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메니코 스타르노네 지음, 김지우 옮김 / 한길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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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에서 가장 저명한 문학상을 꼽으라면, 이탈리아어로 쓴 전세계의 모든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스트레가상 Premio Strega를 든다고 한다. 책 소개글을 보면, 이 작품 <끈>이 아니라, 작가 도메니코 스타르노네가 스트레가 상을 받은 작가라고 쓰여 있다. 저명한 상을 받은 작가가 쓴 작품이니까 믿고 읽으라는 의미겠지. 작가 소개 가운데 나도 재미있게 읽은 건, 이이가 나폴리의 얼굴 없는 베스트셀러 작가 엘레나 페란테일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거였다. 나는 물론 우리말 번역으로 읽어서 뭐라 주장할 게 없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이 읽는 페란테와 스타르노네의 문장이 상당히 유사한 모양이지? 하여간 스타르노네는 이 의심을 단호하게 부정했다고 한다. 혹시 알아? 숨 넘어가기 바로 전에 사실 페란테가 나야, 하고 숟가락 놓을지?

  <끈>은 스타르노네가 스트레가 상을 받은 2001년에 퓰리처 상을 받은 런던 출생 뱅골 이민자의 딸인 줌파 라히리가 번역해 미국 시장에 출간한 것이 화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앗, 그러고보니 내가 아직 라히리 작품을 한 권도 안 읽어봤네. 서둘러 읽어봐야겠다. 이젠 나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하여간 여기까지가 내가 <끈>을 읽기 전에 작가와 작품에 대해 알아본 모든 내용이었다.

  한 가족의 이야기. 작가가 스트레가 상을 받은 작품, 아직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되지 않았고, 미국에서도 영어번역본을 2023년에야 팔기 시작한, <비아 제미토의 집>도 한 가정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위키피디아를 봐도 이이가 가정 이야기 스페셜리스트, 라는 건 아니고, 그런 것처럼 보인다. <끈>은 크게 3부로 되어 있다. 반다와 알도 부부와 1965년생 아들 산드로, 69년생 딸 안나로 이루어진 가정.


  1부에서는 30대 부부의 갈등이 주제다. 때는 1974년. 나폴리에서 타의 모범이 되는 인텔리 가정을 만들어가던 반다와 알도. 알도는 나폴리 대학에서 교수로 있다가, 60년대 후반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인간해방과 자유주의의 급류에 휩쓸려, 자신의 행복이 가정을 위한 의무를 선행한다는 신조가 생기기 시작했고, 때마침 로마의 대학에 교수자리가 생기자 얼른 제의를 승낙해 주말부부를 하기 시작했다. 근데 재직하고 있던 로마 대학에서 제자 가운데 당연히 젊고 예쁘고 예의 바른 리디아라는 이름의 아가씨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알도 선생은 자신의 행복과 기쁨을 위하여 가족이란 굴레를 벗어 버리고 리디아 곁으로 훨훨 날아가는 데 성공하지만, 집안에서, 그것도 나폴리 문화에 푹 젖어 있는 가정 주부 입장에서 아내 반다는 꼭지가 돌아버린다. 그리하여 1부는 반다가 집을 나간 남편 알도에게 독설 가득 담아 쓴 편지로 되어 있다.

  “친애하는 신사 양반, 제가 누군지 잊어버리신 거라면 기억을 되살려드리지요. 저는 당신의 아내랍니다.”

  아직도 그의 아내다. 그렇다. 반다는 끝까지 이혼에 동의하지 않았다…… 라기 보다, 알도 입장에서도 굳이 골치 아프게 이혼이라는 복잡한 과정을 거칠 이유가 없었다. 그냥 행복하기만 하면 되니까. 리디아도 애초에 알도의 아이를 생산하고 싶은 마음이 없던 터라 뭐 그냥 그렇게, 주말에 한 번씩 나폴리로 내려가 아이들하고 겁나 서먹서먹한 시간을 보내고, 처음 마음먹기로 하루 종일 식당 가서 밥 먹고, 소풍 가고, 롯데월드 놀이동산에도 가려 했지만 결국 그저 서너 시간 겨우 시간 때우다가 허겁지겁 로마행 기차를 타던지, 얼른 피아트 132에 올라 고속도로를 타던지 했던 거였다.

  상상이 가시지? 반다한테 한 주먹 하는 오빠가 없던 것이 알도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는 그는 죽을 때까지 모른다. 앞에서 나온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 읽어보신 분은 뭔 얘긴지 아실 것.


  2부는 이로부터 한 40년 지나 로마의 이들 부부 집이다. 70대 부부는 여름 휴가를 바닷가에서 보내고 집에 돌아왔는데, 에구머니, 집 안이 난장판이다. 심지어 애지중지 기르던 고양이 라베스도 사라졌다. 아래층 사는 90대 전직 판사에게 물어보니, 며칠 전에 남녀 두 사람이 반다-알도 부부의 집 전용 현관에서 얼쩡거리는 것을 보았단다.

  집이 어떤 상태로 난장판이었느냐 하면, 온갖 가구의 서랍 속에 들었던 물건들이 다 내장에서 탈출해 거실 카펫이나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고, 책장 꼭대기에 은근히 숨겨져 있던 큐브까지 누가 손을 댔으며, 결혼 첫해인 1962년부터 꼬박꼬박 쓴 가계부 철과 온갖 청구서, 영수증 철이 한 자리에 거꾸로 순서대로 뒤집혀 있는 것도 모자라, 혹시 반다가 보기라도 한다면 아무리 세월이 흘렀어도 결코 질리지 않는 주제인 40년 전 바람 피우던 시절의 편지까지 휘리릭 펼쳐져 있었으니, 알도가 속으로 얼마나 깜짝 놀랐겠느냐는 말이지. 그러니 결혼한 젊은 남자들아, 아내 가슴에 못 박지 말아라. 수십년이 흘러도 여전히 당신을 겨냥한 총알이 되어 있을 터이고, 그게 발사될 때마다 당신은 끔찍한 지옥 구경을 할 것이다. 그래서 세월이 가면 갈수록 아내 앞에서 벌벌 기는 거지. <끈>에서 알도 역시 딱 그렇다.

  근데 신기한 것이, 남의 집에 몰래 숨어 들어온 두 명의 도둑들이, 뭐 별 건 없었지만, 반다의 자연산 진주 목걸이와 서랍 안쪽에 꼬불쳐 둔 현금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거다. 더 기겁할 것은, 오랜 세월, 진짜 오랜 세월 저 장식장 꼭대기에 약간만 눈에 띄는 큐브의 비밀 서랍 속에 숨겨두고 알도가 옛 추억에 휩싸이거나, 반다한테 심하게 쿠사리를 먹었거나, 튼튼한 손바닥으로 귀싸대기를 두어 대 맞았을 때마다 아내 몰래 훔쳐보고 위안을 삼던, 꿈에도 못 잊는 리디아의 사진, 그것도 그냥 사진도 아니고 홀딱 벗은 나체 사진이 사라졌다는 거였다. 아 참, 이거 환장하네. 그잖여? 나도 이해는 하겠다. 하지만 아무리 꼼꼼하게 숨겨봐라, 그게 안 걸리나. 죽을 때까지 들키지 않고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면 그건 인생도 아닐 걸?

  여기에 하나 더. 키우던 늙은 수코양이 이름이 “라베스”였다. 알도는 그게 라틴어로 “우리집 짐승”이란 뜻이라고 줄창 주장해오고 있었다. 이 와중에 집을 턴 도둑이 서재의 라틴어 사전 “L” 권을 꺼내 쫙 펼쳐 놓았고, 펼쳐진 페이지에 하필이면 “라베스”에 밑줄이 그어져 있는 걸 반다가 봤다. 그랬더니 “라베스”가 무슨 뜻이냐 하면, 몰락, 함몰, 붕괴, 파괴. 고양이는 알도가 아니라 반다가 늘 곁에 끼고 살던 짐승이다. 그러니 반다는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라베스야, 라베스야!” 다정하게 부르면서 그녀로 하여금 재앙, 불행, 추잡함, 파렴치함, 수치심이라는 말을 입에 담게 했다는 거다. 이것도 들켜버렸다. 알도, 참, 고고 마운틴, 갈수록 태산이지?


  3부는 부부가 휴가를 떠난 사이, 그러니까 도둑들에게 집을 털리던 날의 아들과 딸, 산드로와 안나.

  산드로는 세 명의 여자에게 네 명의 아이를 낳아 유럽 각지와 아메리카에서 키우고 있고, 안나는 비혼을 주장하며 쉼없이 짧은 연애를 하고 있는 중이다. 1974년에 아빠가 바람이 나서 집을 나가고, 75년부터 양육비를 보내기 시작했지만 자존심과 살림살이는 끝장을 보던 엄마는 아이들 양육비에 손 대지 않고 오직 아이들이 컸을 때 대학 학비로 쓰겠다고 이 악물고 다짐해, 나폴리의 집을 팔고 잔나 이모네 집으로 들어간다. 나폴리다, 나폴리. 이 정도는 언제나 가능한 동네. 몇 년 후 다시 가정이 합쳤지만 이때 조카에게 정을 듬뿍 주었던 이모는, 세월이 가서 자손 없이 숨을 거둘 때 자기 전 재산을 거의 몽땅 남자 조카 산드로에게 유증했고, 안나한테는 냄새나는 리라 몇 푼만 남겼을 뿐이다. 성차별은 아니고 작품을 보면 산드로가 워낙 사람들하고 친화적인 반면 안나는 성격이 야멸차다. 안나는 오빠한테 이모의 유언을 무시하고 그냥 딱 반반씩 나누자고 제의했지만 이미 아이를 넷 키우는 오빠가 그걸 허락하겠어? 오히려 말다툼이 생겨 혹시 주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더라도 깨끗하게 입 닦는 계기가 됐을 뿐이다. 이 사건 이후 남매는 서로 얼굴도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모든 노력과 정성을 들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갑자기, 난데없이 안나가 오빠한테 전화를 해서 다정한 목소리로 한 번 만나자는 거다. 바짝 긴장한 산드로. 하여간 누이가 만나자니, 그것도 오랜만에 만나자고 하니 거절하기도 쉽지 않은 법. 이들은 억지로 친절을 가장한 채 부모의 집에서 만나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는데, 안나가 말씀 하시기를, 부모란 (자기 부모가 그랬듯이) 어차피 자식들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어서, 때가 되면 자식들에게 더 큰 상처를 받을 각오를 하고 살아야 하는 법이니, 부모가 더 늙어 정신 없어지기 전에 이 집을 미리 팔아 절반씩 뚝 떼서, 미리 상속을 해달라고 하자는 거다. 그런 후에 남매가 돈을 갹출해 좀 작은 집을 세 내 살게 하면 서로 좋지 않겠는가, 하는 것.


  그래, 어차피 가족은 서로가 서로한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팔자다. 이 절묘한 역학의 다차원 방정식을 도메니코 스타르노네는 참 맛있게 풀어나가고 있다. 처음에 남자가 바람피고, 여자가 악을 쓰는 장면에서는 참 징글징글하더니, 읽으면 읽을수록, 진도가 나갈수록 슬며시 빠져들게 되는 매력. 거참, 스타르노네, 색다를 맛이 있는 작가다. 하여튼 이탈리아 소설이 블루오션이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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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7-12 05: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모하메드 음부가르 사르, <인간들의 가장 은밀한 기억>
화요일, 명학수,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목요일, 츠쯔젠, <어얼구나 강의 오른쪽>
금요일, 빅또르 뻴레빈, <오몬 라>

moonnight 2024-07-12 08: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_@ 다음주 예고까지 @_@;;; 뱅글뱅글@_@;;; 어쩜 이렇게 (첨 들어보는-_-;) 책들을 빠르고 깊게 읽어내시는지 늘 감탄하고 존경합니다. 계속 뱅글뱅글@_@;;;;;;;

Falstaff 2024-07-12 20:35   좋아요 1 | URL
에고.... 전 백수랍니다.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책 읽고, 술 마시고, 운동(속보, 저속 달리기)하고, 잠자고, 뭐 그런 것들이랍니다. ㅎㅎㅎ

stella.K 2024-07-12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책 재밌을 것 같습니다. 표지 그림도 독특하고. 특히 페란테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고 유수한 문학상도 받고. 정말 능력자네요. 가족 신파는 아닌 거 같네요. 함 읽어봐야겠습니다.

Falstaff 2024-07-12 20:36   좋아요 1 | URL
재밌습니다. 한 달 후에 이 양반이 쓴 다른 작품 <트릭>을 올릴 건데요, 그거 보다 <끈>이 좀 더 괜찮습니다. 저절로 주목하게 되는 작가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