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와 준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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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태어나 가난하게 살던 작가 헨리 밀러가 우리 나이 마흔 정도 먹었을 때 머문 곳은 프랑스 파리였다. 밀러가 1891년생이니 마흔이면 1930년. 이때 그는 평생의 역작이자 당대 최고의 외설문학이자, 이젠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죽기 전에 꼭 읽어봐야 할 책 1,001 권에 드는 <북회귀선>을 쓰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북회귀선>을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미국 출신의 한 룸펜 프롤레타리아 인텔리겐치아가 파리에서 글을 씁네, 하며 빌빌거리는 이야기로 미국에서 아내가 보내주는 용돈으로 밥과 술을 먹고 여자를 사는 모습을 밀러 특유의 문명, 문화에 대한 세계관에 입각한 길고 긴 에세이 비슷하게 만든 소설이다.
 이이가 실명으로 등장하는 소설. 헨리 밀러와 그의 처, 준. 밀러의 파리 시대에 스물아홉 살 먹은 스페인, 프랑스 혼혈인 여류작가 아나이스 닌이 밀러 부부와 가깝게, 몸과 마음이 동시에 가깝게 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나이스가 11세 때부터 줄기차게 일기를 써 왔으며, 나름대로 작가라는 이름을 갖고 활약을 했다 한다. 무수하게 많은 일기를 썼는데, 특히 밀러 부부와 인연을 맺은 1930년대 초반에 가장 왕성하게 일기를 쓴 것까지는 좋았다. 개인 일이니까. 하지만 ‘작가’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은, 자신이 쓴 문장들을 누구에겐가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다는 것. 아나이스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아나이스 닌 재단 담당자인) 루퍼트 폴이 쓴 이 책 <헨리와 준>의 서문에 의하면, 1966년에 남편의 이름과 애인, 즉 정부情夫 부분을 삭제하고 처음 출간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급기야 모든 사람의 실명 이름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게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어보면 인체의 각 부분을 칭하는 단어를 숨김없이 사용한다. 같은 장면이라도, 지금 시선이라면 그렇지 않겠지만 외설이라 시비를 걸만한 문장도 많다. 이런 밀러, 그리고 당시 외설논란의 중심에 있던 D.H. 로렌스에게 영향을 깊숙이 받은 아나이스 닌의 일기, 더구나 내밀한 자신만의 글쓰기인 일기에서는 더욱 노골적인 묘사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이 한편 당연하기도 하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밀러의 작품, 그것도 밀러가 조금 더 나이 들어 쓸 작품이 아닌, 초기 히트작 <북회귀선>의 초고에 당연히 충격을 받고 매우 신선하다고 느꼈으며 심지어 깊숙하게 영향까지 받은 아나이스는, 작중 인물과 헨리 밀러 자체를 혼동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필요 이상으로 (띠 동갑인) 헨리 밀러에게 얽히는, 즉 의도된 자유상태로 스스로를 몰고 간 것이 아닌지, 책을 읽는 내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북회귀선>을 읽어보면 정말 매력적인 책인 걸 단박에 알게 되리라. 헨리 밀러는 오랜만에 입장권을 훔쳐서 음악회에 잠입해 몽롱한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드뷔시의 곡까지 진행되고 있을 무렵에는, 분위기가 아주 혼탁해지고 있다. 나는 자신이, 만일 내가 여자였다면 성교性交 중에 어떤 기분이 들까, 쾌감은 여자 쪽이 더 예민할까…… 라는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북회귀선》 문학세계사 1991 김진욱 옮김. 90쪽)


 야수파 마티스의 그림 속에서는 이런 것도 찾아본다.


 “햇빛은 파열된 직장直腸처럼 출혈한다. 이 망가진 차륜의 바퀴통에 마티스가 있는 것이다” (같은 책 179쪽)


 당시가 1930년대 초반. 이런 놀라운 감각과 묘사력과 상상 속에서 배회하는 헨리 밀러를 아나이스 닌은 천재라고 규정해버리고 만다. 위에서 얘기했듯 이미 자신의 삶 자체를 ‘문학적’으로 연출하기로 작정한 아나이스는 충실한 남편 휴고가 있음에도 몇 명의 애인을 두었는데, 책에선, ① 예전부터 관계를 맺었으나 자주 발기부전 증상을 보이는 존, ② 사촌형제로 가끔 한 침대에 들지만 그때마다 근친상간에 관한 의혹을 받아 영 께름칙한 에두아르도, ③ 인터코스가 아니라면 유사성행위라도 꼭 해야 본전을 뽑는 기분이 드는 소설가 드레이크와 불륜으로 얽혀 있다. 이 와중에 1931년 12월, 드디어 헨리 밀러를 만난다. 원래부터 DH 로렌스를 즐겨 읽고 탐구해왔던 닌에게는 모르긴 해도 밀러의 특이한 문화, 문명비판과 성에 대한 의식 같은 건 아주 매혹적으로 다가왔으리라. 거기다가 책의 초반에 밝혀지듯이, 어려서부터 아버지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라서 나이든 남자의 사랑에 관심을 두는 심리상태 또는 성향이 있다고 신경정신과 전문의가 숱하게 얘기하기도 하고, 심지어 나이든 그 의사의 키스를 받기도 하는데, 자신과 띠 동갑, 아나이스가 보기엔 듬직한 나이까지, 갖출 것은 다 갖춘 인물이 바로 헨리. 이들은 곧바로 몸의 잔치로 빠져든다. 아나이스가 비록 진심을 다해 남편을 사랑하지만 침대 위에선 오소독스한 섹스만을 고집하던 부부 사이도, 아나이스-헨리의 기법, 소위 침대 테크닉이 더해져 한층 윤택한 커플로 발전하게 됨은 물론이고, 헨리의 매혹적인 아내 준과 아나이스마저 동성애 바로 바로 전단계로 접어든다. 그러니까 아나이스는 밀러 부부 두 명과 동시에 연애를 하고 있거나 하고 싶어 한다는 말. 여기서 말하는 연애는 몸과 몸의 사랑을 일컫는 것일 뿐, 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즉 정신적 유대관계는 부부 둘 다를 사랑하고 동시에 같은 이유로 질투한다는 뜻이다.
 그냥 이게 다다. 어찌하여 준이 헨리의 곁을 일정 기간 떠나게 되고 그때, 아이고 이런 천우신조가 있나 그래, 아나이스는 헨리와 헨리의 친구 프레드가 같이 쓰고 있는 아파트에 번질나게 드나들며 심지어는 프레드가 훤히 보고 있는 와중에 라이브 쇼도 구경시키기도 하고, 하여간 질퍽하게 놀아난다. 사랑타령이 이어지고, 독자(특히 남성 독자인 ‘나’의 경우)는 헨리의 사랑타령이 점점 수상하게 보이는데 그건 <북회귀선>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헨리 밀러 자신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이기적이며 난장판의 성격을 가진 인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서서히 밀러가 아나이스를 ‘이용’하여 그녀의 재산과 몸과 열정을 착취하기 위해 사랑을 하는 것인지 궁금해지기 시작하지만, 이건 전적으로 읽는 사람마다 다 다를 것이니 굳이 강조할 것은 없다. 몇 명과 동시에 사랑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빠져드는 딜레마가 바로 질투. 사랑과 질투와 문학을 빙자한 로맨스가 난교를 맺는 작품. 초판이 나온 1960년대 중반엔 모르겠지만 50년이 넘어 지난 지금 <헨리와 준>이 특별한지 그건 모르겠다. 만일 이 독후감을 읽는 당신이 아직 <북회귀선>과 <헨리와 준>을 다 경험해보지 않았다면 <북회귀선> 하나만 읽어도 충분할 것 같은 기분 (솔직해서 미안합니다).
 헨리 밀러가 사실은 나약하고 우유부단하고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인간이란 걸 알고 읽으시면 한 유부녀의 ‘사랑’이 사람을 어떻게 왜곡시켜 볼 수 있게 만드는지, 놀라운 착시현상까지 보실 수 있을 터.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은

 

 

 이렇게 두가지 번역이 있다. 아니, 동서문화사에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이 한 권에 든 두꺼운 책도 있는데 그 출판사에 대한 별로 좋지 않은 소문 때문에 권하지 않는 편. (소문이다, 소문. 진짜가 아니라. 오해 금지!)

 하여간 김진욱과 정영문 번역은 둘 다 문학세계사에서 나왔고, 아이고, 사이도 좋지, 나란히 절판이다. 난 김진욱 번역을 가지고 있다. 굳이 읽어보시려면 중고책을 선택하시든지, 아니면 그래도 번역 매끄럽고 동시에 <북회귀선>과 <남회귀선>을 다 읽을 수 있는 동서문화사를 선택하는 방법이 있다. <북회귀선>은 야하고 좋은데 <남회귀선>은 (전적으로 내 의견으론) 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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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31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정말 지루....하지요...? -_-;;; 그런 자극적(?)인 소재를 갖고 이렇게 지루하게 쓸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 모범 사례라고나 할까요... 작가는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Falstaff 2018-01-31 10:24   좋아요 0 | URL
자기 일기를 쓸 때부터 언젠가 대중에게 발표할 작정을 하고 썼다는 데 만원 겁니다. 그러니 자의식과 감정 같은 것이 과도하게 나타날 수밖에요. 길기만 하고 재미라고는 하나도 없다아아아아고 얘기하면 실례일지 모르겄습니다. ^^;

레삭매냐 2018-01-31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에 7년 전에 독서모임에서 읽은 책인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네요.

버거웠던 독서로 기억합니다만.

Falstaff 2018-01-31 13:12   좋아요 0 | URL
흑, 제 생각으로 말씀드리자면, 지금 다시 읽으셔도 버거우시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ㅠㅠ 이거 읽느라고 꼬박 이틀 걸렸는데, 고생 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