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두발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카렐 차페크 지음, 권재일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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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찍이 카렐 차페크의 팬이 되기를 선언한 바 있다. 처음 읽었던 <도롱뇽과의 전쟁>에서 시작해 <곤충극장>에 실린 드라마 세 편으로 나는 그의 세계관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어제는 그가 쓴 동화집 <작은 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의 독후감을 올렸고 오늘도 <호르두발>을 읽은 독후감을 쓰기에 이른다.
 역시 차페크.

 

 먼저 출판사 이야기부터. 출판사 이름이 “지식을만드는지식”이다. 띄어쓰기를 해야 하는지 아닌지 애매해서 책을 온통 뒤졌더니 맨 마지막 쪽에 출판사 이름이 “지식을만드는지식”(아우, 자판 두드리기 힘들어, 앞으로 ‘지만지’라고 함)이며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에 있단다. 책 고르다보면 숱하게 보이는 출판사로 굳이 특징을 들자면, ① 이 회사에서 찍은 책이 과연 책 전문全文인지 발췌본인지 확신이 가지 않으며, 그건 ② 나이 들어 글자 읽기 불편한 노인들을 위한 출판사처럼 소위 “큰글씨책” 시리즈의 사이즈도 큰 책을 내기도 하는 걸로 미루어, 글씨가 크니까 혹시 발췌본이 아닐까라는 선입견을 주는데다가, 진짜로 “천줄읽기”란 희한한 요약본도 활발하게 만들고, ③ 무엇보다 책값이 경악할 수준으로 비싸다는 것. 이 책도 (직접 한 번 재보자. 가로 127mm, 세로 182mm) 작은 판형의 보통 활자체로 꾸민 것으로 본문, 해설, 역자소개, 판권 등을 모두 합해 딱 300 쪽의 평범한 책임에도 불구하고 얼마를 주고 샀느냐 하면, 18,520원. 정가가 무려 19,500원인데 여기서 딱 5% 할인해준다. 그런데 왜 이 출판사를 눈여겨볼 수밖에 없느냐 하면, 뭐겠어, 당연하지, 이 출판사 말고는 읽어볼 수 없는 유명한 작품들을 찍는다는 거. 이 책도 20세기엔 “리브로”란 출판사에서 찍었지만, 소위 차페크 3부작(<호르두발>, <유성>, <평범한 인생>)을 낸 다음, 곧바로 망했다. 그 가운데 <호르두발>을 지만지에서 골라 다시 찍었으니 지만지 아니었으면 차페크를 제대로는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시험 삼아 한 번 사서 읽어본 것. 결과는 합격. 요약본이라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앞으로 지만지 책을 가끔 사볼 것인데, 전적으로 ‘가끔’인 이유는 당연히 너무 비싸서 그런 거다. 벌써 한 권 찍어 놨다. 어떤 책인지는 올해 안으로 아실 수 있을 듯.
 얼마나 비싼지 한 번 비교해 봐? 동서문화사에서 나온 찰스 디킨스의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2월 중에 읽으려 샀는데, 큰 판형의 보통 글씨, 1,120쪽, 1kg 더하기 8g의 무게, 이 책의 정가가 16,000원, 판매가가 10% 깎아서 14,400원. 물론 동서문화사는 나로 하여금 예전 해적판인데 해적질 한 시기가 너무 오래전이라서 합법적으로 저작권을 지불하지 않으며, 일어 중역의 의심(저작권 포함해서 이것까지 몽땅 의심이다, 의심. 확실하다는 게 아니고!)을 일으키는 시리즈이긴 하지만, 하여간 그렇다는 거.
 책은 참 잘 만들었다. 이게 지만지가 공을 들인 건지, 아니면 전에 같은 텍스트를 찍었던 리브로가 처음부터 소위 심혈을 기울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오탈자 거의 없고(있긴 있다), 편집 깨끗하다. 이걸로 출판사 및 하드웨어로의 책 소개는 끝. 이젠 작품 이야기로 들어가보자.

 

 호르두발은 사람의 이름이다. 유라이 호르두발. 아메리칸 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건너가 탄광에서 8년 동안 미친 듯이 일을 하고 이젠 무려 700달러(당시론 거금)를 주머니에 넣고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올라 있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정말 위험한 작업도 무릅쓰고 개처럼 벌어 돈 생길 때마다 고향의 (자신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아내 폴라나에게 송금을 하다가, 같이 탄광에서 일을 하던 동료가 죽은 후엔 (호르두발은 글자를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인데)꼬박꼬박 은행에 저금을 해 3,000달러를 모았지만 한 방에 사기를 당해 몽땅 잃고, 다시 힘을 내 700달러를 벌어 금의환향의 길에 올랐으니 꿈엔들 잊힐까, 사랑하는 아내와 딸 하피에를 만난다는 즐거운 설렘이여. 그러나 행복은 결코 현실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 전적으로 호르두발의 시각에 의하여 씌어진 1부를 읽는 일은, 대단히 아름다운 문장과, 인간 본성을 바라보는 작가의 객관적인 듯하면서도 넉넉한 시선에도 불구하고, 독자로 하여금 끝 모를 안타까움의 손톱을 깨물게 한다. 그리하여 읽다가 잠시 책을 내려놓고, 다시 읽다가 잠깐의 산책을 하게 만들고, 또다시 읽다가 한숨을 한 번 쉬게 만든다. 한 선한 인간의 마음을 문자로 적는 일. 지나간 8년의 세월을 옆에서 보고 들은 사람들의 객관적인 상황설명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람을 향한 믿음을 잃지 않으려 다시 생각하고 또다시 생각하고, 그리하여 믿고 싶은 것을 기어이 믿는 호르두발의 슬픈 이야기, 그걸 읽는 건 참 쓸쓸한 일이다. 독자로 하여금 가슴의 한 부분이 비어져가는 느낌이 들게 하는 소설.
 하지만 2부로 넘어가면 상황이 급변하는데, 나는 어떻게 변하는지 알려주고 싶지 않다. 인간이 도롱뇽과 전쟁을 하고, 딱정벌레와 나비들이 사랑과 투쟁을 하며, 한 소프라노 가수가 300년을 사는 이야기와 흑사병이 아닌 백사병이 창궐하는 시대를 만들어낸 작가가 사람 사는 모습도 이렇게 아름답고 쓸쓸하게 쓸 수도 있다니. 여전히 카렐 차페크를 읽는 일은 내게 대단한 즐거움이다.

 

 지만지가 만든 다른 책들의 수준이 이 <호르두발>과 균일하게 같다면, 천정부지의 책값도 (전혀는 아니고, "조금")아깝지 않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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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8-01-17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이 작품 마지막에 정말 가슴 미어지는 줄......;;

지만지가 요즘 찍어내는 책 (예전 연두색 양장 말고 하얀색 책)은 괜찮은 것 같아요. 무시무시한 가격 때문에 저는 거의 도서관에 주문 신청해서 빌려 읽었지만 하얀색으로 나온 책들 가운데 실패한 책은 아직은 없네요. 차페크의 <별똥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편집도 깔끔하죠? ㅎㅎ

지만지에서 차페크의 <평범한 인생>도 나오면 좋겠습니다...

Falstaff 2018-01-17 09:38   좋아요 0 | URL
근데 얘기하신대로 너무 비싸요! 아무리 비싸도 살 놈들은 산다는 건지 모르겠지만 책 좀 많이 사는 인간들에겐 가혹해요! ㅠㅠ
이 책도 잠자냥 님이 지만지에서 나온다, 축약본이 아닌 거 같다, 하고 지르시는 바람에 완전 낚였다가 아주 만족해가며 읽은 겁니다. ^^

독서괭 2023-09-09 11: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값 겁나 비싸지만 사서 읽었는데, 저도 만족입니다^^ 골드문트님은 이미 오래전에 sf로 시작하셨군요. 저도 sf도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3-09-09 18:47   좋아요 0 | URL
옙. 아주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이 양반, 참 좋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