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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 맹인 안마사 ㅣ 문예중앙시선 32
심재휘 지음 / 문예중앙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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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휘는 처음 읽는다. 며칠 전에는 구병모가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였던 반면, 이번엔 심재휘가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였다. 아이고, 무식하면 가만이나 있지. 차라리 시치미 딱 떼고 조용히나 있던지 말이지. 이게 뭐야, 자만심 상하게시리.
‘재’자 돌림 심재휘는 강릉 출신의 1963년 토끼띠 교수님. 눈치를 보아 빠른 63년이라 범띠일 수도 있겠다. 고려대학 국문과와 같은 대학원 국문과에서 박사 취득. PhD를 딴 1997년에 작가세계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한 심재휘는 현재 대진대학 문예콘텐츠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이제 나이 들어 학과장 자리를 후배한테 넘긴 거 같다. 개나 걸이나 다 등록되어 있는 네이버 인명사전에 심재휘의 이름은 없다. 그게 오히려 특색있군. 근데 인터넷 책방 응24에는 심재휘에 관해서 두 가지 자료가 있다. 다른 하나는 고려대학에서 교육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강사로 재직 중인 심재휘. 거참 조금 헷갈리는 데 이 시집을 낸 시인 심재휘는 대진대 교수가 맞을 거다. 지가 설마 대학에 내는 이력서를 거짓으로 썼겠어?
제일 앞에 배치한 시부터 톡 쏘는 맛이 있다.
옛사랑
도마 위의 양파 반 토막이
그날의 칼날보다 무서운 빈집을
봄날 내내 견디고 있다
그토록 맵자고 맹세하던 마음의 즙이
겹겹이 쌓인 껍질의 날들 사이에서
어쩔 수 없이 마르고 있다 (전문 p.13)
누가 시인 아니랄까봐 양파 하나 자르면서 옛사랑을, 그리 허망했던 맹세를 떠올린다. 그래서 눈물 좀 찔끔거렸을까? 자꾸 옛사랑 생각하지 말아라. 그러다 진짜로 만나면 사고친다. 하긴 뭐 그게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아느냐고? 넘겨짚지 마시라, 안 알려준다.
옛사랑을 시집의 선봉에 세웠다고 이런 시들만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도서관에서 특히 시집을 골라 읽으면 앞서 읽은 독자가 좋게 읽은 시에 표시를 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이 책에서 그런 시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소개해보자.
어떤 무늬
오후의 병실에 해가 지나가고
나는 그의 이마를 손으로 짚어본다
아주 천천히 몇 점의 온기가
그의 걸음처럼 내게로 온다
체온을 띠고 만나는 서로의 젖은 뼈 사이에는
바람에 이는 잔물결들만 가득하다
가장 적은 피와 살로 연명하는
이생의 몸 하나를 만질 때
내 아버지라는 무늬의 벽지로 도배해놓은
이토록 낯익은 방 안에 들어와 볼 때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나의 생에 어룽대며 비쳤던
벽지의 무늬
그의 폐가 서서히 저물듯이 저녁이 오고
나는 때늦은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린다
낡고 여윈 무늬 하나가
나를 쳐다본다
아버지라는 무늬의 방
누군가 이 방의 문을 걸어 잠근다면
나는 그 안에 영원히 갇히게 되겠지만
방 안의 무늬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다시는 볼 수 없겠다 (전문 p. 28~29)
소설 속의 우리나라 아버지들은 대개 취미생활로 술 마시기와 식구들 두드려 패기, 고기 안 먹는다는 딸 입 속에 억지로 탕수육 쑤셔 넣기, 오토바이 뒤에 개 한 마리 줄로 묶고 달리기, 치마만 입었다 하면 누가 됐든 자빠뜨리기, 도리짓고땡과 섰다 같이 비 오는 날 우산 쓴 남자와 개구락지 그림 구경하기 등등인 반면 시 속의 아버지는 개구락지의 사촌형인 두꺼비가 손등에 앉은 것처럼 막노동을 하면서 가족 먹여 살리느라 선비손이 거친 손으로 변해버렸거나, 라면을 끓이는 한이 있어도 그게 딸들과의 기쁜 만찬으로 변하게 하거나, 평생의 궁상을 접고 이렇게 세상을 마감해 남은 자식들 앙가슴을 울리고 만다.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소설이라는 산문은 삶의 곤고함에서 나오고 시라는 운문은 삶의 그리움에서 나오기 때문에? 아냐, 아냐. 이런 주장은 틀림없이 염병일 거야. 좋아. 실제의 아버지는 소설에 가까울까, 시에 가까울까? 참 나. 남의 시 읽으면서 별 엉뚱한 생각을 다 하네. 이런 분도 계시고 그런 새끼들도 사는 거야. 그게 인생이잖아.
이 시집의 2부는 “북쪽 마을에서의 일 년”이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위도 45도. 추운 곳. 처음 나오는 시의 제목이 “전나무 숲 속의 자작나무 한 그루”. 나는 북쪽, 그러면 저 캄차카 반도부터 시작해서 서쪽으로 광활하게 펼쳐지는 타이가 삼림을, 그걸 지나쳐 광활한 벌판과 목초지대, 그리고 사막을 연상한다. 내 상상 속의 북쪽 마을은 유라시아 반도의 북쪽, 한대림freezing forest과 황량한 벌판과 초원, 한때는 열대 삼림지역이던 거친 사막은 당연히 한 시절 나의 로망이었다. <전나무 숲 속의 자작나무 한 그루> 3연과 4연은 이렇게 쓰였다.
눈 쌓인 뒷마당가에는
전나무 숲이 어둠을 품고 잠들어 있다
마지막 남은 원주민인 듯
마음이 서러운 갓 이민자인 듯
자작나무 한 그루 젖지 않은 전나무들 사이에 서서
온몸에 눈을 맞고 있다
좁고 둥근 그의 발치로 달빛은 내려와
여윈 뿌리를 손으로 가만히 덮어준다
눈부신 날에 누군가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는지
자작나무 쪽으로 한 사람의 발자국이
밤눈 위에 곧게 나 있다 (부분 p.64~65)
무슨 근거로 이 시를 읽고 유라시아 대륙의 위도 45도 근처라고 했느냐고? 일간 시에서 위도 45도, 겁나 추운 곳이라 말했고, 시집의 제목이 《중국인 맹인 안마사》이며, <변방에서>라는 시 속에는
섣달 중에도 흐린,
옛 만주국의 어느 변방을 걸으면
갑자기 들켜버린 마음처럼 나타나는
러시아 거리가 있다
(중략)
1월의 햇살처럼 말없이 빛나는 곳
영문도 모르는 중국 소녀들이
조잡한 가로등에 기대어 서툴게
눈빛을 보낸다 (하략) (부분 p.22)
얼핏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떠오르는 바람에 국경의 밤 비슷한, 그러면서도 친근한 기분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원주민”이니 “마음이 서러운 갓 이민자”라느니 해서 영낙없이 이 시인이 드디어 나의 로망, 유라시아 북쪽의 타이가 숲을 건드리고 마는구나, 잠깐 감격했다는 것이지. 근데, 하긴. 명색이 대학 교수인데 일년 동안 러시아의 타이가 숲에서 살았겠느냐고. 아무리 안식년이라 해도 그게 안식하라고 주는 안식년은 아니잖여? 그잖여? 눈치를 보니 딸과 함께 타이가 숲이 아니라 캐나다의 한 도시에서 살다 온 모양이다. 캐나다야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다 밀림이고, 원주민은 별로 구경할 수 없어도 있기는 있고 이민자는 많겠지. 그래서 좋다가 김 샜다. 그건 시인 책임 아니다. 미리 김칫국물 벌컥벌컥 마셔버린 내가 후졌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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