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세계문학전집의 매력은 순문학만 고집하고 있지 않는데 있습니다.데실 해밋의 <몰타의 매>, 너세니얼 웨스트의 <메뚜기의 날>, 제임스 존스의 <지상에서 영원으로> 같은 대중소설도 기꺼이 시리즈에 포함시키고 있어서 가끔 깜짝 놀랄만한 작품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게 열린책들 시리즈의 진짜 매력입니다. 별 기대하지 않고 읽기 시작해 놀라운 작품을 발견하는 맛. 정말 기가 막히지요. 물론 완전 반대로 똥 밟을 때도 많긴 합니다만.

 출판사 열린책들, 빡빡한 글씨간격과 줄간격으로 악명과 동시에 매니어 층을 이루고 있는데, 전 글씨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편집을 아주 좋아합니다. 예전에 내려쓰기 두 줄로 빽빽했던 정음사 세계문학전집, 청구문화사의 현대한국문학전집 같은 불멸의 시리즈에 익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열린책들의 조판에 부담을 느끼지 않습니다. (근데 정음사, 청구문화사. 정말 불멸의 문학전집을 냈던 출판사의 공통점은, 다 망했단 겁니다) 말이 길어집니다.

 역시 이 시리즈를 통해서 제가 읽어본 책들만 대상으로 쓰겠습니다. 예를 들어 <마의 산>은 오래전에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고, <거장과 마르가리타>는 민음사 책으로 읽어 대단한 작품입니다만 여기에 포함시킬 수 없었습니다.

시작하겠습니다. 가나다 순서로 하겠습니다.

 

 

 

 줄리언 반스, <10 1/2 장으로 쓴 세계역사>

 

 여권 발급받고 비자 받아 노아의 방주에 탑승한 임종벌레와 눈치보며 밀항에 성공한 나무좀벌레의 입을 통해 서양 역사의 중요 변곡점을 아주 제대로 비틀어버린 명작. 반스의 다양한 시도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찬송을 해도 아깝지 않다. 그의 작품은 눈에 띄는대로 선택할 만하다.

 

 

 

 

 

 

 

 

 

 

 

 아르투로 페레스 로베르테, <검의 대가>

 

 

 재미있는 점잖은 스릴러. 요새 넘쳐나는 활극하고 비교하면 심심하기 그지 없겠지만 고전적인 검술의 대가들이 플뢰레 검을 베고, 찌르는 역동적인 묘사는 가히 일품. 시간 죽이기에 더없이 좋은 책.

 

 

 

 

 

 

 

 

 

 

 

그레이엄 그린, <권력과 영광>

 

 오역의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한다. 예를 든 원어를 내가 읽어도 정말 오역시비는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 그러나, 가톨릭 땡초 신부 이야기. 예쁜 수녀와의 사이에 아이도 하나 있는 '위스키 사제'란 별명의 진짜 땡초 신부, 오역 시비에도 불구하고 읽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재미가 있어 추천하지 않을 수 없는 책.

 

 

 

 

 

 

 

 

 

 


 하인리히 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패전한 전쟁에 참전했던 독일인 이야기. 전후 폐허 독일에서 가난과 황량 속에 팽개쳐진 시민들의 쓸쓸한 뒷모습. 뵐의 다른 작품들도 참 좋다. 믿고 읽을 수 있는 작가. 그러나 대표작은 문학동네에서 찍은 <어느 어릿광대의 고백>.

 

 

 

 

 

 

 

 

 

 

 

 

 짐 크레이스, <그리고 죽음>

 

 비위 약하신 분은 아예 책을 열지 말 것. 초장부터 두 죽음과 부패의 상세 묘사 등장. 사람을 역겹게 만들다가 인류 또는 생명의 불멸성에 관한 담론이 펼쳐지는데, 참 볼 만하다.

 

 

 

 

 

 

 

 

 

 

 

 

 보리슬라프 패키치, <기적의 시대>

 

 

 이제 내가 명하노니 눈을 뜨고 나를 보라, 하자 장님이 두 눈을 번쩍 뜨더니, 에이 썅, 누가 이놈의 세상을 보게 해달라고 했어? 괜히 오지랖은 넓어서 지랄이야, 하고는 다시 자기 손으로 자기 눈을 파내더란 얘기. 대단한 역설. 궁금하시지?

 

 

 

 

 

 

 

 

 

 

 

 윌라 캐더, <나의 안토니아>

 

 

 미국의 대표적 지방주의 작가. 쉬운 얘기로 촌년이 쓴 재미나고 건강한 소설책. 제발 촌년이라고 썼다고 때리지 마실 것. 난 애정을 담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을까 싶어서 쓴 단어다. 광활한 네브라스카 평원으로 이주한 북구 출신 이민자들의 삶과의 투쟁 이야기. 읽어보신 분은 자연스레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를 떠올릴 것이다. 이토록 쌔가 빠지게 고생해 건강하게 살던 이들이 1930년대에 거지꼴을 하고 캘리포니아로 떠나는 풍경으로 연결된다니, 그저 눈물이 앞을 가린다. 역시 열린책들에서 나온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도 아주 건강하게 좋다.

 

 

 

 

 

 

 

 버지니아 울프, <델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재미로 읽는 사람이 있는지는 몰라도 난 그렇게는 못하겠더라. 스토리의 전개보단 문장과 인물을 가지고 노는 울프의 글쓰기 자체가 대단히 멋있다. 소위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고맙게도) 짧은 소설책. 적어도 의식의 흐름, 하나만을 감상하자면 길고 긴 <율리시즈>를 고통스럽게 읽을 필요는 없을 터.

 

 

 

 

 

 

 

 

 

 

조르지 아마두, <도나 플로르와 그녀의 두 남편>

 

 나 이 책 읽고 이렇게 발랄하고 발칙한 상상력을 낼 수 있는 브라질이란 나라가 급격히 좋아졌다. 잘 생기고 털도 많은 남편과 돈 많은 약사 남편, 둘을 거느리고 사는 팔자좋은 플로르 여사가 사랑과 오르가즘이 충만한 섹스를 찾아 선택하고 그걸 누리는 흥미로운 이야기. 아주 딱 내 수준. 지금 글 쓰면서 생각하기만 해도 비실비실 흘러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다.

 

 

 

 

 

 

 

 

 

존 파울즈, <마법사>

 

 

 이 책은 끝까지 읽어야 끝난다. 말 이상하지? 읽어보신 분은 무슨 뜻인지 이해하실 것. 이마빡 한 번 치고 나중에 결정적으로 뒤통수 한 방 후려갈기는 책. 완전 사기꾼 이야기. 파울즈의 대단한 입담은 이미 세상에 다 알려진 바인데, 그 결정체가 바로 여기 있다. 역시 같은 시리즈 <프랑스 중위의 여자>도 재미있지만 <마법사>에 비하면 조족지혈, 즉 새 발의 피.

 

 

 

 

 

 

 

 

 

 허먼 멜빌, <모비 딕>

 

 

 

 고전 중의 고전. 이 소설은 자체가 인류의 유산이다. 과장이라고? 천만의 말씀. 읽어보시면 안다니까. 영화 하나 보시고 모비 딕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건, 이 소설과 멜빌에 대한 모욕이다. 포경선이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이토록 광대한 서사가 나올 수 있다는 거 하나만 가지고도 기념할 만한데, 거기다가 감동까지.

 

 

 

 

 

 

 

 

 

 에밀 졸라, <목로주점>

 

 

 이 책 역시 오역의 극치라는 평가를 즐기고 있다. 이 책을 읽고 <목로주점> 읽었단 얘기하지 말라는 수준. 난 오역에 관해선 모르지만 굳이 그런 평가를 알고 선택할 수 없으니 다른 출판사의 <목로주점>으로 대신하시라. 팔자 드런 한 여인의 생애. 이 책을 읽어야 졸라의 다른 소설들, <나나>, <제르미날>, <작품>, <인간짐승> 같은 것의 배경을 아는데 도움이 된다. 루공 마카르 총서 가운데 가장 유명한 소설. 자연주의 작품의 전형을 볼 수 있다. 거위 잡아서 파티하는 장면, 알콜 중독자의 금단현상 장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으.....

 

 

 

 

 

 

 

 싱클레어 루이스, <배빗>

 

 미국 사회의 허리를 이루는 중산층의 허위 의식을 절묘하게 까발린 소설. 루이스로 말할 거 같으면 미국인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 입담 죽임. 겁많은 잡놈이자 순진하기도 하고, 완벽한 속물을 구경하고 싶으신 분 계시면 서둘러 책방에 달려가 이 책 고르시라.

 

 

 

 

 

 

 

 

 

 

친기즈 아이트마토프, <백년보다 긴 하루>

 

 

 열린책들 세계문학 시리즈를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이런 작품을 번역한다는 거. 이 책 읽기 전에 아이트마토프에 관해서 아무것도 몰랐는데, 아, 가공스런 상상력과 인간에 대한 경의를 이런 식으로 풀어내다니. 난 이 책 하나로 맛이 갔다.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

 

 

 

 

 

 

 

 

 

 

잠시 우리 부부 커플 사진 한 번 감상하시고 넘어가자. 즉, 쉬는 시간. (오줌 마려)

 

 

 

 

 

귀스타브 플로베르, <성 앙투안느의 유혹>

 

 자유분방한 방귀쟁이, 수다쟁이, 오입쟁이, 설레발꾼 플로베르가 어쩌자고 이런 작품을 썼을까? 이거 역시 끝까지 읽어야 끝나는, 희곡 양식에 입각한 소설. 그냥 산문으론 성 안토니우스와 악마의 유혹에 관해서 설파하기 좀 곤란했던지 난데 없이 희곡을 가져다 댔는데, 거 참. 재미하고는 별개로 읽어볼 만한 책. 난 틀림없이 얘기했음. 재미하고는 별개라고. 흐흐.

 

 

 

 

 

 

 

 

 

아르까지 스트루가츠끼, 보리스 스트루가츠끼, <세상이 끝날 때까지 아직 10억년>

 

 골때리는 두 형제가 마음 먹고 힘을 합해 한 권의 재미난 책을 내놨다. 흠. 도대체 주인공이 누구야? 지구, 즉 가이아의 항상성. 지구를 파괴할 수도 있는 열쇠를 가진 사람들. 그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책, 나중에 독자한테 숙제 하나 내주는데 그 숙제, 생각해볼 만함. 이게 소비에트 시절에 출판됐었다니 참. 말 하나 보태자면, 이 책을 쓴 형제가 나중에 신, 파충류의 외모를 한 신으로 진화한다는 거. 물론 다른 책에서.

 

 

 

 

 

 

 

 

 

미셸 우엘벡, <소립자>

 

 인류의 멸종에 이르는 과학의 길을 그린 디스토피아 미래관. 주목할 것은 종의 멸망과 비극적 세계관을 그림으로써 오히려 인류에게 서로 사랑하며 살 것을 강조한다는 점. 전철 안에서 읽기엔 좀 버거울 정도의 베드씬은 꼭 필요했을까?

 이 작가는 작품별 편차가 큰 편. 다른 작품 고르실 때 조심하실 것.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악령>

 

 말이 필요없다. 필독서. 19세기 후반의 러시아. 사회주의에 경도된 일당들과 한 인물 스따브로긴의 행적. 단연 도스토옙스키의 대표작으로 거론할 수 있는 걸작, 명작, 명작, 불후의 명작.

 

 

 

 

 

 

 

 

 

 

 

 

 헨리 제임스, <여인의 초상>

 

 내가 읽은 헨리 제임스의 소설 가운데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책. 워낙 널리 알려져 출판사마다 이거 안 찍는 곳이 없을 정도. 세상에 부모 잘 만나 평생 부자로 사는 인간도 있고, 이 책의 여주인공 이사벨 아처처럼 이모부 잘 만나 갑자기 돈 벼락 맞는 일도 있으니, 그대, 아직 생을 포기하지 마시라.

 

 

 

 

 

 

 

 

 

 

빅토르 위고, <웃는 남자>

 

 

 한 시절의 궁중 광대를 만들기 위해 안면 성형수술을 했다고 하는데, 어려서 시술을 받아 베트맨의 조커(히스 레저!)처럼 입술이 귀 아래까지 찢어져 웃는 모습을 지니게 된 불행한 인간의 이야기. 열린책들의 또다른 빅토르 위고, <93년>도 재미있으나 둘 가운데 굳이 하나를 꼽으라는 악마의 독촉을 받는다면 나는 <웃는 남자>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아이작 바셰비스 싱어, <원수들, 사랑 이야기>

 

 북유럽 출신 아쉬케나지 유대인들 이야기. 뉴욕에 한 기구한 유대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 인간이 왜 기구하냐면, 아내가 세 명이다. 유럽에서 나치의 손아귀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구해준 지금의 법적 아내, 법적 아내가 자기 수준하고는 맞지 않아 러시아 유대인 수용소를 거쳐 입국한 유대인 아가씨와 중혼, 그리고 아우슈비츠의 유령 속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본마누라. 이 사기꾼을 둘러싼 따뜻한 이야기. 재미남. 이거 읽고 그의 모든 번역 소설책을 읽기로 결심했음.

 

 

 

 

 

 

 

 

 

 조지 버나드 쇼, <인간과 초인>

 

 암만봐도 코메디 맞음. 가정이란 세속적 규법에 끝까지 반대한 인간 버나드 쇼의 결혼에 관한 매우 신랄한 독설이 상쾌하다. 촌철살인의 단어와 가끔 툭 뱉는 한 마디. 근데 사실은 버나드 쇼가 결혼을 못한 건 너무 못생겨서 그랬다나? 읽어보시라 추천하지는 않겠음. 맞지 않는 사람은 무지 지루할 수도 있을 듯.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이런 건 읽어줘야 어디 가서 교양 떨 수 있다. 기독교에 관해서 더할 수 없을만큼 무식한 나는 가끔 지루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코의 중세 종교에 관한 지적 탐구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굵직한 기둥과 이를 둘러싼 눈부신 가지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나무 한 그루를 올려다보는 일. 이 책을 읽는 것이 그렇다.

 

 

 

 

 

 

 

 

 

 

 

알베르 카뮈, <최초의 인간>

 

 카뮈의 성장소설. 그러나 그의 미완성 유작. 알제 출신의 공부 잘하는 똑똑한 청년. 자신보다 더 젊은 시절에 전사한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작중 주인공이 알제의 곳곳에서 옛 시절, 평범하고 똑똑한 소년의 뒤를 밟아 나가는데 왜 그가 최초의 인간이 되고 말았을까?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최후의 세계>

 

 명작. 1년에 한 편 나오는 소설. 수준높은 우화적 상상력. 유배지로 떠나 살아 로마로 돌아오지 못한 오비디우스를 좇아 유배지 흑해 연안의 토미로 간 주인공 청년 코타. 토미에서 숱하게 코타의 눈에 들어오는 오비디우스 표 변신의 증거 또는 표식들. 더 이상은 스포. 이런 소설은 아무 정보 없이 읽어야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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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9-01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이 글 보면서 점심 먹다가 밥알 뿜을 뻔했습니다.... 부부커플 사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나저나 전 <마법사들> 빨랑 읽어야하는데 말이죠! ㅎ

Falstaff 2017-09-01 14:49   좋아요 0 | URL
우리 부부 생긴 것이 워낙 감동감화 가득한지라 가끔 잠자냥 님 같은 분들이 계시죠. ㅋㅋㅋㅋ
<마법사들>은 일단 뒤통수에 뭐라도 대신 다음에 읽는 것이 만수무강에 좋습니다. ^^

레삭매냐 2017-09-01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린책들의 좋은 책들이 이렇게 많았었나요?

팔스타프 님 덕에 <남쪽으로> 구해서 잘
읽었습니다 :>


하인리히 뵐의 책들은 다 가지고 있는데 읽
은 책은 꼴랑 한 권이네요 반성해야겠습니다.

Falstaff 2017-09-01 15:24   좋아요 0 | URL
저 위에서 얘기했듯이 열린책들 시리즈에선 생각하지 못한 작가들이 툭 튀어나와 상당한 즐거움을 주는 경우가 왕왕 있더군요. 그게 이 출판사 최고의 매력입니다.
ㅎㅎㅎ 그리고 <남쪽으로> 정말 괜찮지요? 저도 우연히 중고책방에서 구해 매력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