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리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 지음, 장소미 옮김 / 녹색광선 / 202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이 책은 처음 나왔을 때 한눈에 척 보고 희망도서 신청을 하려다가 아무래도 너무 올드 패션인 거 같아서 참았었다. 근데 책방 독자 서평도 괜찮고, 마침 도서관 서가에도 꽂혀 있기에 망설이지 않고 읽었다. 그리고 조금 고민.


  책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 전쟁 끝난 날이 언제라고? 그래. 1918년 11월 11일, 빼빼로 데이. 책의 초판이 1920년이니까 실제로 작품의 시간적 공간은 1918년 겨울부터 19년까지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이래서 고민이 생긴다. 다만 이건 전적으로 잘못된 세월에 청춘을 소비한 내 경우에 국한하는 것이니까 다른 독자들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을 말해야겠다. 무슨 고민인가 하면:


  작품의 주인공은 49세의 과부 레오니 롱발. 애칭 레아 롱발.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시절에 행복한 사교계 이력을 끝마쳤다. 질서와 아름다운 속옷과 레이스 달린 비단 잠옷, 그리고 잘 숙성된 와인을 곁들인 공들인 요리를 좋아한다. 여사님의 집에서만 맛볼 수 있는 하우스와인은 파리의 극히 제한된 계층만 홀짝거릴 수 있는 명품으로 알려질 정도. 눈치로 보아하니 19세기까지 토지를 매개로 한 부르주아, 즉 영주 정도의 계급이었다가 세월이 흘러 부동산을 정리하고 대부분 채권과 증권에 투자하여 배당금과 이자, 그리고 증권 가격 상승에 따른 차액으로 전혀 노동할 필요 없는 최고위층 부르주아이다.

  여사님의 애인은 벌써 6년 동안 연애를 하고 있는데 지금 나이가 스물넷. 작품 뒤로 가면 여사님은 쉰, ‘셰리’ 즉 귀염둥이, 자기, 여보 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셰리’라고 불리는 당대 최고 미남 프레드 플루도 플루 집안의 외동아들인데 이 집도 애초에 부자가 아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는 최고 중의 최고 부르주아 집안이다. 심지어 자작이 플루 집안의 식객으로 머물고 남작도 이 사람들한테 껌벅 죽는 정도. 이 프레드, 즉 셰리가 남자 주인공을 맡았다. 셰리는 생긴 건 번드르르 하다. 어려서부터 가정부들이 돌려가며 키워 당연히 응석받이로 자라 이날 이때까지 세상만사 안하무인, 버르장머리 없는 청년으로 살았다. 일찍이 열일곱 살 때부터 금리생활자로 등극했는데, 공부를 못해 바칼로레아에 합격하지는 못했어도 셈 머리가 대단해서 마필, 보석, 자동차 등을 수집하고 두둑한 용돈을 써 댔지만 두 명의 자가용 운전수들의 장부를 꼼꼼히 살펴 운행거리와 연료비를 비교하며 닦달을 하는 등 좀스러운 부자의 면모를 과시했다.


  전쟁 끝나고 바로 직후의 파리를 무대로 했으면서도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의 <셰리>에서는 시민들 가운데 아주, 아주 극소수만 차지하는 부르주아 계급의 사랑만 열나 묘사하고 있다. 작품은 레아의 침실에서 벌거벗은 셰리가 아침부터 응석부리는 장면으로 시작하고, 이어서 며칠 안 지나 결혼식 전날 다시 레아의 침실에 들르고, 결혼을 하고, 마흔아홉 살 레아 롱발 여사는 이에 상심해 남부 유럽 각지로 여행을 떠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셰리는 신혼생활에 당연히 있는 불편함과 레아를 향한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앞에서 말한 가문의 식객인 자작이 머무는 호텔로 가서 몇 달 동안 방황하고, 뭐 이렇고 저렇고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 타령만 한다. 그러니까 일부 독자들이 주장하는 문학 속의 삶의 모습을 완전히 증발시킨 작품이어서 읽으면서 상당히 불편했다는 말이다.

  다시 한번 더 강조한다. 이런 작품을 읽을 때면 꼭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한다고 굳세게 배워서 그렇다. 카뮈가 쓴 <이방인>을 감동 깊게 읽었다는 것이 중요 죄목이었던 시절에 재수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낸 일단의 무리들은 대강 그러할 걸? 정오의 태양이 눈부시게 빛난다는 이유로 알제리의 식민지 청년을 권총을 쏴서 죽인다? 그걸 감명 깊게 읽었다고?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이런 시절이었다. 나도 하필이면 딱 그때, 지랄났다고 딱 그때 청춘시절을 보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이 누구였느냐 하면,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를 쓴 백범사상연구소 소장이자 <임을 위한 행진곡> 가사를 쓴 백기완 선생. 지금 말은 이렇게 해도 당시 청년한테 이런 충고가 얼마나 새롭고, 획기적이고, 따당, 쇠망치로 대갈빡 한 대 맞은 것 같았는지. 눈이 다 번쩍 띄어지더라니까. 92년이던가, 대통령 후보로 나왔을 때 이 양반한테 투표까지 했다는 거 아냐.

  이제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 세월도 알만큼은 아니더라도 조금 알 거 같아서, 이까짓 소설책 한 권 읽으면서 구태여 그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여러모로 바람직하다는 건 충분히 이해를 하는 시절이 왔건만, 콜레트의 <셰리>는 사실 너무하기는 너무 했다. 일반 시민들은 전후 망가진 경제, 사회 속에서 하루하루 지내기가 무지하게 팍팍한 시절이었을 텐데, 등장인물은 부르주아, 귀족, 사교계 늙은 퇴물들, 일년 365일 로얄스위트룸에서 묵으며 유럽, 아메리카를 여행할 수 있는 이야기만 한다. 아주 넌덜이가 나더라고.

  그거 보면 공화국 프랑스도 참 오른쪽으로 멀리 간 거 같다. 콜레트가 1954년에 죽었을 때 프랑스 역사상 여자로는 처음으로 국장을 치뤄주었다잖아? 어떻게 봐도 자유, 평등, 박애하고는 거리가 좀 있는 양반 같은데 말씀이야.



  * 3별 반 정도가 마땅.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케이 2025-07-04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팔스타프님.
저같은 소인은 모두가 열광하는 책을 읽고 나서 아무도 안보는 독후감을 쓸 때조차 살짝 눈치를 보게 됩니다. 내가 멍청이라 이렇게 느낀 거 아냐? 하는 생각도 들고요 ㅋㅋㅋ
하여튼 드리고 싶은 말씀은 서재의 다른 분들과 다른 이런 견해를 써주실 때마다 참 감사할 따름입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팔스타프님처럼 읽진 못하겠지만, 나도 눈치보지 말고 내 의견 그대로 읽고 써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 글이네요.
저희 애기들은 한국 나이로 5살이 되니 많이 건강해 졌어요. 결석이 잦던 재작년 작년과 비교하면 괄목상대할 정도예요. 저는 드디어 얼굴에 8자 주름이 생기기 시작했고요. 운좋게 흰머리는 안나네요. 이제 곧이겠지요.
가족들 모두 더운 여름 잘 나시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드려요. 건강하세요!

Falstaff 2025-07-04 19:14   좋아요 1 | URL
오랜만입니다 케이 님. 이렇게 삐딱한 독후감을 올려야 등장하시네요. ㅋㅋㅋㅋ (농담인 거 아시지요?)
오, 아이들이 벌써 다섯 살이군요. 애 많이 쓰셨어요. 8자 주름도 다 훈장이겠거니 생각하시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시려나요?
케이 님도 건강하게 여름 잘 보내셔요. 집안에 두루 행운이 가득.... 아오, 이런 추상명사 말고요, 올 여름엔 그저 로또 한 방 꽝! 맞으시기 바랍니다. ㅎㅎ

반유행열반인 2025-07-04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소인 심지어 새 책으로 이거 구매해놨는뎁쇼...읽기 싫다...

Falstaff 2025-07-04 22:24   좋아요 1 | URL
반쌤도 참. 걍 읽으셔요. 쇤네야 주둥이만 깐 찐 아마추어인뎁쇼.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