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와 철학자 펭귄클래식 12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박찬원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전쟁,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대공황 사이의 미국. 드디어 세상은 바뀌기 시작한다. 미국땅에 거대한 설레발 꾼 두 명이 혜성같이 등장하니 이름하여 잃어버린 세대. 여태까지 아메리카를 휩쓸고 있던 지극히 보수적인 세계관은 이들로 인해 허위의 껍질을 벗기 시작했고, 기존 세대는 피어나는 젊은 세대로부터 비아냥과 경멸과 멸시를 받았다. 놀라운 일. 봉건시대 이후 최초로 젊은 세대가 구세대를 조롱하기 시작했던 거다. 물론 이후 젊은세대에 의한 기성세대의 조롱은 지금까지 계속되어 세월이 흘러 기성세대개 된 옛 젊은세대는 또다시 도래한 젊은 세대에 의하여 더욱 큰 조롱과 멸시와 비아냥을 감수할 수밖에 없게 되긴 하지만.

 부르주아 숙부와 숙모의 집에 얹혀사는 아디타 아가씨, 이제 다 커 말만해진 숙녀는 숙부가 위탁받아 키웠음에도 불구하고 숙부가 조언 겸 약간의 잔소리를 꺼내자마자 이렇게 대꾸한다. "그 입좀 닥쳐요." 물론 발랑까지고 버르장머리 없는 숙녀인 것은 맞지만 기존 부르주아 가문 숙녀의 입에서 이런 단어가 나온 것은 문학사상 처음이 아닐까. 여덟편의 단편을 수록한 이 책에 첫번째 소설로 실린 <바다로 간 해적>의 일화다. 숙녀는 숙녀이되 되바라지고 교양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이제 숙녀는 드디어 자신의 기분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단계 혹은 계급의 위치로 올라선 것이다. 기존 율법이 엄정한 눈알을 굴리고 있을 때 이런 숙녀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설을 쓰기는, 글쎄, 쉽지 않았을 거 같다. 1차대전 와중에 야전병원에 입원한 주인공이 엄숙한 수녀 간호사에게 '그럼 내가 뒷발질을 해서 내 불알을 걷어찼을 거 같기라도 하다는 얘기예요?'라고 되물어 수녀의 입을 콱 틀어막은 바 있는 헤밍웨이(이 에피소드는 아마 <무기여 잘있거라>에서 나오는 걸로 기억하는데 정확하진 않다)와 거의 똑같으나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작품들을 이 책 <아가씨와 철학자>에 담았다.

 아가씨들은 해적들을 따라 기꺼이 외딴 섬으로 짱박혀 들어가고, 괜찮은 동네 청년들을 다 개무시하고 오직 하나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돈 많은 남자의 보호를 받으며 살겠다는 생각으로 북부 도시로 시집가기로 결정하고, 천재 아니면 적어도 수재형 남자를 자기와 같은 계급으로 떨어뜨려 같이 살게하며 와중에 오히려 남자를 능가하는 권세를 누리기도 하고, 은근한 경쟁의식과 충동으로 삼단같은 머리카락을 단발로 자른 다음 그걸 복수하기 위해 은근한 경쟁을 부추긴 사촌의 갈래머리를 옛 인디언이 머리가죽을 벗기듯 댕가당 잘라버린다. 이 책의 제목 <아가씨와 철학자>에서 주장하는 아가씨의 현대적 모습이 이렇다. 행위와 사고의 필터를 제거해버린 직선적 여인들의 등장. 대단하지? 단편들의 내용은 사실 별거 없는데 작품을 20세기 초반에 발표했다는 건 대단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불과 십여년 만에 엄숙한 도덕주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다신 아메리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남자들? 남자가 주인공인, 물론 상대적으로 여자 주인공보다 더 비중이 있는 주인공이란 뜻인데, 그런 작품도 등장한다. 1차 세계대전의 전쟁영웅으로 귀국한 델리림플. 열렬한 환영을 받다가 2박3일만에 언제 그랬냐는 듯 아무도 알아봐주지 않는 인간. 시장관사에서 한 달간 기생하다 사실상 쫓겨나온 후 점원으로 들어가 재고관리 일을 하며 박봉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 인간, 전쟁영웅으로 누릴 거 누려본 것이 오히려 큰 탈이라서 도무지 박봉을 받아 그걸로만 산다는 걸 용납할 수 없다. 그리하여 선택한 것이 사소하기 짝이 없는 강도, 절도. 몇 건을 성공시켜 세상 참 편하구나, 조금 더 벌어 라틴 아메리카로 뛸 생각을 하다가, 어떻게 될 거 같으셔? 언제나처럼 여기까지만 얘기함.

 또는 부르주아 출신의 한 남자가 인생을 살면서 일방적으로 아구통을 얻어맞는 사건을 네 번 당하는데 이 몸집 크고 건장해서 온갖 스포츠에 능한 남자 새뮤얼 매러디스는 인언이폐지하고 싸움을 했다하면 맞을 이유가 없는 인간이지만 하여간 일방적으로 네 번을 얻어 터지면서 인간이 해야할 도리에 눈을 떠가는 과정을 실었는데 과연 어떤 사건이었으며 그 후 인간 매러디스는 어떻게 변했을까 하는 이야기도 있다.

 재미난 책. 300쪽이지만 하루면 다 쫑낼 수 있을 정도로 휙휙 지나간다. 때마침 여름이 극을 달리고 있는 시점에 당신이 휴가지에 있어 하루종일 놀고 먹느라 이제 피곤한 오후를 맞았다면,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책 가운데 한 권이리라. 글쎄 믿어보시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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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07-27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대한 게츠비도 제대로 이해를 못했는데,
이 책은 좀 더 휙휙 넘어가나보네요^^

Falstaff 2017-07-27 14:02   좋아요 0 | URL
예.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요.
휴가 가셔서 놀다가 지쳐서 책이나 좀 볼까, 할 때 아주 직빵일 겁니다. ^^

잠자냥 2017-07-27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츠제럴드 작품 가운데 전 여기 실린 단편들이 가장 좋더라고요. 위대한 개츠비는 여기 단편에 비하면 망작....

Falstaff 2017-07-27 14:23   좋아요 0 | URL
푸하핫! 잠자냥님이 이 책 좋아하시는 줄은 독후감 업로드 하면서 알았는데 이 정도인지는 몰랐습니다. ㅋㅋㅋ
근데 번역이 하도 개판이라서 그렇지 <밤은 부드러워>도 좋지 않으셨어요?

잠자냥 2017-07-27 15: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흐흑.... <밤은 부드러워>는 다른 번역본으로 나오면 다시 읽어보고 판단하려고요.. ㅠㅠ 암튼 <밤은 부드러워>도 <위대한 개츠비> 보다는 좋은 작품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