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의 사형 집행인 - 16세기의 격동하는 삶과 죽음, 명예와 수치
조엘 해링톤 지음, 이지안 옮김 / 마르코폴로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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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은이 조엘 해링톤은 미국 출신 사학자로 1700년 이전 독일의 사회적, 법적, 종교적 주제에 대하여 연구하며 1989년부터 밴더빌트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다. 해링턴은 30년 전쟁 이전까지 독일에서 가장 (수)공업과 금융업이 발달한 뉘른베르크에 주목했을 것이며, 연구를 하던 중 프란츠 슈미트라고 하는 뉘른베르크의 사형집행인 일기 기록을 열람할 기회를 가져 당연히 대단한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당시의 뉘른베르크는 수공업 길드 이외에도 법과 질서의 요새라고 칭송받는 자유제국도시여서 다른 도시에 비하여 활발한 사형집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사형집행인. 흔히 망나니라고 불리는 직업의 사나이를 작가는 마이스터 프란츠, 마이스터 슈미트 등으로 칭하면서 엄연히 긴 도제생활을 거친 사형집행의 장인으로 깍듯하게 올려 불렀지만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이름 높은 뉘른베르크의 수공업 길드가 사형집행을 길드로 편입시키지 않았던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집행인들도 피집행자들에게 실수 없이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고통을 극소화 하는 것이 일종의 직업윤리였더라도 극도의 혐오직업인 사형집행인을 길드는 받아주지 않았다. 내가 아는 상식과 달리 뉘른베르크의 길드는 피혁, 무두장이, 신기료, 도살업 같은 직업도 길드에 들어올 수 없었다고 해링톤은 두어번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시와 노래로 한 시절을 풍미한 뉘른베르크 길드의 우두머리 한스 작스가 직업이 신기료인 것에 대해서는 슬쩍 모른 척해버린다. 나는 한스 작스는 바그너가 작곡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 주인공으로 독일 이야기책에 나오거나 바그너가 창작한 인물인 줄로만 알았다가, 이번에 책을 통해서 실존 인물이며, 가장 유명한 뉘른베르크 길드 조합의 대표였다고 해서 깜짝 놀랐다. 그럼 베크메서 씨도 실존인물이었을까?

  프란츠 슈미트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 하인리히 슈미트 씨를 따라다니면서 사형집행과 고문, 사체의 처리 같은 일을 오래 배운 후에 비교적 젊은 나이로 정식 사형집행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버지 하인리히 슈미트 씨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1553년 가을. 하인리히 슈미트 씨는 지금 지도상 체코 국경에서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바이에른 주 남서쪽에 있는 호프 시의 나무꾼이자 새사냥꾼으로 평화롭고 존경받는 삶을 살고 있었다. 호프 시는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변경백의 영토였다. 변경백邊境伯이란 국경지역의 방어를 위한 지역으로 봉건영주의 권한이 일반 영주보다 폭넓은 군사력과 행정권을 가지고 있었다(p.49 각주). 이곳의 젊은 제후가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 2세라는 독일인치고 독특한 이름을 가진 이였는데, 종교분쟁 당시 자기 이권에 따라 여기저기 막 붙어먹었던 모양이다. 책에서는 점잖게 합종연횡을 계속했다고 썼다. 영토를 조금이라도 늘리려는 욕심이 스스로를 일종의 전쟁광으로 만든 모양이기도 했다. 알키비아데스 변경백에게는 호프 시를 위하여 한 명의 사형집행인을 종신고용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계속되는 전쟁으로 이미 재정이 황폐화된 마당에 다른 직종보다 적지 않은 연봉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던중 반역죄로 마을의 총포공 세 명을 체포하여 사형 판결을 내놓고, 공개처형을 구경하기 위하여 새카맣게 모인 구경꾼들에게, 옛 관습을 들먹이는 연설을 하면서, 처형의 관객 가운데 한 명을 지목해서 사형을 집행하겠다고 선언하고는 곧바로 하인리히 슈미트 씨를 꼽아버린 거였다. 당연히 거부할 수밖에. 그러나 알키비아데스 변경백은 슈미트 씨에게 만일 세 번 거절하면 같은 반역죄로 죄인들 옆에 세우겠다고 협박을 하는 바람에 급기야 사형집행인이라는 직업을 얻게 됐다. 애초 알키비아데스와 슈미트 집안 사이에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지만 그것까지 소개하기에는 지면이 모자란다.

  호프 시에서 사형집행인이 된 하인리히는 밤베르크로 가서 정식으로 시청에 등록된 공인 사형집행인이 된다. 그런데 하인리히의 아버지는 직조공 또는 재단사 가문이었으며 자신은 (시민들에게) 존경받는 나무꾼과 새잡이였음에도 어떻게 사형집행인의 일을 받아들였을까? 간단하게 이야기해서 알브레히트 알키비아데스의 폭정이 종막을 내리고 자리를 승계한 게오르크 프리드리히는 즉시 호프 시의 재건에 착수하여 인구가 늘고 재정이 충분한 상태로 만들었다. 한편 형법을 정비해 사법 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처형건수와 처형의 강도가 각각 큰 폭으로 늘어났다. 하인리히 슈미트는 제후가 바뀌고 1년 동안 8건의 사형을 집행했으며, 이때 받은 대가는 다른 직업에서 얻을 수 있는 것과 비교해도 안정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수입원이었다. 이제 하인리히에게는 프란츠를 비롯한 여러 아이가 태어나 고정적인 수입이 반드시 필요한 시기였던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본다. 예나 지금이나 빵이 중하니까.

  하인리히는 보다 나은 수입을 위하여 밤베르크 주교후의 공식 사형집행인 자리에 적어도 두 번 이상을 도전해 지위를 얻게 된다. 공식 사형집행인이 되기 위해 하인리히 슈미트는 갑작스레 고통스러운 직군으로 떨어져 20년 동안 굴욕의 시간을 지내고 난 다음이었다. 일반 시민의 경우에 비록 같은 시민계급의 사람들조차 악수는커녕 눈길 마주치는 것도 피하는 신분이어서 심지어 성 안에 들어와 사는 것도 허용이 되지 않아 공개처형장 옆의 부속건물에서 살아야 했지만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안정된 직업으로써 사형집행인은 적어도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만큼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를 알게 된 하인리히는 자신의 아들인 프란츠는 어린 시절부터 사형집행의 조기교육을 시켜 자신보다 훨씬 훌륭한 집행인을 만들고 싶어하고 정말로 그렇게 된다.

  사형집행인은 일단 연봉이 높다.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는 직종이니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게다가 좋은 직업은 아니기 때문에 사형집행 일에 전심전력을 다해 헌신하려는 사람 역시 극히 드물기도 하다. 하지만 뉘른베르크나 아우크스부르크, 밤베르크 시에서조차 정식 집행인이 되면 높은 보수에, 일이 없을 때는 영주의 허락을 받아 이웃한 도시나 마을에 출장 집행 서비스를 해주기도 한다. 또한 당시 사법 시스템에는 지금 시각으로는 지극히 원시적인 법의학 수준만 가지고 있어서 용의자의 자백이라는 증거를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자백을 이끌어내기 위한 특별수사, 즉 고문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여겼다. 이 고문을 통해 사형집행인은 괜찮은 가외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집행인은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을 죽이고, 해체하고, 수거하고 처리하기 때문에 저절로 상당한 해부학적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이를 이용하여 당시 수준에서는 꽤 어려운 난이도의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을 알고 있어서 정식 의과대학을 졸업한 의사만큼은 아니지만 의사를 찾아갈 형편이 안 되는 시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적의 치료사 가운데 한 명이었다. 물론 전통적으로 의료업을 겸하던 이발사와 함께. 그러나 이발사보다는 더 실력을 인정받으면서. 집행인이 나이가 들어 원숙해지면 의료행위로 인한 수입이 전체 수입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니 오히려 더 중요한 직업일 수 있었다.


  스스로 문자를 읽고 쓸 줄 알았던 마이스터 프란츠 슈미트는 견습생 시절부터 자신이 집행한 거의 모든 사형에 관하여 일기 형식으로 메모를 해 놓았다. 처음에는 그저 짧은 보고 식으로 시작했다가 세월이 가면서 죽은 이와 그가 저지른 범행, 사형의 방법, 심지어 집행인의 감정까지 보태게 된다.

  사형의 방식은 화형, 수레바퀴형, 교수형, 참수형으로 나뉜다. 다른 방식의 사형도 있었겠지만 법정에서는 이 네 가지 방식으로 선고를 내리고, 집행인이 집행하기 전, 집행하면서 방식을 좀 더 개선할 수도 있었다. 산 채로 불에 태워 죽이는 화형의 예를 든다면, 아무래도 정말 산 사람을 불에 태우면 고통이 지독할 수밖에 없으니 불을 붙이기 전에 슬쩍 목을 조르거나 하여간 다른 방법으로 죽인 다음 형태만 불에 태우는 식이다. 당시만 해도 미신의 시대니까 화형은 근친상간이나 동성애, 마술사, 마녀에게 집중했고, 잔인한 범죄에 대해서는 수레바퀴형을 집행했다. 형을 집행하기 전에 판사는 불에 달군 인두로 몇 번 지지는 형벌을 내릴 것도 선고했는데, 정말 빨간 인두형을 하면 피부와 근육이 인두에 들러붙어 인두를 떼는 순간 살덩이가 뚝 떨어져 나가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린다고 한다. 집행대에 올라 바퀴 위에 눕혀 놓고 쇠로 만든 바퀴살에 다리와 팔을 걸어 돌리면 팔과 다리가 부러지고 심하면 잘라진다는데 뭐 더 구체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교수형도 교수목과 사람의 목이 매달인 간격이 너무 짧아 말 그대로 질식사를 시키는 것이라 고통이 심하고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죽은 후에도 그냥 내버려둬 몇 주가 지나 시체가 썩으면 저절로 교수대 아래 구덩이로 툭 떨어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교수형, 수레바퀴형, 화형을 선고 받았다가 탄원을 해 참수형으로 “감형”도 많이 해주었다고.

  주인공이랄 수 있는 마이스터 프란츠 슈미트는 다른 집행인들과 다르게 매번 작업을 심도있게 연구하고 술과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늘 기록을 남겨 뉘른베르크의 법관과 공무원 사이에 신임이 대단했다. 그러나 일반 시민과의 혼인도 불가능하고, 항상 모욕적인 시선을 감내해야 하는 불명예 속에서 살아, 자신은 모르겠더라도 자식대에서는 정상적인 시민으로 살게 해주기 위하여 독일의 황제에게 직접 신원복고의 탄원서를 제출한다. 물론 황제가 직접 읽어보고 조치를 취하지는 않았겠지만, 그의 나이 일흔 살이 넘어 기어코 명예로운 신분으로 돌아와 제국도시 뉘른베르크의 시민권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늙은 프란츠는 숨을 거둔다. 하지만 계속되는 질병과 전쟁, 기근 등으로 프란츠 슈미트의 후손은 자식 대에서 끊어지고 만다.

  그리하여 이 책은 16세기에서 17세기 전반까지 활동했던 모범적인 사형집행인의 삶을 그렸다고 해야지, 이것을 작가가 주장하는 대로 시대의 혁신 비슷한 인물, 시대상을 대변 같은 수사를, 안타깝지만 나는 말하지 못하겠다. 역사가 사람의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당연하지만 아무래도 프란츠 슈미트에 과한 후광을 그려준 느낌이다. 책은 재미있다. 재미로만 읽어도 왠만한 소설만큼은 된다. 그러나 역사책으로는, 조금 오버? 한겨례신문 서평을 보고 고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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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4-02-27 10: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작년 가을에 나오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둔 책인데...
빌리긴 했으나 미처 펴 보지도 못
하고 반납을 -

<행맨‘s 다이어리>라는 책으로
마이스터 프란츠 슈미트 아재
의 기록이 소개된 모양이네요.

사형 집행인의 당대 기록이 후대
의 연구가에 의해 부활하는 서사
가 흥미롭네요.

오늘 도서관에 가서 빌려 보려
고 합니다.

Falstaff 2024-02-27 17:47   좋아요 1 | URL
작가의 오버가 넘 심해서 말입지요, 뭐 사가들이 대개 그러하지만 부분을 과하게 객관화시켜서 마치 시대를 대변하는 듯한... ㅎㅎㅎ 그랬습니다. 별 셋을 줄까, 넷을 줄까 하다가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넷 주는 선에서 마감했답니다.

coolcat329 2024-02-27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이런 책이 있군요. 프란츠 슈미츠가 사형집행인으로서 죄책감(?)을 덜기 위해 일기를 썼을까요?
우리나라 망나니는 돈 많이 못 벌었겠죠? 그래도 독일은 돈이라도 많이 줬네요. 참 돈이 뭔지 이런 일도 해야하고... 무서운데 또 읽고는 싶네요.

Falstaff 2024-02-27 17:50   좋아요 1 | URL
아이구.... 굳이 뭐 직접 읽으실 필요까지는.... ㅋㅋㅋ
정말 읽어보셔도 제 독후감이 거의 다일 텐데, 재미는 있으나, 굳이 내돈내산은 피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