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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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한 세상>의 경우, 책을 읽은 독자가 독후감을 쓰는 것은 자유지만, 그걸 다른 독자, 후에 이 책을 읽을 사람이 볼 수 있게 공개하는 건 신중해야 마땅하다. 르메트르는 내가 아는 가장 뛰어난 대중소설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이이의 작품을 “소위” 문학성 운운하기에는 좀 그렇고, 거의 전적으로 재미있어서 선택할 터인데, 독후감을 쓰면서 스토리를 소개하는 건 조심스러워야겠다. <식스 센스>를 먼저 본 인간이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래”, 하는 것하고 같은 수준의 반전까지는 아니지만 전개부가 끝나갈 즈음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숱한 뒤집기 또는 되치기 같은 건, 독자가 읽어가면서 혹시 이렇게 되는 건 아닐까, 저렇게 될 것이 분명해, 추리하다가 맞추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는 재미를 빼앗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독후감을 쓸까? 이 책이 르메트르의 다섯 번째 독후감이니 작가소개를 할 필요도 없고, 그저 <오르부아르> 3부작이 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끝나고, 이제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발전하는 이후 30년을 다룰 새로운 4부작의 첫 번째 작품이라고 강조해봤자 몇 줄 되지도 않는다.

  좋다. 이렇게 하자. 이 책이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에 정착한, 몇 천만 프랑의 부르주아 프랑스인 펠티에 가족 이야기이니, 본격적인 이야기가 펼쳐지기 전 까지의 펠티에 씨 부부와 3남 1녀를 소개하는 것으로 하겠다.


  수천만 프랑의 현금을 갖고 레바논에 도착한 루이 펠티에 씨는 식민지에서 무슨 사업을 할까, 여러가지로 궁리하다가 1920년대 초에 작은 비누 공장을 매입해 발전시키기 시작한다. 제품을 제조하고, 여러가지 비법을 개발해서 더 좋은 품질을 만들어내는 것에 자신도 몰랐던 재능이 있는 것을 알아챈 루이 펠티에 씨는 “펠티에 상회”를 만들어 1930년대에 많은 수익을 남긴다. 이후 트리폴리, 알레포, 다마스쿠스의 소규모 공장 몇 곳을 인수해 사세를 확장하고, 자회사의 경영은 관리자에게 위임을 하더라도 제품의 품질 감독은 본인이 직접, 모든 에너지와 재능과 자부심을 쏟아부었으니, 성공을 한 기쁨과 비누 업계의 품질에 관한 한 세계 최고급이라는 가오를 즐기는 기쁨으로 누구 못지 않은 근사한 노년을 누리고 있었다. 회장님은 품질에 전력을 다하고, 회장 사모님 앙젤 펠티에 부인 또한 회사에서 인력관리, 제품 출입고 그리고 회계를 담당했다. 펠티에 부부가 애초에 부르주아로 출발한 게 아니라 전쟁 당시 고생도 할 만큼 해본 사람들이라 특히 여사님의 구두쇠 기질이 대단했으며, 입신양명한 사람들이 자주 그러하듯 굳이 내세우지 않아도 어련히 알아서 기겠지만 그걸 꼭 겉으로 드러내고 싶어하는 펠티에 씨의 과한 자긍심은 3남 1녀 모두에게 가정이란 곳이 세상에서 가장 지긋지긋한 연옥이라 생각하게 만들어 버린 것을 부부는 몰랐다. 하기는 이들 부부도 자식들에게 세상의 모든 부모보다 더하면 더 했지 조금도 모자라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있다는 건 자식들도 당연히 몰랐고.

  펠티에 씨는 20세기 중반에 성공한 사업가답게 자신의 후계자로 당연히 맏아들을 지목했다. 그래서 “펠티에 상회”에서 “펠티에와 아들 상회”로 간판도 바꾸어 달고 맏이 장을 전무 자리에 꽂아 놓는다. 그런데 장이 문제다. 애초에 장은 형편없는 학생 출신이었다. 약간 살이 찌고 동작이 굼뜨지만 놀라울 정도로 힘이 센 청년으로 성장했지만 소극적인 성격에 상당히 몽상적이며 소심했다. 아버지가 바란 대로 비누 공장의 대표가 되기 위하여 화공학을 전공했으나 자신의 적성하고는 극적으로 맞지 않은 터였다. 나중에 스스로 알아차렸듯이 장은 가게를 열어 고객들에게 직접 물건을 판매하는 일이 아주 딱이었지만 이 책에 국한해 말하자면 너무 늦게 알게 된다. 만일 이 4부작이 계속 펠티에 씨 가족의 이야기라면 언젠가는 가족 구성원 모두 장의 자질을 알게 될 듯. 하여간 공장 경영과 이에 따른 상업적 결정은 도무지 장한테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 세상에 이런 모지리가 있을까 싶게 하는 일마다 족족 깨끗하게 말아 자신다. 그리하여 큰 희망을 가졌던 아버지조차 결국 장을 포기하게 되었을 때, 가업을 잇는 데 실패한 기운 센 천하장사 장 펠티에는 아무 이유도 없이 지나가던 열아홉 살 여성의 머리통을 곡괭이 자루로 힘껏 내리쳐 그 자리에서 즉사하게 만들어버린다.

  장의 아내 준비에브는 우체국장의 네 딸 가운데 유일하게 예쁘지 않은 딸이었다. 워낙 예쁘게 생긴 자매들에게 눌린 바람에 외모를 가지고 유전학적 사건이라 칭해서 그렇지 결코 못생긴 여성이란 말은 아니다. 참 독특한 여성으로 베이루트의 부르주아나 미남 청년 가운데 준비에브가 공원 수풀 속에서 베풀어준 유사성행위의 은총을 못 받은 인간을 구경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장과 첫날 밤을 치룰 때까지 어엿한 처녀였다는데, 허, 그것 참, 준비에브 자체가 유전학적 사건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면으로 기적 자체… 아니었나? 준비에브는 장이 “펠티에와 아들 상회”를 이어받을 거라는 풍문을 듣고 역시 단 한 번도 여성과 접촉이 없던 장 펠티에를 자신의 아지트였던 공원의 수풀 속으로 끌어들여 멋지게 유사성행위를 시현하고 몇 달 후 결혼에 성공하지만, 후계에서 탈락하고, 장이 살인사건이 발각날까 전전긍긍하다가 부모한테 파리로 가겠다고 하자 생기발랄하게 파리로 날아가 매사 빠짐없이 남편 장을 “뚱땡이”라고 부르면서 들들 볶아 숨만 쉬는 지옥을 만들어낸다. 책이 끝날 때까지 참으로 다양한, 기적같은 악역을 도맡아 하는데, 암만해도 남편의 살인행위를, 엣다 모르겠다, 하나만 더 일러주겠다, 한 건도 아니고 두 건 혹은 모든 살인사건을 알고 있는 거 같다는 말이지. 넹? 장이 악마같은 아내 준비에브의 바가지를 견디지 못해, 자신을 경찰에 넘겨버릴까봐,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결국 아내의 머리통을 터뜨려 죽여버릴 거라고? 난 입틀막이다.


  둘째 아들 프랑수아는 열여덟 살이었던 1941년 5월에 르장티욤 장군이 지휘하는 자유 프랑스군 제1 경기갑 사단에 입대하기 위하여 1차로 가출을 감행해 비시 프랑스군과 회전을 벌인다. 그러나 해방 프랑스는 같은 프랑스 국민끼리 총부리를 맞댔다는 이유로 르장티욤 장군 부대의 공적은 인정하되 조금도 훈공을 인정하지 않아 프랑수아는 전시에 흔하디 흔한 훈장 하나 없이 집에 돌아온다. 이후 이제 심심한데 공부나 좀 해볼까 싶었더니 어린 나이에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단박에 펠티에 씨의 희망, 아니면 적어도 자랑거리로 떠오른다. 바칼로레아 통과 뿐 아니라 단박에 파리의 고등사범학교 시험에 합격을 해버렸으니 가히 그럴 만했다. 하지만 고등사범학교는 죽었다 깨도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통학할 수 없는 법이라 프랑수아는 이번엔 합법적으로 2차 가출을 하게 된다. 당연히 작은 집을 얻을 수 있는 돈과 학비, 약간 부족한 수준일 것 같았지만 사실은 턱도 없이 모자란 생활비를 매달 집에서 지원 받는 조건으로. 그러나 1948년 3월, 매년 베이루트에서 벌이는 펠티에 가족의 집안 행사에 참석한 꼴을 보니, 그럴듯한 외모와 입성과 달리, 엄마 눈엔 손톱 사이에 낀 잉크와 불결한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왜 그런고 하면, 애초에 프랑수아는 고등사범학교 시험도 보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신한테 가장 적합한 유일한 직업이 신문기자라고 생각했던 프랑수아는 기자가 되기 위해서 굳이 고등사범에 갈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1948년 3월에 둘째 아들은 신문사 ‘르 포퓔레르’에서 기자도 아니고, 흔한 리포터도 아니고 단지 신문의 배송작업을 했던 터라 손톱과 손가락에 묻은 40년대 질 낮은 신문잉크가 지워질 틈이 없었다. 프랑수아의 꿈은 4년 후에 일류 언론인이나 저명한 칼럼니스트가 되는 것이며, 가장 일하고 싶은 신문사로는 ‘르 주르날’을 꼽았다.

  셋째 아들 에티엔으로 말하자면 집안의 문제아이자 죄인이라 할 만했다. 게이였던 것. 그러나 유감스럽기는 하지만 부모를 포함한 가족 모두는 에티엔의 성적 선택을 존중해서 벨기에 출신 프랑스 외인부대원으로 인도차이나에서 복무중인 셋째 아들의 애인 레몽도 물론 흔쾌한 건 아니지만 인정하고, 에티엔도 레몽이 근무하고 있는 인도차이나, 지금의 베트남 사이공으로 취직해 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회계사이면서 은행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에티엔이지만 인도차이나에 무대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특정 기업에 취직을 해야 가는 것이었는데, 아무런 희망 없이 그저 한 장짜리 이력서를 보내본 게 덜컥 합격을 해 사이공 소재 인도차이나 외환국에서 통지가 온 것이었다. 새끼들 키워봐야 별 거 없는 이유는, 에티엔의 취직도 사실은 펠티에 씨가 인도차이나 인맥인 사이공 무역회사 르코크&다른빌 상회를 통해 다 사바사바를 해 두어 가능했다는 걸 전혀 몰랐었다. 당시의 인도차이나는 프랑스인들 가운데 한탕을 노리는 사람들, 패배자들, 변태성욕자들이 즐겨 찾는 난잡하고 음란한 것들로 가득한 땅으로 유명했지만 진짜로 가보니 이런 내용이 든 편지가 저절로 쓰어지는 곳이었다.

  “이곳은 매우 난폭한 나라야. 여기서는 모두가 제각기 킬러를 몇 명씩 두고 있는 것 같아. 쩌런에만 가면, 단 몇 피아스트르에 네가 원하는 거의 모든 사람을 없애 줄 수 있는 킬러가 널렸어.”

  이런 곳에서 사이공 북서쪽에 있는 밀림지역 히엔지앙 쪽으로 작전을 떠난다는 레몽의 마지막 편지가 오고는 영 소식이 없어 미칠 것 같은 심정의 에티엔이 고양이 조제프와 함께 도착한다.

  1948년 현재 열아홉 살이며 문학과 그림에 재능을 보이는 막내이자 외동딸인 엘렌. 몇 주만 지나면 아주 쉽게 바칼로레아 2차 시험을 가볍게 통과할 재원이기도 하다. 하는 일마다 꼬이기만 하는 큰오빠 장에게는 깊은 연민을 가지고 있으며, 겁나게 머리 좋은 프랑수아를 향한 존경심을 표하는 반면 막내 오빠 에티엔한테는 모종의 융합을 느끼며 결코 떨어질 수 없는 사이라 생각한다. 권위적이고 고집불통이 아버지와 모든 방면으로 막힌 사고방식을 가진 어머니를 견딜 수 없어 부모에게 벗어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불만을 엉뚱하게도 학교의 수학교사이자 사진클럽 지도교사인 로몽과 월요일 오전마다 햇빛이 환한 호텔 객실에서 동침하는 것으로 해소한다. 이를 우연히 알게 된 펠티에 씨는 학교에 거액을 후원한다는 명분으로 회계감사를 진행하는 과정에 수학교사 로몽의 터무니없는 변태 행위를 발견하게 되어 학교에 쫓아내지만 엘렌에게는 아는 척도 하지 않는 자상함과 현명함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엘렌은 아빠의 이런 면을 꿈도 꾸지 못하고. 그러던 어느 날, 이제 욕구불만을 해소할 재수없는 수학 선생 로몽도 사라진 터에 아이, 못살아, 외치다가 서둘러 트렁크를 싸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몽땅 찾아 파리행 비행기에 올라 오빠들을 찾아간다. 그렇지만 별 거 있나? 오빠들도 자기들 먹고 사는 것만 가지고도 미치고 팔짝 뛸 거 같은데 말이지. 세상이 그렇게 쉬우면 그건 사는 것도 아니지.

  어떠셔? 참 다양하게 복잡한 집안이다. 그래서 다양하게 불행하다고? 글쎄,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 구라니까 선입견 없이 가보시면 어떨지.


  이런 상태에서 다른 건 모르겠고, 딱 하나, 재미는 확실하게 보장하는 초 특급 대중소설의 꽃 <대단한 세상>은 시작한다. 확실하게 이건 식민주의적이고 유럽 백인들 위주로 쓴 오락물이다. 그러나 재미있어도 너무 재미있다. 다른 거 생각하지 말고 그냥 재미에만 초점을 맞추고 읽자, 라고 제안한다. 거의 분명하게 내가 지금은 이 작품의 재미에 열광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느 새 그런 작품이 있었지, 라는 선으로 한 단계 이상 내려갈 것임을 짐작한다. <오르부아르> 3부작이 그러했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살다가 가끔은 신나는 타임 킬링도 필요한 법이다. 아무 생각 없이 한 번 즐겨봄이 어떠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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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4-05-13 15: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저 재미보장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

Falstaff 2024-05-13 16:28   좋아요 1 | URL
정말 재미..는 있습니다. 간혹 하드코어 적인 (살인 또는 학살) 묘사에 진저리를 칠 수도 있지만 그런 거 없으면 또 ㅎㅎㅎ 개인 차이일 거 같더라고요. 저는 좀 힘들었습니다.

공쟝쟝 2024-05-14 09: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 (잠깐 막말 죄송합니다) 르메트르 미친 거 아닌가.. 이후30년이라면.. 가만있어봐.... 50.60.70년대인가요~ ㅋㅋㅋㅋㅋ 68혁명 나오나요.......푸코 나오나요....... (퍽 !!!ㅋㅋㅋ)......
퐐선생님 혹시 엘레나 페란테 <나의 눈부신 친구> 읽으셨나요? 제가 다른 건 모르겠고 이 이탈리아 처자들 68혁명 스쳐지나갈 때 나도 모르게 가슴이 뻐근.... (왜, 68좋아하게 되었지?) 지금 이미 바깔로레아 통과 어쩌고에서 그시절 나의 프랑스에 대한 로망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도서관에 풀리기만 해봐라.. (드릉드릉~)

Falstaff 2024-05-14 16:19   좋아요 1 | URL
넵. 저도 그 시리즈 다 읽었습니다. ㅎㅎㅎ
이 책에서는 68년에 있었던 아주 잠깐의 꼬뮌은 나오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다음이나 다음 다음 작품에는 나올 수밖에 없을 거 같네요. 프랑수아와 엘렌 때문이라도 말이지요.
이 책을 도서관에 신청해서 읽었답니다. 분명히 지금 있을 거예요. 얼른 가보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