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정세계
찬쉐 지음, 강영희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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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 소설의 본질은 초현실주의이다. 초현실적인 상황이 많이 등장하면 독자들이 헛갈린다. 지금 읽고 있는 것이 초현실적 문장인지, 상징인지, 특정 장면의 메타포인지.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없이 이 미노타우로스의 미궁 같은 작품 속에서 빠져나오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조금 익숙해지면 어렵기는 하지만 읽을 수는 있다. 찬쉐의 다른 작품, 그래봐야 <마지막 연인들>, <황니가黃泥街>,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포함해 네 편밖에 읽지 않았지만 다른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달리, 거 참 신기하지, 지루하지 않게 읽힌다. <격정세계>도 마찬가지로 초현실주의에 입각한 장면/문장을 속속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문학적 재질이 뛰어난 대형쇼핑몰 매대의 계산원인 주인공 샤오쌍(小桑)은 문학적 스승이랄 수 있는 이(儀)아저씨와 한 아파트에 산다. 아파트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6층짜리 구식 건물로 샤오쌍은 4층, 이아저씨는 3층에 산다고 숱하게 나온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날 같은 아파트에서 샤오쌍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에 있는 옥상 테라스에 올라가 멍청(㑁城) 시내를 구경하는 장면이 있다. 이럴 때 당황하지 말기. 원래 초현실이 그렇다. 건물이 지그재그로 휘기도 하고, 가옥의 지붕이 머리에 부딪힐 정도로 낮기도 하고, 심지어 천장과 바닥이 결국 붙어버리기도 한다. 아마 앙드레 브르통의 <나자>에 이런 장면이 나오는 걸로 기억한다. 아닐 수 있다. 기억력이 전 같지 않아서.

  작품에는 두 도시 멍청과 진청(京城). 진청은 서울(京)에 있는 성(城)이니 베이징으로 생각하면 되고, 멍청은 비행기를 타고 남쪽으로 두 시간 정도 가야 도착하는 도시이다. 그런데 멍청은 인구 비율로 보면 문학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그것을 판독하여 가치를 따질 수 있는 고급 독자들과, 비평가와, 심지어 소설가들을 무지하게 많이 배출하고 있다. 작품의 등장인물 가운데 딱 한 명, 차오쯔(雀子)의 전남편이자 학교 동창생 한 명을 빼고 모두, 적어도 문학 애호가이다. 즉, 도시의 이름처럼 멍청한 이들이 많이 산다는 뜻이다. 소설 백날을 읽어봐라. 돈이 나오나, 쌀이 나오나, 그것도 아니면 라면 국물이라도 한 방울 나오느냐는 말이지. 앞에서 이야기한 작품의 주인공 샤오쌍이 근무하는 대형 쇼핑몰에서도 샤오쌍을 필두로 샤오마, 한마(寒馬)를 멤버로 하는 북클럽이 활성화되어 정기적으로 책을 읽고 작품에 대한 토론을 한다. 그러다가 샤오쌍과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사는 이(儀)아저씨가 젊었을 적 애인의 외아들 헤이스(黑石), 역시 대단한 문학 고수에게 샤오쌍과 연애를 해보라 해서 작업의 일환으로 헤이스는 마치 우연히, 오랜만에 샤오쌍을 만난 것처럼 위장을 해 자신의 ‘비둘기 북클럽’에 참여하게 만든다. 이 비둘기 북클럽은 멍청에서 가장 유명하고 실력있는 고수들이 포진해 있는 곳으로 초기 멤버로 헤이스와 페이(費), 리하이(李海)가 있고, 뒤를 이어 옌(岩), 자오쯔, 샤오짱, 샤오미 같은 이들이 규합하여 스무 명에 이르는 호화멤버를 이룬다.

  한 가지 주제로 사람이 모이면 그 안에서 당연히 짝짓기가 생긴다.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비둘기 북클럽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비둘기 북클럽과 쇼핑몰 북클럽의 대장 격이었던 헤이스와 샤오쌍, 이들을 엮어주는 핵심역할을 하기도 했고 둘의 실질적 문학 교사이기도 한 나이든 이아저씨와 젊은 샤오마, 비록 짧은 기간 동안만 부부의 연을 맺기는 했지만 페이와 한마, 헤어진 후 다시 한마와 샤오웨. 처음엔 헤이스의 (속물) 애인이었고 동창과 결혼해 1년 남짓 살다가 이혼한 차오쯔가 훗날 진지한 문학적 깨달음을 얻어 연애를 시작한 깊은 시골 출신의 리하이. 몇 번 이야기했는데, 연애소설은 이별소설이기도 하다는 고금의 진리를 찬쉐는 깔끔하게 깬다. 위의 커플들은 진정으로 사랑을 하고, 말 그대로 죽음이 이들을 갈라놓을 때까지 쉼 없이 사랑하고, 사랑의 행위를 하고 간혹 헤어지더라도 ‘아름다운 이별’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되살려 남은 생애 동안 가장 친한 친구 사이로 지낸다. 이게 다 문학의 힘이란다. 그러니까 멍청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수련하는 고수들은 문학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들이다.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가장 모범적인 소설. 이게 가능한 건, 본문만 680 페이지에 달하는 장편 작품 자체가 초현실적 관점에 의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6층 구식 아파트가 갑자기 엘리베이터를 타고 45층 테라스가 있는 초현대식 아파트로 변용하듯이. 그리고 이들의 사랑. 특히 사랑의 행위. 거 참. 은근히 야하다. 그래서 좋다는 뜻이지 뭐.


  근데 이 작품의 주제가 뭐야? 멍청이라는 문학, 특히 소설문학의 유토피아를 설정해놓고 삶은 문학이 구원한다, 뭐 이런 식을 설파한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연애와 결혼과 이별에 대하여 쓴 것인지, 이것도 헛갈리는데, 아무래도 문학의 효용, 문학제일주의, 문학만세를 주장하는 측면이 더 강한 듯하다. 소설과 평론을 하는 사람들의 모색과 탐구, 노력. 지면 뒤에서 이들이 발전해가는 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는 찬쉐의 눈길이 느껴지기도 한다. 특히 초현실주의 문학 같은 전위적 글쓰기에 관하여. 작품 속에서 연작 장편을 징청, 즉 수도에 있는 유명 잡지에 실을 한마의 입을 통해 찬쉐는 말한다. 찬쉐는 알다시피 중국의 전위적 그룹이었던 선봉파先鋒派의 기수이다. 선봉파 문학을 거칠게 정의하면 사회주의 문학에 반대하고 형식과 언어의 미궁을 실험하는 전위라고 할 수 있는 바, 찬쉐는 자신의 작업을 작품 중 작가 한마의 입을 통해 어느 정도 독자에게 주장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창작이 이런 관습을 깨뜨리고 있다고 봐요. 나는 자신을 분열시킬 수 있는 현대 작가라고 할 수 있고 언제든 나 자신의 창작을 냉정하게 평가할 수 있어요. 그래서 창작과 관련해서 느끼는 생각을 쓰고 싶기도 해요.”

  이 말을 받은 연인 샤오웨가 말한다.

  “그거 잘 됐네요. 한마의 창작은 특별한 경우로, 전통에 얽매여서는 안 돼요. 작가는 소설과 떨어지면 자기 소설의 평론가가 될 수 있어요. 이 역시 미래 문학의 추세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아가 분열되어야 발전을 희망할 수 있어요. 원초적 역량이 가장 큰 사람이 중심이 되죠. 그 중심이 세상 사람들에게 바로 인식되지는 않지만요. 역사는 언제나 그래요.”  (p.523~524)


  작품의 무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도시 멍청에서는 새로 작가의 자리에 오른 한마의 전위적 작품에 대하여 털끝만큼의 반대나 저항이 없이 찬사 일변도다. 그래서 혹시 찬쉐가 자신의 선봉문학 작품들을 위한 유토피아로 멍청을 설정하고, 선봉문학을 하는 사람들을 천사로 만듦과 동시에 자신의 작업이 궁극적으로 미래를 여는 가장 올바른 문학이라고 주장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사실 전위 작품은 언제나 저항에 부딪히고 가자미 눈알을 하는 비평가들이 백안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모든 전위 작업을 통해 역사는 진보해 나가는 법이기는 하다. 그래도 너무 했어. 전위문학의 유토피아 이름으로 하필 멍청이 뭐야, 멍청이.

  그러나 나처럼 이미 나온 문학작품을 오직 즐기기 위한 독자들에게 이 책은 과하게 전문적이다. 내용이 전문적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이 하나같이 문학에 목을 매고, 실제로 소설작업과 평론을 하고, 중앙 문단과 연결을 하고, 아무리 아마추어라도 문학을 “공부”하려 한다. 그것도 전위 문학을.

  전위적인 작품을 즐길 수 있는 사람은 대개의 경우 소수의 잘 교육받은 ‘탁월한 자’들이다. 이건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그랬다. 예술의 효용이 쾌락이라고? 그건 탁월한 자들의 경우가 그렇고 나한테는 쾌락이기는커녕 고난의 행군일 확률이 매우 높다. 그러한데 멍청의 숱한 독자들이 그리 쉽게 이해가 되겠느냐고. 그렇다고 좌절금지. 문학적 소양이 대단한 샤오쌍조차 멍청 최고의 비둘기 북클럽을 찾아 가려해도 도무지 북클럽이 있는 고서점 거리를 발견하지 못했던 거다. 아무리 행인한테 물어도 아는 사람조차 없는 고서점 거리 안에 북클럽이 있었던 것. 여기까지는 나나 샤오쌍이나 그게 그거였다는 뜻. 글쎄 초현실주의라니까. 이런 장면에서 당황하면 책 못 읽는다.

  작품의 또 하나는 역시 연애. 연애소설 쓰기가 이게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거의 비슷한 플롯에 비슷한 진도, 비슷한 결합과 분리 과정은 사실 이미 다 써먹었다.  그리하여 찬쉐가 연애소설을 다루는 방식은 문학을 매개로, 멍청이란 유토피아에서 문학공부를 하는 선한 사람들의 연애감정을 꽤 디테일하게 묘사하고 있다. 뭐 그냥 넘어가는 게 없을 정도로. 그리고 한 작품 속에 다양한 커플을 등장시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적절한 수준의 베드씬까지. 그럼에도 <격정세계>에서의 격정은 연애보다 문학을 향한 격정이라는 측면이 훨씬 강했다. 문학을 위한 문학인의 유토피아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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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5-06 06: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북클럽을 찾아 고서점 거리를 걷는 모습은 너무 좋았어요^^ 어디에서 모이는지도 모르고 찾아가는데 헤매다 보니 그 장소에 도착해있는! 마치 그런 전위적인 문학을 읽는 독서과정을 비유하는 듯 합니다.
오향거리 읽다가 멈췄습니다.
틈나는대로 읽기엔 적합지 않아서, 나중에 한꺼번에 읽으려구요. 폴스타프님 리뷰는 책보다 재미있네요^^

Falstaff 2024-05-06 08:31   좋아요 1 | URL
예. 찬쉐가 참 흥미로운 작가더라고요. 대개 이런 선봉파 적 작품은 읽기가 곤란한데, 이이는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워 하면서도 그래도 잘 읽히면서 뒷부분으로 가면 나름대로 감을 잡게 되더라고요.
저도 오향거리 읽어야 합니다. 근데 좀 뒤에 읽으려고요. 먼저 읽고 리뷰 남겨주세요. ^^

stella.K 2024-05-06 1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멍청이라는 지명이 나오나 보죠? 전 첨에 폴님께서 오타하신 건 아닌가 했습니다. 거 이름도 참. ㅋ 초현인만큼 현실에는 없는 그런 곳이겠죠? 문학을 위한 문학인의 이야기라니 읽어보고 싶네요.

Falstaff 2024-05-06 16:55   좋아요 1 | URL
옙. 㑁城이란 지명인데요, 베이징 말고 대도시 중 한 군데를 모델로 했던 거 같습니다. 상하이 아닐까 싶기도.
이 책 재미있습니다. 찬쉐 작품 치고 좀 덜 골치 아프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그것 참, 은근히 야합니다. 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