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악마
존 웹스터 지음, 고현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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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66년에 런던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런던의 랜드마크이기도 했던 여러 성당도 홀랑 타버렸는데 당시 런던 시민들의 출생증명서는 세례를 받은 교회에서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내가 뭐 아나, 소설책 읽어보니까 그렇더라. 근데 런던교구 예배당이 불길에 휩싸이는 바람에 유명인사의 생몰 기록도 함께 사라져 정확한 출생, 사망 연도를 모르는 일도 생겼다. 이 가운데 하필이면 셰익스피어와 거의 동시대에 극작가 활동을 하는 바람에 우리나라 독자들에겐 이름이 생소한 존 웹스터도 끼어 있어 이제 영문학자들이 탄생이 1578년 아니면 79년, 사망은 1627년에서 34년 사이로 추정한다. 오늘의 교양. 런던 대화재 때문에 사라진 교회를 새로 짓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 여전히 세계적인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크리스토퍼 렌’이다. 소설 작품 여러 편에서 이이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렌의 제자 가운데 니컬러스 혹스무어라는 인간이 있어 이때 교회 여섯 개를 개축하며 이름을 날렸으나, 혹스무어가 슐레밀 성향이 있는 인간이라 하는 일마다 꼬여 아마 말년이 좋지 않았지? (슐레밀: 하는 일마다 꼬이는 불운한 인간. 토머스 핀천의 작품 <브이.>에 나오는 이디시어 단어) 이 혹스무어를 차용해 대체역사 소설을 쓴 피터 애크로이드의 작품이 읽어볼 만하다.

  하긴 존 웹스터가 때를 잘못 골라 하필이면 셰익스피어와 동시대에 활약한 것만 가지고도 웹스터 역시 슐레밀 인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이 더러워 2등은 별로 기억하지 않거든. 제일 유명한 2등이 모차르트한테 찌그러진 안토니오 살리에르? 위대한 소프라노 가운데 한 명이라서 그래도 ‘라이벌’이란 칭호를 얻어듣기는 했던 칼라스 시대의 레나타 테발디. 근데 내가 지금 뭘 쓰고 있는 거지? 하여간 웹스터가 <하얀 악마>를 쓴 것이 1612년 왔다갔다니까 만년의 셰익스피어시대 맞다. 이거 얘기하느라.

  누가 썼는지 밝히지 않았지만 관례로 보아 역자 고현동이 썼을 거 같은, 본문 뒤에 붙은 해설을 보면, 작품의 초연이 1612년에 런던 레드불Red Bull 극장에서 있었고, <하얀 악마>는 공연되기 30년 전쯤에 이탈리아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극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작중 등장하는 피렌체의 추기경 몬티첼소가 콘클라베에서 교왕으로 선출, 바오로 4세가 된 해가 1555년이니 적어도 60년 전쯤에 있었던 사건이 맞겠다. 바오로 4세는,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겠지만 하여튼 극 중에서 교왕이 되자마자 제일 먼저 내린 교왕령이 매춘부 교화소에서 탈출한 비토리아 코롬보나와 이 매춘부의 정부이자 브라치아노의 공작 파울로 지오다노 오르시니를 파문하고 로마에서 추방하는 일이었다. 그게 그렇게 큰 일이었을까? 그렇다. 한 마디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뽑은 사건이다.


  여기부터 등장인물도 많고 이름도 길어서 헷갈리기 쉽다. 눈 피곤하면 단락 그냥 훌쩍, 뛰시라.

  다른 가문도 아니고 피렌체 디 메디치 가문의 딸 이사벨라를 막대한 지참금과 함께 아내로 맞은 브라치아노 공작. 당연히 이사벨라는 살아 생전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혀본 적 없이 곱게 자랐을 터이니 살갗 뽀야니 얼마나 예뻤겠나. 그래 젊어서는 여기서 쪽, 저기서 쪽, 볼때마다 물고 빨고 했지만 아들 지오바니가 이제 열다섯 왔다갔다 할 때는 그저 소 닭 보듯 했다. 사실 뭘 몰라서 그러는 거다. 더 늙어 아내한테 얻어 터지지 않고 살려면 딱 이 때부터 잘 보여야 하거늘, 공작은 안면 싹 가리고 귀족 떨거지이자 자기 부하인 카밀로의 환장하게 어여쁜 젊은 아내 비토리아 코롬보나한테 눈이 휙 돌아가 버렸다. 죽으려고 환장을 한 거지. 아내 이사벨라는 15세기부터 유럽 최고의 재력을 바탕으로 세 명의 교왕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한 디 메디치 가문의 영애였고, 눈독 들인 비토리아도 현직 추기경(훗날 바오로 4세 교왕이 될 지는 몰랐겠지만) 몬티첼소의 조카 며느리였다. 이사벨라가 메디치 가문의 그냥 영애도 아니고 현 토스카나 대공위의 자리에 있는 피렌체 공작 프란체스코 디 메디치의 친 동생이었으니. 하긴 뭐 여자한테 눈이 돌아가면 무슨 짓을 못해? 하여간 꼬다리 달린 남자새끼들이란…….

  근데 이게 브라치아노 공작 혼자 죽기살기로 비토리아의 몸과 마음을 갈망하는 게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다. 비토리아도 나이 들어 머리가 홀랑 벗겨진 남편, 아니면 매독이 벌써 상당히 진행해 머리카락까지 말짱하게 빠져버린 남편하고 잠자리는커녕 입맞춤도 하지 않은 게 하 세월이었다. 정나미가 뚝 떨어졌는데, 왜 그랬는지는 설명이 없다. 진짜 매독 때문이지(아닐 듯), 늙어 발기부전이 생겼는지(조금 그럴 듯), 너무 못생겼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든지(조금 더 그렇다), 권태를 더 못 견디겠든지(많이 그렇다), 공작의 아내가 되어 더 멋있게 살고 있었든지(아주, 아주 많이 그렇다) 했다가, 이게 시간이 갈수록 진짜 사랑이란 걸 하게 된 거다. 덧붙여 친동생이자 세상없는 악당인 플라미니오가 공작과의 사이에서 슬금슬금 모닥불을 피워주니 비토리아 간땡이가 슬슬 붓기도 했고.

  이 비토리아 코롬보나가 작품의 제목인 “하얀 악마”인데, 간이 얼마나 부었느냐 하면, 꿈 꾼 이야기를 이렇게 한다. 당연히 진짜 꾼 꿈은 아니겠지만.

  “한밤중에 교회 옆 묘지로 걸어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곳에 크고 매력적인 주목(朱木) 나무가 땅에 커다란 뿌리를 내리고 있었죠. 그 주목 아래에서 오랜 세월 비바람에 상처 난 어떤 무덤에 기대앉아 생각에 잠겨 있을 때, 그곳으로 공작님의 부인과 제 남편이 슬그머니 왔어요. 한 명은 곡괭이를, 다른 한 명은 녹슨 삽을 들고서 말이에요. (중략) 공작부인과 남편이 말하더군요. 제가 잘 자란 주목을 뽑아 버리고 그 자리에 시든 가시나무를 심어 놓으려 한다고요. 그래서 저를 산채로 묻어 버리겠다고 맹세했어요. (중략) 그때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커다란 주목의 거대한 가지를 떨어뜨렸고, 공작부인과 제 남편은 그 성스러운 주목에 맞아 그들에게 걸맞은 초라하고 얕은 무덤 안에서 죽어 버렸어요.”

  여기서 “주목朱木”의 영어 발음이 you와 같단다. 그리하여 비토리아가 꾼 개꿈의 결론은 자기를 위하여 공작부인 이사벨라와 자기 남편 카밀로를 죽여달라는 거다. 그래야 자신이 공작부인의 자리를 꿰찰 수 있으니까. 나는 여기까지 읽으면서 기어이 브라치아노 공작이 아내와 카밀로를 죽이고 말겠구나, 하는 건 탁 눈치를 챘지만, 이게 16세기 중반에 실제로 다른 집구석도 아니고 메디치 일가에서 있었던 일이란 건 생각도 못했다. 출연진에 “프란체스코 드 메디치: 피렌체의 공작이며 이사벨라의 오빠”라고 씌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디 메디치 가문한테 이런 불명예를 줄 깡다구 있는 바보 멍청이라 있었을까,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 철없는 브라치아노 공작은 자꾸 귀찮게 구는 디 메디치 공작한테 정 꼬우면 전쟁 한 판 뜨자고 하더라니까, 글쎄. 자기들 집안의 명예 하나 때문에 공국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망실할까봐 오히려 디 메디치 공작이 전쟁에 반대하고 말이지.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고? 좋다. 이 희곡은 안 읽거나 아주 극소수만 읽을 거 같아 화끈하게 일러드리지. 사실은 희곡이나 오페라, 발레 같은 공연물, 당연히 영화 장르는 빼고, 거의 모든 공연물은 극의 내용을 미리 알고 관람하는 것이 백번, 천번 옳은 일이어서 내용을 몽땅 드러내는 일에 거부감이 훨씬 덜하긴 하다. 미리 희곡을 읽고 연극을 보는 거하고, 말짱 생으로(‘생으로’라고 쓰지만 발음은 ‘쌩으로’ 하는 게 훨씬 더 호소력 있지?) 극장에 가는 거하고, 이거 많이 다르다.

  1. 이사벨라 브라치아노 공작부인. 공작의 파도바 성에서 늘 습관적으로 자기 전에 세 번 인사하고 입맞춤을 하는 공작의 초상화 입술에 독을 발라놓은 줄 꿈에도 모르고 평상시처럼 아무렇지 않게 두 번 입맞추었다가 밤새도록 고통에 시달리다 새벽에 죽는다. 물론 조금 과장해서.

  2. 카밀로. 공작의 하수인이자 비토리아의 동생인 플라미니오가 카밀로와 뜀틀 놀이를 하다가 카밀로의 목 경추를 거꾸로 접어버린 후 뜀틀에서 떨어져 목뼈가 부러져 죽은 것처럼 위장한다.

  카밀로의 죽음으로 의심을 받아 비토리아는 종교재판에 넘겨져 매춘부 교화소에 입소한다. 공작과 불륜관계라는 건 세상이 다 알았고, 당시에 불륜은 교회에서 재판을 했다고. 거기서 얼마 지내다가 현직 교왕이 사망해 콩클라베가 소집되어 교회가 어수선해지자 브라치아노 공작이 비토리아를 빼내 파도바의 성으로 데려가 새로 결혼을 한다. 이런 커플이 행복하면 참 불공평하겠지? 그리하여 파도바의 성으로 진입하는 정의의 사나이들. 누구냐하면, 차마 알려드리지 못하겠네. 재미있으니 직접 확인하시면 좋겠다는 의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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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4-23 10: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기론 존 웹스터가 영어 사전을 낸 그 사람 아닌가 싶기도 한데요. 7,80년대 중고등학교를 다닌 사람은 웹스터 영어사전 하나씩은 있었다고 하던데 암튼 영어 사전을 낸 사람도 대단하지만 그걸 번역한 사람도 대단하지 않나 싶습니다.

Falstaff 2024-04-23 16:13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웹스터가 그 웹스터군요. ㅎㅎㅎ 전 XX년대 영어사전 쪽인데 아무래도 민중서관이던가에서 나온 에센스가 제일이었습죠.
큰 아이 고등학교 올라갈 적에 영어사전 사줬더니 이게 멍뮈? 하던 표정을 잊지 못합니다. ㅋㅋㅋㅋ 사전은 말 그대로 사전적 의미로만 있더구먼요.
아하, 그 웹스터가 이 웹스터! ㅎㅎㅎ 고맙습니다. 처음 알았습니다.

stella.K 2024-04-23 18:12   좋아요 1 | URL
가만히 계셨으면 중간은 하셨을텐데 그 순간 나쁜 아빠로 등극하는 순간이셨겠어요. ㅋㅋㅋ 아드님은 내심 입학축하 상여금이나 최소한 문학이나 사상전집 같은 걸 기대하지 않았을까요?^^

다락방 2024-04-23 1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너무 재미있겠는데요??

Falstaff 2024-04-23 16:1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재미 죽입니다. 원래 치정, 살인이 기가 막힌 소재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