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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여인
마리 은디아이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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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09년에 파리 2구에 있는 드루앙 레스토랑에서 수여하는 공쿠르 상과 소액의 상금 10유로(16,220원)를 받아 전세계 잡지에 이름을 올린 바 있다. 다들 아시겠지만 공쿠르상은 세계에서 상금을 주는 문학상 가운데 가장 적은 돈을 수상자한테 주는 걸로 유명하다. 대신 최고의 프랑스 문학상이라 공쿠르 상만 받았다 하면 단박에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고, 스토리가 그럴 듯하면 영화로 만들어져 금세 돈벼락을 맞을 수 있어, 프랑스 소설가한테는 이 상 받는 것이 일생의 로망이기도 하다. 한 작가에 딱 한 번 주는 걸로 알고 있는데, 유일하게 두 번 받은 작가가 있었으니 로맹 가리. 이 심술궂은 작자가 에밀 아자르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자기 앞의 생>을 출간해 1956년에 이어 75년에 한 번 더 공쿠르 상을 받았다. 이런 염병할 작자가 있나. 누군가한테는 필생의 소원일 텐데, 1975년이 ‘누군가’에게 절호의 기회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지.
마리 은디아이는 프랑스 누아르Loiret의 피티비에에서 세네갈인 아버지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1967년에 둘째 아이로 태어났다. 첫째는 65년에 세상을 본 아들 팝 은디아이. 국가교육청소년부 장관을 거쳐 2023년부터 유럽 평의회 프랑스 대사로 재직중인 역사가 겸 정치인이다. 마리 은디아이가 첫 돌을 넘기던 해에 세네갈 아버지는 처자식을 몽땅 버리고 세네갈로 돌아가 호적등본 상 가족의 인연을 탁 끊어버렸다. 이후 홀어머니와 함께 설마 평생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유년기까지는 함께 살았다고 책의 앞날개에 쓰여 있다. 그래도 백인 홀엄마가 “1960년대에” 유색인 남매를 이렇게 둘 다 번듯하게 키웠으니 대단하기는 대단하다.
<세 여인>을 읽어보니 마리 은디아이의 다른 작품은 굳이 찾아 읽을 거 같지 않아 이 정도만 가비얍게 소개하고 만다. 이 가운데 제일 중요한 소개는 은디아이가 돌 지나자마자 세네갈로 돌아간 아버지.
작품 속 세 여인 가운데 첫번째 여자의 이름은 노라. 서른여덟 살이다. 결혼을 했었는지 모르겠고, 프랑스에서는 중요하지도 않지만, 딸 뤼시와 함께 살았던 변호사이다. 얼마전부터 법학을 공부하는 남자 자콥과 그의 딸 그레트를 자기 집에 데려와 주민등록등본에 올리지 않은 가족으로 함께 살고 있다. 다행히 뤼시와 그레트는 사이가 좋아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함께 잘 논다. 아이들이 그러면 됐지 뭘 더 바라나. 다만 자콥이 이제는 법학 공부에도 관심이 없고, 따라서 변호사가 되고자 한다는 말도 허풍선으로 밝혀져 암만해도 노라가 버는 돈으로 모두 먹고 살아야 할 형편인 것 같다. 가정의 권력은 경제력에서 나오는 법이니, 이 가족의 왕초는 당연히 노라이다. 두번째 공동으로 아이들, 그리고 제일 꼬붕이 자콥이며,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개는 키우지 않는다는 것. 노라는 거의 모든 교육과정을 “총을 들고 건설하는 보람에” 사느라고 죽을 똥을 싸는 향토예비군처럼 악착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졸업을 했고, 어렵게 변호사 자격을 땄으며, 넓지는 않지만 집값에 관한 한 전세계적인 악명을 향유하고 있는 파리에서 30년 할부로 아파트를 구입한 데 대하여 도처에 자부심을 은밀하게 뿜어대는 중이다.
그런데 무려 30년 전에 순서대로 딸-딸-아들을 키우고 있다가 다섯 살 난 아들만 홀딱 데리고, 사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세네갈로 잠적해버린 아버지한테, 급하게 세네갈로 오라고, 꼭 와야 한다는 연락이 온 거였다. 학교에 다니는 뤼시도 있고, 파리 직장에서 해야 할 일도 있어서, 아몰랑! 단칼에 거절했건만, 딱 한 번만 방문해달라고 끈질기게 부탁, 아니, 간청하는 아버지를 끝까지 모른 척할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노라는 세네갈 공항에서 내려, 아버지가 보낸 구형 검정 메르세데스를 타고 저택에 도착하는 것으로 작품은 시작한다.
30년 전에 세네갈로 돌아온 아버지는 해변가의 휴양 리조트를 프랑스인에게 인수받아 이를 성공적으로 리모델링해 대단한 성공을 이룬 왕년의 부자였다. 휴양 리조트를 넘길 수밖에 없었던 전 사장은 유럽에서도 소설에 나오는 아버지들이 주로 완벽하게 더럽고 난폭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동업하던 세네갈 흑인 남자를 때려 눕힌 다음 커다란 트럭을 앞뒤로 몰아 나가 떨어진 동업자의 해골을 바퀴로 짓이겨 죽여버렸다. 자신은 감옥에 수감된 상태에서 당시 세네갈에선 뇌물로 안 되는 일이 없어 어떻게 권총을 감옥에 반입해 총구를 입에 물고 장하게 방아쇠를 당겨 숟가락 놨고. 전 사장의 처자식은 다시 프랑스 보르도 지방으로 돌아가 살다가 아들 뤼디가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세네갈로 가서 고등학교 교사를 했다. 이때 같은 학교에서 불문학을 가르치던 현지인 교사 판타와 사랑을 하고,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았는데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러 해고를 당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사는 게 2부. 그래서 좀 자세하게 쓰는 거다.
세네갈에서도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가는 법. 노라의 아버지 사업도 날이 갈수록 시들기 시작해 견디다 못해 지금은 리조트 전부를 팔아서 생긴 현금으로 어떻게 살고 있다. 그동안 아들이자 노라의 사랑하는 동생인, 정말 남매간의 우애는 아주 좋은 상태인데, 아버지의 아들 소니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정치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이번 방문이 노라의 첫 세네갈 나들이는 아니다. 열두 살 때부터 몇 번 온 적이 있다. 한 번은 날이 가면 갈수록 가난해지는 가정을 견디기 어려워 어머니는 미용실 헤어디자이너를 때려 치우고 조금 비싼 매춘부를 하기 시작했었나보다. 이때 나이도 좀 많고 경력이 있지만 다정다감한 은행 지점장을 만나 처음으로 엄마, 아저씨, 그리고 엄마의 두 딸이 세네갈을 방문한 적도 있다. 당시엔 아버지도 세네갈에서 잘 나갈 때라, 엄마가 결혼해 가정을 다시 꾸렸다는 것에 안심을 해 지점장 아저씨와 친밀하도 위풍당당하게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번에 만나는 아버지는 과거의 오만과 당당하던 풍채는 완전히 사라지고, 늘 깔끔하고 광채나던 의복과 신발은 간데없이, 길고 누런 발톱을 깎지도 않은 채 샌들을 신은 반바지 차림의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불룩 나온 배를 숨기지도 않은 차림이었다. 한 마디로 이제는 쇠락해도 많이 맛이 간 상태에 처했다는 것. 이 아버지는 이제 막 도착한 노라를 식탁으로 안내해서 하인 겸 메르세데스 운전수 마세크와 하녀 카디 뎀바에게 일러 방문객을 대하는 세네갈인의 전통인지 뻑적지근하게 저녁상을 차리게 하고 오직 먹는 일에만 집중한다.
이 이야기에는 완전하게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하녀 카디 뎀바는 책의 3부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좋은 남자와 결혼을 해서 임신을 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하지만 수태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남편이 죽고 만다. 시댁으로 들어가 대바구니 짜서 내다 파는 일을 했지만 시누이들과 비교해 전혀 생산성도 없고 영업도 하지 못해 하루는 종이쪽지에 주소를 써 주면서 유럽의 사촌, 앞에서 말한 고등학교 불문학 교사 판타를 찾아가라고 돈 몇 푼을 쥐어주고 쫓아버린다. 그래서 역시 갖은 고생을 하며 프랑스로 장정을 떠나는 이야기가 3부이다.
아버지는 둘째 딸 노라를 왜 와달라고 그렇게 간청했을까? 집에 와서 보니까 아버지가 최근에 낳았다는 딸 쌍둥이는 있는데, 명색이 아버지이면서 딸 쌍둥이의 이름도 모르고, 쌍둥이의 엄마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나, 이럴 수가. 알고 보니, 그렇게도 점잖고, 말없고, 내성적이고, 절대 과격하지 않은 서른다섯 살 먹은 동생 소니가 쌍둥이 엄마이자 아버지의 새 아내인 여자와 수년 동안 간통을 했으며, 틀림없이 쌍둥이가 소니의 딸임에도, 의붓어머니가 자신한테 싫증을 내는 것 같아서, 나일론 빨래줄로 목을 졸라 죽여버렸다는 거다. 이렇게 증언을 하고, 한 점의 부인도 하지 않은 채 최종 심판을 앞두고 유치장에 들어가 있는 상태였다. 범죄의 질이 하도 좋지 않아 세네갈에서는 어떤 변호사도 사건을 수임하지 않으려 해, 아버지는 언어가 같은 프랑스에서 변호사를 하는 노라에게 소니의 변호를 맡기려 한 것. 그리하여 세네갈의 비위생적인 유치장에서 소니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니는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어떠한 증명도 하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다.
“누나, 나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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