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강물처럼
셸리 리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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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풍월에 의하면 휴대폰 앱 가운데 “북적북적”이라고 책 읽은 내역, 읽고 싶은 책 같은 걸 관리하는 게 있어서 나도 깔았다. 이 앱에 의하면 연초부터 오늘, 4월 두번째 목요일까지 내 키가 111.83cm 자랐고 지금은 다른 책의 388쪽까지 읽었다. 두 개를 합해 22,754 페이지, 63권이다. 앱의 재미난 기능 가운데 하나가, 책을 읽으면 별점을 주게 만들었다. 다섯 개 만점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을 하기 위해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 건데, 셸리 리드의 <흐르는 강물처럼>을 어제 오후 한 시 정도에 읽기를 마쳤으며, 앱에 등록을 할 때는 틀립없이 별 다섯으로 나름대로 채점을 했건만, 26시간이 지난 지금 독후감을 쓰려니까, 도무지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거. 세상에 이런 변이 있나. 다행히 책을 읽으면서 메모를 해 둔 것이 있어 그걸 훑어본 다음에, 맞아, 이런 이야기였어, 어제의 기억을 오늘에 되살릴 수 있었다. 그래, 그래. 거창하게 말해 역사는 기록한 자의 것이다.

  작가 셸리 리드를 검색해봐도 별 정보를 찾을 수 없다. 콜로라도에 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미국인이며, 웨스턴 콜로라도 대학에서 글쓰기, 문학, 환경 및 지속 가능성을 30여 년 가까이 강의했다고 했으니 50대 이상일 듯하다. 이 작품이 2023년에 발표한 데뷔작이라고 한다. 흠. 데뷔작이라. 미국의 대학에서는 작품을 한 편도 발표하지 않은 박사님한테 글쓰기 교수도 시킨다, 이거지? 좋아, 좋아. 시비하는 거 아니다. 경력 여부를 떠나 괜찮으면 흔쾌하게 교수로 임용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워 그러는 거다. 리드는 매우 미국적인 소재로, 매우 미국적인 스토리로 <흐르는 강물처럼>을 썼다. 그래서 독자는 처음 대하는 작가의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구성이나 스토리를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그랬을까? 읽자마자 이 책은 별 다섯 만점이야, 했다가 불과 하루 만에 스토리를 통째로 잊어버린 건?


  주인공의 이름은 빅토리아(이하 “V”) 내시. 이제 나이 들어 오랜만에 고향 근처에 돌아온 V는 콜로라도 강의 지류인 거니스 강의 물길을 막아 호수로 만든 블루 메사 저수지에 잠긴 아이올라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차를 세우고 깊은 회한에 잠긴다. 콜로라도 주의 건조한 남서부 지역에 물을 흘려 보내기 위하여 과감하게 실행한 대형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댐을 건설하는 바람에 생긴 수몰지역. V가 향수병 같은 것 때문에 회한에 잠긴 것은 아니다. 아이올라에서 누구보다 먼저 집과 농장과 과수원을 팔고 훌훌 떠나온 사람이 V였으니. 이 장면은 드물지 않게 보는 평범한 오프닝. 평범하기 때문에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차별적인 묘사가 있어야 할 터. 셸리 리드의 문장이 좀 매력적이긴 한데 크게 어필할 정도는 아니다.

  본문의 첫 장면은 1948년. 집에서 ‘토리’라고 불린 V는 방년 17세. 무뚝뚝하지만 알고 보면 진심을 다해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와, 한 살 아래 폭력적이고 매사 말썽꾼이며 어린 나이에 알코올과 럭키 스트라이크를 애용하는 철부지 남동생 세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 징집당해 참전했다가 두 다리를 잃은 오그 이모부와 함께 산다. 그렇다. 내시 씨는 홀아비다. 전쟁이 끝나고 쾌활한 호남이었던 이모부가 우울한 상이 제대자로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엄마와 비브 이모와 큰이모의 아들이었던 친절하고 올바른 청년 캘러머스 오빠가 차를 타고 가던 중에 속도를 줄이지 않고 커브를 돌다가 가로수를 들이받아 세 명 다 엉망이 된 채 생을 접었다. 이 사건은 아버지한테 크게 충격을 주어 이후 급격하게 말수도 줄어들고 농장 일도 신경을 쓰지 않는 우울한 중년 농부가 되었지만 딱 하나, 대를 이어 명성을 떨친 내시 복숭아 생산에는 여전히 전력을 다했다. 집안의 세 남자는 아무리 시대가 1948년이라도 그렇지, 겨우 열 두 살이었던 V한테 슬그머니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하길 기대했지만 그것을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 요구 자체가 무리였으니까. 그러나 V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나름대로 충실히 가사 일에 전념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서 열일곱 살이 된 것.

  V는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자신이 간절하게 바랐던 것은 여자도 자기가 선택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고 말해줄 사람이 옆에 있었으면, 하는 거였다는 점을. 한 가정의 상실과 그로 인한 결여, 또는 결핍이 V를 어떤 의미에서는 “필연적으로” 불행으로 향하게 만든다. 열일곱 살의 V. 당연히 사랑 문제.


  윌슨 문. 그가 마을에 나타났다. 돌로레스 탄광에서 일하다 그냥 그곳이 지겨워져서 탈출해 석탄을 싣고 출발하는 화물차에 뛰어올라 아이올라까지 흘러든 청년 또는 소년. 1948년에 십대 청소년이 탄광에서 일한다고? 그렇다. 그래서 아이올라에 첫발을 디딘 윌슨은 까마귀 날개만큼 새까맣게 빛나는 눈에 담긴 다정함이 있었고, 눈빛만큼 새까만 석탄 자국을 얼굴과 옷과, 옷으로 가리지 않은 모든 부위를 덮은 꼴이었다. 조금 지나면 독자도 알게 되는 것처럼 윌슨은 백인이 아니다. 어느 부족인지는 끝내 알 수 없었으나 아메리칸 인디언, 즉 북미 선주민의 후예였으며 탄광에서 거의 노예 수준의 노동학대에 시달리다 도망한 거였다.

  이날 오후, V는 다부진 몸에 유난한 성질을 가진 개 복서종을 닮은 동생 세스를 저녁 식사 전에 집으로 끌고 오기 위하여 포커장으로 가던 길이었다. 되게 작은 마을이라도 메인 스트리트가 있고, 이 거리 한 가운데서 두리번거리고 있던 윌슨 앞에 V가 섰고, 윌슨은 V에게 자기가 머무르며 목욕을 할 수 있는 곳이 있는지 물어보았으며, V는 행상이나 계절 노동자들 같이 주머니가 가벼운 사람들이 묶는 던랩 여인숙을 추천했다. 고맙다고 인사를 차리는데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V는 유럽식 무릎절curtsy을 해버렸고, 윌슨은 미소를 머금은 채 역시 한쪽 팔을 벌리며 답례했다. 사랑, 남자 이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은 V는 서두르거나 초조해하는 법이 없는,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 현재의 순간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윌슨에게 마음을 빼앗긴 것을 그때는 몰랐다. 이렇게 헤어지고 잔뜩 술에 취한 세스를 만나 집으로 돌아가던 V. 가던 길에 비틀거리는 세스를 부축하다가 둘은 함께 넘어졌고, 세스의 몸에 깔린 V의 발목이 심하게 삐고 말았다. 처음엔 절뚝이며 걸어보려 했으나 결국 주저앉은 V.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세스한테 의지할 수도 없는 처지에, 나무 그늘에서 다시 등장한 이가 윌슨이었다. 윌슨은 말없이 V를 두 손으로 안아 집에 데려다 주었다. 복서 종 같은 성질의 세스가 한낱 인디언 나부랭이가 누나를 품에 안고 가는 것에 열을 받아 있었다가, 아버지가 현관문을 열고 나오는 걸 보더니 윌슨의 등짝을 주먹으로 후려 갈겼다. 윌슨이 당연히 반격을 해 세스의 코피가 터졌을 때, 아버지 내시 씨가 호통을 쳐 다툼은 짧게 끝나고 윌슨은 가버렸다. 이때만 해도 V는 길들일 수 없는 복수의 들불이 어떤 건지 아무것도 몰랐다. 복수의 들불. 세스 마음 속에 피어나기 시작한 불길.

  V가 추천한 던랩 여인숙의 주인 던랩 부인은 뽀얀 피부에 큰 키, 그리고 퉁퉁한 몸매처럼 친절하고 후덕한 여인이었다. 백인에게만. 부인은 윌슨을 인디언을 거의 욕설 수준으로 낮춰 부르는 ‘인전’이라고 일컬으며 인전 따위를 자기 여인숙에 머물게 하면 숙박객이 화를 내고 전염병도 옮을 것이라면서 그를 내쫓아 버렸다. 이 와중에 누군가 윌슨이 도둑질도 했을 거란 소문을 냈고, 이를 들은 마을의 유지 마틴델 씨는 보안관도 아니면서 윌슨을 현상수배 한다고 커뮤니티에 전단을 살포했으며, 이를 본 세스는 “저 20달러, 내가 따고 만다. 두고봐라.” 전의를 다졌다. 우리는 안다. 미국 소설에서 이렇게 말했다면 결국 윌슨은 세스의 손아귀에 잡힐 운명이란 것을. 그러나 윌슨은 마을에서 도망쳐 콜로라도 산맥 한 봉우리에 있는 대피소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몇 주 후, 내시 씨가 아들 세스를 데리고 농장일을 보러 길을 떠나 하루 묵고 올 일이 생겼다. 옆집에 이웃과 격리하여 홀로 외롭게 사는 할머니 루비앨리스 에이커스 여사를 통해 연락을 하고 있던 윌슨을 만나기 위해 V는 얼른 이모부한테 점심을 차려주고, 저녁 거리를 챙겨 알아서 먹으라 일러준 후 곧바로 윌슨을 따라 산꼭대기 대피소에 도착해, 둘 다 처음으로 다른 성과 밤을 새운다. 당연히 처음엔 제대로 된 것 같지 않았으나 곧바로 익숙해졌고, 이날의 결과로 V는 임신을 하고 만다.

  아침이 되자 서둘러 집에 돌아오고, 나날이 갔으며, 가을이 되어 일손이 바빠져 내시 씨는 던랩 여인숙에 묵던 계절 노동자 포레스트 데이비스를 고용했다. 이게 V한테는 결정적으로 실패작. 가을 수확이 다 끝나고 한가한 시간을 만나자마자 포레스트는 세스와 찰떡이 되어버렸다. 세스한테는 한 가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들은 윌슨을 산 채로 잡는데 성공하고, 두 명 다, 아니면 적어도 한 명은 윌슨의 손과 발을 묶어 밧줄로 차의 뒷범퍼에 연결한 채 그대로 질주해 결국 산채로 피부가 거의 벗겨진 상태에서 윌슨은 숨을 거두고 만다. 넋이 나간 V. 계절이 또 바뀌고 배가 본격적으로 불러오자 V는 지겹고 지겨운 세 남자의 소굴인 집을 떠나 윌슨의 오두막을 향해 떠난다. 그리고 출산. 열일곱 혹은 열여덟 살의 V가 혼자 힘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을까? V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되고, 삶은 그래도 이어가고, 미국 소설이니 결국은 해피엔드까지는 몰라도 그리 사나운 삶으로 생을 마치지는 않을 것이니 독자여, 결코 마음 조리며 읽지 않아도 되리라. V 앞에 어디선가 갑자기 큰 돈이 뚝 떨어지지 않겠는가.


셸리 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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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5-08 10: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북적북적이란 앱이 있군요. 저도 요즘 만보기 사용하고 있는데 안 쓸 때랑 걷는 게 다르긴 하더군요. 저도 한번 알아봐야겠습니다.
책은 무슨 식물학 책 같은데 예쁘긴 해요. 전 미국문학은 호불호가 있어서 당장 읽게될 것 같진않고 영화나 다시 보고 싶단 생각이 드네요. ㅋ

Falstaff 2024-05-08 13:34   좋아요 1 | URL
북적북적이 처음엔 그랬는데 좀 있으니 시들시들해지더군요. 다 그렇지요 뭐.
책도 재미는 있습니다. 헐리우드 영화 같아서 아쉽지만요. ^^

페넬로페 2024-05-08 10: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의 내용이 제가 아는 브레드 피트의 <흐르는 강물처럼>과는 다른거네요.
V앞에 큰 돈이 뚝 떨어져 너무나 다행인데요~~
저 앞에도 그런 행운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05-08 13:39   좋아요 1 | URL
브래드 피트의 강물은 명작입지요!
돈벼락 쉽고 합법적으로 맞는 거 역시 상속이잖습니까.
근데 세상의 거의 모든 부모는 적절한 나이에 죽어서 자식들을 필요할 때 편하게 만들어주지 않는 거 같더라고요.
하긴 그것도 뭐 받을 거 있는 집이나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에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