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주노 디아스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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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노 디아스는 1968년 12월 31일에 도미니카 공화국의 수도 산토도밍고에서 태어났다. 나고 하루만에 우리 나이로 두 살이 됐군. 7남매 가운데 셋째로 많은 식구들 먹여 살리느라 아버지는 주노가 어렸을 때 미국 뉴저지로 떠나, 유년기까지 어머니와 외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여섯 살이 되어 가족도 뉴저지의 도미니카 타운으로 가 합류했다는데, 이 동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뉴욕의 거대한 쓰레기 매립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작품의 주인공 오스카 데 레온의 엄마 벨리시아 카브랄은 도미니카 공화국의 가장 유명하고 솜씨 좋은 외과의사와 간호사 사이의 세 딸 가운데 막내로 태어난 순간부터 말 그대로 “눈 뜨고 보기 힘든” 역경의 세월을 보내다가 10대 후반에 고모이자 양어머니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이민해, 그곳에서 맏딸 롤라와 아들 오스카를 낳아, 직장 세 군데를 다니는 억척을 떨어 두 아이 다 대학까지 다 마쳤다. 이렇게 인생 험하게 살다가 암으로 세상 뜬다. 엄마는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대개 소설에서 남편은 다 개자식들이라, 아이들이 유년기일 때 집을 나가버렸다.

  (‘도미니카 공화국’을 ‘도미니카’와 헛갈리지 마시라. 멀지 않은 곳에 있지만 엄연히 다른 나라다. 우리가 알고 있는 야구 잘하는 나라이자 오스카의 할머니 라 잉카가 사는 나라는 도미니카 공화국이다.)

  작가 주노 디아스와 작품의 주인공 오스카 와오는 이렇게 다르다. 그러면 주노 디아스는 작품에서 사라졌나? 아니다. 책 전 분량은 아니지만 많은 페이지에서 화자 ‘나’로 등장한다. 주노를 알파벳으로 쓰면 Junot. 작품에서 벨리시아의 맏딸 롤라와 한 시절 연애도 하고 사랑도 했지만 주체하지 못하는 바람기 때문에 걷어 차인 청년 유니오르Yunior로 등장하는 걸로 보인다. 키 크고, 흑진주처럼 새까맣고, 아름답기까지 한 육상선수 출신의 누나 롤라는 초고도비만에 못생긴 동생 오스카를 살뜰하게 보살피고, 응원하고, 격려하는, 정말 나도 이런 누나 있었으면 싶을 정도로 동생을 사랑하는데, 유니오르가 대학 다닐 때 롤라의 부탁을 받아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오스카의 기숙사 룸메이트로 들어가 자연스럽게 오스카와 친해지는 역할을 맡았다. 이렇게 해서 유니오르는 문제적 가족 벨리시아-롤라-오스카의 뉴저지와 도미니카에서의 행적과 앞 세대의 몰락을 알 수 있게 되며, 훗날 이들의 삶을 작품으로 쓴 것. 유니오르라는 반 자전적 캐릭터와 아버지의 부재가 이 작품에만 등장하는 건 아니라고 한다. 1990년대 초기 단편집부터 등장했으니 디아스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해도 좋을 듯.


  책 좀 읽는 인간들이 도미니카 공화국, 하면 아마도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2000년 작품 <염소의 축제> 아닐까 싶다. 1961년 5월 말에 차를 타고 가다가 기관총의 집중사격을 받아 암살당한 독재자 라파엘 트루히요. 국가의 거대한 부를 트루히요 일가가 독점하다시피 하고, 공화국의 어리고 예쁜 여자 아이들은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 품을 수 있다고 여긴 염소. 한 인간이 30년 동안 절대 권력을 쥐고 보니 이제 스스로 자신이 신, 하느님과 진짜 초등학교 동창쯤 되는 것으로 착각한 게 틀림없다. 처음에는 공화국 안에서 자기 시민들, 정적들을 불법 구금한 채 잔인하게 고문하고 처형하다가 이웃나라 아이티의 민간인 수만 명을 학살하더니, 뉴욕에 거주하고 있는 반 트루히요, 반정부 인사들도 암살했다. 그것도 모자라 베네수엘라의 대통령까지 베네수엘라 땅에서 암살을 시도해 대통령과 국방부장관에게 부상을 입히고 군인과 경찰 등이 목숨을 잃게 하는 등 세상에 무서운 것이 없어질 즈음해서, 더 이상 눈 뜨고 보지 못할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아이젠하워는 도미니카의 경제를 무너뜨려버렸다. 그러니 죽을 수밖에.

  트루히요 자신은 하느님의 초등학교 동창 정도로 생각했겠지만, 공화국 국민들은 어땠을까? 신이라기보다 악마로 여기지 않았을까? 저 먼 시절,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서인도제도에 도착한 것은 노예만이 아니었다. 생각할 수 있는 최악의 불운의 창에 맞은 흑인의 음울한 그림자 속에 함께 도착한 것은 푸쿠 아메리카누스, 또는 흔히 푸쿠라고 불리는 모종의 파멸이나 저주를 가리켰다. 파멸과 저주의 유령은 도미니카공화국의 근대사 20세기에 들어서도, 특히 트루히요가 통치했던 31년 동안 낮게 깔린 먹구름처럼 섬의 동쪽을 지배했고, 트루히요가 죽어서도 그 시절에 몸과 마음에 밴 공화국민의 의식에서 사라지지 않았단다.


  오스카의 할아버지 아벨라르 루이스 카브랄은 1940년대 최고의 수술 외과의사로 명문가의 명맥을 잇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여쁜 아내 소코로와 총명한 두 딸 재클린, 아스트리드가 있었다. 행복했다. 아이들은 영어와 프랑스어, 라틴어를 구사할 수 있었고, 놀라운 학업 성과를 얻어 재클린은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언제나 아이들이 아니었다. 키만 크고 비쩍 마른 재클린이 한 순간에, 정말 아주 짧은 시간 동안에 눈이 동그래지고, 몸이 풍만해져 보는 사람마다 눈을 떼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카브랄 박사는 불안했다. 그래서 아내 소코로는 심각한 우울증에 걸려 집밖 외출을 하지 못할 지경이며, 재클린은 엄마를 돌보느라 짬을 낼 수 없다는 거짓말을 트루히요와 그의 측근들이 믿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것이 가려지나? 특히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는 것이? 그렇게 어느날 카브랄 박사 내외와 맏딸 재클린을 대통령 궁의 파티에 초대한다는 초청장이 왔다. 이제 남은 것은 해변으로 가 보트 한 척을 빌려 푸에르토리코로 가서 다시 미국으로 떠나는 일이었지만, 이렇게 어리고 예쁜 딸, 겨우 열댓살의 아이를 설마 50대 중반의 (당시 기준으로) 노인이 손을 대겠는가 싶어, 그러나 안심이 되는 건 아니라서 아내와 재클린은 그냥 집에 머물게 하고 아벨라르 혼자 파티에 참석했다. 그리고 며칠 후, 대통령에 관한 유언비어 배포와 반역 혐의로 체포되어, 차마 내 독후감에 다시 옮기기 힘든 방식의 고문을 받다가 미쳐버려, 감옥에서 몇 년 후에 죽음을 맞는다.

  이때 소코로는 임신 상태였고, 배 속의 아이가 오스카 와오의 엄마 벨리시아 카브랄이다. 언니 재클린과 아스트리드는 납득하기 어려운 사고로 어린 나이에 죽고, 엄마 역시 벨리시아를 낳자마자 죽어 시골의 악마 같은 가정에 입양된 벨리시아는 노예 수준의 하녀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몇 년 지나 벨리시아를 구출해 자신의 딸로 삼아 키운 사람이 오스카가 할머니라고 부르는 라 잉카. 갓 과부가 되어 죽을 때까지 상복을 입고 지낼 라 잉카가 벨리시아를 찾아냈을 때는, 저주받을 부부의 남자가 끓는 기름을 벨리시아의 등에 부어 끔찍한 상처가 난 상태였고, 그 몸을 한 채 닭장 안에 가두어 놓고 있었다. 그래도 살아 남아야 했던 어린 벨리시아. 이후 라 잉카가 아무리 좋은 교육을 시켜도 생존을 위해 충분히 단련해야 했던 야만성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무리한 연애를 두 번 경험하고, 나이 든 유명 갱스터의 아이를 임신했건만, 세상에나, 갱스터가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은 그의 아내 이름이 소이 트루히요, 염소이자 유령이자 공포, 저주의 독재자 트루히요의 여동생이었던 거다. 당연히 벨리시아의 임신상태는 출산 전에 해소되었지만 문제는 임신중단의 방법. 경찰로 보이는 건장한 체구의 두 남자에게 사탕수수 밭으로 끌려가 극악한 수준의 폭행을 당한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벨리시아의 목숨마저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엄마이자 5촌 고모 라 잉카는 10대 후반의 벨리시아를 미국행 비행기에 태우며 울었다.

  이제 남은 것은 벨리시아의 아이들. 롤라와 오스카. 진짜배기는 소개하지 않겠다. 재미있는 작품이라 읽어보시라는 뜻으로.

  오스카 와오. 벨리시아가 와오라는 이름의 남자와 결혼해 낳은 아이들이냐고? 아니다. 오스카가 못생긴 초고도비만자라 오스카, 와우, Wow! 가 오스카 와오로 바뀐 것. 못생기고 비만이며 환상문학, 장르물, 게임과 피규어 세상에 머무는 청년. 여자와 잠자리는커녕 키스 한 번 못해본 유일한 20대. 그의 짧은 인생을 타이틀로 하면서 카브랄 가의 불행을 통해 본 도미니카공화국의 현대사. 아쉬운 점은 무거운 주제에 비해 오스카와 유니오르의 성적 환상과 집착이 과하게 과장되어 있지 않은가 하는 거였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가 그만큼 큰 것인지도 모르겠다. 좀 더 무겁게 썼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는데, 또 그렇게 썼다면 요사의 작품을 능가하기 쉽지 않기도 하고, 그래서 여차하면 유사품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직전에 읽은 폴 비티의 <배반>도 그렇고 이 작품도 마찬가지, 소위 21세기 100대 소설 목록에 들어 있어 찾아 읽었는데, 미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은 독자를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절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좀 들었다. 과한 말장난과 잔재주가 가끔은 독자를 짜증나게 할 수도 있는데 말이지. 다음 작품도 21세기 100대 작품으로 선정된 미국 작가인데 또 그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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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돌이 2025-08-07 0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에서 Falstaff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아요. 특히 Wow! <- 이 부분이요. ㅎㅎㅎ 실감 나게 써주셔서 단숨에 후루룩 읽었어요. 재밌으면서도 슬플 것 같아요. 다음 작품도 기대 ‘만땅’ 하고 있겠습니다. :)

Falstaff 2025-08-07 06:08   좋아요 1 | URL
넥. 이 책, 재미있습니다. 아프리칸 미국인들 차별 이야기 같은 거하고는 다른 재미. ㅎㅎ 근데 젊은 남자의 리비도에 촛점을 맞춰서 여성들이 공감하실지 ㅎㅎㅎ 남자새끼들 다 그렇답니다. ㅋㅋㅋㅋ

yamoo 2025-08-07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드뎌 제가 먼저 읽은 작품의 독후감이 올라오는 날도 있군요!!ㅎㅎ
주노 디아스의 책을 한꺼번에 3권을 사서 이게 제일 유명하다고 해서 읽어 봤는데, 나름 읽을만한데,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았습니다. 마지막 문단이 제가 하고 싶은 말이었네요...ㅎㅎ 저는 이제 이 책의 리뷰를 쓸 필요가 없어졌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뽈님께서 마지막문단에 떡~~하니 쓰셔가지구..^^

Falstaff 2025-08-08 04:51   좋아요 0 | URL
그래도 리뷰 한 번 쓰실 걸 그랬습니다. 사람마다 느끼는 게 다 다른 법인 걸요.
오늘 또 흑인 노예 이야기.... 당분간은 흑인 문학은 좀 쉬어야겠습니다. 에휴... 사는 게 참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