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4분기 읽은 책 중에서 ① 재미있게 읽은 것, ② 감명깊게 읽은 책, ③ 재미있지 않았고 감명깊게 읽지도 않았지만 다 읽고나서 뭔지 하여간 뿌듯하게 만족감을 준 책, ④ 읽은 거 하나 가지고 어디가서 폼 잡을 수 있는 책들을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아직 퇴근하려면 시간이 좀 남았으나 오늘 밥값은 다 해서 노닥거리는 겁지요.

 순서는 책읽은 날짜 순입니다.

 

 

 

1. 스콧 핏제럴드, <밤은 부드러워>

 

 대단히 재미있는 텍스트. 그러나 최악의 번역. 페이지에 비문이나 이상한 단어 하나 이상 나오지 않으면 섭섭해지는 신묘한 경지에 이른 책. 하지만 핏제럴드가 마지막 숨을 모아 스스로의 절망적 인생을 뒤돌아본 역작. 알콜 의존으로 빈곤 속에서 생을 마감하며 그가 마지막 남긴 말. 밤은 부드러웠어. 하지만 읽어보실 분은 마음 단단히 먹어야 함. 번역이 워낙 개판 무인지경이다.

 

 

 

 

 


 

 

 

 2. 조르주 베르나노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광신자 베르나노스가 이런 소설도 쓸 줄은 미쳐 몰랐다.

 일상적인 단어와 문장으로 만든 조합이 이렇게나 아름다울지는 몰랐다. 인생과 선의 삶에 대한 꾸밈없는 이야기. (천주교를 포함한) 모든 기독교, 라고 하면 일단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나도 참 좋게 읽은 책. 유물론자들도 읽어두면 인생에 도움이 될 듯.

 

 

 

 

 

 

 

 

 

 

 

 3. 안나 제거스, <제 7의 십자가>

 

 이미 죽었거나 생존해 있는 모든 독일의 반 파시스트 운동가들에게 헌정한 책. 히틀러 치하의 살벌무지한 공포 아래서 전체주의에 반대해 이미 수용소에 갇힌 반 파시스트들의 탈출기. 일곱명이 탈출하자 십자가 일곱개를 만들어 며칠 안에 다 잡아들여 십자가에 묶은 다음 처형하겠다는 수용소장의 결심이 과연 이루어질까. 도시로 잡입한 이들에게 옛 동지들은 그들을 순순히 받아들였으며 새로운 도피처를 알선해주었을까?

 

 

 

 


 

 

 

 4.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재능>

 

 나보코프 예술의 발원지인 러시아에 대한 진지한 송가. 이국땅에 망명한 러시아 사람들의 좌절과 고국의 모든 것에 관한 진한 회한과 추억, 그리고 피할 수 없는 비판. 나로 하여금 러시아 언어로 쓴 나보코프는 읽지 않겠다는 선입견을 깨 준 작품.

 

 

 

 

 

 

 

 

 

 

 

 5. 조르조 바사니, <금테 안경>

 

 우라질 문학동네가 총 여섯 편의 작품 가운데 두번째 것만 똑 따와서 단행본 한 권을 만들었다. 단편소설 하나로 책 한권을 만드는 신출귀몰한 문학동네의 편집기술에 의해 나는 모든 인류에게 이 책을 읽기 위해 냅다 도서관으로 달려가시라 권한다. 믿었던 무솔리니 새끼가 히틀러하고 한 편을 먹는 바람에 졸지에 범 사회적으로 찐따가 된 한 인간에 관한 소고. 이렇게 얘기하니 별 거 없겠으나 천만에, 짧은 단편 하나로 이리 심금을 울리다니. 라면은 직접 끓여 먹어봐야 맛을 알고, 책을 읽어봐야 맛을 안다. 명품 단편. 그러나 절대 사지 말고 도서관으로 달려가시라. 뭐? '경장편'? 하여간 말은 잘 만든다. 하긴 미국에선 여섯 권으로 잘라 팔기도 하더라.

 

 

 


 

 

 

 6. 이노우에 야스시, <둔황>

 

 나만의 명작. 당신에겐 콕 집어서 권하지 않음. 오랜 시절 내 로망이었던 실크로드의 한 걸음 걸음을 눈 앞에 삼삼하게 만들어준 책.

 

 

 

 

 

 

 

 

 

 


 

 7. 에드워드 올비,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부부간의 소외, 고독, 불통, 가학, 그리고 권력.  단 하나 남은 소통의 가능성을 고통스럽게 탐구하다가 절망하는 가족을 한 걸음 뒤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행위.

 

 이거, 정말 대박!

 

 

 

 

 

 

 

 

 

 



 8. 크리스타 볼프, <나누어진 하늘>

 

 사랑을 하여 부부가 되기로 약속을 했으나 박사 남편 예정자는 서쪽 독일로 떠나가고 아내 예정자는 동쪽 하늘을 버릴 마음이 없는 상태. 거기다가 전쟁 시절의 천형을 짊어진 아버지. 체제는 부부,연인 간에도 하늘을 쪼개버리고 이들은 결합의 희망 없이 그저 나누어진 하늘을 바라보는데, 문제는 한때 한국 괴테 학회장이었던 전영애의 번역. 좋은 책이지만 선뜻 권할 수 없는 것이 안타깝다.

 

 

 

 

 

 

 


 9. 오에 겐자부로, <개인적인 체험>

 

 오랜 진통 끝에 아내가 사내 아이를 출산했는데, 아이의 두개골에 이상이 생겨 뇌의 많은 부분이 두개골이 벌어진 틈으로 흘러나왔다는 진단을 받는다면? 그리하여 아무 처치를 하지 않으면 조만간에 짧은 인생을 끝내게 될 것이며, 수술을 한다고 하더라도 생애 전체를 지적 장애인으로 살아야 한다면? 이제 갓 세상에 나왔으나 바로 그 아이를 위해 지적 장애란 길고 긴 고통을 주는 것보다 일찍 생을 마감시키는 것이 아이를 위해 좋은 일 아닐까? 물론 나를 위해서도. 오에 겐자부로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당시 심정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나오는데 그게 다가 아니다. 또 있다. 재미있는 뭔가가.

 

 

 


 

 10. 보흐밀 흐라발, <영국 왕을 모셨지>

 

 자유국가로 도망치지 않고 프라하에 눌러앉아 깡다구 있게 소설을 써온 작가 흐라발의 재미난 소설. 인생의 유일한 목표를 백만장자가 되는 것으로 정한 열 다섯 먹은 소년이 중소도시를 거쳐 프라하의 거대 호텔 사장님이 되는 과정. 내가 이래뵈도 한 때 영국왕을 모신 몸이야. 웨이터 보조를 할 때 선임 웨이터의 폼잡는 말에 심취하여 나중에 백만장자가 되고나서는 '귀한 인간'이 되고자 엉뚱한 해프닝을 벌일 수밖에 없던 키 작은 돈 키호떼. 진짜 재밌다.

 

 

 

 


 

 

 11. 막스 프리시, <몬타우크>

 

 독일의 염병할 47그룹과 뜻을 같이 한 프리시의 단편. 이 책을 읽고 그의 책을 검색해 하나를 선택, 보관함이고 지랄이고 없이 걍 즉시구매했다. 내내 쓸쓸한 풍경의 해변 몬타우크가 머리 속에 삼삼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재미난 줄거리 기대했다간 헛물 켜는 대표적인 작품

 

 

 

 

 

 

 

 

 



 12. 페터 바이스, <저항의 미학>

 내 인내의 한계가 어디까지 인가를 측정할 수 있는 매우 정확한 계측기. 읽어내기는 쉽지 않으나 다 읽으면 책 속에서 벌어지는 미학의 향연과 여태 몰랐던 현대사의 숨겨진 놀라운 이야기들을 발견할 수 있다. 참 어렵게 읽어서 다신 생각도 하지 않으려 했으나 지금 새삼스레 이 책에 관해 쓰려니 그 많은 내용이 파노라마처럼 머리 속에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휙 화면처럼 지나간다. 진짜다. 바이스가 묘사한 예술품들과 독일(과 친독 주변국)에서 벌어진 파시스트들의 야만적 행위들이. 이런 걸 명작이라고 하는 거 아닌가? 근데 기억하시기를. 처음에 읽을 때는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거.

 

 

 


 

 

 

 13.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내게 딱 맞는 단편소설. 역시 돈벌레 문학동네에서 단편소설 하나 딸랑 싣고 책을 만드는 야만행위를 저질렀다. 읽어보실 분은 절대 사지 마시고 도서관을 이용하실 것. 경제논리에 입각해 이렇게 양심없이 만든 책은 안 사면 안 만들거나 못 만든다. 두권의 흐라발을 읽었는데 둘 다 마음에 딱 들었다. 책을 압착하는 직업을 35년을 보내며 어느덧 자신이 압착한 책을 보면서 근면한 지식인이 된 우리의 주인공 한타. 인류의 지성은 무섭게 변하는 세월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14. 존 케네디 툴, <바보들의 결탁>

 

 거구 뚱보. 끝없는 식탐에 남의 사정은 결코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이기주의자에다가 사회 부적응자. 대학원 졸업 학력에 아직도 홀엄마한테 빌붙어 사는 룸펜 인텔리겐챠. 하는 일마다 주변 사람을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빠뜨리는 결과를 초래하는 구제불능의 루저, 이그네시어스. 그러나 생은 지상 최고의 루저에게 살아야 한다고, 살아내야 한다고 애가 타게 호소하지만 결국 작가 존 케네디 툴은 이그네이셔스와 같은 나이 서른 두 살에 자살하고 만다. 코메디 소설. 코메디를 읽으며 목이 컥컥 메는 신기한 체험을 하게 한 책.

 

 

 


 

 

 15. 찰스 부코스키, <호밀빵 햄 샌드위치>

 

 독일 이민자의 아들이 부모한테 얻어 터지면서 세상의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몸부림의 성장소설. 이제 다 자라 성인이 될지언정, 식당에서 접시를 닦더라도 최소한의 생계만 유지할 수 있다면 허름한 건물의 다락방에서라도 자유스럽게 두드릴 타자기 한 대 사서 인생을 꾸리고 싶다는 진정한 자유인의 자유선언. 동네 깡패, 그러나 맘 좋아서 동네 꼬마들한텐 절대 손 안대는 착한 형 이야기.

 

 

 

 

 

 

 


 

 16. 에니타 부르크너, <호텔 뒤락>

 

 나 이런 소설 정말 좋아한다. 스위스의 숱한 호수 가운데 하나. 그 옆에 붙은 휴양 호텔이 있어 이름을 '뒤락'이라고 한다. 때는 휴가기가 거의 끝나가는 늦여름 또는 가을. 몇 안 남은 객실 손님 사이의 탐색과 관계. 쉼없는 눈치보기와 각자의 삶과 애로. 그것들이 얼키고 설키는 장면들.

 

 

 

 

 

 

 

 

 


 17. 오르한 파묵, <하얀 성>

 

 왜 나는 나지? 누구나 한 번 쯤, 아니, 한 시절 심각하게 생각해보는 고민. 이게 세계적인 공통점인줄 처음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심한 건 시간. 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는 또다른 나가 되어가는 것을 서서히 느끼다가 드디어 내가 또다른 내가 되고야 마는 이야기.

 

 

 

 

 

 

 

 

 

 

18.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네루다의 우편배달부>

 

 

 칠레 현대사에 관한 가벼운 이야기. 여기서 가볍다라고 하는 건 다른 책에 비하여 그렇다는 뜻이지 결코 이야기 자체가 경미하다는 뜻 아님. 노벨문학상의 계관을 쓴 거구의 노 시인과 시인 전담 우편배달부 사이에 계급과 빈부를 떠난 우정의 따뜻한 시선. 누구나 읽을 만한 아름다운 소설.

 

 

 

 

 

 

 

 

 

 

19. 라우라 에스키벨,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

 

 라틴 아메리카의 전형적인 환상소설. 요리를 주제로 한 카르사 집안의 막내딸 티타의 이야기. 티타가 만든 요리에 티타의 어떤 성분이 포함되느냐에 따라 요리를 먹은 사람들은 온갖 현상을 직접 겪게 되는데, 사랑과 허튼 약속과 집안의 말도 안 되는 전통과, 하여간 이런 것들이 와장창 섞여 한 편의 재미나고 흥미있고 생소한 작품을 하나 만들었다.

 

 

 

 

 

 

 

 

20. 움베르토 에코, <바우돌리노>

 

 세상에서 가장 선의로 똘똘 뭉친 거짓말장이 이야기. 그가 만들어낸 거짓말에 의해 역사는 바뀌고 전쟁이 끝나며 한 집단은 인도의 동쪽에 있다고 하는 기독교도를 찾아 멀고 험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온갖 황당하고 신기한 경험을 하는데, 이거 뭐, 그 얘기가 진짜야 구라야? 진짜면 어떻고 구라면 어떠랴. 그에 의하여 인간사 선한 기운이 충만하게 되면 그걸로 충분하지, 안 그랴?

 

 

 

 

 

 


 

 

 21. 마거릿 애트우드, <눈먼 암살자>

 

 진짜 재미난 책. 주인공 노파 아이리스의 친동생 로라가 수십년 전 아이리스의 자동차를 몰고 전속력으로 달려 낭떠러지 아래로 자유낙하한다. 그래서? 죽는 거지 뭐. 근데 로라가 죽기 전에 소설 한 권을 써서 언니한테 남겨주어 언니가 사후 출간을 했고, 그 책 제목이 바로, <눈먼 암살자>. 시절이 1910년대 부터 1990년대 까지니까 여성들이 남성에 의해 심한 차별을 받았다. 근데 역시 세월이. 이제 어느덧 1990년대. 아이리스는 다 늙어 이제 죽음을 눈 앞에 두고 전단지 뒷면, 호텔 메모지, 낡은 편지지에 볼펜으로 마지막 메모를 시작하여 아 썅, 모든 걸 홀랑 까발리는데!

 

 

 


 

 

 

 22. 강기원,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밤>

 

 재미난 시집. 사랑과 섹스에 관한 재치가 철철 넘친다. 은하가 은하를 관통해? 남자는 하나의 은하. 그리고 여자 역시 하나의 다른 은하. 그럼 은하가 은하를 관통하는 건, 남자가 여자를 관통하는 밤. 즉 삼삼한 섹스가 벌어지는 밤이란 말씀. 으때, 혹 하시지? 그럼 읽어보셔. 재미나다니까.

 

 

 

 

 

 

 

 

 

 23. 김희선, <무한의 책>

 

 깨는 책. 우주선이 상공 500미터 위에서 동동 떠 있고 그 속에서 어느 날 신이 강림하는데, 햐 이거, 옛 드라마 "V"에서처럼 파충류야. 근데 인간 만한 파충류가 아니라 거대 공룡, 티라노 사우루스 닮은 거. 그게 수천 수만, 수십만. 절대 다신교 아님. 수십만의 신이 사실 한 개체.

왜 파충류냐 하면, 천사는 날개가 달렸다는 데서 시작. 날개를 자유롭고 힘차게 움직이려면 가슴 근육이 무지막지하게 발달한 신체구조를 가져야 하는데, 현대인이 다이어트를 위하여 즐겨 포식하는 닭가슴살 비슷해야 날개를 다는 기본 요건이 되는 것. 거기다가 이젠 다들 아시다시피 새들의 원조가 파충류, 즉 공룡이 진화해서 새가 된 거니까, 이왕이면 공룡중에서 제일 폼나는 티라노사우루스가 천사들의 원조, 즉 신이 된 거다. 정말 재미난 상상력 아닌가? 글쎄 읽어봐야 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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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D 2017-07-12 19: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봐야 안다하시니 마지막 <무한의 책>은 꼭 읽어봐야겠네요.^^

Falstaff 2017-07-12 20:31   좋아요 0 | URL
진심,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매우 색다른 작갑니다. ㅎㅎ

박균호 2017-07-12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참 맛깔나게 잘 쓰시네요. 덕분에 좋은 책 몇 권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Falstaff 2017-07-12 20:33   좋아요 0 | URL
아이고, 말씀이 과하십니다. 백퍼 아마추어 독자가 글을 쓰면 을매나 맛이 있겠다고요. ㅠㅠ
제가 늘상 쓰는 말인데, 제 말을 믿고 읽으신 다음의 감동 여부는 ㅎㅎㅎ 책임지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