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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궐 - 제171회 나오키상 수상작
이치호 미치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26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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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호 미치, 1978년에 오사카에서 출생한 일본 소설가. 여성이고 본명은 밝히지 않았다. 오사카에 있는 간사이 대학 사회학부를 졸업하고 잡지 같은 곳에 글을 쓰면서 데뷔, 주로 남성 청소년의 동성애를 그린 BL소설가로 활동했다. 여러 작품이 만화로 나와 있어서 아마존 검색하면 화면이 숱하게 넘어간다. 2020년엔 대표작이라는 <예스 오어 노 오어 하프>가 애니메이션 영화로도 만들어졌다고.
회사원으로 일하는 동안에도 글을 썼다고 하는데, 지금도 회사에 다니는 지는 모르겠고, 하여튼 그때는 평일에 서너댓 시간 글을 쓰고 주말에는 쉬느라 외출도 삼가했다 한다. 이쯤 되면 슈퍼우먼 맞다.
2021년, 이이가 마흔세 살 때 소설집 《스몰 월드》로 순문학 작가 데뷔를 해 주목을 받았고, 《창궐》로 2024년에 나오키 상을 수상해 내가 읽게 되었다. 최근에 읽은 다섯 권의 일본 작품 가운데 세 권이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작품이고 《창궐》을 포함해 두 권이 나오키 상 수상작이다. 여러 번 말한 것 같은데, 일본 현대소설을 읽어보고 싶으나 아는 것이 없어서 일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문학상 수상작을 선택해 읽어보았다. 앞서 읽은 책들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사실 이 책을 끝으로 당분간 일본 현대소설하고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할 즈음, 별 기대도 하지 않았던 이 책이 마음에 들었다.
이치호 미치가 알려진 BL 작가. BL도 당연히 사랑인 건 마찬가지니까 사람의 섬세한 감정선을 묘사하는 데 특화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책에 실린 여섯 단편들이 섬세하면서도 극단적이지 않다. 등장인물도 청소년이거나 젊은 청년 세대가 많이 등장해, 읽는 중에 틀림없이 작가가 젊은 층일 것이라 여겼는데 1978년생이란 걸 알고 놀랐다. BL 작가 출신이라지만 《창궐》 작품 중에 동성애 장면은 안 나온다.
《창궐》 속에 <창궐>이라는 표제 작품은 없다. 나오키 상을 받은 것이 2024년. 우리나라에서도 엔데믹을 선언한 시기. 그러니까 여섯 작품은 모두 펜데믹 시절에 쓴 것이라고 봐도 좋겠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을 터이니. 실제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처음에 실린 <날개가 다른 새>에서 가끔 마스크를 쓴 사람이 보이는 장면이 보이고 천천히 밤의 유흥가에 손님이 줄어들기 시작한다. 마지막 작품 <잔물결 드라이브>에서는 이제 자기 얼굴을 보이기 싫은 경우에 가끔 마스크를 쓰는 정도. 마스크 쓰는 것이 펜데믹 시기에 익숙했던 터라 예전처럼 경원받지 않는 수준이다. 그러니까 펜데믹이 지나갔거나 거의 막바지에 달했다는 뜻이겠지.
그러고보니 그렇구나.
<날개가 다른 새>는 오사카 시절 중학생 시절 그저 알고 지냈던 동창 유토와 나기사. 유토는 원하지 않는 전공을 1년 하다가 때려 치우고 도쿄에 와서 주점 삐끼를 하며 살고 있던 차. 나기사는 파파카쓰, 나이 많은 남자와 사귀면서 돈은 받는 아가씨, 우리말로 원조교제 비슷한 걸 해서 먹고 산다. 나기사가 유별난 것이 도쿄에 와서도 오사카 사투리를 구태여 바꾸려 하지 않는다는 점. 사실 특별한 건 아니다. 나중에 굳이 사투리를 쓰는 이유도 자기 입으로 말하지만 소개하지는 않겠다.
근데 유토가 생각해보니 나기사는 오사카 고향에서 이미 죽은 걸로 알려져 있다. 그것도 험하게. 안나 카레리나처럼 정거장에 도착하기 위해 천천히 속도를 줄여 들어오는 기차에 몸을 던진 것도 아니고, 힘차게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건널목에서 뛰어들어 거의 형체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신체 훼손을 당해 죽은 것이 틀림없다. 근데 지금 도쿄에 와 있으니, 정말로 나기사인지, 아니면 나기사의 도플갱어인지 막 헛갈린다. 하여간 죽은 게 맞다. 그게 정말로 나기사였는지 아닌지는 다음으로 하고.
반면에 마지막 작품 <잔물결 드라이브>는 화창한 토요일에 한적한 교외 역에서 트윗을 함께 하는 사람들이 만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딱 보면 소위 번개? 번개 맞다. 그것도 첫 번개. 어쩌면 마지막 번개. 당연히 처음 보는 사람들이고 나이와 성별도 각양각색이다. 계정이름이 ‘오이 정말 싫어’,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 ‘마리골드’, 중년 남자 ‘팥빙수’. 소녀 같은 분위기의 ‘케이트 모스’ 그리고 승합차를 가져와 이들의 이동을 책임질 나이 많은 남자 ‘동물원의 겨울’. 모두 다섯 명.
이들이 모인 이유는 집단 자살을 하기 위해서이다. 자살 방법은 번개탄. 진짜로 번개탄을 피우기 전에 독한 수면제를 몇 숟가락 퍼먹거나 산토리 위스키 같은 술을 왕창, 그러나 절대 토하지 않을 정도만 퍼 마시겠지. 어차피 번개탄의 일산화탄소에 중독이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토하긴 할 터이지만 그거야 죽기 바로 직전이니 알 바 없고. 그리하여 이들은 승합차에 올라 죽음의 장소로 이동하는데, 한 가지 작지 않은 문제가 있으니 이 가운데 케이트 모스가 불과 열두 살의 꼬마였던 것. 죽기에는 너무 어리잖아? 그래, 사실 더 큰 문제는 이게 아니다. 문제의 실행 장소에 가 보니 이미 다른 차가 한 대 와 있고, 동물원의 겨울 님이 운전석에서 내려 짙은 선팅이 된 차에 다가가 들여다보니, 차에 탑승한, 아니지, 탑승했던 사람들 모두 이젠 불이 꺼진 번개탄의 일산화탄소를 충분히 넘칠만큼 흠향하고 벌써 저승행 특급을 탔던 거다. 이후에 어떻게 됐는 지는 당연히 안 알려드리고.
그러니까 첫 작품과 마지막 작품은 모두 죽음, 죽음 가운데서도 자살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그것 참, 시원하게 탁 이야기하면 틀림없이 스포일러라서 그럴 수도 없고, 밝히지 않으면 싱겁기 그지없는 독후감이 될 터. 그래도 결론을 말할 수는 없다. 재미있는 책이니 읽어 보시라고.
다른 작품도 괜찮다.
만일 당신이 여성이고, 우연히 정말 마음에 드는 외모의 한 남자를 보았는데, 그 남자가 하필이면 배민 배달원이라서 예컨대 짜장면과 탕수육 세트를 주문하거나 아구찜 작은 것을 앱으로 주문하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그가 음식을 가지고 올 확률이 있을 경우, 정말로 딱 내 마음에 드는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크게 먹고 싶지는 않지만 햄거버나 파스타를 주문해보고 싶을까, 아닐까? 나는 남성이라 여성 마음을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는 안다. 그럴 수 있고, 전적으로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거. 다만 <로맨스>의 주인공 유리처럼 도무지 절제가 되지 않고 남편이 집에 있는 휴일 빼고 하루에 두 번씩 주문을 해대면 그건 집착이라고 생각할 뿐.
근데 세상 일이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게 몇이나 있지? 유미도 이래저래 헛물만 켠다. 오라는 남자는 안 오고 영 이상하게 생긴 남자만 줄창 올 뿐만 아니라 이 못생긴 배달원은 유미가 자기한테 반해서 주구장천 KFC에 양념 반, 프라이드 반을 오더하고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어째? 어쩌긴 뭐가 어째, 당연히 사고가 생기고 말지. 동네 소문이란 소문도 활랑 나 버리고. 사는 게 다 그런 거 아냐? 그걸 이치호 미치가 참 귀신 같이, 재미있게 포착한다. BL로 다져진 솜씨가 거 참 녹록하지 않네. 이름을 기억해 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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