난 안 봤지만.
서른네 살 먹은 마리-콩스탕스라는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유부녀가 주인공이다. 목소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코끝이 조금 굽었기는 해도 입술이 도톰하고 아주 포동포동하며 피부 빛은 아무리 생각해도 깃털보다는 복숭아를 더 연상시키는 편”이고, “목은 어깨 위로 시원하게 솟아나 있고 팔은 가늘고 허리는 날씬하다. 두 개의 젖가슴은 잘 분리되어 있으며 상체의 크기에 비해서 분명히 너무 풍만하다는 인상을 주지만”, “그것이 여러 가지 경우에 있어서 아주 큰 이점이 되고 있다.” 즉 잘 생기고 약간 풍성한 듯싶게 잘 빠진 몸의 소유자이면서, 그러나, “치골과 사타구니에 난 털들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곱슬곱슬하고 지독하게 촘촘히 나 있다”는 치명적 함정을 가지고 있는 여자다. 왜 이게 함정인지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책 사서 읽어보시라. 보시면, 웃다가, 웃다가, 너무 웃어서, 자.빠.진.다.
마리-콩스탕스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 시절 같이 연극 동아리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기도 했던 프랑수아즈의 아이디어로 자신이 갖고 있는 아름답고 훌륭한 목소리를 이용하여 원하는 사람에게 책을 읽어주는 일을 하기로 결심을 하고, 3주에 한 번씩 신문광고를 한다. 그리하여 곧 열네 살이 될 운신이 매우 어려운 장애 소년, 장군의 부인이기도 하고 원래부터 헝가리의 백작부인이었던 여든 살의 노파, 워낙 바빠 함께 놀아줄 시간도 없는 커리어 우먼을 엄마로 둔 꼬맹이 소녀아이, 파티 같은 데 나가 문화적 대화에 한 자리 끼고 싶어 하지만 책 읽을 여유가 없는 상당한 규모의 금속/비금속 광산업체의 사장. 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를 제공하고 돈을 받게 된다. 여기에 끼어드는 인간이 글쎄, 레몽 장 본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 마리-콩스탕스의 대학시절 지도교수 롤랑 소라. 마리-콩스탕스는 소라 교수한테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자 하는 직업에 대해 자문을 구하고, 이어서 어떤 책을 읽어주어야 하는지 자주 방문해서 귀찮게 물어본다. 자상한 노교수는 책 선택을 비롯한 몇 가지 그녀의 고민에 대해 정성껏 답변을 해주고.
그리하여 이 책은 마리-콩스탕스가 각각의 고객들에게 읽어주는 텍스트를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책을 읽는 행위’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끔 만드는데,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책을 읽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지 뭐 더 이상이 있을 수 있나? 이 <책 읽어주는 여자>에서도 나오는 작가들을 나열해보면, 모파상, 졸라, 마르크스, 페렉, 클로드 시몽(이 양반의 한국어 번역본은 한 권도 없다), 사드 등을 들 수 있다. 심지어 졸라의 <작품>을 딱 꼽기도 한다. 책 속에 정말로 19세기까지 있었던 직업으로서 “책 읽어주는 여자”가 등장해 주인공 클로드와 동거하기 때문에. 그래서 소라 교수가 마리-콩스탕스한테 딱 그 이야기를 해준다. 비가 죽죽 내리는 어느 깜깜한 밤, 열차에서 내려 집에 오다가 한 구석에서 시커먼 뭉텅이가 놓여있다. 뭔가 봤더니 젊은 여자. 그래 클로드는 이 여자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 연을 맺으면서 시작하는 <작품>. 모파상, 졸라 등 자연주의 작가들은 소라 교수가 추천한 책이고, 페렉과 시몽은 마리-콩스탕스가 이 사람들은 어때요, 소라 교수한테 자문을 구한 책들이고, 마르크스와 사드는 고객께서 읽어주기 바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남자 고객들은 어떻게 하나같이 성적 판타지 속에 빠져있다. 아직 대가리가 제대로 크지도 못한 소년은 책을 읽어주는 내내 마리-콩스탕스의 무릎만 바라보고 있고, 다리를 조금만 더 벌려 보실래요? 다음에 오실 땐 빤쓰를 입지 않고 오시면 안 될까요? 이 따위 건의사항이나 제출한다. 광업회사 사장은 페렉의 <W>를 읽어줄 때는 침을 흘리며 자고 있더니 읽기를 마치자마자 그냥 눈물을 펑펑 흘리며 아내하고 합의이혼 했고 너무 바빠 여자의 품에 들어본 지 벌써 아홉 달이나 돼서 미치겠어요, 나하고 결혼해주세요, 타령을 하며, 이젠 은퇴해서 부유한 노년을 즐기는 전직 대법관은 고급 장정을 한 고서 <소돔 120일>을 꺼내 남성 동성애 장면을 읽어달라고 근엄하게 지시한다.
반면에 여성고객들은 전부 자식들을 과잉보호하기에 눈알이 벌겋게 충혈된 상태. 아이가 평상 상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완전하게 이성을 잃어버리는 일차원적 광경이거나, 이미 옛 시절의 유물이 된 과거에 함몰되어 있다. 원래 소설에서 정상적인 사람 찾아보기가 쉽지는 않지만 해도 조금 너무 하는 듯. (사실 이 표현도 말이 안 된다. “조금” “너무”하다니 말이야!)
하여간 역경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신의 직업을 유지하고 있는 마리-콩스탕스. 나는, 처음부터 직업이라고 해도 나쁠 건 없는데, 프랑스라는 선진국에서 소득에 대한 세금을 징수하기 위해 딴지를 언제 걸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음에도, 결코 이런 쪽으로는 시도하지 않고 우리의 주인공 마리-콩스탕스가 책을 읽어주는 직업을 때려치우고 다시 실직자가 되지 않을 수 없는 사회적 억제장치로 마감하고 있다.
<불운의 미덕>이라는 사드의 소설 한 권을 읽고 사드는 더 읽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책 읽어주는 여자>를 비롯해 생각보다 많은 작품이 <소돔 120일>을 언급하고 있어서, 별 기대 없이 <소돔 120일>을 읽어보기로 작정했다. 도대체 어떤 책이기에 그리 많은 작가들이 설레발을 푸는지 직접 좀 읽어봐야겠다 싶어서. 좀 그렇긴 그런가 보다. 주문하는데 성인 인증하란다. 거 참 은근히 기대되네 그려.
역자 김화영이 은사의 책을 번역해서 그런지 주례사가 난만하다. 난 그냥 그랬다. 그래서 레몽 장의 소설을 딱 한 권 더 읽어보고 더 읽을지 말지 결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뒤져보니까 <카페 여주인>이란 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