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
에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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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이 내가 아는 에마뉘엘 카레르 맞나? 책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연하지 유일하게 읽어본 카레르가 <겨울 아이> 또는 <스키 캠프에서 생긴 일>이었으니. 다른 사람인 줄 알았다. 읽다 말고 이름 검색해보니 이 카레르가 그 카레르다. <겨울 아이>는 1995년 작품이고 <요가>는 2020년이다. 프랑스판 위키피디아에서 에마뉘엘 카레르의 저술을 검색하면 <겨울 아이>는 소설Novel로, 21세기 이후 출간한 작품은 “이야기”story로 분류해 놓았다. 그러니까 카레르는 밀레니엄을 기점으로 밀레니엄 이전 BM 시절에는 누가 읽어도 소설을, AM 시절엔 소설이기는 한데 자신의 이야기와 허구의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바람에 똑 소리 나게 소설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조금 켕기는 작품을 주로 썼다. 출판사 ‘열린책들’의 프랑스 소설 핵심 역자인 임호경은 ‘옮긴이의 말’에서 “조금의 가식과 위선도 없이 자신의 발가벗은 삶과 영혼을 송두리째 털어놓은 것 같다”고 했다. 카레르 자신도 작품 속에 스스로 고백하기를 작가에 관한 것은 전부 사실 그대로, 출연하는 사람들이 실명을 허락했을 경우에도 그 사람 그대로, 허락을 하지 않았거나 물어볼 수 없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당연히 가명을 쓰고 사건이나 행위도 각색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니 이 작품 <요가>는 작가의 주변에서 일어난 실제상황에 대한 르포르타주 적 사실과, 등장인물의 소설적 허구가 뒤섞인 기묘한 잡탕의 미각을 느껴야 할 듯.


  에마뉘엘 카레르는 책을 시작하면서 자신이 지난 4년 동안 겪은 일을 쓰겠다고 깔아놓고 시작한다. 그러니까 ① 애초의 목적은 요가에 대한 기분 좋으면서도 세련된 책을 한 권 쓰려고 했으나(1부 ‘울타리’), ② 지하드 테러리즘(2부 ‘1,825일’)과 난민 위기(4부 ‘소년들’) 같은 별로 기분 좋지도 세련되지도 못한 것들을 대면하고, ③ 너무 심각해 넉 달 동안 생탄 병원에 입원해야 할 정도의 우울증을 겪었으며(3부 ‘내 광기의 이야기’) ④ 35년 동안 함께 작업한 편집자를 잃어버린(5부 ‘나는 계속 죽지 않는다’) 것들이다. 카레르가 책의 제목을 <요가>로 했기 때문에 각기 독립된 다섯 개의 이야기에 조금씩 요가에 관련한 내용을 구겨 넣을 수밖에 없었겠지만, 이 책을 제목처럼 “요가” 또는 요가와 같은 의미이기도 한 “수행”, “명상”, “참선” 또는 “도 닦기”를 기대했다가는, “욕망과 허영 덩어리이고 충동적이며 모순투성이에다가 지질하기도 한” 작가의 쓸데없이 솔직하기만 한 술주정만 듣다가 책을 덮을 것이다. 정말로 이 책을 읽을 분들은 다섯 개로 구성된 부part가 각기 독립되어 서로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셔야 한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났지만 역자의 의견에 의하면 노벨문학상은 탈 수 없을 거 같은 글 좋은 에마뉘엘 카레르는 그저 자신이 겪은 4년 동안의 굵직한 일들에 관해 쓸 뿐이다.

  그가 작가라는 자유업에 종사하기 때문에 일상적으로 학교와 가정, 육아, 돈벌이, 은퇴의 사이클을 운행하는 보통 사람들의 행적과 다른 범위에서, 다를 수밖에 없는 인물과 만나고 다른 사고를 한다. 그래서 특별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것만 해도 특별한데 그 위에다 현란한 문장의 분식을 하니 더욱 특별하게 보이는 건 당연한 일. 독자는 분식한 문장을 위해 주머니에서 현금을 꺼내거나, 카드를 내민다. 작가라는 직업인은 평범한 이웃을 현혹하는 인간을 칭하는 단어이니까. 카레르는 1990년 이전부터 명상과 요가 수행을 했다. 동네마다 하나씩 있는 요가 학원에서 배운 게 아니라 권위있는 요가계의 한 명인 아헹가에게 직접 전수받은 파에크 비리아라는 프랑스 요가의 개척자와 중국인 양진밍 박사에게 정통 명상과 태극권, 요가를 습득해 이미 1990년대 초에 ‘자푸’, 우리말식 일본어인 ‘자부동’을 깔고 제대로 수련을 했다고 주장한다. 처음에 이이는 태극권을 익혔다. 중국인들이 새벽마다 도시 광장에 양팔 간격으로 벌려서 흐느적거리며 몸을 움직이는 건강유지법을 TV에서 보신 적 있을 터. 태극권 가운데 소주천이라는 걸 하다가, 작가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자신의 거의 유일한 문제가 거추장스럽고도 폭군적인 자아였는데 이걸 조절하기 위해 이제는 요가만 하고 있었다.

  2015년 정월. 작가 개인으로는 거의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드물게 휴대전화와 책, 모두 집에 그대로 두고 가벼운 짐을 꾸려 리옹 역의 분역인 베르시 역에서 라로슈미젠으로 가는 기차에 오르면서 작품은 시작한다. 오늘부터 열흘 동안 휴대전화와 책이 없는 시간으로, 모든 것에서 절연된 시간을 보낼 예정이다. 라로슈미젠에서 내려 다시 셔틀버스를 타고 ‘모르방’이란 곳에 위치한 비파사나 명상원에 도착한다.


  * 비파사나: 여러가지 현상을 관찰하는 직관 명상법. 산스크리트 비파샤나(Vipasayana)를 음역한 말로 의역하여 관(觀), 능견(能見), 정견(正見), 관찰이라고도 한다. 마음을 한 가지 대상에 집중하여 평화를 얻기보다는 여러 현상들을 관조함으로써 통찰력을 얻는 수행법을 말한다. (두산백과)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런 방면에는 영 관심이 없는 거다. 명상, 도, 수행, 참선 같은 거. 바닥에 매트 깔고 위에다 자부동, 자푸도 깔고, 무릎 연골이 나가거나 말거나 정좌해 앉아 척추를 꼿꼿하게 펴고 고목나무에 꽃 필 때까지, 병 안에 든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쌀도 안 나오고 밥도 안 나오고, 쌀이나 밥은커녕 라면국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걸 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좇는다는 시간 죽이기. 하여간 하루에 열 시간씩 모든 것에서 절연하여 말 한 마디 하지 않고, 명상이 끝난 시간에도 참여한 사람들끼리 서로 눈도 마주치지 않으면서 지내야 하는 곳. 무료 수련회라고 좋아할 일이 아닌 건, 열흘이 지나 수련이 끝난 후에 자신의 형편에 따라 다른 사람의 액수를 모르는 상태에서 기부금을 걷는데, 거기서 과감하게 천원이나 만원짜리 한 장 달랑 낼 수 있나? 침묵의 의무가 있고 고립된 생활을 해야 하며, 열흘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참가자의 방어능력을 저하시켜 좀비로 만드는 불충분한 음식을 제공하는 곳은 세상에 딱 두 군데 존재하니, 하나가 모르방의 비파사나 수련회이며 다른 하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라고 할 정도다.

  비파사나 센터에서 제일 먼저 하는 건 서약을 받는 일. 센터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 안에서도 울타리가 쳐진 길로만 다닐 것, 여성을 위한/남성을 위한 구역이 나뉜 것을 존중할 것, 침묵을 지킬 것, 비언어적 방식으로도 소통하지 않을 것, 시선을 나누는 것도 가급적 피할 것, 문제 발생시 오직 교사에게만 말할 것, 가장 중요한 서약으로, “끝까지 남아 있을 것.”

  그러나 에마뉘엘 카레르는 사흘을 버티고 출소한다. 수련 3일째 밤. 창문을 두드리는 자원봉사자. 그를 따라가 책임자 격인 사내에게 가니 지난 며칠 동안 우리나라, 프랑스에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해서 불렀다는 거였다. 기억하실 것이다. 프랑스의 좌파 풍자 전문 주간지 “샤를리 에브도.” 이 주간지가 이슬람의 창시자인 무함마드를 그려 게재했고, 잡지에 나온 무함마드가 주로 항문과 성기 노출 같은 예외없이 처절한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 무슬림 지하드로부터 협박을 받았다가, 정말로 2015년 1월 7일에 테러리스트들이 잡지사 사무실에 들이닥쳐 총기를 갈겨대는 바람에 편집장 스테판 샤르보니에르를 비롯해 열두 명이 사망하고 다섯 명이 중상을 입는다. 2015년 당시엔 잡지에 실린 무함마드를 볼 수 있었으나 이젠 보기도 쉽지 않다. 봐도 영양가 없으니 보려고 애써 찾지 마시라.

  이때 테러 사건으로 베르나르-마리가 죽어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센터를 나가면서 1부가 끝나고 비교적 자연스럽게 2부, 지하드 테러리즘의 별로 기분 좋지도 세련되지도 않은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때가 대강 170여 페이지. 앞에서 다섯 부part가 각기 독립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나 제목을 <요가>로 한 이상 “요가, 명상에 관한 내용을 구겨 넣었다”고 했다시피, 사실상 요가와 명상은 여기서 끝난 얘기다.


  그러니까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경험담을 딱 그대로 노출시킨 것이다. 그리스 섬에 있는 난민수용소 장면은 쥴퓌 피라넬리의 <어부와 아들>을 비롯해 이미 몇 번 읽어본 것이라 인상깊지도 않았고, 자신이 생탄 병원 정신병동에 입원해야 했을 정도의 심각한 조증과 우울증을 경험한 것도 작가 본인한테는 안 된 이야기지만 한두 번 읽은 게 아니다. 조르주 페렉의 작품을 출판한 회사의 사주이자 편집인이 죽은 것과 관련해서, 페렉의 작품을 낸 출판사라서 계약을 맺은 작가도 에마뉘엘 카레르 혼자가 아닌 건 다들 아실 것(<자살>을 쓴 에두아르 르베). 이런 불평은 사실 중요한 게 아니다. 제일 짜증났던 건 이런 이유 때문에 다섯 이야기가 억지를 쓰지 않으면 서로 완전히 다른 이야기라는 거다. 심통이 나서 필요 없는 말까지 보태자면, 혹시 다섯 작품 쓰기가 귀찮거나 버거워 그냥 한 권으로 만든 거 아냐? 아니지 물론. 내가 기대했던 건 한 편의 장편소설이었지, 다섯 이야기를 묶어 쓴 4년 동안 살아온 “자기 이야기”가 아니었던 거다. 내가 카레르를 스토킹 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다 읽은 소감은, 글은 좋아 별점을 주면 네 개 정도가 적당하겠지만, 다시 카레르를 찾는 일은 없을 거 같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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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4-03-21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걸 잘 모르겠어요. 원래 소설이란 게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허구와의 만남 뭐 그런거 아닌가요? 그렇담 이 작품도 그냥 소설이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약간 거시기하게 분류하네요. 작가가 누군가 했더니 저도 들어 본 작가긴 하네요. 제목이 참 변심한 애인에게 이별통보 받는 것 같네요. 카레르가 알면 상심이 클 것 같아요. ㅎㅎ

Falstaff 2024-03-21 20:20   좋아요 1 | URL
그럼요. 자신의 경험이 들지 않은 작품은 없겠지요. 경험담도 좋고, ˝자전적 소설˝도 좋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그걸 소설로 다시 형상화 시키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아니 에르노도 이제는 안 읽습니다.) 그냥 지난 몇년 간의 경험, 그것도 독립적인 이야기의 재배치를 읽는 건 피하겠다, 카레르는 이런 방식을 철회하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안 읽겠다, 하는 것 뿐입지요. 그냥 취향의 문제입니다. ㅎㅎㅎ

종이 2024-03-21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인사드려요. 쓰신 불만이 이해도 되고 동의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저는 평소 카레르의 책을 좋아하는 편이라 이번 책도 그런대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원체 허구와 자신의 현실을 섞어쓰기하는 작가인데 이번 작품은 특히 그런 부분에서 작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편하게 쓴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제 안녕을 고하시지 말고 이 작가가 가장 인정받은 작품인 ‘왕국‘은 보시길 추천드립니다. 저는 ‘왕국‘으로 이 작가를 발견하고 다른 책을 찾아보았거든요. 그냥 ‘왕국‘을 안 보시고 카레르와 헤어지신다니 안타까움에 지나가다 조금 적었습니다.ㅎ 그리고 관심 소설이 겹쳐서 리뷰는 자주 참고하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Falstaff 2024-03-21 22:12   좋아요 1 | URL
답글 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는 <겨울 아이>를 괜찮게 읽었습니다. 기대를 갖고 이 책을 읽었는데, 단순하게 이야기해서 그저 제 취향이더라고요. 당연히 분식을 할 수밖에 없는 건 이해하겠는데 그게 마땅하지 않습니다. 저도 이이의 성과는 납득을 하겠더군요. 앞으로 안 읽겠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기회가 닿으면 말씀하신 왕국을 읽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제가 디킨스를 안 읽겠다고 이야기한 횟수도 한 너덧 번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