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시집을 읽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오디오를 껐다. 비록 시인이 시 속에서 베토벤과 바흐를 인용했을지언정, 시편들이 내게 준 감정이 흩어지길 바라지 않아서. 마흔 해가 넘도록 서울 토박이로 살다가 느닷없이 하행선을 타고 해남 미황사 아래동네로 거처를 옮긴 시인. 해남엔 내가 가 본 절집이 두 군데 있다. 큰 절 대흥사와 저 꼭대기에 금천이란 금빛 나는 샘이 있다는 달마산 중턱에 다도해가 내려다보이는 작은 절집 미황사. 내 기억 속 미황사는 씩씩하게 근육이 울퉁불퉁한 중들과 갓 낳은 송아지만한 개, 그리고 매끄럽게 깍은 나무 기둥으로 오랜 대웅전 앞에 신나게 불사 중이던 바쁜 절이라는 거. 하긴, 거길 다녀온 지 벌써 20년도 훌쩍 넘어버렸으니 이젠 당시에 짓고 있던 건물들도 오래된 티가 나겠구나. 차 두 대가 비켜 지날 수 없는 좁은 시멘트 도로를 타고 절 아랫동네 이른바 사하촌을 거쳐야 갈 수 있었던 절집이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여태까진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었다가, 김태정의 시집을 읽고는 무척 가보고 싶어진다. 서울 토박이가 해남, 이 미황사 아랫마을로 이사가서 만 마흔여덟 살 되던 해에 짧은 생을 마치고 만다.
 그러나 나는 시를 읽는 독자로서 시인의 죽음에 관해서는 별 의미를 두지 않겠다. 세상에 김태정 혼자 이른 나이에 암에 걸려 죽는 건 아니니까. 다만 시를 읽으면서 예전의 미황사를 다시 깊게 생각하게 만들만큼 시들이 내 마음 속에서 공명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김태정의 시는 가난하고 궁핍하다. 그러나 이런 시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 가난하고 궁핍해서 급기야 궁상맞기까지 한 골짜기로 들어서지 않는다. 이 기묘한 경계선의 이편에 서는 일. 곤고하고 고단한 시인의 삶을 김태정만큼 깔끔하게 노래하는 시인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 나는 시집을 펼치고 맞는 첫 작품부터 예사롭지 않게 읽었다. 감상해보자.




 호마이카상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네가 낡아서가 아니야
 싫증 나서는 더더욱 아니야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해온
 네가 이젠 무서워졌다
 무서워졌다 나의 무표정까지도 거뜬히
 읽어낼 줄 아는 네가,
 반질반질 닳아버린 귀퉁이만큼 노련해진 네가.
 너를 펼쳐놓는 순간부터
 시를 쓸지 책을 읽을지
 아니면 밥을 차려 먹을지
 내 행동을 점칠 줄 아는 네가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시를 쓴다는 것이,
 네 앞에서 거짓말을 못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이십년 전이나 이십년 후나
 변함없이 궁핍한 끼니를 네게 보여야 한다는 것이
 불편해졌다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는 네 앞에서
 시도 되지 못하고 밥도 되지 못하는
 나의 현재가 문득 초라해졌다
 시가 밥을 속이는지
 밥이 시를 속이는지
 죽도 밥도 아닌 세월이 문득 쓸쓸해졌다
 이 초라함이,
 이 쓸쓸함이 무서워졌다
 네 앞에서 발바닥이 되어버린 자존심
 아무래도 이 시시한 자존심 때문에
 너를 버려야 할까보다
 그래 이젠 너를 갈아치울 때가 되었나보다  (전문)



 제목에서부터 시인은 이십년 동안 그 위에서 시도 쓰고, 책도 읽고, 밥도 차려먹었음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러나 다리 하나가 부러져서도 아니고, 술 마신 애인이 발로 걷어차서도 아니고, 이젠 시인이 포마이카 상 앞에서 더 이상 거짓으로 시도 쓰지 못하겠고, 삼시세끼 자신의 초라한 끼니를 구경시키기도 쪽팔려 이젠 스무 해 동안 정든 밥상이자 책상인 너를 버릴 때가 됐다는 거다. 결국 시도 안 되고, 다른 밥벌이도 안 되는 시인의 초라함 또는 자존심이 포마이카 상을 버리는 것으로 결심을 하여, 시는 궁상스러움이란 다모클레스의 검으로부터 비켜서게 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적어도 한 명의 독자인 내게 시를 쓰는 어려움과 시인으로의 생활인이라는 곤고함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한다. 나는 어리석게도 마음 한 구석에서 <조침문弔針文>을 기대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시인의 바람은 소박하다. 삶은 언제나 팍팍한 것이라 애초부터 풍요라는 게 자신의 팔자에 없음은 사십 년에 가까운 체험으로 익숙하지만 그래도 시골 산촌에 자그마한 공간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동백꽃 피는 해우소



 나에게도 집이란 것이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돌아
 무명저고리에 행주치마 같은
 두 칸짜리 해우소
 꼭 고만한 집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방에도 창문이 있다면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그리울 것도 슬플 것도 없는 얼굴로
 버티고 앉아
 저 알 수 없는 바닥의 깊이를 헤아려보기도 하면서
 똥 누는 일, 그 삶의 즐거운 안간힘 다음에
 바라보는 해우소 나무쪽창 같은
 꼭 고만한 나무쪽창이었으면 좋겠다


 나의 마당에 나무가 있다면
 미황사 감로다실 옆의 단풍나무를 지나
 그 아래 감나무를 지나 나지막한 세계를 내려서듯
 김장독 묻어둔 텃밭가를 지나 두칸짜리 해우소
 세상을 두 발로 버티듯 버티고 앉아
 슬픔도 기쁨도 다만
 두 발로 지그시 누르고 버티고 앉아
 똥 누는 일 그 안간힘 뒤에 바라보는 쪽창 너머
 환하게 안겨오는 애기동백꽃,
 꼭 고만한 나무 한그루였으면 좋겠다


 삶의 안간힘 끝에 문득 찾아오는
 환하고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전문)


 
 시인이 해남군 송지하고도 달마산 아래 장춘이라는 지명의 윤씨 할머니댁에서 방을 얻어 살았던 모양이다. (55쪽 <달마의 뒤란>에서 인용) 그래 자주 미황사에 들렀을 테고, 건강이 좋지 않으니 달마산 꼭대기까지는 오르지 못한 거 같다. 아닐 수도 있지만 만일 올랐다면, 시인이 병풍같이 생긴 바위산에 올라 보길도를 비롯한 올망졸망한 남해의 그림 같은 시를 한 수도 쓰지 않았을 리가 없었으리라. 미황사 경내를 산보삼아 다니던 시인은 절 근처 모르는 나무도 없고, 풀도 없으며 들꽃 이름도 다 알았을 터. 그렇게 다니다 해우소에 들러 삶의 즐거운 안간힘을 동반한 똥을 누면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고 이 절집의 소박한 화장실 같은 집이라면 아주 딱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 시 속에서는 더 이상 시를 쓰는 어려움이나 시를 써서 먹고 사는 생활의 곤고함은 보이지 않는다. 병이 깊어갔으리라. 그러나 조금의 엄살도 없다. 이른바 요새 몇몇 시인들이 주장하는 ‘병시病詩’라는 집단하고는 고급지게 다르다. 소박하게 그냥 쓸쓸한 꽃바구니 같은 자그마한 집 하나가 산골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 병이 깊어 오히려 마음도 깊어가는 한 인간이 나를 울리고 만다.
 시는 삶이어야 하리라. 오직 하나,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독특하고 사치스러운 고통을 최대한의 은유를 써서 끄집어내는 일만 시가 되는 건 아니다. 포마이카 상을 이젠 버리고 싶은 일, 절집의 해우소에 두 다리로 지구를 버티고 앉아 좁은 공간을 바라보는 것도 매우 훌륭한 시의 제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모범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3부는 시인이 서울살이를 하면서 쓴 시를 모아놓았는데 앞쪽의 시보다는 울림이 덜하다. 좋은 시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으면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을 기억하시라.




* 언제나처럼 시집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시는 인용하지 않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쟁탈전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에밀 졸라 지음, 조성애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이 총 스무 편의 루공-마카르 총서 가운데 두 번째 작품이고, 내가 읽은 일곱 번째 총서이다. 따라서 루공 가문과 마카르 가문에 어떤 특징이 있는지 이젠 대강 짐작을 할 수 있었으므로, 시리즈에서 루공 가의 비조鼻祖 피에르 루공의 셋째 아들 아리스티드가 무대 전면에 등장하여, 드디어 이제 막 개화하려 하는 프랑스의 태평성대 벨에포크(Belle Époque) 시대의 시발점, 1850년대 후반부터 1860년대 초반까지의 파리를 무대로, 기질적으로 유전병적인 집착 혹은 광기가 어떻게 발현될까 애초부터 집중적으로 관심을 두고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아리스티드 루공은 1851년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12월 2일 쿠데타 소식을 듣자마자, 1852년 초에 남부 플라상 지역에서 단박에 파리로 올라왔다. 아들 막심은 할머니 무릎 아래에 두기로 하고, 허약체질의 아내와 딸 하나만 데리고 상경을 하면서, 마치 대한민국의 1970년대 중반부터 80년대까지 서울 강남 지역에서 광풍을 일으켰던 것과 비슷한, 부동산 투기의 현장 파리에 뛰어든다. 아리스티드가 갖고 있는 유전병적인 기질은 돈에 대한 집착 또는 광증이었던 거다. 아리스티드가 그냥 맨몸으로 상경했느냐하면 그건 아니어서, 쿠데타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었으며 지금도 은밀한 세력을 주도하며 황제 나폴레옹 3세를 보필하고 있는(소설이 진행하며 장관자리까지 올라가는) 친형 위젠이, 적어도 자기한테 한 자리는 얻어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상과 달리 형은 동생에게 시청 말단 공무원자리를 겨우 하나 얻어주었는데, 이 자리가 보통이 아닌 것이, 위에서 얘기한대로 본격적인 벨에포크 시대를 열기 위해 첫 번째 사업으로 벌이고자 하는 도시 재개발에 관한 비싼 고급 정보를 누구보다 먼저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리였던 거다. 처음부터 동생의 집착 또는 광기를 알고 있던 위젠 형은 나중에라도 동생의 광기와 자신이 엮일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동생의 성姓을 ‘루공’에서 제수(동생의 아내)의 성인 ‘시카르도’ 비슷하게 ‘사카르’로 바꿔버린다. 그리하여 책에선 이 인간의 다섯 글자 이름 ‘아리스티드’ 대신 주로 세 글자 성인 ‘사카르’로 표기하고 있다.
 수년 동안 시청에서 파리 재개발 사업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동시에 인맥을 키우기 위해 시청 곳곳의 장소와 인물들을 샅샅이 훑어가던 사카르가, 이제 드디어 큰 건을 발견한 찰나, 아뿔싸, 부동산 투기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 종자돈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가능하단 걸 뼈저리게 실감하고야 만다. 조금의 종자돈을 형도 안 빌려줘, 자기 보스인 도시개발과장도 안 빌려줘, 마누라 형제들도 안 빌려줘, 일찌감치 파리에 나와 작은 가게를 하고 있던 여동생 시도니 부인도 모른 척, 정말 마중물만 조금 있으면 펌프에서 우물물 쏟아지듯 하늘에서 금화, 은화가 우수수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이는데, 그걸 못하는 거다. 아, 안타까워. 원래 그런 거다. 없이 사는 인간들은 기회가 눈에 번히 보여도 그걸 확 잡아채지 못하는 거.
 이때 혜성같이 등장해 예상치 못했던 도움을 주는 한 여인이 있으니 바로 여동생 시도니 부인. 원래부터 파리의 대표적 마당발이었던 여사가 어디서 뉴스 하나를 물고 온다. 파리의 옛 부유층이 살던, 아 그게 파리 중심가의 무슨 섬이더라, 시테 섬이던가, 하여간 거기서 살던 공화파 법조인, 그러니까 시대적 배경이었던 나폴레옹 3세 시절엔 골수 야당이어서 거의 두문불출했던 인물한테 딸이 둘 있는데, 그중에서 첫째 따님이 수녀들이 운영하는 기숙학교에 계속 다니다가 학업을 마치고 이제 집에 돌아와야 하는 순간, 길을 가다가 들판에서 어떤 부잣집 유부남한테 겁탈을 당하고 임신을 한 채 집에 돌아오는 불행한 사건이 벌어졌다. 아버지는 집안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기꺼이 큰딸 르네를 죽이려고 작정을 했는데 이를 불쌍히 여긴 엘리자벳 고모와, 사카르의 누이동생이자 파리의 왕발 시도니 부인이 연결이 되어, 몸이 약했던 마누라가 죽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사카르가 르네 배 속에 있는 아이의 (거짓)생부이니 딸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말고, 사카르가 마침 홀아비 신세라 둘을 결혼시키자고 설득, 정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돈벼락을 맞게 된다. 르네가 지참금으로 수십만 프랑을 가져오는 동시에, 이를 불쌍히 여긴 엘리자벳 고모 역시 비싼 땅을 상속해주는 거였다. 세상 참 불공평한 것이, 어찌하여 나한텐 이런 행운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 것인지, 참. 이쯤에서 한숨 한 번 쉬어도 큰 까탈은 아닐 터, 제위의 양해를 바람.
 대한민국 서울의 강남 개발과 아주 유사하게, 이제 전면적으로 파리를 때려 부수고 다시 건설하는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질 판. 고급 정보와 정신 못 차릴 정도의 자금을 확보한 사카르는, 정신 못 차릴 만한 자금을 정신 못 차릴 만큼 불리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불과 몇 년 만에 파리 중심가에 대규모 저택을 무지 화려하게 짓고, 그러나 문화적 수준은 아직 남프랑스 플라상 촌놈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해 흔하지만 나중에 천문학적 재산이 될 그림 한 장 벽에 걸지 못하면서, 그저 국가를 상대로 국민들 세금 축내기에 혈안이 된다. 문제는 이게 병적이라는 거. 돈이란 건 쓰자고 버는 거다. 그 정도는 아무리 광적으로 돈 벌기에 눈알이 벌건 사카르도 아는 거라서, 젊고 아름다운 아내 르네의 무한정한 사치와 낭비를 눈감아주는 정도가 아니라 기꺼이 거금을 오직 하나, 아내의 기분전환을 위해 가져다 바친다. 결혼은 했지만 침대 생활은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도 맞지 않아 거의 관계가 없는 상태여서 각자가 서로 알아서 즐기기로 암묵적으로 인정한 당대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부르주아 계급의 관례도 칼 같이 지킨다. 심지어 파산한 정부의 다이아몬드를 거액을 주고 사서 그걸 아내에게 선물할 정도. 당시 파리 부르주아들은 이걸 당연시하고 칭찬까지 쏟아 붓는다. 한 여자를 살리는 휴머니즘과, 그리 쉽게 거금을 쓸 수 있는 재력에 반해버리는 거다. 우와, 우리 집 같으면 너 죽고 나 죽는다. 하긴, 그래서 나는 절대 부자가 못되는 것이겠지만.
 그리하여 이 부부가 평생 잘 먹고 잘 살면 그게 어디 소설이겠는가. 소설의 가장 중요한 갈등 가운데 하나를 아직 본격적으로 소개하지 않았다. 파리에 올 때 할머니한테 맡겨놓은 아들 막심. 막심이 어느 새 열 살이 됐고, 이제 돈도 벌만큼 벌었으니 막심을 파리로 데려오는데, 지금이야 열 살이지만, 얘가 언제나 열 살인 줄 알아? 조금 있으면 머리통 커지고, 머리통 커지는 거만큼 (키 말고)다른 것도 커지고, 어느 날부터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자신의 유전자를 살포하기 위해 별 짓을 다 할 거 아닌가 말이다. 아니나 달라, 열일곱 살을 먹자마자 계모 르네의 몸종의 배 속에 아이 하나를 담아 놓는다. 르네는 점잖게 몸종에게 연수 1,200 프랑의 재산과 함께 고향 앞으로 보내버리는데, 점잖기는 했지만 참 인색했다, 인색했어. 자신은 의상실 주인한테 15만 프랑 이상씩 빚을 지면서 명색이 손자를 밴 하녀에게 연수 1,200 프랑, 월 100 프랑이 말이 돼? 그렇다고 막심과 계모 르네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천만의 말씀. 나쁘기는커녕 오히려 너무 좋아서 탈이다. 여덟 살 차이의 아들과 계모. 어때 그림이 그려지시나? 뭐라? 페드르? 그렇다. 작 중에서 막심과 르네는 <페드르> 연극을 보는 장면도 나오긴 한다. 하지만 문제는 루공 가문 특유의 기형적 신체조건. 졸라는 막심에 대하여 이렇게 썼다.
 “루공의 피가 그 안에서 정제되어 미묘하고 사악하게 나타났다. 너무 어린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아버지의 격렬한 욕망과 어머니의 나약함과 체념이 이상하게 결합되고 상충되어 나타난 기형적 산물이 그(막심)였다. 그 안에서 부모의 결점들이 서로 맞물리며 더 나쁜 결과를 낳았다.” (183쪽)
 궁금하시지? 여러 번 얘기 했던 바와 같이 졸라 작품의 특징은 “질주”다. 하나는 이야기 했다. 남자 주인공 사카르의 돈에 대한, 오직 돈을 버는 행위를 향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질주. 사카르의 탐욕적 광기의 질주에 대해 졸라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쇠처럼 거무스름한 사카르가 집게 같이 뾰족한 웃음을 띠고 가느다란 다리로 비웃으며 서 있었다. 이 남자는 욕망 그 자체였다. 십 년 내내 그녀(르네)는 그가 용광로 속에서, 붉게 타오르는 금속 속에서, 자기 자신도 깔릴지 모를 위험 속에서 불에 달아오른 몸으로 헐떡이며 자기 팔보다 스무 배나 더 무거운 망치들을 들고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아 왔다.” (439쪽)
 그리고 또 하나는, 안 알려드림.
 위에서 막심 사카르(루공)의 성격을 인용한 이유는, 막심이 진짜 결혼을 하는데, 상대는 지참금으로 3백만 프랑을 가져오기로 계약한 하원의원 드 마뢰이으 씨의 딸 루이자이며, 루이자에 대한 묘사가 아래와 같았기 때문이다.
 “기형적 몸에, 추하면서도 아름다운 그녀는 젊어서 죽을 몸이었다. 일종의 폐병이 그녀를 은밀히 파 들어가고 있었고 그녀의 지나친 쾌활성이나 교태 있는 매력도 그 때문이었다. 197쪽  어머니 쪽을 물려받은 루이즈는 부족한 피, 비틀린 수족, 손상된 뇌, 이미 추잡한 생활로 가득 찬 기억들과 함께 세상에 나왔다.” (198쪽)
 그래서 혹시, 막심과 루이자가 결혼을 해서 사이에 나온 아이가 정말로 혹시 <목로주점>을 만들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는데, 그건 아닌 거 같다. 하여간 이 루공 마카르 총서는 이렇듯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조금씩 관계를 알아채거나 오해하는 즐거움도 아주 독특하다. 이 책 <쟁탈전:La Curée>의 제목을 또 다른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하나인 <돈>을 번역한 유기환은 <이전투구> 즉 진흙탕 개싸움이라고 한 바 있고 <돈>의 주인공이 이 <쟁탈전>의 주인공인 사카르인 것으로 미루어, 총서 가운데 두 번째로 쓴 작품이 열여덟 번째 작품으로 연결될 것이 틀림없으리란 것만 얘기한다. 즉, 뒤끝이 있는 소설이란 뜻?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3인당 이야기 - 페라귀스.랑제 공작부인.황금 눈의 여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1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830년대 초반에 쓴 중편소설 세 편을 책 한 권에 담았다. 문학동네가 오랜만에 중편 세 편을 한 권에 담는 기특한 짓을 했다.
 발자크라면 20대 청춘시절에 인쇄, 출판, 활자주조 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벌기는커녕 6만 프랑의 빚을 떠안기만 했단다. 6만 프랑의 돈은 지금 가치로 약 2억 원가량이라고 하는데(역자 해설 인용), 말이 2억 원이지, 지금처럼 돈과 재화가 넘쳐나는 시기와 19세기 초반의 2억 원이라는 건 화폐의 가치 자체가 다르다. 마치 도시 번화가에서 백만 원과 산골마을에서의 백만 원의 차이처럼. 6만 프랑은 사업실패에 따른 것일 뿐, 이것 포함해서 그의 채무는 당대 파리 인텔리들에 어울리는 사치를 위한 비용까지 합해 12만 5천 프랑에 달했다고 나이 스물아홉 살 시절, 1828년에 쓴 편지에 나와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인용). 발자크가 빚을 갚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열라 소설을 쓰는 일 말고는 없었다. 그리하여 하루에 최소 9시간, 심하면 14시간, 이렇게 하루 평균 12시간 동안 쓰고 또 쓰고, 쓰다가 또 쓸 수밖에 없었는데, 그래서 사람이 제대로 살겠어? 발자크는 18년간 이메일서신을 주고받아온 한스 백작부인과 드디어 결혼한 1850년 3월, 불과 다섯 달의 신혼생활을 끝내고 쉰한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다.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이것저것을 뒤져보니, 발자크의 이른 죽음을 많은 매체에서는 과도한 집필로 인한 건강악화로 보고 있어서 나도 이렇게 쓰는 것이지 뭐 내가 아는 게 있나.
 자의건 타의건 간에 빚을 청산하기 위한 과도한 노동으로써의 집필을 한 결과, “저녁밥을 주둥이에 처넣고 여섯 시에 잤다가 자정에 일어나 커피를 마시고 정오까지 일”을 해, 그것도 20년 동안, 사람은 골로 가고 대신 숱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다. 지금부터 짐작인 바, 발자크가 많은 작품을 써내기 위해서 보다 효과적으로 고단한 소설 쓰는 일을 만들기 위해 일정한 틀을 준비한 거 아닐까? 이른바 “풍속”, “철학” 그리고 “분석.”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쓴 산더미 같은 결과물을 보며 그걸 크게 이 세 가지 틀에 입각해 창작해낸 “인생극” 또는 “인간 희극”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시라.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다. 겨우 예닐곱 작품만 읽어본 하찮은 독자의 짐작이다. 어디 가서 이거 인용해 말 하지 마시라. 개망신당할 수 있다.
 《13인당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세 중편 <페라귀스>, <랑제 공작부인>, <황금 눈의 여인>은 당연히 “풍속”의 범위 안에 들어야 할 것. 발자크를 칭하기를 사실주의의 대가라고 한다. 이 세 작품은 사실주의자가 쓴 당대 풍속, 특히 파리와 왕정복고 시기의 귀족, 부르주아 등을 아주 세밀하고 다양하게 묘사한다. 귀족의 시대가 저물고 부르주아가 본격적으로 대두한 19세기 초반. 멸망한 나폴레옹의 광휘를 아직도 가슴에 품고 있는 파리의 신귀족 등등. 13인당이란? 작가가 만들어낸 비밀결사다. 마치 프리메이슨이나 카르보나리 같은. 그러나 기꺼이 살인 등 범죄를 저지르고, 당원들의 개인적 욕망과 목적만을 위해 행위하는 경제, 권력적으로 힘 있는 악당들의 비밀조직. 그렇다고 이들을 공작, 주교, 법원장, 징세청부인 등으로 여길 필요는 없다. 다만 당원인 주인공의 문제를 13인당의 적극적 협조 하에 해결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스토리라야 베리즈모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은 잔혹 애정, 치정극 수준이다. 작품에서의 문제해결 방법에 당시 계급 간의 한계와 새로운 방법 및 승패가 은유되어 있다고 해설에서 열라 설명하고 있으나 그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면 될 것.
 문제는, 지금부터 180년 전의 파리와 파리 시민들의 계급적 이동관계 같은 것이 “지극히” 사실적으로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는데, 그걸 동아시아의 일반 독자가 두 세기 전의 파리 골목이나 광장, 길거리, 건물 이름을 읽으며, 아하 그땐 이 거리를 그렇게 불렀으며 분위기는 어떠했구나, 이렇게 공감하기 쉽지 않다는 거. 한국의 작가가 18세기의 한양을 무대로 운종가와 진고개, 시구문, 청계천과 그곳에서 살던 딸깍발이, 상민, 깍쟁이 등을 묘사한 세밀한 기술을 읽으면서 그것들에 흥미를 느끼는 프랑스 사람이 별로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는 바, 세 편의 작품 다 같이, 앞부분의 상당량을 차지하는 당대 풍속의 사실주의적 긴 묘사가, 분명하게 기념할만한 성과인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지루함을 느껴야 했다. 파리의 한 길거리가 당시엔 뒤라 가街라고 불렸다가, 이후에 랑베르 가로 명명되었으며,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지금까지 아스시 가로 불리고 있는 게 뭐 어떤데?
 그럼 이 책이 지루할까? 아니다. 재미있다. 파리 시내와 계급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서 지루함을 조금 느낄 수 있을 뿐이지, 사실 인간들의 이야기 가운데 제일 재미있는 건 애정과 치정 이야기 아닌가. 거기다가 적당하게 잔혹극까지 섞여 있으니 말 해 뭐하나. 앞에서 스토리 라인이 베리즈모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했다. 이런 의견은 21세기 인간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것일 뿐, <13인당 이야기>는 19세기 초반 작품이고, 베리즈모는 20세기 초반의 예술 형태. 그리고 베리즈모가 화끈하게 재미있음을 누가 부정하겠느냔 말이지. 그저 지금 읽으면 좀 촌스러운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는 것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히칸족의 최후 열린책들 세계문학 203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임스 쿠퍼는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미국 작가 가운데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근데 왜 여태 몰랐을까. 작년에 이이가 쓴 <개척자들>을, 우습게도, 무척 흥미롭고 한편으론 대단히 지루하게 읽은 경험으로, 다른 건 몰라도 진짜 초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일 거란 생각은 했다. 미국 동부지역에 광활하게 뻗어있던 원시림. 그리고 개척지. 백인 미국인이지만 개척지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인디언과 함께 그들의 정서를 공유하며 사는, 가죽 각반脚絆을 찬 명사수 내티 범포를 주인공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겨울 광경 묘사가 특별하게 기억나는 책이다. 사실은 그때 제임스 쿠퍼의 책을 한 권 더 읽기로 하고 이 <모히칸족의 최후>를 보관함에 담아 놓았다가 이제야 읽은 거다. 책을 읽으면서 번쩍 눈에 띄는 이름, 내티 범포. <개척자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죽 각반을 찬 키 큰 명사수 이름. 아, 맞아, 맞아. 가죽 각반을 영어로 하면 ‘레더 스타킹.’
 제임스 쿠퍼가 쓴 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 바로 “레더 스타킹 시리즈”라고 불리는 여섯 권의 연작 장편이라고 한다. 각 권은 내티 범포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별개의 스토리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모히칸족의 최후>를 읽으면서 분명히 이 책을 <개척자들>보다 먼저 썼을 것이라 짐작했다. 읽는 도중에 그게 궁금해서 (근데 그게 왜 궁금했지? 나도 나를 모르겠어!) 책 뒤편의 해설을 보니까, 아니란다. <개척자들>이 시리즈의 첫 번째고 이 책이 두 번째란다. 왜 이렇게 생각했느냐 하면, <개척자들>에선, 이거 얘기하면 <개척자들> 읽으실 분한테는 스포일러지만, 내티 범포와 비밀리에 함께 사는 인물이 모히칸족의 마지막 왕 비슷한 검은 뱀, ‘칭가치국’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선 칭가치국이 늙어 결국엔 숨을 거두는 장면이 나오는 반면, <모히칸족의 최후>에선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웬만한 젊은 인디언하고 맞짱을 떠도 절대 꿀리지 않을 완력을 보유한 건강한 상태로 등장하니 내 착각도 뭐 정당하다할 만하겠지.
 미국 판 무협지다. 선한 인디언 부자와 가죽 각반의 사나이 내티 범포. 여기서 범포는 일명 ‘라 롱그 카라빈’ 불어로 ‘긴 카라빈 총’ 즉 ‘장총’으로 불린다. 인디언 부자는 위에서 말한 칭가치국과 그의 아들 펄펄 뛰는 사슴이란 뜻의 ‘웅카스’. 이들이 선한 집단, 소위 ‘우리 편’이다. ‘너네 편’은 프랑스 사령관인 용감한 후작과 군대, 그리고 밍고라고 불리는 인디언 집단과 그들의 우두머리 ‘마구아’. 즉, 아직 미국은 독립하지 않은 18세기 중반으로 밀림 속에서 프랑스와 영국, 그들을 지지하는 인디언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시절. 수적으로 열세에 처한 영국군 진지에 사령관으로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배 다른 자매가 젊은 영국군 소령의 보호아래 우리 편인 줄 알았던 마구아를 길잡이 삼아 출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마구아는 영국군 사령관인 대령의 큰딸에 흑심을 품고 이들을 납치하려 호시탐탐 노리다가, 성공한다. 여기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영국군에게 호감을 느끼고 영국 왕에게 충성을 하기로 결정한 백인이자 미국인 장총, 내티 범포와 그의 인디언 친구들.
 이 정도면 그림이 그려지시지? 우여곡절 끝에 두 아름다운 아가씨를 구출하고, 비록 백마는 타고 오지 못했지만 가난한 젊은 소령은 아가씨와 결혼에 성공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날이면 날마다 바가지 득득 긁히는 거. 근데 정말 그럴까? 그렇게 뻔한 도식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그리 많은 후세의 작가들이 <모히칸족의 최후>를 자주 언급하지 않았을 것. 당연하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더 이상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개척자들>처럼 지루하지 않다. 그 책은 문학과지성사의 큰 판형과 조밀한 편집으로 해설 포함해 750쪽의 위용을 자랑하면서도 인색하게도 400쪽을 넘길 수 있는 인내심과 질긴 엉덩이 가죽을 가진 자들에게만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반면에 <모히칸족의 최후>는 처음부터 어려움 없이 읽히는 가독성을 지녔다. 역시 제임스 쿠퍼가 쓴 이 책의 미덕은 무협지와 비견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아메리카 인디언 특유의 자연친화적 삶의 방식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외경과 관찰방법을 감상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동부 미국의 광활하고 빽빽한 삼림의 풍광도.
 고백하노니, 미국문학을 전공하는 분이 이 고백을 들으면 대경실색하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지만, 나는 책의 주인공이자 여섯 권으로 이루어진 레더 스타킹이며 라 롱그 카라빈, 장총이기도 한 내티 범포를 보면서, 정말로 엉뚱하게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 나오는, 확고한 신념의 주인공 에스터의 진짜 남편 ‘칠링워스’가 떠올랐던 거다. 물론 내티 범포는 평생 독신獨身이자 독신瀆神으로 일관한 삶을 살지만, 만일 그가 어느 결에 혼인이란 걸 했다면, 당연히 칠링워스처럼 악당은 아니겠으나, 아내로 하여금 가슴팍에 금실로 “A”자 수를 놓은 주홍빛 천을 달고 다니게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 아니다. 범포 같으면 비록 아내 혼자 날마다 독수공방하게 내버려둘지언정 그렇게까지 아내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지는 않았겠지. 하여간 칠링워스의 삶의 방법이 숲 속의 사나이 래더 스타킹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 이거지 뭐. (내티 범포, 혼자 살기 잘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돔의 120일 동서문화사 월드북 201
사드 지음, 김문운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소돔 120일>을 읽었다. <미덕의 불운>을 읽고 뭐 이런 작자가 다 있는가 싶어서 다시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려 했다가, 많은 책에서 <소돔 120일>을 인용하거나, 언급을 해서, 특히 레몽 장이 쓴 <책 읽어주는 여자>을 보다가 눈길을 끈 것이 이 책을 읽게 된 경위다. 서문과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까지는 완성된 ‘작품’. 2부부터 4부까지는 미완성 스케치라고 해야 할 터. 전해오는 이야기 그대로다. 완전 변태 성욕과 인류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부도덕한 모든 형태의 죄악들이 선천적으로 미덕을 보유한 소년, 소녀들을 학대하는 내용이다. 71쪽 까지 이어지는 머리글에서부터 이런 부도덕과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엽기 잔혹한 내용이 준비되고 있다.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루이 14세 집권 말기라고 하니까, 18세기 초반의 프랑스를 이끌어가는 집권층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50세의 블랑지스 공작과 공작의 친동생인 46세의 주교. 환갑을 갓 넘은 법원장 퀴르발과 53세 먹은 공작의 학교 동창이자 징세청부인 뒤르세가 이들. 징세청부인徵稅請負人에 대하여 좀 알아보자. 국가에서 특정인에게 도급을 주어 세금을 걷게 했는데, 도급을 받은 사람을 징세청부인이라고 하고, 대개 이런 인간들은 마땅하게 징세할 금액보다 훨씬 더 많이 긁어모아 차액을 착복해 거액을 거머쥘 수 있었다고 한다. 오노레 드 발자크의 <인생의 첫출발>에서 보면 오스카르라고 하는 인물이 전쟁에 나가 한 팔을 잃고 돌아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고 징세청부인이 되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당연히 이 징세청부인이라는 이름의 세리는 대부분 악당이거나 조금씩 악당에서 악마로 진화하는 것들이 보통이라 시민들의 원성을 대단히 많이 사고 있었다고 한다.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국민을, 얼마나 악질적으로 착취를 했겠는가. 실제로, 질량불변의 법칙을 발견한 화학자 라브와지에 아시지? 이 양반도 젊은 시절에 잠깐 징세청부인을 했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프랑스 혁명 당시 단두대에서 대가리가 날아가 버렸을 정도다.
 작중 시대는 부르봉 왕가의 루이 14세 집권 말기. 당시 공작, 주교, 법원장, 징세청부인이라면 가히 골고루 시민들의 등골을 쪽쪽 빼먹던 인물들 가운데 대표선수들만 고른 것. 사드 후작이라고 흔히들 얘기하는 도나티앵 알퐁스 프랑수아는 당대(또는 조금 선대)에 시민들과 직접 대면하여 그들의 고혈을 짜냈던 계급들을 무대의 중심에 놓고 21세기에도 상상하기 힘든 악덕과 불의를 쉽게 저지르는 모습을 그려냈던 거였다. 내용이 얼마나 지저분한가를 보이려면 불유쾌하게 본문의 특정 장면을 인용할 필요도 없다. 그냥 머리글에 나오는 이들의 가족관계만 요약하면 충분하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철저히 인색한” 구두쇠, “거짓말쟁이에 욕심쟁이, 주정뱅이, 남색에 근친상간자, 살인자, 방화자, 도적일 뿐만 아니라, 그러한 수많은 악덕을 보상할 수 있는 미덕은 하나도 지니지 않은 채 어떠한 미덕도 존경하기는커녕 혐오하고 있”는 짐승들로(18쪽) 막대한 재산을 남긴 아버지의 돈을 마음대로 쓰고 싶은 욕망을 이기지 못해 친어머니를 독살하고 모친살해를 공모한 여동생마저 살해하는 것도 모자라, 친딸과 근친상간의 관계까지 맺는 정도는 그냥 일반 상식인 말종들이다.
 이 네 짐승들은 역시 아이까지 생산해준 착한 아내들마저 죽게 만들어 홀아비 신세인데, 서로 그들의 딸들에게 관심이 있어 돌림 사돈을 맺게 이른다. 공작의 큰딸은 법원장의 아내가 되고, 법원장의 딸은 징세청부인의 아내가 되고, 징세청부인의 딸은 공작의 아내가 되고, 사실은 주교의 핏줄이지만 주교라는 직업 때문에 친형인 공작의 호적상 둘째딸에 올린 소녀는 네 명의 공동 아내가 되는데, 이미 모든 부녀가 근친상간의 죄를 상습적으로 지고 있어서 언제든지 합의하지 않고 누구의 아내든지 공유할 수 있도록 약속을 했다. 이 정도면 <소돔의 120일>의 성격은 능히 짐작하실 수 있을 터. 근데, 천만의 말씀.
 나는 <소돔의 120일>을 읽으면서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을 떠올렸다. 아시다시피 <데카메론>은 열 명의 귀족 남녀가 피렌체의 페스트를 피해 시골로 요양을 가서 열흘 동안 소풍을 가 각자 한 가지씩 재미난 얘기를 하는 내용. 14세기 중반에 피렌체 귀족들은 당시 도덕수준에 비추어 대단히 야하고 음란한 얘기까지 서슴없이 이야기하고, 박수치고 즐거워한다. 그 후 434년이 지난 1785년, 뱅상 감옥에는 독방 6호실에는 성적으로 편집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45세 사드의 후작이 몇 년 째 외곬으로 앉아 폭 12cm, 길이 12미터의 두루마리에 촘촘하고 작은 글씨로 단 37일 동안 <소돔의 120일> 머리말과 1부를 완성하고 있었는데, 위에서 얘기한 네 명의 악당이 12세에서 15세까지 (특히 엉덩이가)아름다운 여덟 명의 소녀와 12세에서 15세까지 (역시 특별하게 엉덩이가)아름다운 여덟 명의 소년, 하녀 네 명, 다른 것은 아무 조건 없이 페니스가 거대한 네 명의 마장馬藏(남색용 사나이)과 이들이 거느린 네 명의 졸개 마장, 악당의 아내들, 여덟 명의 요리사, 그리고 네 명의 여자 이야기꾼을 대동해 알프스 산맥 저 오지 가운데서도 오지, 아무도 찾지 않아 새가 아니라면 도달할 수 없는 벽지에 지은 저택에 도착하여, 이야기꾼이 날마다 다섯 편의 음란하고, 더럽고, 폭력적이며 무엇보다 비인간적인 내용의 짧은 이야기를 각자 30일씩, 총 120일 동안 600가지 악덕에 관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악당들은, 이야기를 마치고 맛있게 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데카메론>의 발랄한 귀족들과는 달리 이야기에 나오는 것을 흉내 내 변태적이고, 더럽고, 부도덕한 변태성욕을 채우기에 여념이 없으며, 읽을 필요 없는 2부~4부의 스케치에 의하면 가학성향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사드가 <데카메론>을 염두에 두었다고, 아니면 조금은 염두에 두고 썼을 것이라고 짐작하는데, 이 짐작이 확신에까지 이르지 못하는 건, 그의 다른 작품 <미덕의 불운>에서도 산골 외딴집에서 한 정숙하지만 불운한 미덕의 아가씨가 작살나는 장면, 역시 외진 수도원에서 많은 수도사들로부터 능욕당하는 장면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럼 왜 사드는 옥중에서 이따위 글을 썼을까. 혁명 몇 년 전이라 아직 프랑스 가톨릭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한 사회 분위기에서. 흔히들 감옥에서 쓰는 작품은 어딘지 모르게 좀 사색적이고 철학적이며 가끔 불세출의 걸작까지 나오는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글쎄 그게 정말 그럴까. 1968년부터 88년까지 20년이 넘게 감옥생활을 한 신영복 선생이 워낙 유명해서 그렇지, 감옥, 그것도 18세기 감옥의 독방이라면 그게 아무리 귀족을 유치하는 감옥이라 하더라도 한 귀퉁이에 뚜껑이 없는 변기가 놓여 있고, 키가 닿지 않는 높이의 유리(또는 덮개) 없는 창, (없을지도 모르지만)조그만 나무 책상과 나무 침대. 이런 곳에서 오래오래 홀로 있으면서 가뜩이나 약간의 성적 도착이 있는 남자가 외곬으로 빠지는 건, 바람직하지는 못하지만 한편으론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더구나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인간을 독방에 홀로 있게 하는 것은 (요새 자주 언급되는, 회사의 갑질에 의하여 직장 내 왕따가 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대상자의 폭력성과 비타협적 가해 증상으로 대표하는 공격성을 상당히 높여준다고 보고되고 있다. 언제 감옥에서 나갈지 모르는 사드 후작. 일찍이 탈옥에 성공했던 경험도 있으나 결국 다시 들어온 감옥에서 그의 뇌 속에서는 실제 생활에선 이루어질 수 없는 성적 판타지가 지극히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거, 그건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이 감옥에 갇힘으로 해서 스스로 폭력의 대상이 되었음을 늘 인지하는 한 똑똑한 인간이, 그의 뇌 안에서는 현 상황을 완전히 반전시켜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인간으로 환치시킬 수 있는 건 아닐까.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대리인이 거의 틀림없는 공작의 입을 통해 196쪽에서 이렇게 말한다.
 “뒤클로, 진실을 말해주지 않겠나? 당신은 부인이 숨을 거두자 참을 수가 없어서 스스로 몸을 비비지 않았어? 범죄가 불러일으키는 미묘한 관능적 감각이 당신의 쾌락 기관을 자극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리하여 날마다 벽만 쳐다보며 대뇌의 화학작용에만 박차를 가하는 사드 후작은 위 대사에서 보듯 범죄의 완성과 성적 쾌락을 연결시키게 되고 이후 끔찍이도 지저분한, 아니, 더러운 성적 판타지로 변질되는데, 현재 독방에 수감된 자신의 모습인 피해자에 대한 동정은 완벽하게 반의적으로,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전혀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에게 봉사한 인간은 우리에게 관대한 마음을 기대할 권리가 없어. 그런 자들은 우리에게 봉사하고 있을 뿐이지. 그런 자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강한 정신의 소유자에게는 치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그들을 경멸하고, 귀찮게 굴지 못하게 내쫓아버려야 해.” (201쪽)
 그러나 사드 후작은 안다. 지금 자신이 쓰고 있고 앞으로 2부, 3부, 4부로 확장해 쓰고자 하는 이야기는 실제로 인간 생활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감히 말하는데, 나의 상상력은 나의 실행력을 넘어서는 것이야. 지금까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악행을 범했지만(악행에 대해 서술했지만), 모두 나의 상상력에는 미치지 못하는 악행뿐이었어.” (151쪽. 괄호 안은 내가 썼음)
 사드 후작은 성적 판타지가 유난히 화려한 한 명의 똑똑한(아니, 천재적인)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리하여 그때까지 직접 보거나 듣지는 못했지만 유사한 이야기와 대화를 통해 과장되게 알고 있던 것들을, 분변 냄새가 언제나 대기 중에 충만해 있는 감옥의 독방에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정상적인 중년의 남성도 한 번 상상해보지 못한 하드코어로 확대 재배치한 것이다. 정말로 책의 내용은 역겹고, 끔찍하고, 더럽고, 차마 읽지 못할 수준이지만 한 불운한 천재가 이해받지 못한 사회 안에서 나름대로 처절하게 반항한 흔적이라고도 할 수는 없을까.
 이 책에서도 문제는 권력이다. 주인공 공작, 주교, 법원장, 징세청구인. 정치, 종교, 사법, 경제적으로 완벽하게 우위에 있는 이들에 의하여 벌어지는 지옥의 모습. 그리하여 소설 <폭력적인 삶>을 쓰기도 한 좌파 영화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는 그의 작품 <살로, 소돔의 120일>에서 자신들의 성적 만족을 위하여 가볍게 인간과 인간성을 말살해버리는 권력자들을 파시스트라고 규정한 현대극으로 만들기도 했을 것이다.

 나도 역시 1부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같은 생각이 들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용은 참 역겹기 그지없다. 읽어볼 만은 하나 권하기는 힘들다. 아니, 도저히 추천하지 못하겠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18-06-22 09: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1992년인가 새터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 10대였는데 친구가 이 책을 동네 서점에서 훔쳐주고(쿨럭;) ㅋㅋㅋㅋㅋ 그 훔친 책을 집에서 몰래 몰래 읽다가... 급기야 구토를 했더랍니다. 너무 끔찍하고 역겨워서 책을 읽다가 마구 마구 토했답니다. (어린 마음에 정말 충격;;) 절반쯤 읽다가 결국 포기하고 엄마 몰래 내다버렸는데..... 글쎄 그 뒤로 그 책이 절판되고 중고 시장에서 10만원을 호가 하더라고요. 버리지 말걸... ㅋㅋㅋㅋ 암튼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책입니다.

Falstaff 2018-06-22 09:56   좋아요 0 | URL
ㅎㅎㅎ 10대 아가씨가 이 책을... 거 정말 상상이 안 됩니다. 지금 제가 읽어도, 아니 다시 생각만 해도 속이 뒤집히는 걸요. 어쨌거나 조숙하셨습니다. ㅋㅋㅋ
근데 왜 이 책이 후배 작가들의 작품 속에 끊임없이 거론이 되는 건지 참 그렇단 말이지요.
하여간 제 인생에 더 이상의 사드는 없습니다!!!

잠자냥 2018-06-22 1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나친 독서 욕구가 불러일으킨 폐해라고나 할까요. ㅋㅋ 금기하니까 더 읽고 싶은?? ㅋㅋ 아무튼 아무거나 아무때 주워먹으면 탈나는 법이지요. 다시 생각해도 정말 꾸엑...
네, 저도 제 인생에 사드 배치 절대 반대입니다. 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18-06-22 13:16   좋아요 0 | URL
저도 여태까지 살면서 별별 희한한 야설(우린 그걸 ‘빨간책‘이라고 했는데) 등의 패관문학에 관한 ‘한 한 패관‘ 했다라는 자부심으로 살았었건만, 단방에 무너졌습니다.
완전히 K.O.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