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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속자들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47
윌리엄 골딩 지음, 안지현 옮김 / 민음사 / 2017년 3월
평점 :
놀랍게도 주인공이 네안데르탈인들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알아두어야 할 점은, 골딩이 서문 대신 써놓은 허버트 조지 웰스가 쓴 《세계사 대계》의 일부를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심각하게 유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일반상식 적的 지식에 입각해 책을 읽게 되고, 그 결과 나처럼 오리무중에 빠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서문 대신 써놓은 조지 웰스의 글이 뭔가 보자.
“……우리는 네안데르탈인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하지만 털이 과다하게 많고 추하며 아래로 처진 이마와 돌출한 눈썹과 유인원 같은 목과 작은 키 때문에 추하거나 역겹고 낯선 모습을 띠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근대 인간의 부상을 조사한 해리 존스턴 경은 자신의 저서 『시각과 검토』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활한 뇌, 느릿한 걸음걸이, 털로 덮인 몸, 튼튼한 이빨 그리고 식인종의 성향을 지닌 고릴라와 유사한 괴물들에 대한 어렴풋한 인종적 기억이 민담에 등장하는 거인의 기원일 수 있다…….”
문제는, 조지(핫따, 거 이름도 참. 자꾸 ‘조지’, ‘조지’ 그러니까 우습네그려!) 웰스가 《세계사 대계》를 쓴 것이 1920년(네이버 지식백과). 골딩이 <상속자들>을 쓴 시점이 1955년. 그러니까 웰스의 1920년 저작물을 1950년대 초에 인용을 했다는 말이다. 우리가 아는 네안데르탈인은 큰 키(성인남성 평균 1.65미터. 호모 사피엔스 가운데 동아시아 한반도에 살던 종의 성인 수컷 평균 신장이 1.65미터를 넘기까지는 예수가 죽고 근 2,000년 더 필요했다.)에 큰 골격, 큰 비강과 추위를 극복하는 놀라운 체력, 불을 다루고 석회암 동굴 벽에 들소를 비롯한 채색화까지 그린 사람 속屬의 한 종이다. 따라서 이 서문을 읽지 않고 그냥 상식에 입각해 책을 읽으면 자주 곤란하기 그지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책에서와 마찬가지로 네안데르탈인은 사냥을 하거나 다른 육식동물이 잡은 먹이를 약탈하는 포식자였으며, 포식자의 입장에서 당연하게 호모 사피엔스와 조우하여 그들을 죽일 기회가 있으면 당연히 호모 사피엔스의 시체를 먹었을 것이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네안데르탈인 멸종의 가장 큰 이유가 호모 사피엔스들이 사냥해 먹어치웠기 때문이란 기사를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인터넷 신문기사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러나 골딩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소설이라는 <상속자들>에 출연하는 네안데르탈인, 로크, 파, 라이쿠, 말, 늙은 여자, 하, 닐 등은 상상을 초월하는 평화주의자들로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이유 하나만 가지고 생전 처음 보는 호모 사피엔스 무리들에게 큰 호감을 지닌다. 물론 결과는 죽임을 당하거나 포로가 되긴 하지만.
이 책이 골딩의 두 번째 작품. 첫 작품인 <파리대왕>에서 골딩은 소년들을 오스트레일리아 주변이라고 추정되는 외딴 무인도에 떨어뜨림으로 해서 인간종이 갖고 있는 권력과 지배 등의 속성을 까발려, 처녀작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대표작으로 인식하게끔 한다. 책의 내용을 한 마디로 하자면 뭐 ‘인간의 인간에 대한 이리상태’ 정도, 이미 익숙한 내용을,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인간 종으로의 소년들 무리 속에서 발견함으로써 방점을 찍은 것이 큰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이어서 두 번째 소설 <상속자들>이 나오는데, 이 작품도 전작 <파리대왕>과 지독하게 닮아있다. <상속자들>에서 등장하는 것 역시 아직 문명을 완비한 인간 종으로 발전하기 전 원시 상태의 호모 사피엔스와 인간 종과 가장 유사한 사람 속屬 네안데르탈인을 등장시켜 호모 사피엔스, 그러니까 현대인의 아주 깊은 곳, 원시적 유전자 속의 잔인함과 폭력, 지배 인자들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책 읽기가 좀 불편한 건, 내가 알고 있는 네안데르탈인과 많이 다른 특색, 1920년대 지식으로 만든 야만족, 히말라야나 알프스의 사스콰치안 닮은 털 많고 큰 원숭이 정도로 그들을 묘사해 놓은 것에서 시작한다. 책 속의 그들은 여차하면 사슴이나 “다람쥐처럼 팔다리를 모두 사용하며 뛰어가”고(240쪽), 단순히 가시덤불을 휘두르며 돌(칼)을 ‘던짐’으로 하이에나를 퇴치하고 하이에나가 사냥한 사슴고기를 탈취(58쪽)한다. 실제의 그들은 완전한 직립보행과 무리사냥을 했고, 돌칼을 나무 장대 끝에 매달아 창으로 쓸 줄 알았다. 이건 21세기 인류라면 당연하게 알고 있는 상식이지만 1955년에 발표한 소설에선 그렇지 않았던 거 같다. 더 심각한 과학적 오류가 맨 처음부터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시대적 한계이니 그만하고, 다만 그것 때문에 책 읽는 독자의 오해가 발생한다는 정도만 꼽아 놓겠다.
또 하나는 번역의 문제. 번역에 관해 말을 아끼고 싶다. 분명히 역자 안지현은 원작에 충실하게 될 수 있으면 원문을 그대로 표현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다. 네안데르탈인의 의사소통 방식이 짧은 대화와 암시에 이은 텔레파시. 텔레파시라고 해봐야 서울 부산처럼 떨어진 곳에서 의사소통을 정확하게 하는 수준은 아니고, 집단 사냥하는 무리들이 예를 들어 들개 같은 종들이 사냥을 하면서, 나는 직진, 너는 우회하여 가젤을 몰고 와, 그럼 3번, 네가 지칠 때까지 쫓고 이어서 4번, 그 다음에 내가 끝까지 쫓아갈 테니까. 하는 식의 텔레파시. 물론 그것보다 훨씬 높은 단계이긴 하지만 진짜 그림을 펼쳐놓고 ‘이런 식이다’라고 할 수는 없는 정도란 뜻이다. 작가는 자기 모국어로 이런 의사소통 방식을 자유자재로 써놓았겠으나, 역자는 그걸 이방의 언어로 바꾸면서 뜻이 훼손당하지 않아야 하니 고생을 좀 했겠다, 싶긴 하다. 그러나 안지현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불행하게, 책 좀 읽는 수준의 독자 나는, 책의 많은 부분을 안개 속에 두고 책을 덮고 말았다. 그리하여 비록 270쪽에 불과한 얇은 분량이지만, 읽는 자체가 많이 까다롭고 같은 문장을 몇 번 읽어야 해독이 가능한 경우가 많았다. 저자 혹은 역자와 독자 사이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많았다는 뜻이다. 독자가 읽기에 모호한 서술이 지속되면 그건 독자 책임인가? 아니면 저자나 역자의 책임인가.
물론 책을 다 읽으면 어떤 내용인지, 작가가 주장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은 뒤에 나오는 작품해설을 읽어보면, 아 그랬구나, 딱 알아채고 그 부분을 다시 읽어볼 수도 있다. 근데 이 모든 것을 감안하여 책을 다 읽고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난 이후 윌리엄 골딩의 책은 더 이상 찾지 않겠다고 작정해버리고 말았다. 저역자와 독자의 책 속에서의 의사 불통. 그 위력은 이런 것이다. 그게 저자 혹은 역자 또는 독자, 누구의 책임이 됐건 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