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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의 죽음
크리스토프 하인 지음, 김충남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2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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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프 하인은 1944년에 지금은 폴란드 영토로 넘어간 접경지역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주로 라이프치히에서 활약한 소설가, 연극인 기타 등등 하여간 예술가로, 1998년부터 2000년까지 통일 독일의 통합 초대 펜클럽 회장을 지냈다고 위키피디아에 쓰여 있다. 표제에 이름을 올린 호른 씨도 라이프치히를 터전으로 하는 역사학 박사였으며, 화자 크루슈카츠 씨도 라이프치히 사람이다. 이렇게 작품 속에 흔적을 남기는 작가들이 많아 그들의 내력을 알고 읽는 것도 재미가 괜찮다.
그러니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1989년 이전까지 하인은 동독 작가였다는 건데, 그래서 그런지 다른 동독 작가들 작품에서 자주 읽을 수 있는 불행한 일이 호른 씨에게도 들이닥친다. 독일 통일 이전부터 동독 사람들은 서독이 훨씬 더 잘 사는 나라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하여간 갖가지 수단을 써서 서쪽으로 월경을 도모했다. 관광여권을 갖고 헝가리나 체코슬로바키아 등 같은 동구권 지역으로 갔다가 거기서 서독으로 넘어가는 장면은 자주 발견할 수 있고, 페터 슈나이더인가 누군가의 작품에서는 심지어 장대 높이뛰기 하는 식으로 겁나게 달리다가 작대기에 몸을 의지해 장벽을 훌쩍 뛰어넘어가는 것도 읽은 적 있다. 시기적으로 장벽 붕괴에 가까워지면서 월경의 위험과 영향이 점점 작아지다가 급기야 거의 없어지는 경향이 있었지만 <호른의 죽음>의 경우엔, 호른 박사의 누이가 서독으로 탈출한 것이 1955년 경인데, 당시는 전 세계가 극도의 냉전상태에 있었을 때라 가뜩이나 수정주의의 혐의를 받고 있던 호른 박사한테는 기총소사 하듯 종파주의자라거나 당파성의 원칙을 훼손했다거나 하는 비난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호른 박사는 당에서 축출당하고, 학계에선 학위를 박탈당한 채 라이프치히에서 멀리 떨어진 외딴 시골마을 굴덴베르크의 낡은 성에 달린 향토박물관의 학예사로 좌천당한다. 이때 당적을 몰수하고 학위를 박탈한 위원회의 위원 가운데 한 명이 앞에서 말한 크루슈카츠 씨였으며, 1년 후 크루슈카츠 씨가 굴덴베르크의 시장으로 선임되면서 이들은 재회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호른 씨가 종파주의나 당파성 같은 어처구니없는 명목의 피해를 당한 일에 초점을 맞추는 건 아니다. 호른 씨는 1957년에 죽는데, 이 때의 사건을 주민 다섯 명의 기억 또는 호른 씨와 얽힌 일을 담고 있다. 이후 사반세기 이상의 세월이 흐른 1980년대 초반에 그해 여름과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형식이니 각기 다른 화자의 일인칭 시점으로 쓰였다. 이들은:
이곳저곳에 수많은 자식들을 살포한 바람둥이 부자 남자를 아버지로 둔 사생아이자 그의 머리 좋은 아들인 슈포테크 의학박사. 불행한 과거를 갖고 있는 똑똑이들이 대개 그렇듯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대단히 삐딱하고 적어도 해발 8천 미터까지는 솟은 자존심 끝판왕에, 가시 같은 혀를 가지고 있어서 모든 사람의 귀를 따갑게 하는 독설가이지만 알고 보면 소심하고, 마음 약하고, 그러나 전혀 착하지 않은 인간이다.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 토마스. 일반 시민들과 구분이 되길 바라고, 실수라도 사람들이 자기한테 닥터라고 부르면 속으로 좋아 죽겠는 속물이지만 겉으로는 점잖고 근엄한 약사의 아들. 한 살 위인 껄렁한 친구 파울과 어울려 다니며 예전과 달리 한 달 정도 늦게 도착한 집시한테 시간 일자리를 얻었다가 천한 집시에게 고용되는 것이 아빠의 뜻과는 완전히 다른 일을 저지른 짓이라서 외출금지도 당하기도 한다. 늙은 화가 골 씨를 도와 친하게 지내고, 결정적으로는 늦여름 아침에 파울을 따라 숲으로 들어갔다가 마가목 나무에 목을 매단 호른 씨의 툭 튀어나온 눈과 쑥 빠져나온 거의 보라색의 혀를 보게 된다.
마를레네. 화가 골 씨의 정신지체 딸. 1943년에 나치 정부가 아리아 인들의 품종을 개량하기 위하여 장애인을 수용하기로 결정했을 때, 자신을 대신해 엄마가 수용소에 들어가 죽는 바람에 죽다가 살아남았다. 세상이 바뀐 1950년대가 되고나서도 마를레네는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지만 성폭행을 당했고, 임신을 했으며, 아버지를 따라가 인공중절을 경험한다. 시대는 바뀌었지만 굴덴베르크에서 정신장애자를 다루는 방식은 바뀌지 않았다는 의미일까?
게르트루데 피슈링거. 파울의 엄마. 처녀로 결혼을 하고 파울을 낳았지만 남편은 다른 여자를 좇아 집을 나갔다. 같은 마을에서 사는 게 남부끄러워 남편더러 파울의 양육비를 받지 않을 테니 다른 데 가서 살라고 해, 파울과 함께 굴덴베르크에 남아 식료품점을 한다. 지방정부가 남은 방을 세놓으라 해서 들어온 사람이 호른 씨. 원래 1년 이하를 계획했지만 호른 씨가 죽기 전까지 계속 머문다. 사춘기의 극점을 달리고 있는 파울은 점점 삐뚤어지기 시작하는 것 같고, 자기하고는 말도 하지 않으려 해서 호른 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깨끗하게 거절당한다. 서로 소 닭 보듯, 예의만 엄청나게 지키는 드라이한 생활을 하지만 나중에 몇 달은 결국 같은 침대에 오르게 된다. 호른 씨가 생을 접기 전에 자살자들이 흔히 그러듯이 다른 것들처럼 관계를 정리하기 전까지. 상점에서 하루 종일 서서 일하느라 다리에 류머티즘이 심해 퉁퉁 붓고 고통이 자심하지만 알아주는 인간은 세상에 하나도 없다.
마지막으로 굴덴베르크 시장 크루슈카츠. 유서 깊은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한 한 때의 사학자였으나 공직에 뜻을 두어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시골이기는 하지만 굴덴베르크의 시장에 취임한다. 취임하고 보니 굴덴베르크도 시골 특유의 배타성과 텃세가 여간 아니라 취임 첫날에, 타지인인 당서기만 방에 찾아와 축하를 했을 뿐, 시청에 근무하는 현지인은 누구 하나 고개 디미는 것들이 없었다. 문제의 1957년엔 5월 23일 목요일에 집시들이 도착해 여느 때처럼 도시 한복판인 블라이허비제에 캠핑카를 차렸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었지만 굴덴베르크의 시의회에서 집시 캠프는 변두리 늪지대인 블루트비제에 설치하게 규정해 놓았다. 그러나 세상에 말 잘 듣는 집시들이 있기나 하나? 집시들의 도착 보고를 듣고 당시 시의회 의원이자 시장대리이며 나중엔 크루슈카츠 시장을 음해해 어떻게 차기 시장을 한 번 해볼까 꿍꿍이를 꾸리기도 할 바흐오펜, 그리고 여비서와 함께 집시들을 찾아가 설득을 시도하지만 당연히 집시 대장한테 무시당하고 만다. 바흐오펜은 처음부터 경찰한테 위임해버리라고 조언을 했으나, 명색이 시장이라면 거절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도는 해봐야 하는 거라 생각했던 거다.
크루슈카츠가 시장으로 취임하고 1주일 후에 시내 낙농장 앞 보도에서 우연히 호른 씨를 만나고야 만다. 같은 작은 도시에 살기도 하고, 향토박물관의 학예사니까 시장이 직속 상관이라 언젠가는 만나야 했지만 그는 1년 전 위원회에서 크루슈카츠를 바라보았던 바로 그 상처입은 눈길을 가지고 있었으니 좀 캥기기도 했을 듯. 당시 크루슈카츠는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내렸다고 생각하며, 이를 호른 씨가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웅변하는 눈길을 여태 잊지 못했다. 크루슈카츠는 호른이 주관적으로 보아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지만, “당파성의 원칙을 맹신하거나 무시함으로써 체제에 큰 피해를 입혔음을 확신”해, 공동의 일과 위대한 목표를 위해서, 그리고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용인한(누이의 서독으로의 탈출?) 호른의 비겁함을 인식하고 실수를 철저하게 떠안아야 한다고 생각해 당적 몰수와 학위 취소를 찬성했다고 변명했다. 이게 벌써 1년 전이니 시간이 약이라고 이젠 좀 상처가 아물었겠지. 그래서 “뜻밖의 재회를 위해 한 잔 해야지요?” 라고 반갑게 제의했지만, 호른은 “아닙니다.” 단호하게 거절하고 말았다.
같은 해 9월 1일 일요일 아침, 숲속에서 아이들이 호른의 시신을 발견했다. 경찰을 비롯한 모든 관련자들은 자살이란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당연히 집시와 연결 짓는 건 적절하지 못했지만 어디 사람들이 그런가. 나치 시절이 12년 전에 끝났어도 집시무리를 정상적인 시각으로 보지는 않았던 거다. 물론 이건 책에서 딱 꼬집어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작가 크리스토프 하인이 숨겨놓은 코드라고 봐야 하리라. 당시 시장은 3년째 굴덴베르크에 살고 있었다. 처음 시의원으로 발령이 나고, 시장이 되자 라이프치히에서 살고 있던 사랑하는 아내 이레네를 굴덴베르크로 불러 살림을 합친다. 이때 이레네는 평생 시골에서 살게 하지 말라는 조건이었고, 정말로 그렇게 됐으나, 안타깝게도 이레네가 불치의 암에 걸려 라이프치히의 대학병원으로 실려가고 석 달 만에 생을 접었다. 그러나 남편을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불구하고, 목요일마다 호른 씨가 주재하는 굴덴베르크 문화사 모임을 바흐오펜 씨가 음해하여 상부에 보고한 일을 시장이 모르고 있었으며, 라이프치히에 이어 같은 사람이 똑같이 아무 죄도 없으면서 같은 혐의로 명예가 훼손되려는 위기에 처해, 스스로 목숨을 거두는 일이 벌어지자, 이레네는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다. 부부의 행위가 끝난 후, 이레네는 침상 위에서 말한다.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는데, 이제 당신은 역겨워요.”
공산주의 치하였던 1985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이런 소설을 쓸 수 있고, 출간할 수 있었다는 거 하나 가지고도 정말 기가 막히다. 크리스토프 하인은 참으로 다양한 시각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다. 비단 시장 크루슈카츠와 학예사 호른의 관계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등장하는 다른 화자 네 명도 모두 자신이 직접 사는 생활 속에 각기 다른 질곡을 부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 사는 게 다 그렇기는 하지만 참 어렵다.
새삼 하고 싶은 말은, 수정주의, 종파주의, 당파성. 지긋지긋한 단어들. 그러나 눈을 뜨고 귀를 열면 21세기의 대한민국에서도 종파주의와 당파성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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