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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풍경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135
E.T.A. 호프만 지음, 권혁준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8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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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낭만주의 문학은 괴테와 실러에 이르러 극점에 올랐다. 극점? 가장 꼭대기. 그러면 이제 남은 일은 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일. 이렇게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를 시작하고, 이를 이끄는 그룹으로 한 세대 아래 작가들이 등장하니, E.T.A. 호프만, 아달베르트 슈티프터, 테오도어 폰타네, 고트프리트 켈러,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같은 이들이었다. 물론 더 다양한 작가들이 있으나 내가 읽어본 사람들만 뽑으면 그렇다는 거다. 이들이 만든 백화제방. 각기 다른 방면으로 자신의 문학을 펼쳐 난만한 화전을 만들었지만, 앞에서 거론한 괴테와 실러, 워낙 막강한 봉우리에 가려 그리 눈에 확 들어오지는 못했다. 적어도 극동 아시아 변방의 독자에게는. 문학적으로 지향하는 바도 서로 달라 호프만은 엽기 환상, 슈티프터는 자연으로의 회귀, 폰타네는 남녀상열지사, 켈러는 스위스 사람이니까 그냥 건너 뛰고, 클라이스트는 정치변혁 같은 주제를 선호했다.
이들 가운데 오늘의 주인공 E.T.A. 호프만, 에른스트 테오도어 아마데우스 호프만은 괴테가 스물일곱 살 때인 1776년에 태어나 괴테가 죽기 10년 전인 1822년 6.25날 죽었다. 그러니 평생 추밀고문관 괴테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긴 그 시절로 보면 괴테가 너무 오래 살기도 했지만. 구체적인 바이오는 생략하고, 하여간 다양한 예술 방면으로 놀라운 재능을 과시한 호프만은 당시에 소설가, 극작가, 법학자, 피아니스트, 작곡가, 그리고 음악 평론가로 활약했다. 우리나라에서 출간한 호프만의 단행본 가운데 표제작으로 가장 많이 쓰인 단편소설 <모래 사나이>는 19세기의 독일태생 프랑스 작곡가 자크 오펜바흐에 의하여 오페라 <호프만 이야기>의 1막으로 다시 만들어져 우리나라의 가장 유명한 소프라노 조수미도 작중 여자인형 올랭피아의 아리아를 자주 노래한다. 이렇게 호프만은 후대의 시인, 소설가, 음악가한테 크고 많은 영향을 주었으니 비록 이 책의 앞날개에 쓰인 대로 “에드거 앨런 포, 도스토옙스키, 보들레르, 발자크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수준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후 유럽 각지에서 쓰이는 고딕 문학, 고딕 소설의 기초를 만드는 작가 가운데 중요한 한 명이었을 것이다. 설마 <모래 사나이>의 주인공 가운데 한 명인 나타니엘이 사랑에 빠지고 만 인형 올림피아를 리얼돌하고 연관시키지는 않으시겠지? 암, 그래야지.
그런데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큰 그림을 보자. 호프만, 슈티프터, 폰타네, 켈러, 클라이스트. 괴테와 실러는 18세기 사람이라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독일 후기 낭만주의의 꽃을 피운 이 사람들이 19세기 초에 만들어내는 독일 문학. 앞 세대까지 독일의 문학은 다른 지역과 비교해 꿀리지 않는 위상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게 큰 작가 한 명, 괴테의 힘에 전적으로 기댔다고 쳐도. 하지만 후기 낭만주의 문학부터 본격적으로 “재미없는 독일 소설/문학의 시대”가 열린다. 재미가 있고 없고는 당연하게 다른 특정 작품군과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일 수밖에 없다. 하필이면 조금 차이가 있지만 19세기 들어 영국 문단에서는 디킨스와 셰커리를 필두로 (매리) 셸리와 브론테 자매 등이, 파리에서는 위고와 발자크, 그리고 뒤마가 위대한 프랑스 문학의 세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내가 거론한 저 다섯 명의 독일 후기 낭만주의자 말고도 같은 시대에 활약한 독일어 작가들은, 하필이면 칼라스와 테발디가 밀라노 극장을 장악한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한 다른 소프라노들처럼 불운의 별을 타고났다고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그게 다 팔자고 운명이니 괜히 핑계대지 말라고, 몇 년 있다가 저승 가서 만나면 얘기해줘야겠다. 그래도 책임은 당신들이 지라는 것도 빼먹지 말고. 아참, 난 유물론자이지? 흠. 만날 수 없겠는 걸.
《밤 풍경》은 1817년에 두 권으로 출간했는데, 을유문화사가 회사의 이름에 걸맞게 두 권, 여덟 편을 묶어 단행본으로 내놓았다. 46세에 매독이 악화되어 죽은 호프만은 참 다양한 작품을 내놓았다. 소설 작품은 물론이고 성악곡, 기악곡, 무대음악도 다수 작곡해 발표했는데 이 가운데 오페라 <운디네>가 유명하다. 당시에 그랬다는 거다. 지금 <운디네>하면 구스타프 로르칭이 작곡한 것이 아주, 아주 가끔 무대에 올려질 뿐이다. 20세기 이후 호프만은 거의 전적으로 소설가로 기억하는 듯하고 그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싶다. 그의 소설작품은 참으로 다양한 양식으로 다시 만들어졌으며, 예를 들어 차이코프스키의 <호두까기 인형>과 레오 들리브의 발레 <코펠리아>, 앞서 예를 든 오펜바흐의 <호프만 이야기> 같은 것을 필두로 로베르트 슈만의 <크라이슬레리아나>까지, 후대 예술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건 분명하고, 이에 대한 찬사는 받아야 마땅하다. 물론 지금 읽어보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야기기는 하지만. 이 책 《밤 풍경》도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인 건 마찬가지다. 대부분 비슷한 플롯으로 되어 있고, 유령이나 혼령, 기타 불길한 운명 같은 이야기를 빼면, 책이 존재하지도 않을 것처럼. 모두 여덟 편의 단편소설로 구성되어 있어 개별적인 작품 소개를 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가장 분량이 많은 <이그나츠 데너>만 말해보겠다. 다른 작품도 다 대동소이, 뭐 그런가보다, 하셔도 좋다.
저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알로이스 폰 바흐 백작이 살았는데, 백작이 시종 사냥꾼으로 안드레스라는 충실한 하인을 두었다. 바흐 백작이 공무가 있어 나폴리에 출장 갈 일이 있어 안드레스를 데리고 간 것이 크게 다행이라, 노상강도를 만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에서 충직한 시종 사냥꾼이 죽음을 무릅쓰고 강도들을 격퇴하여 기적적으로 상전을 구해냈으니 이 아니 대견했겠느냐는 말이지. 이때 나폴리 여관에 머무를 당시 그림처럼 아름다운 불쌍한 고아 아가씨가 있었으니 이름을 ‘조르지나’라 했다. 마당과 부엌에서 가장 허드렛일을 하고 있다가, 백작의 신임을 받는 안드레스와 한 눈에 파박, 불꽃을 피워, 불꽃을 피운 김에 사랑이 깊어져서, 이를 눈치챈 백작이 이들을 배려해 함께 귀국하는 걸 허락했고, 독일 땅을 밟기도 전에 둘은 혼인의 서약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영지에 도착한 후에 백작은 자기 목숨을 구해준 것을 보답하는 의미에서 시종이 아니라 영지 사냥터 총관리인으로 임명해 나이든 하인 한 명과 더불어 부부는 숲 속 오두막에서 깨소금 같은 신혼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나, 틀림없이 백작은 선의로 이들을 숲 속 단독주택으로 보냈거늘, 정작 깊은 숲에 들어와보니, 풍요로운 삶은커녕 실제 살아보니 힘겹고 고생스러우며 궁핍한 생활을 피할 수 없었다. 역대 다른 숲 관리인처럼 대강 알아서 벌목해 밀반출하고, 짐승 잡아 내다 팔아 돈을 장만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상전이 주는 삯만 가지고 살려니 그게 어림도 없었던 거다. 백작은 백작대로 기껏 잘 살게 해줬더니 지랄한다고 여겼을 게 분명하고. 이 와중에 젊고 건강한 부부답게 아이가 생겼고, 몇 달 후에 잘 생긴 아들이 나왔지만 조르지나는 그때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해 이젠 거의 죽은 목숨이라고 봐도 많이 틀리지 않은 상태. 늙은 하인이 자기 수중에 있는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시내에 나가 몸을 보신, 보양할 수 있는 음식을 사오겠다고 하며 장에 간 사이에 안드레스의 집에 키가 크고 마른 체격 그리고 깊숙이 모자를 눌러쓴 나그네가 도착한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나그네의 이름이 작품의 제목 ‘이그나츠 데너’다. 자신을 상인이라 소개한 나그네는 병상의 조르지나를 보더니 자기가 약재를 중개한 경험이 있어서 몇 가지 물약을 가지고 다니며, 이 가운데 묘약도 있다면서 조르지나를 위하여 하인이 가져온 식품과 약초를 이용해 직접 수프를 끓여 먹이기도 하고, 밤새 조르지나의 침상을 지키며 시간 맞춰 묘약을 한 방울 씩 환자의 입에 흘려 넣어준다. 당연히 조르지나는 다음날 아침부터 당장 크게 회복을 해, 감격한 안드레스는 나그네에게 한 가지 약속을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고귀한 행위에 대해 내가 생명과 피로 보답할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책 좀 읽지 않아도 이런 약속은 나중에 크게 후회할 일이 된다는 것을 웬만하면 다들 아는 법. 이에 나그네는 한술 더 떠서 부인을 위해 무조건 받아야 한다며 금화 몇 닢을 건넨다. 안드레스 내면의 목소리는 절대 금화를 받지 말라고 하지만 환자인 조르지나는 그걸 받지 않으면 자신이 숨이 넘어갈 거 같으니 받을 것을 권한다. 이렇게 나그네는 안드레스와 가족에게 세 가지 조건으로 숲 속 빈한한 관리인이 풍족하게 살게 해주는데:
첫번째. 1년에 두 번 숲을 통과할 수 있게 해줄 것.
두번째. 가을에 다시 올 때까지 작은 보석 상자를 맡아줄 것. 상자 속 귀걸이, 목걸이, 팔찌 등은 숲 생활이 심심할 것이 분명한 조르지나가 수시로 착용해봐도 좋음.
세번째. 오늘 숲 바깥으로 동행해 히르슈펠트로 가는 도로까지만 안내해 줄 것.
나그네는 만일 자신이 3년 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상자와 상자 속 보석을, 안드레스는 분명히 받지 않을 터이니, 안드레스의 아들에게 선물하겠다고 한다. 이것도 당연히 조건이 있다. 아들이 견진성사 받을 때 이름에 ‘이그나티우스’를 추가해달란다.
어때? 좀 으시시 하지? 이야기는 당신 생각 비슷하게 흘러간다. 읽으면 읽을수록 고딕의 굴레에 갇히는 느낌. 그러나 여지없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이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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