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
데이먼 갤것 지음, 이소영 옮김 / 문학사상 / 2023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왕은철 전북대 영문과 석좌교수가 쓴 작품 해설을 조금만 빌려오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데이먼 갤것은 1963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입법수도인 케이프타운에서 대학을 다니며 드라마를 전공했단다. 우리나라에서도 1963년생 토끼띠가 유난한 것처럼 남아프리카도 마찬가지인지 이들은 세계적인 암덩어리 아파르트헤이트 정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다가 황금 같은 20대에 넬슨 만델라가 27년만에 감옥에서 석방되고 몇 년 후 민주주의적 투표에 의하여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리하여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의 작가들은 그들의 피부색과 관련 없이 모두 일정부분 아파르트헤이트 적 요소를 띨 수밖에 없다고 왕교수는 주장한다. 일찍이 존 쿳시 번역 등으로 이 지역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 전문가가 쓴 해설이니 믿어 마땅하리라.

  그저 시간이 이들의 상처를 아물려 이젠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작가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 바랄 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책의 우리말 번역본을 낸 문학사상 뿐만 아니라 왕은철 교수까지 작품의 제목인 “약속”을 스와트 가족이 하녀인 살로메에게 살로메와 아들 루카스가 살고 있는 비뚤어지고 지붕이 새는 방 세 칸짜리 낡은 집의 소유권을 주자고 가족,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아내 레이철의 죽음의 침상에서, 레이철의 요구에 남편 마니가 확약했다고 주장하는 일이다.

  물론 문학사상과 왕은철의 주장은, 작품 속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이 “약속”이 흑인 하녀에게 다 쓰러져가는 집을 증여하기로 부모 들이 합의한 것이라는 막내딸 아모르의 굽힘 없는 증언 때문에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엄마 레이철이 죽은 후에 남은 가족, 아빠와 아들 안톤, 딸 아스트리드와 아모르. 아빠와 아스트리드는 아예 처음부터 이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거나(아빠), 무시하기로 마음먹거나(아스트리드), 약속을 지키려고 하지만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 결국 뭉개버리거나(안톤), 어떻게 해서든지 엄마의 약속을 지키려 든다(아모르).

  그러면 작품 속에 실제 약속의 장면은 어땠을까? 39~40쪽에 나온다.


  [나한테 약속해 줄래, 마니?

  그래, 약속할게.

  난 정말이지 살로메가 뭔가를 가질 수 있으면 좋겠어. 지금까지 모든 일을 해줬잖아.

  알겠어. 아빠가 말한다.

  당신이 꼭 하겠다고 나한테 약속해. 직접 말해 줘.

  꼭 약속을 지킬게. 아빠가 목이 멘 소리로 말한다.]


  위에 인용한 구절이 1986년 엄마가 죽기 두 주일 전에 막내딸 아모르가 집이 잘 보이는 불탄 나무 아래 바위가 겹친 곳에 웅크려 앉아 “들었다고 생각하는 또는 주장하는” 부부간의 약속 전부이다. 일종의 마지막 유언을 마친 엄마와 아빠는 “마치 예수님과 성모 마리아처럼” 서로 엉겨 울었다. 아모르는 이 장면을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소리” 즉 기독교의 신적 존재를 걸고 한 약속 정도로 깊게 각인한다. 게다가 이 “약속”을 들은 장소는 아모르가 전에 벼락을 맞아 두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전기 충격으로 새끼 발가락 하나를 잃은 곳이다. 그래서 열세 살의 아모르한테 이곳에서 들은 약속이 더욱 성스럽게 들렸을 수도 있다. 살로메에게 줄 “뭔가”를 더욱 크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바위 틈에서 내려와 걷다가 또래 흑인소년 루카스를 만난다. 살로메의 아들. 41~42쪽에 이들의 대화가 나온다.


  안녕, 루카스, 그녀가 말한다.

  어떻게 지내, 아모르.

  네 엄마 일은 정말이지 안됐어, 그가 말한다.

  (중략)

  이제 너희 거야, 그 집. 아모르는 말한다.

  루카스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녀를 쳐다본다.

  우리 엄마가 아빠한테 그 집을 너희 엄마에게 주라고 했어. 기독교인은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아.

  우리 집이라고?

  그건 이제 너희 집이 될 거야.


  독자 나는 39~42쪽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거 난리 났군.”

  내가 짐작한 난리는 아빠가 죽어가는 아내 레이철에게 하녀 살로메한테 “집”이 아니라 “뭔가”를 주겠다고만 약속했음에도, 살로메와 어린 루카스는 주인 나리가 자기들한테 집을 주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기독교인이니만큼 그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을 것 같았다. 즉 “약속”이 아닌 “오해”가 이렇게 시작하리라 여겼다는 말이다. 아모르의 거짓말 때문에. 아니면 적어도 아모르가 자기 마음대로 확대시킨 약속이 진실인 양 말했기 때문에. 말이 곧 또다른 약속이니까.

  아빠 마니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자.

  아내가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이제 정말 며칠 남지 않은 것이 확실한데, 죽음의 침상에서 나한테 유언 비슷하게 요구한다. 살로메가 무엇을 가질 수 있게 해달라고. 이럴 때, 당신 같으면 “싫어, 안돼.” 할 수 있겠어? 아마도 틀림없이 그저 죽어가는 사람의 마음을 거슬리게 하지 않을 심정으로 “약속할게.” 했을 것이다. 만일 정말로 살로메의 집을 그냥 주자고 했을지언정. 방을 나선 순간 잊을지라도. 그리하여 마니가 장례식 후 식사 자리에서 전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지 못하는 장면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갤것 또는 아모르는 끊임없이 말한다. 아빠가 엄마한테 약속했다. 살로메한테 살로메와 루카스가 살고 있는 집을 주기로. 거대 농장을 가지고 있는 스와트 집안 입장에서 보면 정말 하잘것없는, 지붕이 새고 비뚤게 서있어 다 쓰러져가는 작은 집을 주는 아주 사소한 적선일 수도 있는 약속. 아니, 갤것이 말하는 게 아니다. 아모르가 주장하고, 선한 루저 안톤 오빠가 동의하고, 나머지 가족과 친척 모두 헛소리라고 생각하는 약속이다. 갤것은 그냥 그걸 백지에 옮겼을 뿐이다.

  다시 왕교수의 해설.

  “(갤것이)대학에서는 드라마를 전공했다. 그의 소설에서 희곡이나 영화에서 쓰이는 다양한 기법이 활용되는 이유다.”

  왕교수는 이 말을 어떤 의미로 했을까? 시점이 오락가락하는 다중 시점 작품이라서? 문장이 조금 별나서? 그건 요즘 작품에서 그리 드문 일은 아니건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이쪽으로 포인트를 맞추는 것 같다.

 과감하게 추리하자면, 갤것은 의도적으로 독자들의 오독을 유도했는지도 모른다. 위에 인용한 아내 레이철과 남편 마니의 대화는 큰 괄호 […] 안에 들어 있다. 아모르가 부부의 대화를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집 밖에 있는 바위 틈에서 유리창 안쪽의 엄마 아빠가 나눈 이야기를 자기 식으로, 즉 큰 괄호 안의 내용으로 “인식”했다. 어쩌면 아모르는 대화를 나누는 부모의 입모양과 대화 후에 서로 울며 포옹하는 장면 밖에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애초에 약속 자체가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 그렇다는 게 아니라, 내 의견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지만. 어쨌건 아모르가 주장하는 약속은 확실하지 않다. 이렇게 되면, 이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된다. 거짓을 엉뚱하게 진실로 인식하고, 혹은 거짓임을 알지만 자기가 거짓말쟁이가 되지 않기 위한 반작용으로 자신 혼자 그걸 지키려 평생을 외롭게 기다리는 여성의 이야기로.

  그러니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은:

  독자여, 작가에게 휘둘리지 말자.


  이미 이 책을 읽은 분은 모르겠지만, 아직 읽어보지 않은 분이 갤것의 <약속>을 선택하시려면 내가 주장하는 바를 꼭 기억하셨다가 의견을 들려주셨으면 좋겠다.

  아모르는 “살로메가 무언가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걸 자기 마음대로 집의 소유권으로 확대해 그 가족으로 하여금 믿게 했거나, 아예 듣지 못하고 보기만 한 것을 그렇게 인식해 그걸 약속이라고 평생 알고 살았거나, 마지막으로, 스스로도 자기가 말한 약속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오히려 사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것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 남은 생을 그렇게 곤고하게 살았을 수도 있다.

  만일 내 주장에 일면 타당한 구석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열린 결말을 가진 소설로의 진면목을 나타내는 작품일까? 내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 작품의 주인공들, 스와트 집안 사람들이 누구 한 명 빼놓지 않고 전부 선병질 적 기질이 있잖아?


.


댓글(5)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페넬로페 2026-02-27 09: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독서하면서 이렇게 궁금해진 적이 많았습니다. 나만 이렇게 생각한건지, 아님 오독한건 아닌지 하고요.
만약 이 책 읽으면 저도 그 부분에 대해 꼭 생각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6-02-27 15:25   좋아요 0 | URL
넵. 꼭 읽어보시라고 말씀 드리지 못하겠지만 혹시 기회가 닿으면 한 수 훈수 바랍니다. ^^

잠자냥 2026-02-27 09: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에 쓴 리뷰를 살펴보니 전 이 부분을 이렇게 썼더라고요.

“아모르의 엄마 레이첼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편 마니에게 간곡히 부탁한다. 자신이 아플 때 헌신적으로 돌봐준 살로메에게 무언가 꼭 주고 싶다고. (....). 그런데 이 장면을 때마침 그 방 안에 있었던, 그러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던(아모르는 가족 중에 가장 존재감이 희미하다) 이 소녀가 목격한 것이다. 아모르는 엄마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부탁한 그 약속을 아빠가 반드시 지킬 것이라 생각하고는 또래인 루카스에게 장담하듯이 말해버린 것이다.”

저도 이 작품 읽으면서 내내 소녀가 집을 주겠노라 약속했다고 믿어버린 게 아닌가 그래서 자기가 자기 말을 지키려고 더 그렇게 산 게 아닌가 싶었어요. 작가는 약속이 진짜로 존재했든 아니든, 약속을 지킬 의무와 상관없이 그 집이 있는 땅은 본디 흑인들의 땅인데 백인인 너희들이 약속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지켜야 할 그 무엇인가가 있지 않느냐...? 하고 묻는 것 같았고요. 암튼 제 생각입니다.

Falstaff 2026-02-27 15:29   좋아요 0 | URL
자냥 님은 ˝무엇˝이라고 딱 부러지게 얘기했잖아요.
문제는 쇤네 경우에.... 어? 이걸 약속한 게 아닌데... 이거에 너무 함몰되다 보니까 진짜 주제를 계속... 뻔히 알면서도 놓치게 되더라는 것이었습죠.
출판사와 왕교수는 무슨 마음으로 저런 카피를 날렸는지 거 참 이해하기 쉽지 않습니다.

잠자냥 2026-02-27 15:38   좋아요 0 | URL
집을 준다고 했다고 아모르 옆에서 들었나 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