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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히칸족의 최후 ㅣ 열린책들 세계문학 203
제임스 페니모어 쿠퍼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5월
평점 :
제임스 쿠퍼는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미국 작가 가운데 상당한 명성을 누리고 있다고 한다. 근데 왜 여태 몰랐을까. 작년에 이이가 쓴 <개척자들>을, 우습게도, 무척 흥미롭고 한편으론 대단히 지루하게 읽은 경험으로, 다른 건 몰라도 진짜 초기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일 거란 생각은 했다. 미국 동부지역에 광활하게 뻗어있던 원시림. 그리고 개척지. 백인 미국인이지만 개척지에서 살기를 거부하고 인디언과 함께 그들의 정서를 공유하며 사는, 가죽 각반脚絆을 찬 명사수 내티 범포를 주인공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겨울 광경 묘사가 특별하게 기억나는 책이다. 사실은 그때 제임스 쿠퍼의 책을 한 권 더 읽기로 하고 이 <모히칸족의 최후>를 보관함에 담아 놓았다가 이제야 읽은 거다. 책을 읽으면서 번쩍 눈에 띄는 이름, 내티 범포. <개척자들>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죽 각반을 찬 키 큰 명사수 이름. 아, 맞아, 맞아. 가죽 각반을 영어로 하면 ‘레더 스타킹.’
제임스 쿠퍼가 쓴 소설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가장 인기가 많았던 작품이 바로 “레더 스타킹 시리즈”라고 불리는 여섯 권의 연작 장편이라고 한다. 각 권은 내티 범포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별개의 스토리 라인으로 구성되어 있다는데, <모히칸족의 최후>를 읽으면서 분명히 이 책을 <개척자들>보다 먼저 썼을 것이라 짐작했다. 읽는 도중에 그게 궁금해서 (근데 그게 왜 궁금했지? 나도 나를 모르겠어!) 책 뒤편의 해설을 보니까, 아니란다. <개척자들>이 시리즈의 첫 번째고 이 책이 두 번째란다. 왜 이렇게 생각했느냐 하면, <개척자들>에선, 이거 얘기하면 <개척자들> 읽으실 분한테는 스포일러지만, 내티 범포와 비밀리에 함께 사는 인물이 모히칸족의 마지막 왕 비슷한 검은 뱀, ‘칭가치국’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선 칭가치국이 늙어 결국엔 숨을 거두는 장면이 나오는 반면, <모히칸족의 최후>에선 나이는 먹었지만 아직 웬만한 젊은 인디언하고 맞짱을 떠도 절대 꿀리지 않을 완력을 보유한 건강한 상태로 등장하니 내 착각도 뭐 정당하다할 만하겠지.
미국 판 무협지다. 선한 인디언 부자와 가죽 각반의 사나이 내티 범포. 여기서 범포는 일명 ‘라 롱그 카라빈’ 불어로 ‘긴 카라빈 총’ 즉 ‘장총’으로 불린다. 인디언 부자는 위에서 말한 칭가치국과 그의 아들 펄펄 뛰는 사슴이란 뜻의 ‘웅카스’. 이들이 선한 집단, 소위 ‘우리 편’이다. ‘너네 편’은 프랑스 사령관인 용감한 후작과 군대, 그리고 밍고라고 불리는 인디언 집단과 그들의 우두머리 ‘마구아’. 즉, 아직 미국은 독립하지 않은 18세기 중반으로 밀림 속에서 프랑스와 영국, 그들을 지지하는 인디언 부족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시절. 수적으로 열세에 처한 영국군 진지에 사령관으로 있는 아버지를 만나러 배 다른 자매가 젊은 영국군 소령의 보호아래 우리 편인 줄 알았던 마구아를 길잡이 삼아 출발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마구아는 영국군 사령관인 대령의 큰딸에 흑심을 품고 이들을 납치하려 호시탐탐 노리다가, 성공한다. 여기에 혜성같이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영국군에게 호감을 느끼고 영국 왕에게 충성을 하기로 결정한 백인이자 미국인 장총, 내티 범포와 그의 인디언 친구들.
이 정도면 그림이 그려지시지? 우여곡절 끝에 두 아름다운 아가씨를 구출하고, 비록 백마는 타고 오지 못했지만 가난한 젊은 소령은 아가씨와 결혼에 성공해서 늙어 죽을 때까지 날이면 날마다 바가지 득득 긁히는 거. 근데 정말 그럴까? 그렇게 뻔한 도식처럼 이야기가 흘러간다면 그리 많은 후세의 작가들이 <모히칸족의 최후>를 자주 언급하지 않았을 것. 당연하다. 어느 때와 마찬가지로 나는 더 이상 책의 줄거리를 이야기하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개척자들>처럼 지루하지 않다. 그 책은 문학과지성사의 큰 판형과 조밀한 편집으로 해설 포함해 750쪽의 위용을 자랑하면서도 인색하게도 400쪽을 넘길 수 있는 인내심과 질긴 엉덩이 가죽을 가진 자들에게만 독서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반면에 <모히칸족의 최후>는 처음부터 어려움 없이 읽히는 가독성을 지녔다. 역시 제임스 쿠퍼가 쓴 이 책의 미덕은 무협지와 비견하는 내용이라기보다, 아메리카 인디언 특유의 자연친화적 삶의 방식을 포함한 자연에 대한 외경과 관찰방법을 감상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상상도 할 수 없는 동부 미국의 광활하고 빽빽한 삼림의 풍광도.
고백하노니, 미국문학을 전공하는 분이 이 고백을 들으면 대경실색하는 모습이 벌써 눈에 선하지만, 나는 책의 주인공이자 여섯 권으로 이루어진 레더 스타킹이며 라 롱그 카라빈, 장총이기도 한 내티 범포를 보면서, 정말로 엉뚱하게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글씨>에 나오는, 확고한 신념의 주인공 에스터의 진짜 남편 ‘칠링워스’가 떠올랐던 거다. 물론 내티 범포는 평생 독신獨身이자 독신瀆神으로 일관한 삶을 살지만, 만일 그가 어느 결에 혼인이란 걸 했다면, 당연히 칠링워스처럼 악당은 아니겠으나, 아내로 하여금 가슴팍에 금실로 “A”자 수를 놓은 주홍빛 천을 달고 다니게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 아니다. 범포 같으면 비록 아내 혼자 날마다 독수공방하게 내버려둘지언정 그렇게까지 아내를 불명예스럽게 만들지는 않았겠지. 하여간 칠링워스의 삶의 방법이 숲 속의 사나이 래더 스타킹과 비슷했을 수도 있다, 이거지 뭐. (내티 범포, 혼자 살기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