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구아 비바 암실문고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지음, 민승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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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라면 그녀의 나이 스물둘에 쓴 <야생의 심장 가까이>를 가장 먼저 읽었다. 주인공 주아나의 친절하지 않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 한 여름의 대낮. 탁-탁, 탁, 탁. 타자기 두드리는 소리. 뎅-그렁. 건조한 공기를 뚫고 들려오는 시계 우는 소리. 타자로 시를 쓰는 아버지를 흉내내, 시를 써서 아버지에게 보여주지만 딸은 그리 큰 관심을 받지 못한다. 남편과 아이를 두고 집을 나가버린 어머니 엘자에 대한 기억은 가물가물하다. 어쩌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몇 안 남은 선량한 선생의 조언. 행복해지면 뭘 얻을 수 있을까? 행복해지면 어떻게 되나? 그 다음엔 뭐가 오지? 무엇을 위해 행복해져야 하나? 같이 뒤를 잇는 의문문들.

  작가의 성장과정을 아는 것은 독자에게 이런 의미에서 필요하다. 어머니의 존재 없음이 딸에게 미치는 영향. 또는 딸을 미칠 수 있게 하는 영향. 글을 쓴다는 일이 일종의 미쳐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지만. 유대인 가족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에 살 당시, 리스펙토르가 세상에 나오던 시기인 1919년에서 1920년 사이에 벌어진 우크라이나 지역의 반유대주의 폭동과 학대를 일컫는 포그롬 시절, 클라리시의 어머니 마니아가 폭도들에 의하여 강간당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 일을 클라리시가 직접 목격을 했는지, 아니면 가족 내 깊은 트라우마로 작용해 가족공동체로 절망적이고 궁극적으로 밀실 공포증 적인 상태 속에서 살게 되었는 지, 두 경우 다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여간 이 일로 리스펙토르 가족은 클라리시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브라질로 이민하게 된다. 어머니는 딸이 아홉 살 때 숨을 거둔다.

  그리하여 데뷔작, 놀라운 충격일 수밖에 없는 데뷔작인 <야생의 심장 가까이>는 물론이고 <별의 시간>에서도 죽음과 삶의 흔적에 관한 작가 자신의 내적 갈등을 묘사하는 데 9할, 적어도 8할 이상의 지면을 투여한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글은 수많은 비의, 은유, 미로로 점철되어 있어서, 독자는 작가의 언어를 따라가며 각기 저마다의 오해 또는 오역을 가미할 수밖에 없다. 작가를 오해하지 않고는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책, 문장들의 집합. 그것이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이다.

  여태 읽은 세 권의 책 가운데 이것, <아구아 비바>가 제일 그랬다.


  “거기엔 몹시도 심원한 행복이 있다. 할렐루야가 있다. 할렐루야, 할렐루야. 나는 이별의 고통이 담긴 처절한 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할렐루야를 외친다. 나는 아직 이성을 잃지 않았지만―이성의 광기라고 할 수 있는 수학을 배웠으므로―그러나 지금 나는 혈장을 원한다:”


  작품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런 불경의 할렐루야로. 할렐루야는 주를 찬양하는 할렐루야가 아니라 인간의 울부짖음과 합쳐진 악마의 환호를 말한다. 무엇이 리스펙토르를 기존의 율법에 대하여 극한 도전을 하게 만들었을까? 여기에서도 작가의 바이오그래피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쉰일곱 번째 생일을 불과 얼마 남겨두지 않고 난소암으로 세상을 떴다. 그러나 그녀의 후반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고통은 마흔네 살 때 집에서 난 화재로 인한 화상의 상처였다. 인류가 포유 짐승이던 시절부터 수만 년 동안 가까이 할 이유가 없었던 뜨거운 열기로 인한 피해, 화상에 대해 인류는 그걸 대비하고 스스로 치유할 기질을 가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화상은 인류의 모든 외상 가운데 가장 고통스럽고, 돌이킬 수 없는 흉터를 남기며, 치유하기 위하여 제일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 리스펙토르는 화재 당시 입은 화상을 거의 치료했지만, 지독한 화상의 후유증, 몸과 특히 마음 속에 도사린 끔찍한 고통의 기억 속에서 쉼없이 흔들리는 영혼으로 <아구아 비바>를 쓰고 있었다.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다. 리스펙토르 자신이 직접 그렇다고 말할 작가가 아니라서. 아니면 어떤 식으로도 인간의 울부짖음과 악마의 환호, 그리하여 타인의 피, 혈장을 원하는 상태를 할렐루야, 찬양할 수는 없을 테니까.

  독자는 처음부터 이렇게 큰 펀치 한 방을 맞고 시작한다.

  제목 <아구아 비바 Agua Viva>. 1971년에 쓰고 73년에 발표한 작품. “살아있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을 감안하고 위에 인용한 시작부분을 연상하면 이제 앞으로 뭔가 흐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지난 세기가 시작할 때부터 독자는 글 속에서 뭔가 흐르는 양식을, 쥐뿔도 아는 건 없어도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고 주장할 준비가 되어 있는 족속들이다. 그래서 기대한다. 이제 뭔가 흘러주기를. 게다가 제목 자체가 물이라고 하니까. 하지만 흐름은 시작하자마자 브라질의 열기 속으로 증발해버렸거나 모래땅 속으로 스며들어버렸다.


  바로 다음에 거론하는 주제는 ‘지금-순간’. 즉 현재. 미시적 현재라서 시작하자마자 벌써 과거가 되어버린, 숱하게 많은 작가, 작가 지망생들이 써먹어 식상하기 그지없는 현재의 포착을 말하지만 당연히 실패하고 만다. 현재를 붙잡는 일은 순간의 본질적인 특성 상 금지되어 있지만 유일하게 허공에서 빛나는 순간의 보석을 순간의 떨림 속에서 느낌으로 승화하는 물질, 도파민이 틀림없을 것 같은 물질을 황홀경 속에 반짝이는 기쁨의 순간은 있다고 주장한다. 바로 사랑의 행위. 몸의 기이한 영광, 형태가 없는 동시에 너무도 객관적이어서 마치 몸 밖에서 생겨나는 듯한 기쁨, 기쁨, 기쁨의 시간, 순간의 본질.

  아, 이런 식으로 흐르나보다. 독자는 한 번 더 오해한다. 특별한 교육을 받은 평론가는 뭔가 흐르는 것을 감지할 지도 모르지. 그러나 작가는 이 기쁨의 순간에 ‘찬미하는 주께서 계신 하늘’이 아닌 ‘허공’에 대고 새처럼 노래한다. 이 사랑마저, 고통스러운 열정 없이는 할렐루야가 사랑의 뒤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등장한다. ‘당신.’

  이렇게 해서 드디어 소설은 2인칭 소설이 될 수 있을까? 글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나는 아니라는 쪽으로 손을 든다. 더할 수 없이 개인적인 소설. 오직 자신의 뇌 속에서 벌어지고, 파생되고, 기어 나오는 추상명사들의 열병, 열병에 이어지는 분열행진. 때에 따라 낱말이나 구절의 폭탄을 과시하는 무장행렬.

  명사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추상명사들로 ‘나’는 ‘나’ 자신과 당신, 정말 당신일 수도 있고, 책을 읽고 있는 독자들일 수도 있는 당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무언가를 만들 것인데, 그건 죽음에 이르는 나의 자유이다. 죽음까지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건 자유이고, 자유에 이르게 만드는 건 추상명사들인데 추상명사 속에서 중요한 요소 가운데 ‘고통’이 들어있다고 추리한다. 독자는 단정하지 못한다. 다만 추리할 뿐. 작가 자신 스스로 단정하는 건 추상명사 말고 없기 때문에.

  그리하여 독자는 결코 두껍지 않은 책을 읽는데 지쳐버리기 시작한다. 만일 리스펙토르 특유의 강건체와 화려체 문장이 아니라면 이런 추상명사의 군집, 다른 곳에서도 아니고 엄정한 ‘산문’ 형식의 예술형태 속에서 추상명사가 득실거리는 현상에 대하여 “내 상태는 물이 흐르고 있는 정원.”이라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 다른 독자는 모르겠지만 나는 리스펙토르 표 문장이 아니라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이렇게 많은 상황, 상태, 변용 등을 나열하다가, 그래서 독자가 책을 읽으며 미궁에 빠져들기 바로 직전에, 다행스럽게 책의 분량이 많지 않아서, 어느덧 결말 부근에 도달하면, 놀랍게도 여태 쏟아놓은 추상명사들, 아무렇게나 난삽하게 널려 있는 줄 알았던 추상명사들을 어느 새 넓은 빗자루로 쓸어 모아 적어도 한 군데 소복하게 모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지복至福 자체는 종교적이지도 세속적이지도 않다. 그리고 신이 존재하느냐 존재하지 않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도 아무런 입장을 가질 필요가 없다. 내 말은, 어떤 사람이 머리로 하는 생각과 이 ‘생각-느낌’은 서로 극도의 불통에 이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아무런 궤변이나 역설 없이 말하건대, 그 불통 지점은 그에게 있어서 가장 훌륭한 소통을 제공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는 자기 자신과 소통한 것이다.”


  이렇게 클라리시 리스펙토르는 지복에 관하여 독자들과 소통하고자 했던 거였다. 시도가 성공을 했건 실패했건 판단하는 것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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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5-02-11 08: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시 읽어보니 완전히 꿈보다 해몽이구먼. 인생이 다 그렇지 뭐.

공쟝쟝 2025-02-11 08:35   좋아요 1 | URL
와!!!! 퐐님 특유의 해몽..! 재밌게 읽었어요, 저는 작가의 이력은 이 글 읽기 전에 전혀 몰랐고 책상위에 산문집을 올려두고 종종 읽는데요, 클라리시는 사랑이 많고 꽤 명랑하고 산뜻한 산문을 쓰는 작가였어요. 그래서 아구아 비바 읽을 때랑 뭔가 다른느낌이라 신기하기도…!

Falstaff 2025-02-11 15:30   좋아요 1 | URL
재밌게 읽어주어 고맙습니다! 이이의 작품은 정말 읽기 쉽지 않아요. 그렇다고 막 쓰면 쥐뿔도 없으면서 잘난 척하는 거 같고요. ㅋㅋㅋ 산문집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공쟝쟝 2025-02-11 17:10   좋아요 1 | URL
퐐님 글은 (물론 그냥도 장광설이 좋지만) 책 다 읽고 난 뒤에 보면 더 읽기 좋은 것 같아요. 아. 이런 맥락이 있을 수도 있었겠구나.
제가 느꼈던 아구아 비바는 매우 추상적이면서도 엄청 신체적인 글이었고, 뭔가 읽으면서 대단한 걸 읽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지 못했어요!!!
작가의 삶 자체에 대해서 알아볼 생각을 하지 못했던 걸 보면... (제가 게으르기도 하지만) 책 자체를 책 자체로 좀 느끼보고 싶었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요 글 보고 나서는 다른 느낌으로 다시 읽어볼 수도 있을거 같고요? 아무튼 크라리시 리스펙토르 만세!

수이 2025-02-11 2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구아 비바는 별 다섯 개인데!!!

Falstaff 2025-02-12 06:50   좋아요 1 | URL
작품한테 송구하지만 독자가 따라가지도 못하면서 별5를 찍을 수 없었답니다.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