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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 수 없는 사랑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복복서가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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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큐언을 읽은지 벌써 두 해가 지났다. 이이를 떠올릴 때마다 조금씩 놀라는 건, 이이의 작품을 꽤 많이 읽었다고 여기고 지내건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거. 이름만 눈과 입에 익어 늘 친숙한 반면 정작 작품을 들이대면 별로 안 읽은, 글 좋은 작가가 이언 매큐언이다. 내 경우에 그렇다. 뭐 어쩌겠어? 팔자 또는 이이의 나의 인연이지.
최근에 읽은 매큐언이 <나 같은 기계>인데, 한정판 가정용 로봇 사용기라고 생각하면 되는 조금 SF 소설이다. 그거 읽으면서, 매큐언이 이런 장르의 작품도 쓰는구나, 과학 분야로도 상당한 조예가 있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어제 읽은 <견딜 수 없는 사랑>도 주인공이 양자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 후 더 공부를 하려다가 자기한테 여차하면 세계적으로 대박을 칠 수 있는 사업 아이템이 있어 몇 해 몰두한 일이 있었다. 세상의 컴퓨터 환경을 대폭 개선할 수 있는 뭔가를 개발해 동료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고 세계 특허를 신청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네덜란드에서 한 업체가 주인공 조지프, 조 로즈의 개발품을 포함하는 더 큰 방식에 대하여 가까운 과거에 이미 특허를 신청해 놓은 상태였다. 그래서 사업을 접으니 이미 스물아홉 살. 조 로즈는 이십대 중반에 물리학 박사를 취득한 영재 수준이었지만, 영국의 탑 클래스 영재들만 빼곡하게 모인 물리학계에서 중도 이탈 경력이 있는 스물아홉 살의 연구자에게 남는 자리는 없었다. 어디에서도 하다못해 강사 자리를 제안하는 곳도 없었다. 그냥 놀고먹을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는 조는 이후 과학컬럼니스트 프리랜서를 시작했는데, 글재주가 있었던 모양이라 각종 잡지와 신문, 방송에서 연일 초대하고, 책도 높은 판매부수를 기록해 이제 런던에 집도 장만하고, 월세집이 아니라 자기 아파트도 한 채 사고, 비싼 자동차도 타고, 프랑스 와인도 집에 박스로 쟁여 놓고 마실 수 있는 정도가 됐다.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대학에서 하던 연구를 계속하면서 후학들을 기르고 싶은 마음이, 그렇게 주장하는 건 아니고, 잠재적으로 깔려 있다.
조 로즈의 정확한 나이는 밝히지 않는다. 마흔 후반부터 쉰 초반 정도. 지금은 대학에서 존 키츠를 연구하고 가르치는 교수 클래리사 맬론과 비혼, 미 출산 동거를 하고 있다. 클래리사는 안식년을 맞아 키츠 연구에 박차를 가해 6주간 보스톤에 가서 자료를 더 파보고 돌아왔거나 아직 착륙하지 않았다. 이 6주는 조가 클래리사를 만나고 두 사람이 떨어져 있던 가장 오랜 시간이었으며, 그리 길지 않았던 기간이었음에도 로즈 박사는 클래리사가 보고싶어 안달을 했었다. 그리하여 히스로 공항에서 클래리사를 싣고 런던에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칠턴스 언덕으로 소풍을 가기로 약속했다.
조는 소풍을 위하여 코벤트가든의 카를루치오 레스토랑에서 소풍 가서 먹을 이탈리아 요리를 테이크아웃 구입하고, 유명한 버트럼로타 서점에 들러 미리 주문한 존 키츠의 초판본 시집을, 조가 살면서 무엇을 사 본 가운데 아파트, 차에 이어 세번째로 비싼 값을 주고 클래리사 생일 선물로 구입했다. 오늘이 클래리사 생일은 아니다. 아직 몇 달 남았다. 그럼 소설이니까 이 커플이 몇 달 남은 클래리사 생일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독자는 정상이다. 소설 속에서 시간에 정신 제대로 박힌 상태로 흘러가는 법이란 없다. 소설작법 8장 5절인가 9절에 나온다. 오늘은 알려드리지. 클래리사 생일날, 클래리사의 대부와 조, 이렇게 세 명이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며 이 책을 선물한다. 뭐 신문에 날 정도의 작지 않은 사건이 하나 생기기는 하지만, 말했듯이 소설이잖아?
하여간 조는 히스로 공항 대기실에서 기다리다 도착한 클래리사를 만나 가볍게 키스를 하고 곧바로 칠턴스 언덕으로 향했다. 날은 좋은데 바람이 심상치 않다. 이런 날에 40만평방미터가 넘는 넓은 벌판 위로 누군가가 기구를 띄웠다. 기구가 떠 있는 150미터 상공의 바람은 또 지표하고 다를 것이 분명한데 좀 내려왔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조와 클래리사가 했을 지는 모르겠다. 자기들도 일단 심하게 부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떡갈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야 했으니.
바람이란 게 계속 심하게 불지는 않아 어느정도 잠잠해져 둘은 큰 떡갈나무 아래 매트를 깔고 이탈리아 음식과 1987년산 도마스 가삭의 마개를 따려고 했다. 클래리사가 병을 잡고 있고, 조가 한 손에 따개를 들고 다른 한 손이 병 입구를 포장한 검고 얇은 포일에 닿는 순간, 이 소설을 복잡하게 만들 사건이 벌어진다.
2백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에서 들려온 고함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위험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조는 와인 오프너를 떨어뜨리고 벌떡 일어나, 자기도 모르게 저절로 다음 동작을 결정하고, 즉, 떡갈나무 아래에서 이른 봄날의 풀밭과 아름다운 연인이 주는 행복을 잠깐 보류한 채 벌판에 거의 내려왔지만 강하게 불어닥친 바람에 기울어진 기구를 지탱하기 위하여 지지 말뚝의 밧줄 고리에 발을 감고, 기구 바구니와 연결된 밧줄을 잡은 채 버티고 있는 조종사를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기구는 자꾸 바람을 타고 하늘로 날아오르려 하고, 기구 바구니에서는, 조가 그쪽으로 달려가면서 들으니, 기껏해야 열 살 정도 되는 아이가 히스테리 상태가 되어 큰 소리로 울고 있었다.
벌판의 외곽엔 초고압 송전탑과 전기줄이 지나가고 있어 기구 조종을 하지 못하는 거대한 풍선이 송전탑이나 전선에 걸릴 수 있다는 충분한 가능성을 떠올릴 수 있으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람이 조종할 수 없는 기구가 바구니 안의 아이를 어느 곳까지 데려갈 지도 모르고, 헬륨가스로 충만한 풍선이 그대로 상승하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터져버릴 것이고, 그 이전에 아이는 얼어 죽거나, 산소 부족으로 질식해 죽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달려가기 시작한 조. 조의 눈에는 농장 경계에서 울타리 작업을 하던 두 명의 일꾼도 조가 가는 방향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고, 조와 반대편 언덕 위에 문을 활짝 연 승용차에서도 한 명의 남자가 뛰어오고 있었으며, 다른 젊은 남자도 한 명 보였다. 여기에 기구 조종사까지 합한 여섯 명의 남자들은 각자 기구와 기구 바구니에 연결된 줄을 잡고 기구를 날아가지 못하게 힘껏 당기기 시작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이 여섯 명을 통제하는 리더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여섯 명은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모두 한 방식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했는데, 문제는 각자의 주장이 죄다 서로 달랐다는 점. 기구 고정 말뚝에 밧줄을 붙잡아 매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일단 기구가 날지 못하게 한 쪽으로 당겨야 한다는 주장은 두어 명이 했던 것 같았고, 다른 두어 명은 무엇보다 바구니 안에서 울고 있는 아이부터 꺼내야 한다고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세게 불어 닥치는 바람의 소리가 강해 모두 큰 목소리로 소리를 질러야 의사소통이 가능했는데, 그것도 여섯 명 모두 아드레날린이 극도로 분비되고 있던 와중이라 자신의 생각을 부르짖을 뿐이지 다른 목소리를 듣고, 이성적으로 판단하여 그 방식대로 따라할 여유는 찾지 못했다.
이 사건만 묘사하려고 해도 무척 많은 분량이 필요하다. 중간은 다 생략해야겠다.
갑자기 돌풍이 불어닥쳤다. 나중에 방송을 들으니 시속 110km 이상의 풍속이었다고. 그래서 여섯 명의 구조자 모두 바구니와 연결된 밧줄을 잡고 버티고 있었는데, 기구가 바람에 떠오르기 시작했던 거다. (나는 여기서 밧줄 말뚝과 다리를 연결한 조종사이자 바구니 속 아이의 할아버지의 다리가 찢어질 줄 알았는데) 여섯 명 모두 밧줄을 잡은 채 기구와 함께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여섯 명 모두 이 생각을 했겠지. 과학컬럼니스트 조 로즈는 어느 순간 힘이 빠졌는지, 벌써 지상에서 3~4미터 떠올라 겁이 덜컥 나서 그랬는지, 그것도 아니면 옆에서 밧줄을 쥐고 매달려 있던 58세의 농장 잡역부 토비 그린이 밧줄을 놓고 땅 위로 떨어지는 걸 보고 덩달아 힘이 빠져 자신도 줄을 놓쳐 버렸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투두둑. 모두 떨어졌다. 단 한 사람. 옥스퍼드에 사는 42세의 일반 개업의이며 남편이자 두 아이의 아버지, 카운티 대회에 나갈 수준의 테니스 실력을 가지고 있는 스코틀랜드의 웨스트 하이랜드 산악구조대 출신의 존 로건. 그만 끝까지 기구의 줄에 매달린 채, 기구, 바구니, 바구니 속의 아이와 함께 까마득하게 치솟고 있었다.
그리고, 눈으로 봐서 한 백미터 정도 높이까지 올라간 순간, 작은 작대기 모양의 존 로건은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진공상태라면 1초에 9.8미터. H = g(t^2) 2초면 39미터, 3초에 88미터. 닥터 로건은 3초가 조금 지나 양떼가 풀을 뜯는 칠턴스 언덕 부근의 넓은 벌판에 거의 선 자세로 떨어져 즉사해버렸다.
아이는? 공황상태에 빠져 바구니에 엎드려 울기만 할 뿐 아무런 움직임이 없던 아이는, 사실 여러 명의 어른들이 고함을 치고 사나운 얼굴을 하는 바람에 문제해결능력과 생존본능이 완전히 사라지는 “학습된 무기력상태”에 빠져 있었던 거였다. 그러다 기구가 상승하고 주변이 조용해지자 차츰 정신을 차려 할아버지한테 배운 비상시 조치방법이 떠올라 바구니 안에 달린 밸브를 조종해 기구 속 헬륨을 배출해서 약 2km 떨어진 벌판에 무사하게 착륙했다. 로건 씨 외에 농장 잡역부 그린씨만 4미터 위에서 떨어지며 다리가 부러졌을 뿐 나머지는 무사했다.
그러나, 마음 속 상처는? 이 사건 때문에 새롭게 발병한 소위 드클레랑보 증후군은? 정말 드클레랑보 증후군이라는 질환이 있다면 말이지만. 이렇게 시작한다. 이런 배경으로 사람과 사람 사는 일이 얽히기 시작한다. 즉, 서론이 이만큼 길었다는 뜻이다.
생선으로 치면 이언 매큐언 정도면 준치급. 썩어도 준치다. 이름만 믿고 아무거나 읽어도 재미와 입심은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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