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과거 을유세계문학전집 131
드리스 슈라이비 지음, 정지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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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읽는 슈라이비. 그는 1926년 프랑스령이었던 모로코의 마자간에서 파트미 페르디와 그의 독실한 이슬람교 아내 사이에서 소설 중에는 일곱 형제, 순서대로 카멜, 드리스, 압델 크림, 나짐, 마디니, 자드, 하미드 가운데 둘째 아들로, 실제로는 (역자의 주장에 따르면) 세명의 누이를 포함한 열 남매의 일원으로 마자간, 현재 지명으로 엘 자디다에서 출생했다. 어린 시절엔 다른 형제와 같이 기숙 쿠란 학교에 다니다가 라바의 프랑스계 ‘게수 초등학교’에 다녔다. 시설도 형편없고 저승사자 같은 교사한테 학대 비슷한 교육을 받다가 프랑스 학교에 들어갔으니 갑자기 뇌활동이 활발해져 눈부신 학업성취를 이끌어 냈다. 저절로 큰 기대를 갖게 된 아버지 슈라이비 씨는 드리스를 카사블랑카에 있는 프랑스 “기독교” 사립 리세 리예 고등학교에 입학시키는데, 여기서도 라틴어, 그리스어, 프랑스어 작문, 독일어 등 주요과목은 최우등이거나 차석을 차지해 일찌감치 “신세계”를 배우기 위한 재목으로 선택받기에 이른다. 근데 문제는 이게 위키피디어에 나오는 게 아니라 자신이 쓴 소설 <단순한 과거>의 한 대목이라는 점. 하지만 나는 그게 사실일 거라고 믿는다.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1954년 그의 나이 스물여덟 살에 발표한 데뷔작 <단순한 과거>가 자서전과 소설 사이에서 절묘하게 균형을 잡고 있다니까. 막내아들 하미드가 실제로는 뇌수막염으로 죽었고 엄마는 여든 살이 넘게 장수한 반면, 소설에선 막둥이는 아버지한테 맞아 죽었으며 엄마는 창문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것이 다르다고 했다.

  드리스 슈라이비가 <단순한 과거>를 발표해서 데뷔작부터 스타덤에 오른 다음 해 1955년에 카틀린과 결혼해 다섯 아이를 낳았고, 1978년에 스코틀랜드 여성 시나 맥칼리언과 재혼해 또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으니, 도대체 언제까지 낳은 거야? 그건 아빠 닮았구먼.

  위의 두 문단을 보면, 실제로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소설 속에서 아버지 파트미 페르디, 실제로는 진짜 자기 아버지 파트미 슈라이비 씨일 수도 있는 아버지는, 설마 고의로 그러지는 않았겠지만 한 순간 열을 받아 휘두른 주먹으로 막둥이 아들을 때려 죽였으며, 얼마 후 자기 주관이라고는 1도 없이 그저 어려서는 아버지, 커서는 남편, 늙어서는 아들들, 삼종지도의 길만 충실하게 걷던 어머니도 삶에 얼마나 넌더리가 나던지 그냥 창문에서 자유낙하를 감행해 자살함으로써, 위대하신 알라의 품에 들지 못하고 억겁을 세월을 지옥의 유황불에 불살라지는 것을 선택했다. 그러니 주인공 드리스 페르디가 프랑스로 유학길을 떠나기 전까지 시절을 묘사한 이 소설에서 가정의 폭군으로 존재한 아버지와 (요새 이런 말이 유행이던데) 시스템 적으로 그런 폭군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던 이슬람 문화, 어려서부터 철저한 교육을 받아 부정은 하지 못 할지언정, 이슬람 문화에 염증을 느끼고, 반항을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적으로 보면 이 소설이 나온 1954년은, 모로코를 위시해서 튀니지와 알제리, 이렇게 마그레브 지역에서는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의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모로코에서 영재로 인정받아 식민 모국인 프랑스로 유학을 해 화공학을 전공한 미래의 모로코 인재라는 작자가 모국어도 아니고 프랑스어로 소설을 써서, 이슬람교와 모로코의 가치와 문화에 거칠게 저항했다는 점이 당시 모로코 식자들한테 매우 마땅하지 않았을 것이다.

  작품을 읽어보면 같은 프랑스 기독교 학교에 다니더라도 프랑스인 또는 백인이 아니라 모로코인이 학생일 경우에 받아야 했던 차별 같은 것도 묘사가 되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괴물 폭군 아버지와 이슬람의 비합리적(이라고 볼 수도 있는) 문화에 대한 저항이 하도 커서, 프랑스 백인 문화에 대한 반감을 모국의 독자들이 체감하기는 쉽지 않았을 듯하다.


  라마단. 난 이게 뭘 말하는지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저 허공에 해 있을 때 밥 안 먹는 날인 줄만 알았다. 그런데 아니라며? 무함마드가 쿠란의 첫번째 경구를 받은 날을 기념하는 거란다. 올해는 3월 10이부터 4월 8일까지라고. 이슬람에 관해 불경스러운 말을 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 수가 있어서 갑자기 내 입도 무거워진다. 그래도 쿠란의 경구를 받았으면 좋은 날 같은데 왜 밥을 안 먹지? 드리스 슈라이비에 의하면 마시지도, 먹지도, 담배를 피우지도, 섹스도 못하는 기간이라고 한다. 책을 열면 첫 장면이 라마단의 스물네 번째 밤이다. 때는 1940년대 초. 모로코의 전통이 깊은 도시 페스 거리엔 훈족처럼 거지들이 떠돌았고, 이 거지들은 지난 13세기부터 천삼백 년 동안 내려오는 이슬람의 종이었던 같이 ‘나’ 드리스 페르디는 이슬람교의 결정체인 군주의 종 신세였다. 여기서 말한 ‘군주’가 바로 아버지 파트미 페르디를 일컫는다. 페스 시 앙고라 거리에 철근 콘크리트로 지은 집에서 군주는 상체를 똑바로 펴고, 앞을 똑바로 보고 앉아 있다. 별로 차갑지는 않았지만 권위적이었고, 별로 권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 앞에 서기만 하면 그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들은 소멸해버리고 말았다. 적어도 집에서는 전지전능했다는 것이다. 3년 간 성지순례를 다녀온 아버지. 성지에 가 검정 돌에 손을 대고 묵상을 한 사람들에게 부치는 단어 ‘핫지’를 이름 앞에 달아 ‘핫지 파트미 페르디’라고 불리는 차tea 전문 도매상인.

  핫지 파트미 페르디의 일곱 아들은 태어나면 1년 동안 젖을 먹고, 2년 동안 울었다. 이게 유아기에 할당된 최소한의 자유 시간이었고 이 기간이 지나면 곧바로 공포 속에서 자라며 침묵을 배워 나갔다. 이렇게 엄한 훈육이 다 선한 인간을 만드는 건 아니라서 맏이 카멜은 아무 생각 없고 무책임했으며 주인 앞에서 완벽한 꼭두각시 노릇을 했지만 집 밖에 나가기만 하면 할 짓은 다 하고 다녔다. 라마단 24일차 밤에도 카멜은 식구들이 자기를 기다리느라 밥도 안 먹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 명백하게 술에 취한 채 다 늦게 사창가에서 귀가했다. 드리스는 아버지 앞에 따로 앉아 있고 나머지 다섯 아이들은 이등변 삼각형을 이루어 벽에 드리운 다섯 그림자로 불안한 시간과 배고픔을 견디고 있었고. 살벌한 우리의 군주. 당장이라도 가볍지 않은 폭력이 발생할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 어머니는 기도한다.

  “저의 군주이자 주인에게 헌신하는… 그리스인과 러시아인의 성자들이시어, 작은 사고가 나거나, 계단에서 넘어지거나, 알 수 없는 세균에 감염되거나, 독일군 폭탄이 터지거나, 아무거나 좋으니, 저를 죽여주세요…. 그리스인과 러시아인의 성자들이시어…….”

  그리고 드디어 군주는 카멜의 몸을 잡아 벽에 밀쳐 누르고, 내동댕이친다.

  “이것이 다 네가 자랑스럽게 마신 포도주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네가 조금 전에 품었던 반항심 때문이다.”

  그리고 ‘나’를 쳐다본다.

  “칼 내놓아라.”

  집안 저 구석에 버려져 있던 주머니칼을 시간 날 때마다 닦고 기름치고, 날을 세운 칼. 형이 들어오면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서 칼날을 군주의 목에 꽂아버리겠다고 각오를 다지던 칼이었다.

  군주가 내리는 가장 큰 벌. 그건 여기, 집에서 머무는 것. 각자는 파렴치한 행동과 증오와 과부생활과 분노를 계속 이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특히 너, 드리스 페르디. 하루 종일 굶은 나는 저녁 식사를 거절하고 일어난다. 너무 오래 기다려 배 고프지 않았고, 내일부터 더 이상 금식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기분이 나빠진 군주가 하사한 보리빵 한 덩이는 창문 밖 거지에게 적선해버렸다.


  이렇게 극단으로 치닫는 부자관계. 사회적으로도 억압적일 수 있는 이슬람 문화. 프랑스 학교에서 벌어지는 노골적인 차별. 프랑스 학교에서 바칼로레아 시험을 보아 압도적 성적을 거둔 드리스. 그러나 면접관에게 드리스는 요구한다.

  “제 요청은 이곳에서 나가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선생님, 혹시 더 하실 말씀이 있는가요? 예를 들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든가, 영광스럽게도 친근하게 대해 주었는데 오히려 저의 태도에 격분하셨다든가? 제가 혁명가의 임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든가? 그래서 결과적으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동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른 하실 말씀이 있나요?”

  면접관은 마지막으로 남은 최종 심사에서 빵점을 주겠다고 협박하지만 드리스는 오히려 평온하다. 이제 세상에서 드리스는 완전한 소외를 만나게 된 것.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한 명은 누구? 죽으나 사나 군주, 아버지 밖에 없었다. 전쟁과 미군에 의하여 사업이 결딴난 줄 알았던 군주는 카사블랑카 근방에 어마어마한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곳에 토마토 농장을 만들고 있었는데, 거 참, 잘 나가다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로 군주가 먼저 드리스에게 화해를 청하고, 면접관은 모종의 거래를 통해 빵점 처리를 하지 않았으며, 화공학을 전공하기 위하여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 괴물 아버지. 많이 읽었다. 그의 난데없는 화해신청. 그거 가능해?

  어떻게 하다 보니 결론을 말해버리고 말았네? 정말 이렇게 끝나냐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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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3-29 0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진위청, <번화>
화요일. 이사벨 아옌데, <비올레타>
목요일. 그레이엄 그린, <코미디언스>
금요일. 존 밴빌, <케플러>
아옌데, 그린, 밴빌... 소문난 잔치에 먹을 건?

stella.K 2024-03-29 12:13   좋아요 0 | URL
댓글을 이리 마치시니 진짜 예고편 같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ㅎㅎ

Falstaff 2024-03-29 16:03   좋아요 0 | URL
ㅋㅋㅋ 다음 주 독후감은 별거 없을 듯하네요. ^^;;

그레이스 2024-04-04 07: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큭큭거리며 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왜 밥을 안먹지?˝에서 웃어버렸네요.
궁금한게 있는데... 폴스타프님 현실 말투가 이러신지...?

Falstaff 2024-04-04 16:42   좋아요 1 | URL
ㅎㅎㅎ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기분 좋습니다. 근데 웃기지 않아요? 좋은 날에 왜 밥을 안 먹어요? 잔치라도 할 판인데 말입죠.
말투... 좀 세다고 하더군요. 물론 저는 아닌 거 같습니다만. ㅎㅎㅎ
근데 천성은 비둘기파에 마음 약하고, 그래서 영화보다가 질질 짜고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