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쇄 위픽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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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에 참 구경하기 힘든 것 가운데 시인, 소설가, 극작가 중에서 남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 구경을 하는 거다. 이미 문학판은 여성시대라고 전에도 말한 바 있다. 그리하여 시중에 구병모라는 이름이 돌아다니는 걸 보고, 이야, 오랜만에 남자 작가가 떴구나, 반가워하던 일도 있었다. 구병모의 작품을 꼭 읽어본다고 작심을 했건만 어떻게 지내다보니 세월만 죽였다가, 이번에 탁, 골랐다.

  <파쇄>. 단편소설 딱 한 편으로 책 만들어 비싸게 팔아먹는 위즈덤하우스의 위픽시리즈 가운데 한 권. 이번에도 어김없이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페이지 수 적고, 판형 작고, 페이지 여백 널럴하고, 최소한의 활자만 들어가게 만든 신묘한 편집으로 찍은 위픽시리즈는 한 나절이면 책 다 읽고 독후감까지 쓴다. 준비, 땅, 해서 첫 페이지 딱 넘기니까, 엇, 이게 웬걸. 느와르. 10대로 보이는 여성이 산 속에서 성인 남자이며 전문적인 킬러로부터 수련을 받는 이야기이다. 내용은 다분히 저 오래 전 홍콩 영화에서 가족 몰살당한 청년이 외진 곳에 은거하며 홀로 사는 무림의 절정고수한테 무술을 배우는 것과 동일하다. 즉 초보와 비슷한, 이때 초보라고 하는 것도 우리 일반 시민이 보기에는 절정의 고수지만 고수들이 보기에 초보라는 뜻의 초보라서 상당한 싸움과 살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수준을 일컫는데, 이 초보가 고수의 지도편달 아래 날이면 날마다 저 먼 계곡에서 물을 날라와 큰 항아리에 채우고, 온갖 험한 훈련을 마다하지 않다가 상처도 입고 뭐 그렇게, 거창하게 말해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는가, 시험을 거쳐 결국 사부를 능가하는 초절정고수로 하산하는 것까지. 다만 단련하는 것이 쿵푸가 아니고 진짜 살육, 암살, 저격, 작업 후 도피, 은닉 기술 등을 총망라한다. 세월이 가니까 맨손 싸움에서 칼, 총으로 진화하는구나. 아무렴, 그래야지. 아직도 취권, 당랑권, 외팔이 드래곤 하면 장사가 되겠어?

  그러나 아뿔싸, 나하고 코드가 맞지 않는다. 나, 이런 거 안 좋아한다. 많고 많은 장르 중에 하필이면 죽고 죽이는 이야기를. 그러지 않아도 살기에 팍팍한 세월에 말이지. 그래서 얼른, 후딱 읽어 치웠다.

  놀라운 일은 책 다 읽고 독후감 쓰려고 작가 구병모를 검색해보는 중에 생겼다. 세상에. 구병모가 여자다. 본명 정유경. 경희대 국문과를 졸업한 76년 용띠 여사님. 피시식. 그럼 그렇지, 요즘 세상에 남자 시인, 소설가, 극작가가 어디 흔해? 이제 여성 작가가 이런 장르의 소설을 쓴다 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세월이다. 작품은 재미있게 읽었다. 나하고 맞지 않아서 좀 그랬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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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25-04-07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젊은 여성작가’ 분들이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길’을 놓고서 꽤 자주 글을 쓴다고 느낍니다. 여러모로 보면, ‘예전 젊은 남성작가’ 분들이 쓰던 글감이고 글결이었습니다. 이제는 ‘글쓴이’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었을 뿐이지요.

여러모로 보면, ‘예전 젊은 남성작가’는 집·마을·학교·군대에서 몸소 깊게 겪은 바 있는 갖은 ‘폭력’을 녹이고 풀어서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길’을 썼다면, 또 ‘예전 젊은 여성작가’는 한국전쟁이며 일제강점기라는 굴레를 거치면서 겪은 숱한 죽음을 녹이고 풀어서 썼다면, ‘요즘 젊은 여성작가’ 분들은 ‘사람을 죽이는 솜씨 아닌 솜씨’를 길들이는 ‘군사훈련’을 ‘남성이 여성을 억누르는 나라’라는 틀에서 바라보면서 쓴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받은 피나고 쓰라린 나날’을 녹이고 풀어서 쓰는 ‘죽임질’ 이야기하고, ‘남성가부장권력 마초사회라는 고달프고 괴로운 나날’을 녹이고 풀어서 쓰는 ‘죽임질’ 이야기는 글감과 얼거리와 맺음말이 사뭇 다르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둘 모두 ‘평화’라든지 ‘삶’하고는 맞물리지 않는다고 느낍니다. 다만, 오늘날 ‘젊은 여성작가’ 분들이 쓰는 소설은 “나중에 연속극이나 영화가 되기를 바라면서 쓴 밑글(시나리오)” 같다고 느껴요.

그냥 문학을 하고, 그냥 글을 쓰면 될 텐데 싶어서 여러모로 아쉽다고 느낍니다.

Falstaff 2025-04-07 10:23   좋아요 0 | URL
구병모가 76년생이면 오십인데요, ˝요즘 젊은 여성작가˝라 부르는 것이 좀 어색하긴 합니다.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 하는 데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요. 그게 자기 삶 또는 지난 삶에 대한 아쉬움이면 어떻고, 돈이면 어떻습니까.

hnine 2025-04-07 0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병모 작가가 남성인줄 아셨군요 ^^
장르 소설, SF소설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작가로 알고 있는데, 이 희곡의 내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뜻밖이네요.

그나저나 취권...추억의 영화 이름에 추억 돋습니다. 중학교 1학년때인가, 아버지와 극장 가서 봤어요. 동생들은 연령제한때문에 저만 으쓱하며 보고 왔던 영화였지요.

Falstaff 2025-04-07 10:16   좋아요 0 | URL
정말 남성 작가인 줄 알았습니다. 책 다 읽을 때까지요. ㅋㅋㅋ
취권을 중1 때 보셨다면 저보다 아주 조금 후배님이시네요. 왕우王羽의 외팔이 드라곤은 모르실 거 같고요.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