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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최제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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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읽은 단편집 《퀴르발 남작의 성》 이후 어째 최제훈의 다른 책을 찾아볼 생각을 못했을까?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은 도서관 서가를 서성거리다가 눈에 띄어 고른 책이 아니다. 잔뜩 술에 취해 밤새 뒤척이다가 새벽에 오줌 마려워 깨기 바로 직전, 아마 비몽사몽 중이었던 거 같은데, 허연 수염이 배꼽 밑에까지 내려온 할배가 퀴르발 남작이라고 아느냐고, 혹시 기억하느냐고 물어보더니 펑 소리와 함께 흰 연기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니었느냐는 말이지. 안 믿기지? 맞다. 구라다. 그냥 갑자기 퀴르발 남작이 떠올라서 그래, 그래 최제훈이 있었어 싶어 잽싸게 검색해봤더니 동네 도서관에는 없어서 상호대차서비스 신청해 읽었다.
제목부터 근사하잖아?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이라. 근데 한 가지 오류가 있다. 즉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하나 있다. ‘블러디메리’를 나는 ‘블러디 (한 칸 띄고) 메리’ 즉 헨리 튜더와 에스파냐의 공주 아라곤의 카탈리나 사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손이자 잉글랜드 역사상 사실상 최초의 여왕 메리 1세, 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성공회 사제들과 기타 개신교도들을 줄줄이 화형을 시켜 별칭 “피의 메리”로 불린 비운의 여성을 일컫는 말인 줄 알았다. 책에 다섯번 째로 실린 <토피아>에 ‘블러디메리’가 나온다. 변호사 우영우 말대로 기러기,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역삼역과 더불어 똑바로 해도 토마토, 거꾸로 해도 토마토에 관한 짧은 이야기.
“토마토는 거꾸로 해도 토마토라는 사실이 토마토의 정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토마토는 자신이 토마토라는 걸 모르니 상관없을 것이다. 아는지도 모른다. 토마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해본다. 케첩과 카프레제와 블러디메리가 없는 세상. 토마토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토마토를 상상하는 것과 같다.” (p.169)
카프레제는 “신선함이 가득한 토마토 요리”라고 ‘만 개의 레시피’라는 홈페이지 http://www.10000recipe.com에 나온다. 안 먹어봐서 모르겠다. 그냥 그런가보다 하자. 여기까지 왔으면 ‘블러디메리’도 이 비슷한 먹거리겠지? 우습게도 블러디메리는 토마토주스를 왕창 때려 넣은 보드카 베이스 칵테일이다. 술에 관해서는 신뢰할만한 나무위키가 설명하기를, “서구권에서는 해장술로 사랑받는 칵테일”이라고 한다. 붉은 색의 토마토주스가 피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
그럼 이 책이 만약 이 세상에 해장술이 없었더라면, 하는 수준일까? 천만의 말씀. 내가 전에 읽은 《퀴르발…》의 단편들을 생각해보면 그럴 턱이 없다. 남작의 젊음을 유지시키기 위하여 인근 동네의 어린아이를 잡아와 산삼, 황기, 감초 등을 넣고 폭 고아 먹는 이야기를 쓴 작가가 설마 해장술에 관해 썼을까? 진실은 다음으로 하고, 여왕이 차마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수백명을 불에 그슬려 죽인 엽기적 사실에서 나온 ‘피의 여왕’이란 이미지가 더욱 중요했을 것이다.
아, “화형”이라고 해서 정말로 펄떡펄떡 살아있는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형집행인이 사형수를 거의 죽음에 이르기 직전까지, 아니면 죽은 상태로 만들어 놓은 다음에 불을 붙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물론 집행인에게 이런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어느 정도 사례를 해야 했지만 전설 속 오를레앙의 처녀 잔다르크처럼 발끝부터 몸이 차근차근 타올라오는데도 뜨거운 줄도 모르고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한 예는, 아이 씨, 있었겠지, 정말 있었겠지만 거의 없었다는 거다. 형 집행인도 사람이고 게다가 당시엔 천주의 어린 양 가운데 한 마리였음에야.
단편소설 여덟 편을 모아 책 한 권을 만들었다. 근데 문제가 있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 토요일 오후. 세 편을 읽고 다음날은 일요일. 가족 총출동해 안성 팜랜드로 봄나들이 가서 잘 놀고 왔다. 해를 받아 양쪽 뺨이 발갛게 탈 정도로 하루 종일 놀았다. 모자 쓰고 고글도 써서 다행이지 가뜩이나 숱 없는 대가리 껍데기 홀랑 까질 뻔했다. 첫째 월요일은 도서관 휴관일. 이렇게 이틀 놀고 나흘째 되는 화요일에 마저 읽었는데, 그날부터 내리 며칠동안 또 쐬주를 장하게 비우는 바람에 독후감 쓰는 맥이 탁 끊겨버렸다는 거.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은 미래 소설이다. 가깝거나 가깝지 않거나 하여간 미래인데 흥미롭다. 물론 디스토피아 적 세계관에 입각했더라도 공감까지는 아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하다고 인정하게 되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갈채할 만하다. 예를 들어 <애프터서비스>라는 단편을 보자.
정말 머지않은 미래가 시간적 공간이다. 원자력과 화석연료, 실리콘 폐기물을 생성하는 태양열 발전 등은 전부 불가능한 시대가 왔다. 그래도 인간은 전기를 사용해야 한다. 필요는 방법을 만들어내는 법. 사람이 꿈을 꿀 때 대뇌 측두엽 깊숙한 곳에 해마 모양을 한 기관인 시상하부에서 특수한 뇌파를 발생시키는데, 이것을 특수 컨버터를 이용해 전기 에너지로 바꾸는 시대이다.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기억을 하든 말든 매일 꿈을 꾼다. 즉 전기를 발생시킨다. 이걸 중앙집중 관리센터인 D-컨버터에 모아 사용하고, 만일 개인이 꿈에 의한 전기 발생을 거부하면 개인이 사용하는 전기 요금에 할증이 붙는다. 할증이래봐야 그까짓 것이 얼마나 할까 싶지? 이미 4인 가족 생활비의 60퍼센트 이상이 전기요금으로 지출되는 세상이다. 내가 언젠가 그랬다. 비싼 청정에너지만 사용한다면 죽어나는 건 빈곤한 사회의 약자뿐이라고. 뭐 그렇다는 거다.
근데 미혼모 한은별 씨는 1년 전에 아들 한서현 군을 조수석에 태우고 제2 자유로를 씽씽 달리다가 트럭에 충돌해서 자기는 살았지만 서현 군이 현장에서 즉사한 일이 벌어졌다. 이후 우울증에 시달리는 한은별 씨는 날마다 꿈에 서현 군을 만나는 것에 기대 사는데 ‘드림캐처’에 꿈을 축적시키면 아들 나오는 꿈을 이어서 꿀 수 없어서, 꿈에서나마 아들 얼굴 보는 재미로 사는 은별 씨는 은별 씨와 비슷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공유하는 불법 장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꿈을 꿀 때 뇌파를 전기에너지로 변환한다는 건 과하게 엉뚱한 상상이긴 한데 소설이잖은가. 여기에 자기가 낸 사고로 목숨을 잃은 엄마의 개인사가 보태면 당연히 따듯한 소설 한 편이 될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블러디메리가 나오는 단편 <토피아>의 주인공은 임현우이다. 오랜 마취상태에서 깨어나니 한 여성이 앞에 있다. 민주아. 흠. 연애소설은 아닐지언정 둘 사이에 애정이 꽃피우겠군. 이렇게 생각하면 오산이다. 임현우가 깨어난 곳은 해발 2천미터에 인공적으로 가설된 직경 5킬로미터짜리 거대한 돔. 말 그대로 땅 위의 낙원을 뜻하는 “지상낙원”이다. 그래서 제목이 유토피아에서 ‘유’를 뺀 <토피아>. 이곳에서는 노동할 필요가 없다. 뭐든지 원하면 무상제공. 의식주는 물론이고 자기가 원하고, 환경이 허용하면 취미생활까지. 환경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경우에는 하다못해 놀랄만큼 발달한 VR로 실제보다 더 실감나게. 물론 일하고 싶은 사람은 초로의 최무태 씨처럼 텃밭을 가꾸어 토마토와 싱싱한 채소를 기를 수도 있다. 음식은 셰프봇이 해주고, 천명으로 한정하는 거주인들은 온갖 고상한 취미생활에 여념이 없다.
그러다보니 어떻겠어? 그렇다. 지루해 죽을 지경이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 초짜 입주민이지만, 주인공 임현우처럼 정말로 목을 매는 사람도 가끔 생긴다. 죽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건강을 위하여 혈관에 심은 미세한 크기의 치료봇이 심장과 혈관, 기타 기관을 늘 점검하고 있고, 데이터가 중앙 관리실에 집중해 있어 사고 즉시 발견되어 스스로 죽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죽으려면 순식간에 팍 터져 죽는 방법 말고는 아마도 없을 듯.
임현우는 환장하겠다. 누가 나를 여기로 보냈을까? 전혀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한 홀로그램 관리자가 설명해준다. 임현우 스스로 자기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해발 2천미터의 지상낙원으로 이주하겠다고 홍체 서명한 동영상을 보여준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몽땅 삭제하는 데 동의했을까? 얼마나 지긋지긋한 삶을 살았을까? 얼핏 보면 임현우와 일부 동조자가 뜻을 합하여 이 천하의 지상낙원에서 탈출작전을 펼 거 같지? 그건 당신이 영화를 너무 많이 봐서 그렇다.
하여간 재미있다. 최제훈, 이 사람,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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