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팔이 소녀 말로센 시리즈 3
다니엘 페낙 지음, 이충민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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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니엘 페낙. 분명히 이 사람이 쓴 다른 소설을 읽은 기억이 있다. 뭐였더라. <떠도는 그림자들>? 한 번 이 책이 떠오르자 완벽한 혼돈상태가 됐다. 프랑스 소설가 파스칼 키냐르와. 일단 키냐르를 생각하니 본문만 570쪽이 넘어가는 장편인데 암호해독에 특별한 능력이 없는 독자에겐 접근을 허용하지 않는 키냐르의 길고 긴 장편을 어떻게 읽을 수 있을까. 하물며 200쪽이 겨우 넘는 <떠도는 그림자들>도 억지로 읽었음에야, 걱정을 하며 장바구니에 넣고 주문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이런 심정, 조금 과장하면, 다시 말해, 과장하면 그렇다는 건데, 주문하기 버튼을 클릭하는 비장한 마음이 목에 돌을 매달고 벼랑 위에 서서 깊은 바다를 바라보는 마음과 비슷할까. 하여간 일단 저지르고 보자는 심정으로 구입을 하고, 드디어 책장을 열었고, 한 페이지를 넘기자마자 아, 이 사람이 <떠도는 그림자들>을 쓴 파스칼 키냐르가 아니고, <몸의 일기>를 ‘다니엘 페나크’란 이름으로 번역 출간한 바로 그 사람이구나, 알아챘다. 완전 형광등. 하긴 나로 하여금 스스로 형광등을 자처하게 만들 만큼 파스칼 키냐르의 이름이 공포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니까. ‘다니엘 페나크’가 됐던 ‘다니엘 페낙’이 됐던, 이이라면 읽어내는데 별 문제 없지. 일단 안도.
 호, 놀랍게도 엽기성 연쇄살인과 코미디가 마구 섞여 있는 프랑스판 서부영화다. 소위 누아르로 분류할 수도 있겠지만, 진정한 누아르 장르로 만들기에는 작가의 직업이 너무 교양적이다. 학교 교사였을 걸? 그 나라에선 중등학교 교사가 소설도 많이 쓴다. 참 좋은 책 <프랑스 식 전쟁술>을 쓴 알렉시 제니도 학교(심지어 생물) 선생이었잖은가. 동화책도 많이 써서 동화작가로 분류하기도 하는 다니엘 페낙이 연쇄살인을 주제로 하는 작품을 썼다고 해서 잔혹 엽기로 일관하기는 쉽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모든 악인은 극히 일부의 선량한 희생자들을 길동무 삼아 저 세상으로 가고, 남은 착하거나 보통의 인간들은 다시 사회에 복귀해 지겨운 일상을 계속 이어가는 쪽으로 결말을 냈다. 물론 교직을 경험한 작가답게 교훈 한 가지는 주어야 직성이 풀렸겠지. 기어이 뱅자맹 말로센의 애인 쥘리의 입을 통해 이런 말을 하고야 만다.


 “누가 어떤 꿈을 가지고 있든 말리지 않을 거야. 히틀러가 미술 장학금을 받았다면 정치 같은 걸 했겠어?” (571쪽)


 초반에 이 책이 ‘말로센’이란 프랑스의 콩가루 집안에서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사건들을 쓴, 소위 ‘말로센 가족 시리즈’라는 것을 알 게 된다. 그러니 만일 <산문팔이 소녀>를 포함해 이 시리즈에 관심이 있으시면 1편에 해당하는 <식인귀의 행복을 위하여>부터 찾아 읽으시면 좋을 듯하다. 1편은 내 단골집 알라딘에선 품절이고 나머지 이너넷 책방에선 팔고 있다. 나도 얼른 주문했다. 한 5월경에 읽을 듯. 모두 여섯 편이라는데 그걸 다 챙겨 읽은 정성까지는 없을 것 같다.
 화자이자 중요한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뱅자맹 말로센. 이이의 직업으로 말할 것 같으면 출판사에 근무하면서 자기가 쓴 원고를 보내기는 했지만 채택되지 못하고 연이어 퇴짜를 맞는 작가지망생들, 자신이 시대를 너무 앞서가는 운명을 타고나 현세에 고난을 받아야 하는 천재라고 착각하는 이들의 거친 항의를 감당하는 일. 프랑스에선 이런 지망생들이 출판사에 난입해 온갖 사무 기물을 때려 부수고, 담당자에게 폭행의 위협을 하고 뭐 그래도 그게 그냥 일상생활 정도로 여기는 바람직한 문화가 있었나보다. 하여간 남을 달래는데 탁월한 능력을 보이는 뱅자맹 말로센에게 사랑하는 여동생 클라라가 있다. 많고 많은 동생들 가운데 어느새 열아홉도 안 된 클라라를 제일 아끼는 건, 그 아이가 세상에 나올 때 자신이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 형제가 여덟인가, 아홉인가, 더 많던가? 하여간 무지하게 많은데 놀라운 건 아이들 전부 다 공통의 어머니를 갖고 있고, 개별적으로 다른 아버지를 갖고 있다는 점. 그러니 내가 저 위에서 프랑스판 콩가루 집안이라고 한 게 이해가 되시지? 이 가운데 클라라가 누구의 아버지의 동생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세르비아-크로아티아계인 스토질코비치 삼촌을 면회하러 가서 클라라가 한 남자와 돌이킬 수 없는 사랑에 빠졌으니 누군가 하면, 비스듬히 기우는 햇빛에 흰머리가 금빛으로 반짝이는 키 큰 왕자님, 하늘색 눈의 대천사, 쉰여덟의 대천사, 그리고 교도소장.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동생보다 세 배나 나이를 더 먹은 늙은이에게 엄마 배 속에서 나온 그대로의 상태로 있(다고 믿)는 동생 클라라를 어떻게 기쁜 마음으로 시집보내겠느냐고. 말 그대로 열불이 난다. 그러나 어이할꼬. 클라라는 키 큰 대천사와의 혼인을 반대하면 퐁네프다리 위로 올라가 센이라고 부르는 파리의 개천에 빠져 죽겠다고 협박을 하는 걸. 그래 어쩔 수 없이 승낙한 상태. 날짜는 어김없이 흐르고 어느덧 결혼식 날이 되어 교도소 성당에서의 혼인을 위해 차 몇 대를 대절해 가고 있는 중에, 저 멀리 성곽 위로 곧게 솟는 하얀 연기. 하필이면 그날 새벽, (여태까지는 차라리 천국에 더 가깝도록 평화로웠던, 그래 일부 수형자들은 형기 연장을 호소할 정도였던)교도소에서 폭동이 일어나 창백하고 키 큰 대천사가 처참한 모습으로 죽임을 당한 다음이다. 이게 사건의 시작이다. 첫 번째 죽음. 이리하여 결혼식장은 순식간에 장례식장으로 변해버린다. 뭐 결혼식장이나 장례식장이나 의미로 따지면 거기가 거기긴 하지만.
 스토리는 여기까지만. 앞에서 여러 번 이야기 했다시피 엽기 연쇄살인보다 더 재미있는 건, 작가의 입담이다. 미칠 지경으로 재미있어서 시도 때도 없이 웃음이 터진다. 물론 나중에 화해는 한다. 그런데 어째 '가톨릭의 맏딸'이라고 불리던 나라 프랑스에서 이리도 가혹하게 기독교와 기독교의 신을 희화화하는지 놀랍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이 쇼킹이었다. 제목 <산문팔이 소녀>. 애초부터 작가를 ‘파스칼 키냐르’로 오해했으며, 제목이 이런 식으로 붙었으니 분명히 소설, 즉 산문을 쓰는 여러 가지 허풍, 엄살, 과장, 잘난 척, 형이상학, 미학, 두통거리들이 만발할 것으로 생각했다가 유쾌한 연쇄살인이라니. 고생할 걸 각오하고 읽기 시작했다가 웃으면서 책을 덮었다. 이것만 가지고도 웃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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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0
임레 케르테스 지음, 한경민 옮김 / 민음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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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케르테스 임레(헝가리는 우리나라처럼 성이 앞에, 이름이 뒤에 온다. 케르테스가 성이고 임레가 이름이다.)는 한 시절 자신의 삶 자체가 극적이었다. 전작 <운명>의 주인공 케비슈톄르 죄르지라는 소년과 마찬가지로, 아직 만 십오 세가 되지 않은 소년시절에 공장으로 출근하던 중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헝가리 헌병들의 불심검문에 걸려 아우슈비츠, 부헨발트, 차이츠를 거치고 다시 부헨발트에서 해방을 맞아 헝가리로 귀환한 경험이 있다. 죄르지는 아우슈비츠에서 두 살이 더 많은 열여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해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나이로 인정받아 부헨발트로 보내졌음에도 가스실 행을 피할 수 있었다. 비록 10개월가량 수용소에 있었지만 열네 살의 소년이 1944년에 부헨발트에서 살아남았다는 것만 가지고도 기적이라 할 만하다. 당시 수용소장 카를 오터 코흐 치하에 있던 부헨발트에는 “부헨발트의 악녀”, “부헨발트의 암캐”라고 불리던 카를의 아내 일제 코흐라는 엽기 충만한 여자가 살았다. 이 여자가 얼마나 잔인했었는지, 사람의 가죽을 무두질해서 스탠드 커버, 책의 장정, 장갑 등으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의 뼈를 조각해 문진(文鎭)으로 만들기도 했는데 문진의 모양이 정말 엽기다. 얼마나 잔인한지 (이런 거 좋아하는 내가 '사진 첨부'를 고려하지 않을 정도다.) 궁금하신 분은 ‘Ilse Koch’라는 이름으로 구글 검색해 이미지 페이지를 보시면 안다. 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독일에선 ‘아돌프’와, ‘일제’라는 이름이 사라졌단다. ‘비정상회담’이란 프로그램에서 독일 대표로 나와 다방면에 지적인 대화를 펼친 다니엘 린데만이란 반半 유대인 청년한테 비슷한 얘기도 들었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 이 악마 같은 여자를 알지 못했던 바, 그러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멘델스존 스페셜리스트 피아니스트 일제 폰 알펜하임(Ilse von Alpenheim) 이후 같은 이름의 독일 여성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 지옥에서 살아남았으니 굉장한 행운이기도 하고, 소년기에 인간이 만들 수 있는 지옥을 경험했으며, 그때의 기억을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 했기 때문에 더없는 불행이기도 했을 것이다. 인생의 고비마다 불현듯이 뇌리에 떠오르는 죽음과 광란의 아수라장. 마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돌을 굴려야 하는 시시프스와 비슷했다고, 이 책의 결론 부분에 나온다.
 케르테스 임레가 수용된 것이 열네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그때의 기억을 기록해 출판한 시기가 1975년이다. 그의 나이 46세, 수용소에서 해방된 다음 30년이 지나버렸다. 그동안 케르테스는 일간신문사의 편집인으로 2년 여 일하고, 해고를 당하고, 제철회사의 금속 기계공으로 노동자 생활도 하다가 다시 기자 일을 하면서 쉬지 않고, 수용소에서의 경험에 관한 소설 ‘한 편’을 쓰는 것에 집중을 한다. 1970년대의 40대 중반이면 ‘중년’이라고 불리웠던 시기. 거기다가 일찌감치 소년기에 생의 에너지의 많은 부분을 소모해, 스스로 ‘노인’이라 칭하는 이가 드디어 소설 한 편을 완성하여(이 작품을 <운명>이라고 특정하지는 않는다.) 출판사에 보냈는데, 얼마 후 편집자의 편지가 첨부된 원고가 반송되어 집으로 돌아온다. 편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자신의 경험을 소재로 했으나 그것을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주제도 끔찍하고 충격적입니다....무미건조한 문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소설의 주인공은 계속해서 수수방관하는 태도로....도덕적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50~51쪽)


 작품 속 노인(으로 칭하는 케르테스 임레)은 아홉 평짜리 아파트에서 위층에 사는 짐승같이 매너 없는 이웃의 소음 때문에 귀마개를 한 상태에서 글만 쓰는 실업자이고, 생활고를 위해 아내는 공산당 치하의 부다페스트에서 식당 일을 해 먹고 산다. 이이가 가끔 먼지 앉은 선반에서 꺼내 보는 상자 하나가 있는데 거기엔 ‘아이디어, 원고 초안, 미완성 원고’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정확하게는 말하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미완성 원고’가 바로 케르테츠 임레의 첫 번째 소설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운명>을 쓰기는 했으나 출판사로부터 거절을 당하고 우울한 시절을 보내는 장면이 소설 <좌절>의 앞부분. 그때부터 1988년 헝가리가 사실상 붕괴되어 국경에 군인들이 사라질 때까지를 주인공 ‘쾨베시’라는 이름으로 좌충우돌하는 게 157쪽에 달해서야 비로소 나오는 1부부터 9부까지가 뒷부분이다.
 <운명>에 비해 상당히 버벅거리면서 읽었다. 이게 책의 내용이 전작에 비해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 특별하게 각인시키는 장면이 (별로)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하필이면 정말로 내 눈이 (특히 뒷부분 읽을 때부터) 뻑뻑한 게 영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그런지 잘 모르겠다. 확실한 건, 재미있는 책을 읽고 싶다면, 글쎄 내 경우에 국한해서 말하자면 그렇다는 말씀인데, 권하지 않겠다. 이건 케르테스 임레에 대한 기대가 원래 컸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역자가 작품해설에서 말했듯이 “이 작품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자에게 쉽게 읽히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다시 말해 여러 가지 교묘한 장치를 사용하여 독자에게 생각할 것을, 곰곰이 숙고해줄 것을 요구”하기 때문인지도. 하여간 이 책에 관심 있는 독자 제위는 역자의 이런 의견도 감안하시라. 그냥 쉽고 재미있는 책이리라는 건 애초에 기대하지 말라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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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의 수수께끼
V. S. 나이폴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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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장소설 <미겔 스트리트>를 읽고 호기심을 느꼈던 작가. 서인도제도의 한 섬 트리니다드 토바고에서 인도인 이민 3세로 태어난 나이폴이 어려서부터 싹수가 있어 시험을 치룰 때마다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선장先場하니, 훈장이 이를 보고 채점을 하면, 자자字字이 비점批點이요, 구구句句이 관주貫珠이어서, 당시 식민모국이었던 영국의 문교부장관이 이를 ‘어엿븨 녀겨’ 전액 장학생의 자격으로 옥스퍼드 유학을 시켜주기에 이르렀던 것. 인도 천민 계급으로 서인도제도까지 소작인으로 이주해 와, 이전까지는 흑인 노예들이 하던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에 종사했던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이거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한 마리 승천한 꼴인데, 어린 시절을 이방인으로 그것도 식민지 트리니다드 토바고의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의 가난한 동네 미겔 스트리트의 추억을 연작으로 담은 작품은 솔직히 그리 인상 깊게 읽지를 못했다. 아무리 노벨 문학상 수상자라 하더라도 나 싫으면 안 읽는 거지, 이름값 가지고 책 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그래 아직도 고민하고 있는 그의 다른 작품, 문학과지성사에서 찍은 두 권짜리 장편소설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을 일단 서점 보관함에 집어넣고 살까, 말까를 무한히 왔다 갔다 하고 있다가, 한 권짜리 <도착의 수수께끼>를 발견, 이를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한 권짜리니까 <비스와스....>보다 부담감이 덜했던 것이 주 이유였다. 근데 왜 나이폴이 별로였다면서 굳이 찾아 읽을 생각을 했느냐고? 모르겠다. 책 구경을 할 때마다 나이폴이라는 이름이 나오면 그냥 넘어가면 되는데, 그게 안 되더라는 거. 그래 이 책도 조금은 주저하면서 구입했고, 이거 지루하면 어떡하지, 조금은 걱정하면서 첫 페이지를 넘겼다.
 V.S. 나이폴. V.S는 이름이 하도 복잡해서 그냥 영어로 쓴 것. 우리말로 하자면 “비디야다르 수라지프라셔드 나이폴.” 그냥 “V.S. 나이폴”이라 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유익하겠지?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위에서 영국의 문교부 장관이 나이폴한테 전액 장학금으로 옥스퍼드 유학을 허락했다는 거 까지 이야기 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나이폴은 인도에서 건너온 모든 친척들이 모여 트리니다드 공항 건물에서 거창하게 송별회를 한 다음 ‘팬 아메리카 월드 항공’ 소속 경비행기에 탑승해 푸에르토리코를 거쳐 뉴욕까지 가서 일박을 하고, 거기서 배로 갈아타 영국에 도착해 런던 얼스코트라는 동네의 하숙집에서 학기가 시작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옥스퍼드로 옮기고, 졸업을 하고, 글을 쓰기 시작하고, 본격적인 전업작가의 길로 들어서 스톤헨지가 멀지 않은 시골 월든 쇼의 한 장원에 속한 집에 정착하게 된다.
 <미겔 스트리트>에서는 화자의 소년시절, 그러니까 트리니다드를 떠나기 전까지 그곳에서 실재 살았던 (것처럼 보이는) 인물들을 중심으로 희극적 비극의 감각으로 써내려갔고, <도착의 수수께끼 The Enigma of Arrival>은 월든 쇼의 장원의 한 시골집을 세든 상태, 약 1975년 쯤을 전후한 시간적 배경과, 이 책을 정말 쓴 1984~86년의 시점이 수시로 교차하면서, 어느 정도 시골집에 정착을 한 단계에서 동네 인물들, 1부에서는 ‘잭’이란 야성적이고 성실한 중늙은이와, 이이가 죽은 후엔 그를 대신하는 젊은 남녀들을, 2부에선 자신이 여행을 하며 만나 관계를 맺은 많은 사람들, 3부와 4부는 장원에 속한 장원의 소유자와 관리인 부부, 기타 주변인등을, 5부는 다시 트리니다드로 돌아와 그곳의 친척들에 관해 서술한다. 무엇보다 웨일즈 지역에 인접한 영국 농촌을 완상하는 나이폴의 시각과 문장이 참 좋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내가 일찍이 슈티프터의 <늦여름>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기도 한 적이 있다는 게 떠오른다. <도착의 수수께끼>는 일찍이 슈티프터가 자유자재로 구사했던 모든 자연현상과 인간의 예술품에 대한 미학에는 감히 미치지 못할지언정, 남부 영국의 시골, 나름대로 소박한 자연의 찬가를 담은 모양이 비슷한 지역을 쓸쓸하게 노래한 제발트의 <토성의 고리>를 생각나게 만든다. 제발트는 영국 남동쪽, 나이폴은 남서쪽을 노래하고 있기는 하다.
 1부를 읽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깜짝 놀랐다.
 나이폴의 소설이 이런 거였나? <미겔 스트리트>를 발표한 것이 1959년. 그의 나이 스물일곱. 식민지 출신 이방인으로 영국에 도착해 생전 처음 코스모폴리탄의 위용을 경험한지 9년만의 일이었다. 혹시 그래서(작가가 너무 젊어 쓴 작품이라서) 내가 <미겔 스트리트>를 덜 재미있게 읽은 건가 싶기도 했다. <도착의 수수께끼>에서 ‘도착’은 “본능이나 감정 또는 덕성의 이상(異常)으로 사회나 도덕에 어그러진 행동을 나타냄”을 뜻하는 것인 줄 알았다. 왜 안 그런가. 소설 문학에서 ‘도착’이라면 倒錯을 먼저 생각한다고 뭐 이상한 것도 아니잖은가. 하, 그런데 도착arrival이라니. 생각도 못했다. 도착이 있으려면 반드시 ‘출발’ 또는 ‘이별’ 같은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법. 먼 인생으로 비유를 해보자면 사람이 낳는 것을 출발이랄 수 있고, 죽는 것을 도착이랄 수 있겠다. 트리니다드를 출발해 런던에 도착했고, 런던을 출발해 시골동네 월든 쇼의 장원에 도착을 한다. 그럴 때마다 인생 또는 삶은 작가에게 수수께끼를 냈다보다. 아침엔 네 발로, 하루 종일 두 발로, 황혼이 오면 세 발로 걷는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너나 나나 다 출발하고 도착하고, 출발과 도착 사이에 벌어지는 온갖 일을 세상살이라고 하면서 도착점에 가까이 올수록 괜히 그 누추했던 세상살이가 아름다워 보이기도 하는 까닭에 그걸 ‘추억’이라 포장하면서 산다. 당신이나 나나 다 마찬가지다.
 나이폴의 작품이 이렇게 아름다운 서정 전원시인줄 몰랐다. 문장을 읽어내기가 쉽지 않아서 그렇지, 굴곡 없고 사건도 별로 없고, 줄곧 나붓한 단어들만 나열하는 고독의 바다를 건너기만 하면 문장 하나하나를 음미하며 늦겨울 밤이 기우는지도 모른다. 본문만 552쪽. 내 경우, 적어도 400쪽 까지는 문장을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글자들이 모여 쿡쿡 가슴을 찌르는 공감에 기뻐하면서, 읽은 문장 다시 읽어보기까지 했다. 실제로 나이폴(혹은 역자 최인자)은 독자가 문장을 한 번에 쉽게 읽고 지나가지 못하게 썼다. 무수한 괄호 안의 설명, 일부 서양 작가들의 특징인 문장 기호 “―”의 연속. 그리하여 한 문장을 두 번, 세 번, 네 번 읽어야 하는 경우가 숱하다. 일부 독자는 이런 문장을 매우 싫어할 수 있고, 나도 그리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입장이지만, 워낙 아름다운 글들이 쏟아지는지라, 기꺼이 감수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을 쓴 시기가, 아, 1986년, 신자유주의의 기치를 높이 든 마거릿 대처 남작부인이 전 영국 국토의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때려잡는데 총력을 기울였던 그때도 영국의 한 시골에서는 이런 미문들이 생산되었던 것이구나.
 그러나, 400쪽이 넘어가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지치더라. 분명히 아름다운 문장, 섬세한 감성의 포착, 삶과 전원과 자연과 인간에 대한 시선, 이것들이 무한히 계속된다고 생각해보시라. 그래, 과하면 부족하느니 못하다는 말, 그건 진리다. 그래도 결심했다. 올해 말에 그의 다른 작품, <도착의 수수께끼>보다 더 긴 장편소설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을 읽기로. 나이폴의 서정적 전원 문장이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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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티사
존 파울즈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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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완전히 작가 이름만 보고 고른 책이다. 현재 품절. 헌책방에서 샀다. 대박.
 그러나, 이 책은 나처럼 읽는 즐거움을 누릴 목적으로 독서를 하는 일반 독자보다는 스스로 작가가 되려하는 문학 지망생들이 읽어볼 만할 것 같다. 이리 “것 같다”라고 비겁하게 말하는 이유? 나야말로 완전 아마추어 독자라 자신 있게 얘기하지 못하기 때문.
 주인공은 ‘마일스 그린’이란 이름의 작가, 라고 추정되는 인간. 현재 모종의 사고로 인해 얼굴이 형편없이 망가져 두꺼비처럼 변했고 급기야 수목드라마의 단골 메뉴인 기억상실증까지 겹친 환자. 이이는 자기 이름이 정말로 마일스 그린인지, 마일스 데이비스인지도 모르고, 자기 아내라고 주장하는 클레어라는 이름의 여성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도 들어보지 못한 책 <피크윅 페이퍼스>를 찰스 디킨스가 썼고, <한겨울밤의 꿈>이 <한여름밤의 꿈>을 잘못 이야기한 것이란 것도 알고 그 작품에서 보텀과 티타니아가 등장하는 줄도 안다. 현재 런던 최고의 시설을 갖췄다고 하는 센트럴 병원에서도 방음장치가 완벽하게 된, 창 없는 회갈색 독실에서 기억을 회복하기 위하여 Dr. A. Delfie, 델피 박사와 서인도제도 출신의 가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있는 코리 간호사의 치료를 받고 있다. 그림 그려지시지?
 여기까지는 아무 문제없다. 숱한 매체를 통해 많이 본 그림이니까. 그러나 곧바로 독자를 당황시키는 장면이 등장한다. 난 이 ‘독자를 당황시키는 장면’을 통근 버스에서 하필 내 옆자리에 스물세 살 먹은 신입사원이 타고 있던 날 읽었는데, 신입사원이 여직원이었으며, 언제부터인가 젊은 여직원 옆에 앉게 되면 내 몸을 최대한으로 슈링크, 축소시켜 될 수 있는 한 직원과 닿는 면적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습성이 있는 바, 혹시라도 그녀가 회사 인사팀에 달려가, 저 인간이 일부러 접촉을 시도했다는 얘기를 할지 모르는 일이며, 만일(즉, 만 가지 경우 가운데 하나의 확률로) 그렇다면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회사 대표 꼰대로서 여간 난처하고 민망한 일이 아닐 것이 번한 이치인데, 거기서 한 술 더 떠, 델피 박사, 코리 간호사, 그린 씨, 세 명이 벌이는 다중 ‘섹스 치료’ 장면이 거의 포르노 수준에 이를 만큼 노골적으로 묘사되는 책갈피를 신입 여직원이 흘낏 넘겨다 읽기라도 하면, 그것 가지고도 얼마든지 성희롱으로 엮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자기 아버지보다 더 늙은 직원이 통근버스에서 여직원을 옆에 두고 그딴 걸 읽더라고 소문이라도 내면 그 쪽팔림이 가히 하늘을 찌를 것이 아닌가 말이다. 아, 그런 장면은 방에서 혼자 읽어야 제 맛인데! 드뷔시를 들으면서말야. 한 번 생각해보시라. 몸을 잔뜩 웅크리고 창 쪽에 바짝 붙어 책을 될 수 있는 대로 조금만 열고 짜릿하게 야한 장면을 읽는 중늙은이의 모습을. 지금도 당시 내 모습을 생각하면 아이고, 얼굴이, 귓불까지 다 붉어진다.
 무슨 이유로 이 장면을 묘사했는가 하면, “두뇌의 기억 신경중추는 생식 활동을 제어하는 신경중추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생식 활동을 제어하는 신경중추가 정상적으로 기능을 발휘하고 있는지 확인해 봐야“한단다. (27~28쪽) 마일스는 완전한 나체로 침대 위에 놓여 있는 상태. 두 여자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고, 애정관계도 아닌 완벽한 타인이고, 아까 얘기를 들으니 자기는 클레어란 여자와 부부사이인데 어떻게 관계를 할 수 있는가. 그러나 걱정도 팔자. 의료진은 그냥 그린 씨가 달고 다니는 기쁨의 열쇠(<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조르바의 대사 인용)가 흉기로 변할 수 있는지만 확인하면 된단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남성들의 마음은 어떨까. 여성들은 모를 걸? 대부분의 남자들은 이런 경우에(자기가 의도하지 않고 타인들의 필요에 의해) 기쁨의 열쇠가 흉기로 변하는 자체를 대단히 창피스러워할 거 같다. 그린 씨 역시 마찬가지라 코리 간호사와 델피 박사가 얼른 흉기로 변하라고 죽자 사자 주물러대는데도 탁월한 마인드 컨트롤을 발휘, 그냥 축 처진 상태를 유지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당분간은. 이어서 어떻게 되느냐고? 그건 알려드리면 안 되지. 진도를 더 이상 빼면 내 서재가 유해 음란 매체로 찍힐 우려가 있어서 이 정도에서 생략. 제위의 양해 바람.
 그럼 이 세 명의 등장인물이 누구냐고? 말 그대로 등장인물이다. 그린 씨는 작가 존 파울즈가 만든 작가라는 직업의 등장인물이고, 델피 박사는 그리스 출신으로 한 오천 살 정도 먹은 5급 여신 정도의 레벨을 가진 ‘에라토.’ 에라토가 뭐냐 하면, 음반 만드는 프랑스 레이블을 칭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책에선 사랑과 서정시와 음악의 여신. 그리스 시대니까 유피테르가 아니라 제우스, 신의 시대에 있어 가장 난잡한 난봉꾼이기도 했던 제우스가 우라노스와 가이아의 딸 므네모시네와 아홉 날에 걸쳐 사랑을 나눈 끝에 나온 아홉 명의 쌍둥이 뮤즈 가운데 하나. 이 델피 박사로 변장한 뮤즈 에라토와, 에라토가 만든 등장인물이 또 서인도제도 출신의 유색인 간호사 코리. 그러니까 작가 존 파울즈는 마일스 그린을 만들고, 마일스 그린은 델피 박사로 등장했던 뮤즈 에라토를 만들고, 에라토는 델피 간호사를 만드는 셈이다. 이를 일컬어 해설에선 복잡하게 메타 픽션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굳이 따지자면 메타 메타 메타 픽션이지만, 그딴 건 일반 독자는 몰라도 충분하다. 솔직히 메타 픽션이란 게 내가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걸 말하는지도 모른다. 해설은 그냥 아주, 아주 대충 훑어봤을 뿐이라서. 이게 독자의 권리다.
 난 <만티사>를 읽으며 엉뚱하게 <고도를 기다리며>가 생각났다. 고도는 어디 있을까. 오기는 오는 걸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분명히 오늘도 목 빠지게 고도를 기다리고 있는데, 그는 어디서 우울한 걸음을 옮기고 있을까. 혹시 <고도를 기다리며>를 쓴 사람이 사무엘 베케트가 아니라 고도 아닐까? 고도가 베케트로 하여금 희곡을 쓰게 하고, 베케트는 또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만들었으며, 동시에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그의 책에 등장해 책 <고도를 기다리며>를 읽는 건 아냐? 그래서 내가 지금 한 인격으로 나의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고도가 쓴 드라마의 한 등장인물? 아주 가끔, 정말 아주 가끔, 책장을 바라볼 때, 책과 영상물 속에 들어 있는 무수한 인격들, 한도 없이 많은 등장인물들은 아직도 주어진 배역에 충실하고만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인물을 만드는 행위는 함부로 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오랜 생각. 그래 독후감 첫머리에 일반 독자보다 작가 지망생들이 읽으면 더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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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8
앙리 드 몽테를랑 지음, 유정애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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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년 부르주아 출신 아버지와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출생한 도련님 출신 작가의 교육과정을 들여다보면, 열 살 때 장송 드 사이 중·고등학교에 들어가 일 년 다니다가 성직자 개인교사에게 집에서 또 한 일 년 지도받고, 열두 살에 생피에르 학교로 옮겨 2년 동안 배운다. 열네 살이 되어 할머니와 남불 투르드 여행에 나서 투우를 보고 이에 흠뻑 빠져 열다섯 살엔 스페인으로 가서 진짜로 투우를 배운다. 열여섯 살에 바칼로레아 1차 시험에 합격하고 생트그루아 드 뇌이 콜레주의 철학반에 입학해 이 년 후배 필리프 지켈과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퇴학을 당한다.
 책의 주요 무대는 파리 오퇴유 몽모랑시 대로에 있는 에콜 노트르담 콜레주. 이 학교는 정원이 아름다워 노트르담 뒤 파르크, 즉 ‘정원의 노트르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프랑스의 학제는 일학년이 가장 나이가 많고, 아래로 오학년까지 갈수록 한 살씩 어려진다고 한다. 책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똑똑한 청년이자 철학 아카데미에서 자기 본인을 제외한 만장일치로 회장에 당선한 열여섯 살 반 먹은 알방 드 브리쿨. 이 소년은 학생 신분일 때는 부르주아와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평등한 지위, 나아가 일반 시민계급이란 상대적 열등성에 대한 반동으로 같은 학생들과 교사, 원장 신부 등의 사제들로부터 약간의 우대를 받지만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다시 일반 노무자로 계급으로 전락하고 마는 ‘시민 출신’의 2년 후배 세르주 수플리에와의 ‘특별한 우정’에 빠져 콜레주에서 퇴학당한다. 또한 부활절 미사를 투우 방식을 빗대 묘사하는 등 자신의 경험이 상당한 부분 들어 있다고 해야 하겠다. 근데 이게 자기 이야기? 몽테를랑은 심장 비대증으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고자 했으나 거절당하고, 전쟁의 막바지에야 자진해서 참전하는데, 알방은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기 때문에 참전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도 비슷하지만, 작가는 전문 거짓말 꾼인 소설가이다. 이 작품 <소년들>을 자전적 고백이라고 말 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책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야만의 동산인 노트르담 뒤 파르크 콜레주는 열두 살부터 열일곱 정도의 남학생들만 다니는, 반은 기숙생활을 하고, 반은 통학을 하는 가톨릭 계열의 고급 중·고등학교다. 남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에도 커플이 생긴다. 책에서 등장하는 커플도 주인공 알방-세르주 커플 말고도 몇이 더 있고, 학생들도 이를 요새 말하는 CC 정도로 인정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등장인물들이 나하고 한 60년 정도 차이가 난다. 예전의 젊은이들이 요새 젊은이들보다 더 성숙했다고 가정하자. 평균수명이 짧았으니 더 조숙해야 뭔 일을 이루어도 이루었지 않겠느냐는 의미에서. 아무리 그래도 1910년대에 남학생들만 다니는 학교에서 커플이 하나도 아니고 동시에 여럿이 생길 수 있었을까? 나도 중, 고등학교를 남학생들만 다녔고, 대학도 간호학과와 가정교육과를 포함해 여학생이 전체 학생 수의 5%에 불과한 학교를 다녔지만(옛날 얘기고, 지금은 성비가 50% 정도란다), 남학생 커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있을 수 있었겠지. 커밍아웃이 거의 불가능한 시절이라서 드러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몇몇이 숨긴다고 해도 결코 가려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그걸 우리는 ‘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난 한 번도 소문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원래 이 소문이라는 것이 사람 죽이는 거다. 희대의 천재를 자랑했던 로시니가 그의 대표작 <세비야의 이발사>에서 소문에 관한 기가 막힌 베이스 아리아 하나를 만들었다. 한 번 듣고 가자.

 

오케스트라가 반주를 해야 제맛인데, 자막이 있는 관계로 골랐음


그래 책에서 묘사하는 거의 반(半) 동성애적의 ‘특별한 우정’이 그것도 복잡하게 발생하는 장면에서 그만 책의 재미가 뚝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동성애 또는 ‘특별한 우정’ 혹은 ‘특별한 사제관계’라고해서 삼각, 사각 관계가 없을 수는 없겠지만.
 내 경우에 이런 주요한 스토리 라인보다 더 흥미를 끄는 것이 있었다.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가톨릭 신부 드 프라츠. 아, 그러고 보니 책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남자의 이름 앞에는 귀족 출신임을 알리는 관사 ‘드’, ‘뒤’ 같은 것이 붙어 있다. 관사가 달리지 않는 성을 가진 일반 시민 계급들은 어째 하나같이 좀 찌질하고, 날마다 지적당하고, 공부도 못하며, 벌점을 하도 먹어 품행점수가 0(zero)에 가깝다. 좀 적당히 하지 말이야. 하여간 드 프라츠 신부가 말하기를 가톨릭 신부 가운데서도 종교를 부정하는 사제가 적어도 한 30%쯤 된단다. 이건 작가의 의견일 것이다. 이 구절을 읽자마자 서울 신x동에서 주임신부 하고 있는 내 친구 최xx에게 “넌 정말 하느님이 있어서 우리를 창조했다고 믿는 거냐, 아니면 인간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서 하느님을 만들어냈다고 믿는 거냐.” 라고 물어보려다가 그가 70%에 드는 정상적 사제이건, 30%에 포함되는 사제이건 간에 어떤 경우라도 좋은 대답은 못 듣겠다는 현명한 판단을 내려 전화해보지는 않았다. 어쨌거나 이건 매우 특별한 일이다. 20세기 초 벨에포크 시대의 전성기에 젊음을 보낸 작가가 이런 선언을 했다는 것이.
 이 책은 가톨릭 재단이 만든 중등교육과정인 콜레주를 무대로 하는 소년들의 성장소설이며, 자연스럽게 가톨릭 적 종교소설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어딘가 고집스럽고, 폐쇄적이며, 유아독존적이기도 한 드 프라츠 신부의 비종교적 신념은, 세월이 흐르면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시점까지 분명히 변화를 겪는데, 물론 어떤 변화인지 밝힌다면 틀림없는 스포일러로 작용할 것이라 여기다 쓸 수는 없지만, 그게 어느 작품보다 설득력 있게 다가와 읽기에 좋았다.
 전반적으로 읽는 재미는 있었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 때문에 주요 스토리에 대해서는 김이 샌 상태라 아쉬웠다.


 그래도 잊을 수 없는 명언 하나는 찾았다. 내가 고르는 명언이 다 그렇지 뭐. 큰 기대 하지 마시고 한 번 음미해보시라. 앞으로 자주 써먹을 예정.


 “원하지 않는 건 제공되고, 죽도록 원하는 건 잔인하게 거절된다. - 인간사 불변의 법칙” (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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