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아직 따뜻하다 창비시선 174
이상국 지음 / 창비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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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 28년 전에 읽고 책장에 꽂아 놓은 시집. 1998년 초판1쇄. 52세의 이상국이 절정의 시기에 쓴 작품을 담았다. 1946년에 양양군에서 출생해 속초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나이 들어 여러 학교를 더 다닌 모양이다. 위키피디아에는 강원대학에서 철학 박사를 받았다고 적혀 있다. 이상국의 시를 읽기 위해서는 이이의 가방끈을 알 필요 없다. 지금과 과거의 양양, 시인의 가슴 속에 음각화로 새겨 있는 그림과 1990년대 후반에 찍은 사진을 대조하는 일, 음각화와 사진 속에서 본 자신의 시의 원전을 알아 내는 일, 양양이라는 찬란한, 찬란했던 자연 같은 것을 노래하는데 굳이 그깟 가방끈은 아무 소용도 없다.

  제일 앞에 실은 시. 시인의 가슴 속 음각화 한 장면이다.



  별에게로 가는 길



  별 보면 섧다


  첫새벽 볏바리 가는 소 눈빛에 어리고

  저물어 돌아오는 어머니

  호미날에도 비치던 그 별


  어둠의 겨울이었던

  고향집 우물은 메워지고

  이제 내 사는 곳에서는 

  별에게로 가는 길이 없어


  오래 전부터

  내가 소를 잊고 살 듯

  별쯤 잊고 살아도


  별마다 별은

  머나먼 마음의 어둠 지고 떠올라

  기우는 집들의 굴뚝과

  속삭이는 개울을 지나와


  아직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전문. p.8~9)



  촌스럽지? 시어들이 짤막하고, 읽자마자 시인의 노래가 확 귀 속으로 들어온다. 별을 보면 섧단다. 그렇지. 전엔 밤에 고개만 올렸다 하면 별이 쏟아졌지. 쏟아져도 그냥 쏟아지나, 어디? 정수리에서 물벼락 맞듯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내며 확 떨어질 것 같은 별. 저 눈 닫는 곳에서 금빛 금을 긋듯 죽 미끄러지는 별똥, 한꺼번에 별이 쏟아지면 세상에 그런 불꽃놀이도 없을 텐데. 그래, 나도 가끔, 아주 가끔 빼곡한 별을 보면 섧기는 하겠다. 그렇다고 첫 연을 한 줄로 “별 보면 섧다”라고 쓴 시인.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이어지는 2연이 시인의 가슴 속 음각화. 어려운 단어가 숨었다. 볏바리. ‘볏바리’는 사전에 나오지 않는다. ‘바리’가 마소의 등에 잔뜩 실은 짐을 뜻하니까 ‘볏바리’는 벼를 실러 가는 일을 말할 것이다. 정확하지 않지만 “첫새벽 볏바리 가는 소”, “저물어 돌아오는 어머니 호미날”이라 했으니 새벽부터 들에 나가 벼를 바리바리 싣는 작업을 하고 별이나 떠야 다시 집에 돌아오는 소를 뜻하는 거다. 그건 그거고.

  새벽 들일 가는 소의 큰 눈, 하루 종일 들일에 지쳤을 어머니의 호미날에, 비치는 별이라니. 설마 별빛이 소 눈과 낫과 칼이 아닌 호미의 날에 반사되겠어? 그래도 혹시 아는가, 범부의 눈에 결코 보일 리 없는 별빛이 시인의 눈에는 소의 눈알에도 어머니의 호미날에도 비치는지. 하여간 2연은 시인 가슴에 새긴 음각화이다.

  3연부터 나머지는 별을 상실한 아쉬움. 별은 아직도 시인을 내려다보고 있건만 시인은 별과 별빛이 어렸던 소의 눈을 잊고 세월을 살고 있다. 사실 시인은 지금 삶이 섧지도 모른다.


  두 번째 실은 시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에서 눈에 띄는 건, 기막힌 수미반복.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개울물이 밤새 닦아놓은 하늘로

  일찍 깬 새들이

  어둠을 물고 날아간다


  산꼭대기까지

  물 길어 올리느라

  나무들은 몸이 흠뻑 젖었지만

  햇빛은 그 정수리에서 깨어난다


  이기고 지는 사람의 일로

  이 산 밖에

  삼겹살 같은 세상을 두고

  미천골 물푸레나무 숲에서

  나는 벌레처럼 잠들었던 모양이다


  이파리에서 떨어지는 이슬이었을까

  또다른 벌레였을까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전문. p.10!11)



  “이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에 / 누가 나의 이름을 불렀다”

  좋은 표현은 벌써 시인, 소설가, 수필가들이 다 가져다 썼든지, 자기들이 만들어 써먹어 버렸다. 그래 지금은 웬만한 묘사를 해 놓아도 데자뷔나 클리셰 취급을 받는다. 근데 이건 아닐 걸? “작두날처럼 푸른 새벽”이라니. 그럼 쨍, 하고 추운 겨울 새벽을 말하는가 싶은데 그것도 아니다. 나무들의 몸이 물을 끌어올리느라 흠뻑 젖었다니 봄 아니면 여름. 그런 새벽도 작두날처럼 푸르고 푸르다. 양양 산 속에서는.

  그것 참 이상하지. 시집을 읽고, 읽고 또 읽어도, 좀 쉬었다 다시 읽으면 여전히 저 속에 있는 촌스러움을 찾는다. 소설책을 읽고 읽어도 가장 마음을 콕콕 쑤시는 작품이 결국 추운 산골지역의 없는 사람들 사는 모습이다. 3천장의 CD 가운데 오랜만에 한 장을 골라 기계에 거는 건 결국 모차르트, 하이든, 멘델스존인 것처럼. 내가 그렇다는 말이다. 혹시 모르지, 나와 비슷한 동년배 정도도 또 그럴 지는. 비록 그러거나 말거나 별 관심도 없지만. 무슨 뜻인가 하면, 내 세대가 끝나면 이런 공감 역시 막을 내릴 거라는 거다. 내 속에서 공명하는 감상도 함께 소멸하는 것. 이게 시간이겠지.


  시인은 어떻게 하다가 시를 쓰게 됐을까? 물론 팔자소관이겠지만 그렇게 콕 집지 말고 이상국만의 특별한 뭔가가 있을 것 아닌가? 그걸 시인은 탁 집어 자신의 마지막 원전이라 했다. 이 원전이 되는 두 사람, 두 여성이 있다.



  작은 어머니



  저녁 여물 때 송아지 낳던 이야기 하자면 미나리 꺾어 물치장에 가던 아침나절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야기꾼 작은 어머니, 목고개가 수수이삭처럼 껑충하고 허우대 크신 당신이 가마에서 내리자 큰머슴 하나 들어왔다고 입이 쩍 벌어졌다는 할아버지, 그 시아버지 모시느라 피란도 못 가고 국군 인민군 뒤바뀌던 난리통에 속병을 얻으셨는데 내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도 작은어머니는 속앓이가 도지면 소총 화약이나 휘발유를 한숟가락씩 드셨다. 열여섯에 감동골집에 시집와 팔순이 넘으셨는데 오늘 새벽 큰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솔지 아범이너,

  ―엊지냑에 작은어머니가 돌아가셨다야.


  그렇게 해서 흙으로 된 나의 마지막 原典은 페이지를 덮게 되었다.   (전문. p.33)



  나의 노래



  우리 어머니

  처녓적 자시던 약술에 인이 박여

  평생 술을 자셨는데

  긴 여름날 밭일하시면서

  산그늘 샘물에 술을 담가놓았다가 드실 때면

  나도 덩달아 마시고는 했지요

  그리고 어린 나는 솔밭에서

  하늘과 꽃과 놀며 소를 먹이고

  어머니는 밭고랑에서 내 모르는 소리를 저물도록 했지요


  지금 내 노래의 대부분은

  그 흙 묻은 어머니의 소릿가락에 닿아 있지요   (전문. p.34)



  이렇게 시인 이상국은 작은어머니의 끝도 없는 이야기, 열여섯에 시집와 어린 나도 들을 수 있게, 무슨 이야기를 했다 하면, 딱 그 이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생기기 훨씬 전부터 그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저 오랜 전 밑천부터 말을 시작했던 천생 이야기꾼의 사설을 어려서부터 들은 내력이 이이가 시인이 된 원전 1이요, 처녓적부터 괜히 약술입네 자셨겠는가, 그저 농사일이 고된 줄 모르게 해볼 심사로 한잔 두잔 하셨겠지, 그게 인이 박여 노동요 비슷하게 자기 팔자 탓을 하고, 세상 탓을 하며, 그래도 세월을 차곡차곡 걸어가던 어머니의 일 소리가 시인의 원전 2였다.

  이렇게 삶의 이야기와, 일하는 노래가 한 소년을 시를 쓰는 시인으로 만들어주었겠지. 나름대로 근사하고 따뜻하지 않나? 요즘 사내 아이들은 이런 거 없다. 사는 이야기와 일 노래가 사라져 버린 자리를 첨단 무기와 울퉁불퉁한 무기로 학살해가며 영토를 넓히는 각종 게임이 대신하고 있어서. 이런 시간의 소멸과 쇠락을 이상국은 또 애닯게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독후감이 너무 길어지고 있어서 아쉽지만 다음에 기회가 또 있다면 그때를 기약할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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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6-02-03 09: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따금 소개해 주시는 시와 함께 폴스타프님의 해석과 감상은 웬만한 소설 한 편 읽고 난 뒤에 느끼는 감동과 다를 바 없는 감정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더 읽고 싶은데 끝이 나서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셨으니,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6-02-03 16:14   좋아요 1 | URL
아이고, 뭘요. 그저 곰돌이님처럼 잘 읽어주시는 분이 그리 생각해주시는 겁지요. ㅎㅎ
3월 17일에 쇤네가 정말 좋아했던, 지금도 좋아하는 시인, 황동규의 <악어를 조심하라고?>가 올라올 겁니다. ㅋㅋㅋ 3월 중순이면 온라인에서는 다음 세기 정도겠지만 말입니다.
근데.... 3월 17일?

크...... 그날 독후감에 이런 추임새가 나올 겁니다.
˝(아오, 아오, 아옷! 정말 이것까지 생각하고 쓴 독후감 아닌데, 오늘이 “나를 철퍼덕하고 밟고 지나가버”린 첫사랑의 65번째 생일이다. 좋다, 해피 버스데이 투유! 이런 우연이라니. 살다 보니 별 일이 다 생긴다.)˝

이거, 곰돌이 님 때문, 혹은 덕분에 벌써 써 놓은 독후감에 오늘 덧붙인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얄리얄리 2026-02-03 09: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생하고 성장한 곳이 양양과 속초라서 바다를 노래했으려니 했는데, 막상 소개해주신 시에서는 흙과 육지, 농사를 떠오르게 하네요. 이런 것도 선입견인가 봅니다. ‘원전(原典)‘이란 단어가 참 좋네요. 여러가지 개인적인 소회도 생각나게 합니다.

Falstaff 2026-02-03 15:52   좋아요 0 | URL
좀 오래 묵은 시인이라 세대별로 호오의 차이가 좀 있을 거 같습니다만 그거야 뭐 누군들 그러하지 않겠습니까.
이이의 양양은 태백 줄기의 서쪽, 백담계곡, 십이선녀탕 때문에 해가 늦게 뜬 동네 아니었나 싶군요. 197X년 그 계곡에서는 팔뚝만한 열목어가 잡혀 곧잘 회를 떠 먹기도 했었는데요. ㅎㅎㅎ 아주 오랜 기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