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1
헨리 제임스 지음, 최경도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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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제임스가 <한 여자의 초상>에서는 주인공 이사벨 아처가 부자한테 시집간 이모 잘 둔 덕에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고 덜커덕 7만 달러, 2017년 현재 한국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251억원을 멋쟁이 이모부한테 상속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얼굴 잘생긴 거 빼고 완전히 별 볼일 없는 남자 만나 굴곡을 겪는 이야기를 하더니, <아메리칸>에서는 크리스토퍼 뉴만이란 서민 출신의 미국인을 등장시켜 30대 중반에 세계적인 밀리어네어로 성공하고선 더 이상 돈벌이에 염증을 느껴 유럽일주에 나서 구대륙의 귀족들 알기를 갑순이 코딱지처럼 한다는 설정을 만들어놨다. 직설적인 내 감상을 먼저 얘기하자면, 오직 <한 여자의 일생>과 <아메리칸>에 국한한 헨리 제임스는 진짜 밥맛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캐릭터가 ① 자신은 개뿔도 한 일 없으면서 물총 한 번 잘 맞아 어려서부터 호의호식하여 세상 어려운지 모르고 평생을 사는 거 ② 우리나라 독고탁 처럼 어느날 잃어버린 아버지(또는 친척)이 돌아와 거금의 유산을 상속해줘 한 순간 떼부자가 되거나 생각도 않던 신분상승을 이루는 거 ③ 물론 자신의 굉장한 노력을 수반했겠지만 전혀 가능하지 않은 행운을 등에 업어 이른 나이에 주체할 수 없이 돈을 벌거나 상상도 할 수 없는 권력을 틀어쥐는 거, 뭐 이런 건데 그럼 내가 헨리 제임스의 두 작품을 밥맛이라고 하는 걸 이해하실 수 있을 터. 게다가 <아메리칸>의 주인공, 우연히 이름이 아메리카를 최초로 발견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 같은 크리스토퍼 뉴만이란 작자가 유럽에 가서 오직 교양있고 품위있고 잘 생긴 수준은 되고, 거기다가 상당한 계급의 아가씨를 골라 장가들기로 하다가 친구 마누라 소개로 그런 여자를 발견해 온갖 방해를 무릅쓰면서 결혼을 향해 돌진하는 이야기. 참 미친다. 연애소설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 백만장자 미국인의 돈지랄로 시작하는 500쪽을 넘어가는 장편소설을 관통하는 건 돈의 위력과 유럽 귀족계급의 권위의 극한대립이다. 제임스의 세월은 당연히 부르주아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을 테니 부르주아 계급의 대표선수이자 주인공인 뉴만은 원래부터가 직선적이고 정의파에다가 일체 꾸밈없으며 사해평화와 만민평등(물론 일본인을 제외한 유색인종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지만) 의식에 충만한 의리의 돌쇠이고, 800년 귀족 벨가드 가문은 폐쇄와 권위주의와 가식과 부정과 비노동과 기타등등의 악덕을 총칭하게 만들었다.

 신구 세력, 아메리카와 유럽의 충돌을 뉴만이란 작자 장가드는 일화로 조망하는 제임스의 솜씨야 일단 탁월하다고 아니할 수 없으나 나 읽기에 재수없는 건 어쩔 수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쉼없이 펼쳐지는 뉴만의 돈지랄이 나중엔 진짜 하품나고 한심하고 짜증난다. 소위 자수성가한 인간이 돈지랄을 해? 그건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 다 아시지? 특급호텔 일반실에 묵는 록펠러와 로열 스위트에서 자빠져 자는 록펠러의 아들 이야기. 그게 진실이여.

 다른 얘기 하지말고 책 <아메리칸> 이야기나 하라고? 절대 못한다. 연애소설의 스토리에 관해선 셋 중 하나. 온갖 역경을 뚫고 결혼에 성공해서 죽음이 둘을 갈라놓을 때까지 잘 먹고 잘 살았다는 거하고, 결국 큐피드의 화살이 비껴나가 눈물이 앞을 가려 에이 썅 이따위 세상 더 살아 뭐하나 부둥켜 안고 물에 빠져 죽는 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억만 간직한채 남은 세월 꿋꿋하게 살아가는 거. 근데 그거 가르쳐드리면 책은 뭐하러 읽어? 그러니 못 가르쳐드리지. 이해 해주셔.

 하나 더. 역자 최경도. 앗싸 웃겼어. 요즘에 伊藤博文을 '이등박문'이라고 읽는 사람 있으셔? '이토 히로부미'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근데 이 책에서 악역을 맡은 귀족 집구석 '벨가드'가家를 진짜 '벨가드'라고 읽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꼭 이등박문이라고 써놓은 걸 읽은 거 같은 느낌. 처음부터 그랬는데 소설 속에서 뉴만하고 좋은 벨가드가 오페라를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근데 출연진에 절리나라고 있는 거다. 절리나. 절리나. 이게 누구? 일단 아래 링크한 거 들어보셔.

 

 

 노래가사가 처음부터 이렇거든. Batti, batti o bel Masetto. La tua povera Zerlina 정말로 Zerlina가 '절리나'도 들리세요? 난 암만 들어도 '체를리나'라고 들리는데. 이거 말고도 여러군데 있는데 대표로 하나만 꼽아본 거다.

 이거 읽고 에밀 졸라의 명작 <제르미날: Germinal>을 '저미날'로 쓴 교양인이 한 명 있었다는 얘기가 문득 떠올랐지 뭐야. 흐흐흐....

 


 

* 링크한 유툽은 동영상을 가지고 올 수도 있었으나 암만해도 노래 예쁘게 부르는 루치아 폽이 훨씬 좋아서 위의 것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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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7-01-0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등박문 ㅋㅋㅋ 그 악명 높은 민음사 판 <나사의 회전>을 번역한 사람이군요! ㅋㅋㅋ

Falstaff 2017-01-06 08:24   좋아요 0 | URL
아, 그래서 제가 민음사 <나사의 회전>을 그리 재미없게 읽었군요! 벤자민 브리튼이 만든 으스스한 오페라를 먼저 보고 얼른 사서 읽었더니 이거 참, 원작이 훨씬 재미 없는 거예요. ㅋㅋㅋㅋ

coolcat329 2023-03-17 2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이 책을 읽으려고 하다가 댓글들 보고 안 읽기로 했습니다. 나사의 회전 악명이 높은데 같은 번역자인지 몰랐네요.

Falstaff 2023-03-17 21:0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근데 이 작품은 제임스 가운데서 재미있는 축일 겁니다. 다른 역자를 함 찾아보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