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사등 / 기항지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3
김광균 지음, 배선애 엮음 / 소명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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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4년 개성 출생. 그런데 놀라지 마시라, 열세 살인 1926년에 중외일보에 <가신 누님>을 발표했고, 열일곱 살 땐 동아일보에 <야경차夜警車>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스물다섯 살, 1938년에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설야雪夜>가 당선하면서 정식 시인의 칭호를 얻었으니 시에 관해서는 무척 조숙했다. 이어 스물여섯에 첫 번째 시집 《와사등》을, 해방 후인 1947년에 《기항지》를 낸 후 1952년부터는 동생의 사업을 이어받으면서 거의 시단에서 떠나다시피 했다 한다. 이 두 시집의 대표작들을 ‘원본비평연구’한 시집이 오늘 읽은 《와사등/기항지》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예비고사, 본고사 시험문제로 현대문학에 관해서는 거의 나오지 않아 시 읽기를 소홀히 했을 거 같았지만, 국어 교사들께서는 그렇기 때문에 다음에 나올 확률이 많다고 학생들을 무지하게 때려잡으며 현대시 공부를 시켰는데, 김광균, 김광섭 비슷한 시인들의 작품은 예외였다. 그래서 그냥 이름만 알고, 소위 ‘이미지즘’이란 장르로 기억하고 훅, 넘어갔다. 이런 시인들 가운데 생각나는 사람들이 <논개>의 변영로,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김춘수, 또 누구누구가 있었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나 기억나지 않는다.
  일단 시를 읊어보자. 맨 처음에 나오는 시 <오후의 구도(構圖)> 2연.


  천정(天井)에 걸린 시계는 새로 두 시
  하―얀 기적 소리를 남기고
  고독한 나의 오후의 응시(凝視) 속에 잠기어 가는
  북양항로(北洋航路)의 깃발이
  지금 눈부신 호선(弧線)을 긋고 먼 해안 위에 아물거린다.



  이어서 두 번째 시 <해바라기의 감상(感傷)> 2연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굴러 내리면
  시냇가에 늘어선 갈대밭은
  머리를 흩트리고 느껴 울었다.



  천정에 걸린 시계가 새벽 두 시를 시보하고 있는데,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나는 무엇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일까. 새로 두 시가 새벽 두 시, 맞지? 맞을 거다. 댕, 댕, 괘종시계의 시보를 하―얀 기적 소리라고 치고, 그럼 고독한 나의 사색 또는 ‘오후의 응시’가 ‘북양항로의 깃발’, 먼 수평선에서 크게 원호를 이루는 저 먼 먼 선박으로 향한다는 말씀? 아니어도 좋다. 아니면 어떤가. 그냥 뜻 없는 시어들이 모이고 모여 ‘고독한 나’가 방에 누워 사색에 잠긴 이미지 하나만 독자가 읽어주면 시인으로서는 만족할지도 모른다.
  두 번째 시에서는 한없는 은유의 아름다움. 보랏빛 들길 위에 황혼이 글쎄 굴러 내린단다. 이 때를 맞추어 시냇가에선 갈대들인 또 머리를 흩뜨리고 느껴 운다니. 김광균이야 뭐 애초부터 은유와 직유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시인인 걸 새삼스럽게 이 정도로 감탄하기는 이르다.
  그런데 나는 소위 ‘이미지즘’이란 것이 시인의 심상의 모습 말고 사물을 마치 한 장의 사진처럼 딱 찍어 놓은 듯한 회화적 이미지로도 읽었다. 사실 김광균의 시집은 처음 읽는 것이고 이전엔 조카 교과서에서 하나 정도 ‘설핏’ 읽었을 뿐으로 다소 생소했으나 이 시집을 읽으면서 아, 내 스타일, 다리를 치기도 했으니,



  동화(童話)



  내려 퍼붓는 눈발 속에서
  나는 하나의 슬픈 그림자를 찾고 있었다.


  조각난 달빛과 낡은 교회당이 걸려 있는
  작은 산 너머
  엷은 수포(水泡) 같은 저녁별이 스며 오르고
  흘러가는 달빛 속에선 슬픈 뱃노래가 들리는
  낙엽에 쌓인 옛 마을 옛 시절이
  가엾이 눈보라에 얼어붙은 오후.


  이 시는 두 편으로 구성된 <향수의 의장(意匠)>의 두 번째 편인데, 시인이 찾고 있던 슬픈 그림자를 낙엽이란 추억에 싸인 옛 시절의 얼어붙은 오후라는 회상 속 사진 또는 그림이라는 이미지에서 찾은 것은 아닐까 싶었다. 이런 그림 또는 사진 한 장은 <외인촌(外人村)>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1연만 인용해보자.


  하이한 모색(暮色)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山峽村)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驛燈)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루 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위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김광균의 시를 읽어보니 현대 시인이라면 그다지 즐기지 않을 단어인 ‘고독’, ‘슬픔’, ‘울음’ 같은 것들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있는데 그게 전혀 흉하지 않다. 아니다, 내가 읽기에 흉하지 않다. 전문가들의 시선을 모르겠고. 흉하기는커녕 한 컷의 사진, 한 장의 그림의 분위기를 이미 충분히 묘사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그런 분위기, 이미지로 애초에 단정하는 단어로 읽히기까지 한다. 시집 《와사등》이라면 대표시가 <와사등>이라 이 작품을 소개해주기 바라시겠지만, 대표시를 소개하면 출판사에게는 여지없이 큰 실례를 하는 것이라 안 되겠고, 이미 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린, 그래서 오히려 <와사등>을 젖히고 김광균의 대표 시로 알려져 있는 <추일서정(秋日抒情)> 전문을 읽어보자.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러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 가닥 꾸부러진 철책(鐵柵)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셀로판지(紙)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벌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올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半圓)을 긋고 잠기어 간다.



  세상에 이렇게 자유롭게 은유와 직유를, 심지어 거칠게 사용할 수 있다니. 뭐 요즘엔 이 시를 쪼개서 현미경을 통해 들여다보며 분석하고, 일률적으로 해석해가며 시험공부를 한다고 하니 학생들은 사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쌍하다. 그냥 읽으면서 좋으면 좋다, 아니면 아니다, 라고 단순하게 즐길 수 있으면…… 그게 요순시대라고?
  이제 내가 제일 잘 읽었던 시, 가장 공감했던 시를 소개한다. 그리고 이 시가 어떻더라, 라는 말없이 독후감을 끝낸다.



  반가(反歌)


  물결은 어데로 흘러가기에
  아름다운 목숨 싣고 갔느냐.
  먼―훗날 물결은 다시 되돌아오리
  우리 어데서 만나 손목 잡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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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사등 / 기항지 - 원본비평연구 민족문학사연구소 정본총서 3
김광균 지음, 배선애 엮음 / 소명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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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단장短章˝ 2연 첫 행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달은 어째 빅톨 씨 같은 얼굴을 하고˝ 여기서 빅톨 씨를 각주 30번으로 하고 설명 하기를, ˝러시아 문학가 빅토르 위고˝ 이거 읽고 웃다가 웃다가 기함을 했습니다. 이 양반이 언제 러시아로 이민 간 거야! 하고요. 별점은 각주와 관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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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영탑 : 현진건 장편소설 한국문학을 권하다 21
현진건 지음, 박상률 추천 / 애플북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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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애플북스의 ‘한국문학을 말하다’ 시리즈 스물한 번 째 책으로 시인이자 동화작가, 소설가, 역자 등등 안 하는 거 없는 문학인에다가 숭의여대 문예창작과 교수이면서 교과서 편찬위원까지 명함에 박고 다니는 58년 개띠 남자, 박상률이 추천한 작품이다. 이 시리즈는 책마다 누군가가 추천한 사람이 있는데 계용묵의 단편집 《백치 아다다》는 전석순이라고 하는 83년생 소설가, 김동인의 <젊은 그들>은 76년생 소설가 구병모 등등이 추천을 했고, 책 앞 부분에 추천인의 추천사까지 실었다.
  근데 놀랍게도, 하지만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추천인 박상률이 쓴 이 책의 추천사에 단 한 마디도 현진건의 <무영탑>을 이러이러한 이유로 추천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내 그럴 줄 알았다. 박상률. 시인으로 이름도 얻고, 문창과 교수로 지위와 안정된 수입도 얻고,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명예도 얻은 이 경박스런 문인은 자기 어렸을 적에 읽은 현진건의 단편소설들이 당시엔 요새 말로 19금 정도의 내용이었다고 우스갯소리로 꾸려나가기만 하고 <무영탑>이 왜 좋은 소설인지는 입도 벙긋하지 않는다. 이이가 읽어보긴 읽어보고 추천을 한 건가? 왜 그럴까 했더니, 같은 시리즈에 현진건 단편집 《운수좋은 날》이 있고, 거기에 쓴 추천사를 <무영탑> 추천사로, 그대로 복사해 옮긴 거다. 내 박상률의 시집 한 권을 읽자마자 책꽂이에 꽂는 대신 곧바로 쓰레기통에 쑤셔 박은 적이 있는데, <무영탑>을 끝까지 읽어보니까 박상률이라면 이 책을 추천하기에 충분한 양심을 가지고 있고, 추천사로 다른 책의 것을 복사해 올린 것도 능히 할 만한 인물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무영탑無影塔, 그림자 없는 탑은 ‘석가탑’의 다른 이름. 불국사에서 한 시오리 쯤 떨어진 그림자 연못, 영지影池라고 있었는데, 석가탑이 완공이 되면 영지에 탑의 모습이 그림자로 보일 것이라고 한 썩은 중놈이 말한 것을 그대로 믿은 아사녀가 기다리다 지쳐 못에 빠져 죽었고, 큰 공덕으로 다보탑과 석가탑을 다 짓고는 지어미 아사녀가 영지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신묘한 석수장인maestro 아사달 역시 슬픔을 이기지 못해 영지에 빠져죽은 비극적 전설을 가지고 있는 탑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전설은 딱 여기까지다. 일제에 조금도 협력하지 않아 비참한 가난에 시달리다 1943년에 장결핵으로 운명한 소설가 빙허 현진건은 여기에 있지도 않은 당대 최고 귀족, 이찬 벼슬을 하는 유종唯宗의 외동딸 주만珠曼을 등장시켜 지고지순한 부부간의 사랑의 틈을 파고들어 아사달을 죽기 살기로 사랑하게 만든다. 그래야 짧은 전설을 소설이 될 만한 스토리가 엮어질 수 있을 테니.
  시대는 바야흐로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도 근 한 세기가 흐른 경덕왕 만년. 앗, 경덕왕. 구라 아니고 우리나라의 역사책 <삼국유사>에서 틀림없이 나온 바, 경덕왕의 생식기가 무려 여덟 치. 익숙한 미터법으로 환산하면 8 * 3.3 = 26.4cm. 30cm 플라스틱 자 한 번 손에 쥐어 보시라. 얼마만한 길이인지. 놀랠 노자. 이게 그거냐? 작대기지. 그러나 이전 지증 마립간이 세운 한반도 최고 기록 한 자 다섯 치, 45cm에 비하면 이도 나지 않기는 했다. 지증 마립간은 참 고생했을 거 같다. 그걸 하루 이틀도 아니고 어떻게 평생을 달고 다니냐고. 하여간 경덕왕 만년의 사월 초파일부터 한가위 팔월 보름까지 통일 신라의 수도 서라벌의 대찰 불국사에서 벌어진 일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지 백 년이 지났건만 옛 고구려, 백제 땅의 신민들을 우습게 아는 서라벌 사람들의 심리가 밑에 깔려 있어서, 부여 고란사 부근 출신으로 신라 최대의 명찰 불국사에서 탑 쌓는 일을 맡은 젊은 아사달을 우습게 알고, 차별하고 싶어 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까탈을 잡고 싶어 하는 불국사의 중들도 나오고, 위에서 말한 것처럼 대갓집 따님 주만, 구슬아가씨도 나오고, 구슬아가씨를 얻기 위해 온갖 수를 다 쓰는 시중 금지의 아들 금성金城도 나와 하는 일마다 족족 얻어터지는 전형적인 악당을 맡고, 옛 화랑의 기개를 이어받은 헌칠한 기상과 넓은 도량, 높은 무공을 갖춘 금경신도 등장하는데, 물론 이런 조연들은 전부 허구다.
  부여에서도 마찬가지. 아사녀의 아버지이자 아사달의 장인father in law이고 장인maestro이며 스승인 부석과 그의 불량하기 이를 데 없는 다섯 명의 제자들을 등장시켜 기어이 아사녀로 하여금 부여에서 남편을 기다리지 못하고 온갖 억측을 안은 채 거지꼴을 해가면서 서라벌까지 천리 길을 가게 만든다. 그리하여 드디어 도착한 불국사에서 남편도 만나지 못하고 문전에서 쫓겨나 시오리, 약 6km나 떨어진 영지 위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보이리라는 말을 믿을 정도로 아사녀의 머리가 나쁘든지, 서라벌까지 오는 동안에 하도 먹지를 못해 뇌에 영양공급이 안 됐든지, 그래서 미쳤든지, 시절이 지금부터 1,300년 전이니까 전설의 시대라 온갖 미혹을 믿는 습성이 있든지를 정당화 시켜야 했을 것.
  빙허는 전설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여러 정황을 타당하게 만들고, 동시에 신문 연재소설이라는 한계 때문이라도 1938년 조선의 독자로 하여금 말초를 자극하게 해야 했을 것이다. 이걸 21세기의 대학 교수이며, 시인이며, 소설가이며, 동화작가이며, 삼국지 번역자(암만해도 나관중의 한문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 아니라, 우리말을 우리말로 번역한 거 같지만, 이건 엄연히, 확실히, 진짜 그랬다는 말이 아니라 그런 의문이 든다는 뜻이니 관계자 여러분께서는 법에 호소하시는 일이 없기를 바람)이며, 교과서 편찬위원인 박상률이 지난 시절의 우리나라 대표 소설작품이라고 추천을 했는지 그의 뇌 구조를 한 번 보고 싶다. 비록 빙허가 일제에 단 한 번의 협력도 하지 않고, 타협도 있지 않아 그의 거의 모든 작품이 당대엔 출판 금지 처분을 당했을지언정 <무영탑>은 정확하게 2류 아니냐는 말이지. 다시 한 번 말 하건데, 대학교수이자,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동화작가이자, 한문 번역자이자, 교과서 편찬위원인 추천인 박상률은 정말로 이 작품을 읽어보긴 한 건가?
  현진건의 놀라운 작품들은 단편에 있다.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박상률도 안다. <빈처>, <운수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술 권하는 사회> 등등. 빙허의 업적은 단편만 가지고도 충분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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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1:1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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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1: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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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3: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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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21 13: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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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 - 크툴루의 부름 외 1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7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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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다. 열흘만 빨리 읽을 것을. 비 내리는 주말 한 여름 밤, 이미 모두 잠 든 밤, 빗소리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 충일한 시간, 창으로 습한 바람이 훅훅 끼쳐올 때, 혼자 스탠드 불 아래 이 책을 읽고 있었다면 기분이 어땠을까. 가끔 뇌성벽력을 때려 약하게나마 창틀이 오그르르 우는 밤이면 더욱 어울렸을 것이고.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 책을 읽으면서 더 이상 읽고 싶지 않지만 도저히 그만 둘 수 없는 유혹적인 호기심. 이젠 마음에 때가 끼어 소스라치거나 오소소 소름이 돋는 일은 없었지만 내내 불길한 몽환 또는 즉물적 현상이 당장이라도 이 한 밤에 벌어질 것 같은 공포감. 하, 이런 느낌은 중학교 시절 영화 <엑소시스트> 보고 한밤의 골목길 걸어 집에 갈 때의 팽팽한 신경줄 이후 처음이다. 저 어둑한, 아니, 옻빛같이 깜깜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골목길의 한 구석에서 무엇인가가 내가 다가갈 때까지 도사리고 있다가 일시에, 순간적으로 확 달려들 것 같은, 결코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임은 확신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느껴야 했던 모종의 공포감, 혹은 두려움. 이 정도면 이해하시겠지. 그리하여 이 책을 읽는 것은 한 여름 밤을 위한 최고의 선택일 수 있다.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공포는 첫째가 지하, 두 번째가 죽음, 세 번째가 지구 외의 행성에서 오는 불길한 실제 형상에 관한 이야기의 형태로 표시된다. 나는 아파트 7층에 살고 있는데, 고층의 아파트에 사는 도시인임이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러브크래프트의 지하 세계에 관한 집착은 말 그대로 그로테스크하다.
  이이보다 한 세기 앞서 영국의 메리 셸리는 <프랑켄슈타인>이라는 생체 과학자를 등장시켜 이미 죽은 사람들을 얼기설기 꿰매 한 생명체를 만든 바 있으나, 이 새로운 생명체는 자기 번식 본성 또는 세상에 오직 혼자라는 외로움에 절망해 결국 극지방의 얼음나라로 향하는 운명이었으나, 러브크래프트가 만든 새로운 생명은 이것과 조금 다르다. 모두 열세 작품을 다 소개할 수 없어 <시체를 되살리는 허버트 웨스트>만 예로 하여 <프랑켄슈타인>을 소환했던 바, 이 작가는 죽음의 본질과 죽음을 인위적으로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가설을 세운 한 똑똑한 의과대학생이, 생명이란 근본적으로 기계작용에 의한 현상이란 전제, 즉 대단히 유물론적인 입장에서 시체를 소생시킬 수 있는 약물 개발을 하는 과정과 결과를 섬뜩하게 묘사하고 있다.
  의과대학생 허버트 웨스트는 “영혼이라는 건 신화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헤겔을 신봉한다. 그리하여 나름대로 생명을 소생시키는 화학물질을 개발하였으며, 대학 3학년 시절부터 죽음의 상태에서 다시 생명을 주는 실험을 하기 위해 무수한 실험동물을 학살해 드디어 헌신적인 의사이자 의대 학장인 앨런 할시 박사에 의하여 더 이상의 동물 생체실험을 금지당하고 만다. 화자 ‘나’는 일견 천재성이 돋보이는 웨스트와 동기이지만 기꺼이 그의 조수 노릇을 하여 실험에 참가했던 것인데, 이런 상황에 처하자 웨스트는 곧바로 어떻게든 신선한 인간 시체를 구해서 비밀리에 실험을 지속하고자 언덕 뒤에 버려진 농가에 수술실과 실험실을 마련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무 시체나 다 실험에 사용할 수 있는 게 아니라서, 서양인들이 흔히 하듯 죽은 다음에 방부처리를 한 시신은 결코 소생시킬 수 없으며, 죽은 후 시간이 지나 뇌와 장기에 치명적 상처를 입은 시신 역시 사용할 수 없어 될 수 있는 대로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묻힌 시신을 찾기에 이르러 실험실 역시 공동묘지에 인접한 장소, 인적이 드문 곳으로 물색을 했던 것.
  어때, 으스스하시지?
  그러다가 마침내 젊고 건장한 노동자가 연못에서 익사한 사건이 벌어진다. 이 건장한 체격의 젊은이는 연고가 없어 시 당국에 의하여 방부처리하지 않고 당일 곧바로 공동묘지에 매장을 하는데, 마침 칠흑 같은 밤중이라 웨스트와 ‘나’는 회색 눈과 갈색 머리카락을 한 젊은 시신을 묘지에서 꺼내 실험실로 운반한 다음, 시신의 팔 정맥에 다량의 시약을 주사 하고나서 주사를 위해 절개한 부분을 깔끔하게 봉합을 한다. 45분이 지나도 반응이 없자 다급한 마음에 옆방으로 가서 또 다른 시약을 조제하고 있을 때, 어두컴컴한 실험실에서 터져 나온, 평생 들어본 적 없는 무시무시하고 귀기 어린 비명이 들려온다. 현세의 생명체들이 느끼는 온갖 초월적 공포와 기괴한 절망을 압축한 듯한 비명, 인간일 리 없고, 인간이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닌 끔찍한 비명이 들려, 웨스트와 ‘나’는 갑자기 엄습하는 공포를 이겨내지 못하고 창문을 뛰어넘어 오두막을 탈출해 시골길을 미친 듯이 내달린다.
  다음날, 학교를 결석하고 하루 종일 잠에 빠져 있다가 오후에 신문기사를 보니, 체프먼 농가에서 원인모를 화재로 농가가 전소되었으며 무연고 묘지의 새 무덤이 손으로 긁은 것처럼 망가져 있더란 기사가 실렸다. 이후 지금은 실종 상태인 웨스트는 17년 동안 누군가 뚜벅뚜벅 자신을 쫓아오는 환청이 들린다며 종종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생겨버렸다.
  16년 전에, 러브크래프트의 소설 속에서 주요 무대가 되는, 아컴 지역 전역에 장티푸스가 창궐해 웨스트와 ‘나’는 미스캐토닉 대학의 여름학기를 수강하다가 장티푸스와의 싸움에 투입되기에 이른다. 이 때 가장 영웅적으로 역병과 사투하던 인물이 바로 헌신적인 의사이자 의과대학장인 할시 학장. 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와중이라 감시가 소홀한 틈을 이용해 시신 한 구를 대학 해부실로 밀반입하는데 성공한 이들은 또다시 시약을 주사했으나 잠깐 눈을 뜨게 만드는 것까지는 성공하고 곧바로 다시 기능을 상실하는 경험을 한다. 이 때 8월 14일, 할시 박사가 갑작스럽게 운명을 하고 15일에 장례를 치룬다. 16일 새벽 두 시에 웨스트의 하숙방에는 또다시 시신의 정맥에 시약을 주사하는 행위가 있었고, 세 시에 극한의 비명과 더불어 웨스트는 폭행을 당해 기절한 상태로 발견이 된다.
  이날부터 두 번째 공포가 시작한다. 크라이스트처치 공동묘지 경비원이 발톱 같은 것으로 살해당해 갈가리 찢겨 죽음을 당했고, 괴물이 등장해 총 여덟 집이 습격을 받아 사납게 찢어진 시신이 17구에 달했는데, 가까스로 살아남은 목격자에 의하면 기형 유인원이나 인간 형상의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고 했다. 셋째 날 경찰이 이끄는 수색대가 기어이 괴물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급박한 상황이라 발포를 해, 총을 맞았음에도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괴물 또는 범인을 세프턴 정신병원에 수용을 하고 이후 16년 동안 완충제로 벽을 둘러싸 자해를 막는 특별 방에 수감시키다가 최근에 병원에서 탈출한 범인 또는 괴물이 하필이면 할시 박사와 비슷한 모습이었다는 것이 관계자의 증언이었다.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냐고? 아니다. 이제 반 정도 왔을 뿐이지만 결론은 안 가르쳐드린다.
  하여튼 공포, 괴기 장르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강력 추천이다. 이런 분들은 정말 한 번 읽어보시라. 지하, 깊고, 깊고 어두운 암흑의 지하, 수없이 많은 생명들이 묻혀있는 곳에서 스며 나오는 불길한 연기와 녹색의 끈적거리는 액체, 정신을 잃을 것 같은 부패의 악취. 그 속에 존재하는 또는 존재할 지도 모르는 악령이랄까, 근원적인 죽음의 실체랄까, 그런 것들이 당신의 꿈자리까지 뒤숭숭하게 만들 터인데, 독자에 따라서는 이런 장르를 선호하기도 하니, 이게 바로 사람살이겠지. 하여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그래 별점 하나 정도는 뺄 것이지만, 여름밤에 읽기에 가히 <구미호> 이야기보다 몇 배 으스스, 오소소 소름 돋는 건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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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봄 한국문학대표작선집 15
김동인 지음 / 문학사상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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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부자의 아들로 태어난 김동인에 대하여는 새삼스레 이야기를 보탤 필요가 없을 터이다. 운현궁이 경운동 덕성여대 옆에 있던 궁으로 후에 대원군이 들어와서 살던 집인 줄 알았는데 책을 읽어보니까 애초 흥선군의 집이었다가 개똥이, 명복이, 재황이라는 이름을 쓴 이이의 둘째아들이 조선의 스물여섯 번째 왕이 되고난 연후에 살던 집을 운현궁이라 불러라, 라고 헌종의 어머니, 순종의 며느님이자 익종(헌종의 아버지이지만 일찍 세상을 떠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의 지어미인 신정왕후 풍양 조씨가 집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최근에 운현궁에 가 본 것이 딱 40년 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길 건너 가톨릭 대학과 천도교 본부 건물, 수운회관이던가 하는 게 있던 것만 생각난다.
  외국 소설만 읽다가 우리 작가가 쓴 소설을 읽으면 아주 재미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번에도 그렇다. 비록 소설문학으로의 <운현궁의 봄>이 그렇게 높이 평가할 만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19세기 중반에 왜소한 체격 그러나 웅대한 야망을 갖고 있던 한 천재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갖은 모욕과 냉대와 멸시를 견디는 과정, 그러나 이미 거의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나열한 책을 읽는 일이 어찌나 즐거웠는지.
  이 작품은 흥선군 이하응의 독무대다. 책은 무술년 이월 초이틀,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쓰자면 1898년 2월 22일 화요일, 운현궁에서 흥선 대원군이 79세를 일기로 서거하는 것으로 시작해, 갑자기 장면을 전환, 파락호 시절 섣달그믐 대목을 이틀 앞두고 돈을 얻으러 갔다가 술동무를 만나 기생집에 들러 술에 취해 갈지자도 아니고 쉬엄쉬엄 갈 착辵 자처럼 밤길을 가다가 사납게 덤벼드는 개에게 호통을 쳐 물리치는 장면으로 넘어가, 둘째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기어이 돈도 쌀도 없이 빈손으로 귀가해 가장의 낯이 서지 않은 하응은 다음날 기필코 설 떡살이라도 준비할 여량을 얻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선다.
  하응의 신세야 다들 아시다시피 상갓집 개, 파립폐의破笠敝衣, 깨진 갓과 남루한 옷을 입고 위세 떠는 양반집의 잔치나 상가나 회식이나 어디건 먹을 것만 있으면 상감의 친척 아저씨라는 종실의 자격으로 한 자리를 꿰 차고 우적우적 씹지도 않고 술과 안주를 없애버리는 것으로 호가 난 인물. 내일이 당장 섣달그믐, 어디서 돈이나 좀 구할까 싶어 들른 곳이 권문 팽경장彭景長의 집. 팽의 사랑엔 벌써 사람들이 그득 차서 집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 한 마디에 방바닥을 치고 따라 웃느라, 상감의 먼 친척 아저씨가 왔는지 어쨌는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긴 농담이 끝난 연후에야 팽경장의 한 마디에 이놈 저놈이 한 푼씩 보탠 엽전 스무 닢을 하응의 무릎 앞에 뿌려 던져주는 것으로 종친의 얼굴에 진한 먹칠을 해버리고 만다.
  팽경장의 집을 뛰어 나온 흥선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지만 이런 모멸이 이젠 습관이 되어 잠시 뒤로 돌아 눈을 꾹 감고 있는 것으로 분을 풀고 있는 순간 물렀거라, 행차시다, 벽제 소리에 이어 사인교를 타고 있는 대감이 있었으니 영초 김병학. 흥선의 일생에 가장 많은 모욕과 멸시를 준 안동김씨 세력의 일원으로 현 좌장인 김좌근의 조카. 김병학은 안동김씨 일문의 대표적 비둘기파라서 (수모를 받아 흥분한) 흥선을 보자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술과 음식을 실컷 먹이고, 술주정까지 다 받아주고는 자신의 비단보료 위에서 잠까지 재우고난 다음, 흥선의 옷을 벗기고 갓, 버선, 대님, 허리띠, 주머니 등 의복 일습을 마련해 입고 가라 하는데, 와우, 무려 비단옷이다.
  이왕 신세진 김에 돈 좀 염량해달라고 할까 하다가 벼룩이도 낯짝이 있어 그러지 못하고 비단옷을 입은 채 빈 손으로 집으로 가, 염치가 없어서 몰래 사랑방에 들어갔더니, 이것이 무슨 일인지, 겨울 들어 늘 냉골이었던 사랑방이 훈훈하게 불이 때져 있고 아랫목에 비단 보료와 안석, 장침, 사방침이 깔리고 놓여 있는 거 아니냐. 얼른 비단옷을 평복으로 갈아입고 안뜰로 슬쩍 가보니까 또 하인들이 과세(해를 넘김)하기 위해 음식을 차리느라 마당이 북적북적하다. 안방에 들자 어진 아내 여흥 민씨가 개똥이 이재황이와 함께 있어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랬더니 민씨 하시는 말씀이, 사동 김판서, 그러니까 자기한테 술과 고기를 주고 술 취한 하응을 자기 보료 위에서 재우고, 비단 옷 일습까지 선사한 김병학이 과세나 하라고, 흥선이 자는 사이에 하인들을 보내, 금전, 미곡, 생필품 몇 짐(지게로 지고 왔나보다) 등 당분간 생활에 필요한 물품 모든 것을 보내주었단다. 아무리 안동김씨의 한 자락이라도 이 아니 고마울 수 있을까.
  알고 보니 흥선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원한은 기억할 필요가 없으나,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삶의 신조로 여긴다는 점. 여차하면 위리안치나 사약 혹은 참형 등으로 멸문지화를 당할 안동김씨는 김병학과 친형제 김병국이, 흥선의 젊은 시절에 베푼 호의 덕으로 구사일생 가문의 맥을 잇는 것은 물론이요 더 높은 자리로 승차할 수도 있었으니, 사람들아, 평소 마음 곱게 쓰면 언젠가는 복 받느니라.
  <운현궁의 봄>은 정일품 현록대부 흥선군 이하응을 위한 용비어천가다. 유일한 영웅이자 놀라운 지략과 동네 깡패의 다리 사이를 기어가는 한신을 능가하는 인내와 기다림의 사나이. 적당히 통속적이고 적당히 교훈적이지만 결코 이광수처럼 독자를 가르치려들지는 않는 글 잘 쓰는 김동인의 작품. 이 책 역시 진즉에 읽어볼 것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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