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현궁의 봄 한국문학대표작선집 15
김동인 지음 / 문학사상사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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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양 부자의 아들로 태어난 김동인에 대하여는 새삼스레 이야기를 보탤 필요가 없을 터이다. 운현궁이 경운동 덕성여대 옆에 있던 궁으로 후에 대원군이 들어와서 살던 집인 줄 알았는데 책을 읽어보니까 애초 흥선군의 집이었다가 개똥이, 명복이, 재황이라는 이름을 쓴 이이의 둘째아들이 조선의 스물여섯 번째 왕이 되고난 연후에 살던 집을 운현궁이라 불러라, 라고 헌종의 어머니, 순종의 며느님이자 익종(헌종의 아버지이지만 일찍 세상을 떠 왕위에 오르지 못한 세자)의 지어미인 신정왕후 풍양 조씨가 집의 이름을 정했다고 한다. 내가 가장 최근에 운현궁에 가 본 것이 딱 40년 전.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길 건너 가톨릭 대학과 천도교 본부 건물, 수운회관이던가 하는 게 있던 것만 생각난다.
  외국 소설만 읽다가 우리 작가가 쓴 소설을 읽으면 아주 재미있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번에도 그렇다. 비록 소설문학으로의 <운현궁의 봄>이 그렇게 높이 평가할 만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19세기 중반에 왜소한 체격 그러나 웅대한 야망을 갖고 있던 한 천재가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갖은 모욕과 냉대와 멸시를 견디는 과정, 그러나 이미 거의 다 알고 있는 내용을 나열한 책을 읽는 일이 어찌나 즐거웠는지.
  이 작품은 흥선군 이하응의 독무대다. 책은 무술년 이월 초이틀, 현대인들이 알기 쉽게 쓰자면 1898년 2월 22일 화요일, 운현궁에서 흥선 대원군이 79세를 일기로 서거하는 것으로 시작해, 갑자기 장면을 전환, 파락호 시절 섣달그믐 대목을 이틀 앞두고 돈을 얻으러 갔다가 술동무를 만나 기생집에 들러 술에 취해 갈지자도 아니고 쉬엄쉬엄 갈 착辵 자처럼 밤길을 가다가 사납게 덤벼드는 개에게 호통을 쳐 물리치는 장면으로 넘어가, 둘째 아들이 왕위에 즉위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기어이 돈도 쌀도 없이 빈손으로 귀가해 가장의 낯이 서지 않은 하응은 다음날 기필코 설 떡살이라도 준비할 여량을 얻기 위해 다시 집을 나선다.
  하응의 신세야 다들 아시다시피 상갓집 개, 파립폐의破笠敝衣, 깨진 갓과 남루한 옷을 입고 위세 떠는 양반집의 잔치나 상가나 회식이나 어디건 먹을 것만 있으면 상감의 친척 아저씨라는 종실의 자격으로 한 자리를 꿰 차고 우적우적 씹지도 않고 술과 안주를 없애버리는 것으로 호가 난 인물. 내일이 당장 섣달그믐, 어디서 돈이나 좀 구할까 싶어 들른 곳이 권문 팽경장彭景長의 집. 팽의 사랑엔 벌써 사람들이 그득 차서 집 주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별로 우습지도 않은 농담 한 마디에 방바닥을 치고 따라 웃느라, 상감의 먼 친척 아저씨가 왔는지 어쨌는지 전혀 신경도 쓰지 않는다. 긴 농담이 끝난 연후에야 팽경장의 한 마디에 이놈 저놈이 한 푼씩 보탠 엽전 스무 닢을 하응의 무릎 앞에 뿌려 던져주는 것으로 종친의 얼굴에 진한 먹칠을 해버리고 만다.
  팽경장의 집을 뛰어 나온 흥선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지만 이런 모멸이 이젠 습관이 되어 잠시 뒤로 돌아 눈을 꾹 감고 있는 것으로 분을 풀고 있는 순간 물렀거라, 행차시다, 벽제 소리에 이어 사인교를 타고 있는 대감이 있었으니 영초 김병학. 흥선의 일생에 가장 많은 모욕과 멸시를 준 안동김씨 세력의 일원으로 현 좌장인 김좌근의 조카. 김병학은 안동김씨 일문의 대표적 비둘기파라서 (수모를 받아 흥분한) 흥선을 보자 자기 집으로 데려가 술과 음식을 실컷 먹이고, 술주정까지 다 받아주고는 자신의 비단보료 위에서 잠까지 재우고난 다음, 흥선의 옷을 벗기고 갓, 버선, 대님, 허리띠, 주머니 등 의복 일습을 마련해 입고 가라 하는데, 와우, 무려 비단옷이다.
  이왕 신세진 김에 돈 좀 염량해달라고 할까 하다가 벼룩이도 낯짝이 있어 그러지 못하고 비단옷을 입은 채 빈 손으로 집으로 가, 염치가 없어서 몰래 사랑방에 들어갔더니, 이것이 무슨 일인지, 겨울 들어 늘 냉골이었던 사랑방이 훈훈하게 불이 때져 있고 아랫목에 비단 보료와 안석, 장침, 사방침이 깔리고 놓여 있는 거 아니냐. 얼른 비단옷을 평복으로 갈아입고 안뜰로 슬쩍 가보니까 또 하인들이 과세(해를 넘김)하기 위해 음식을 차리느라 마당이 북적북적하다. 안방에 들자 어진 아내 여흥 민씨가 개똥이 이재황이와 함께 있어 이게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랬더니 민씨 하시는 말씀이, 사동 김판서, 그러니까 자기한테 술과 고기를 주고 술 취한 하응을 자기 보료 위에서 재우고, 비단 옷 일습까지 선사한 김병학이 과세나 하라고, 흥선이 자는 사이에 하인들을 보내, 금전, 미곡, 생필품 몇 짐(지게로 지고 왔나보다) 등 당분간 생활에 필요한 물품 모든 것을 보내주었단다. 아무리 안동김씨의 한 자락이라도 이 아니 고마울 수 있을까.
  알고 보니 흥선의 장점 가운데 하나가 “원한은 기억할 필요가 없으나, 은혜는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삶의 신조로 여긴다는 점. 여차하면 위리안치나 사약 혹은 참형 등으로 멸문지화를 당할 안동김씨는 김병학과 친형제 김병국이, 흥선의 젊은 시절에 베푼 호의 덕으로 구사일생 가문의 맥을 잇는 것은 물론이요 더 높은 자리로 승차할 수도 있었으니, 사람들아, 평소 마음 곱게 쓰면 언젠가는 복 받느니라.
  <운현궁의 봄>은 정일품 현록대부 흥선군 이하응을 위한 용비어천가다. 유일한 영웅이자 놀라운 지략과 동네 깡패의 다리 사이를 기어가는 한신을 능가하는 인내와 기다림의 사나이. 적당히 통속적이고 적당히 교훈적이지만 결코 이광수처럼 독자를 가르치려들지는 않는 글 잘 쓰는 김동인의 작품. 이 책 역시 진즉에 읽어볼 것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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