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파스
채영주 지음, 김형중.한수영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채영주. 낯선 이름의 소설가이다. 1962년 임인년 부산생. 1988년에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해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2002년에 지병으로 사망했다. 하필이면 이이의 활동시기하고 내가 봉급쟁이 한다는 핑계로 정신없이 지내느라 책을 거의 안 읽던 때하고 겹친다. 2022년에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소설가 채영주의 사망 20년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책 몇 권을 “기념선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찍었다. 중단편 열 편을 가려 선집 한 권을 꾸렸고, 장편소설 가운에 오늘 읽은 <크레파스>를 골랐다. “채영주 20주기 기념 선집 간행사”는 “이 선집을 그를 기억하는 많은 분, 무엇보다도 아직도 그를 작가로 소중히 기억하고 있는 독자들께 바칩니다.”라고 해서, 오히려 이 책을 읽기도 전에 독자(나)로 하여금 아주 대단한/대단했던 소설가였을 것이란 기대를 충만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소설가 정찬의 말에 의하면 그의 지병은 “위무력증”. 짧게 이야기해서 굶어 죽었다는 거다. 2002년에 굶어서 죽는다? 교사로 정년퇴임한 것처럼 보이는 아버지를 둔 소설가라면 굶어 죽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때였다. 신경정신과 방면의 집중치료가 필요했었다. 채영주에게는 사는 일이 남들과 같을 수 없었나 보다. 학자가 되기 위하여 독일유학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사라져버려 웨이터, 주방보조, 빵 공장 직공 등을 전전하기도 했고, 1992년에 결혼식 며칠 전에 난데없이 잠적해 식장을 찾은 하객들을 곤혹스럽게 하기도 했다고 정찬은 말한다. 다양한 작품을 썼는데 그의 라이브러리엔 <무위록>라는 제목의 정통 무협지, 동화 <비밀의 동굴>도 포함된다. 읽기도 전에 이렇게 독자의 기대를 키워 놓았으니, 그것 참. 작가가 이미 유명을 달리했다는 이유로 작품에 더 의미를 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빤한 느와르였다. 게다가 나는 느와르와는 상극인 체질이다. 세상에 읽을 것이 얼마나 많은데 하필이면 피가 튀는…….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 이유진은 LA가 잘린 도마뱀의 꼬리만큼 싫다. 천사의 도시에서 사람들은 언제나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유진이 처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왔을 때는 거의 빈털터리라 제대로 된 숙소에서도 살지 못하고 큰 방에 침대 열 개 남짓 들여놓고 여덟 시간 단위로 침대를 대여해주는 시간제 침대 숙소에서 묵었다. 서양인들의 몸에서 나는 이상한 체취와 불결한 오물 냄새가 그득한 방에서 밤을 보내는 일은 몇 년이 흐른 후까지 생각만 해도 진저리를 치게 만들었다. 세상의 모든 명도의 피부와 피부색에 따를 개별적 냄새를 맡은 수 있고, 모든 파렴치한 행위를 볼 수 있는 곳. 유진의 부모는 한국인들 특유의 억척스러움으로 금방 시간제 침대 숙소를 벗어나 작은 싱글 아파트에 들어갔다. 아버지 혼자 벌어서는 도저히 월세와 생활비를 충당할 수 없어 어머니도 주점에 서빙 직원으로 취직을 해야 했으며, 어쩔 수 없어서 동의한 것이긴 해도 아버지는 어머니의 짧은 유니폼을 견디지 못했다. 하루 종일 남자들의 담배 연기 속을 급한 걸음으로 맥주 조끼를 날라야 하고, 기름기 많은 음식을 가져다주어야 하는 일. 아버지는 어머니 몸에 밴 담배 냄새, 기름기 냄새, 술 냄새를 못 견디겠다고 크게 짜증을 부렸지만 사실 짧은 치마와 유니폼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하루는 다툼이 심해졌고, 몸과 마음이 지치기는 마찬가지였던 어머니가 바득바득 따지기 시작했으며, 평소엔 절대 그러지 않았던 아버지는 꼭지까지 흥분해 어머니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으며, 어머니는 그대로 뒤로 돌아 로스앤젤레스의 밤거리로 뛰쳐나가 버렸다. 어머니는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아침이 밝은 후에 거구의 백인 경찰이 집에 와서 어머니가 불량배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하고 교살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몇 년 후 아버지는 새엄마를 들였으며 ‘모친’은 그림형제들의 동화에 나오는 계모와는 달리 유진을 살뜰하게 돌보았다. 그럼에도 유진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다.

  작품의 첫번째 무대는 주유소. 주인공 이유진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친구가 된 절친 재익과 우리나라에서 속칭 총잡이로 불리는 주유원으로 일하고 있다. 이들은 고등학교에 재학중이다. 학교에서는 ‘올리버’라는 이름의 백인 소년이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었다. 올리버는 LA에서 제일 큰 주류 도매상과 호텔을 경영하는 아버지의 외아들로 LA 일부 지역의 패권을 두고 여러 해째 흑인 패거리들과 으르렁거리는 관계에 있었다. 그는 아시아인, 이 가운데서 특히 한국인 소년들을 자기 수하에 부리고 싶어 해 현수를 비롯한 여러 명의 한국 출신 아이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다만 한국인 소년 커뮤니티에서 제일 막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진이 고분고분하지 않아 그의 생일 기념으로 유진과 재익을 죽지 않을 만큼만 두드려주려고 차 네 대에 스무 명이 몰려 들었다. 빌리, 찰스, 덴버를 비롯해 차에서 쇠파이프, 각목, 체인을 가지고 내리는 소년들은 아르바이트 생들을 가차없이 구타하기 시작했고, 피와 살이 튀는 와중에 유진은 급유기의 가솔린 건을 뽑아 그들에게 휘발유를 난사했다. 그리고 품에서 성냥을 꺼내 위협한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그게 쉽나. 유진의 저항은 곧 끝나가고 다시 폭행을 시작할 때쯤 갑자기 차량 한 대가 돌진해 들어와 비교적 차도 가까운 곳에서 얻어 터지고 있던 유진을 나꿔채 차에 싣고 현장에서 벗어나는 데 성공한다. 유진은 혼절해버리는 바람에 상황을 알지 못했지만, 그를 구해준 사람은 한 살 더 많은 흑인 동급생 닉 베이슨이었다. 흑인 소년 커뮤니티에서 크게 힘을 쓰는 권력자. 그러나 선한 마음과 합리적인 행동을 할 줄 아는 반듯한 청년.

  닉은 유진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뼈는 부러지지 않은 유진의 몸에 붕대를 감고 일 주일 가량 푹 쉬게 해준다. 그러나 집안에는 뾰족한 성격의 동생 샐리가 있어서 닉의 방에 놓인 엄마 침대 시트에 피가 묻은 것을 질색한다. 어머니는 십여 년 전에 일을 마치고 샐리를 돌보기 위해 LA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귀가하던 중, 버스 안에 커다란 몸집의 백인이 자기를 쳐다보다가 백인 남자한테 흑인 년이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심하게 구타당하고, 버스에서 내던져져 팔목 골절상을 당한 일을 직접 들어서, 어머니가 돌보려 했던 아이가 바로 자신이어서, 흑인 커뮤니티 이외의 인종들을 혐오하는 성향이 짙다. 흑인 가정 치고는 놀랍게도 벽면 한쪽을 책장과 낡은 전축이 차지하고 있는데 한 2백장 정도의 LP 전부를 흑인 음악으로 구성했다. 샐리는 살며시 들어와 음악을 틀고, 문을 조금 열어놓아 거실 탁자에서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는 했다. 그러다 며칠 후, 유진이 샐리에게 “음악도 편식하는 건 좋지 않아요. 비틀즈나 씨씨알Creedance Clearwater Revival CCR 같은 소프트한 백인 음악도 들어보지 그래요.”라고 했다가 그게 돌아오지 못하는 강을 건너는 것인 줄은 몰랐다.

  이 일을 계기로 닉과 친해진 유진. 그는 닉을 통해 흑인 커뮤니티에서도 얼굴을 알리게 되지만, LA 청소년 집단에서 패권을 쥐고 싶어하는 올리버의 눈에는 도무지 곱게 봐줄 수 없었던 거였다. 게다가 아버지도 하필이면 흑인들과 친하게 다니는 외아들이 마땅하지 않은 건 당연하고. 미국으로 이민간 우리나라 사람들의 백인 집착은 유명하지 않은가 말이지. 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지만, 유진은 죽은 어머니를 꺼내면서 아버지와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달으려 하는 반면, 아버지는 언제부터인가 유진의 일에 관해서는 알고도 침묵을 지키기만 한다. 이렇게 지내다가 LA의 축제 가운데 하루인 한국인의 날이 되고, 유진은 닉과 닉의 여자친구 아이린, 그리고 샐리와 퍼레이드 구경을 나왔다. 행사를 즐기며 기념품도 사주는 유진. 그렇게 즐거운 하루가 마무리되나 싶었지만, 올리버의 한국인 수하들이 그들에게 따라붙어 다시 싸움이 벌어졌고, 이 와중에 유진은 한국소년에게 크게 상처를 입혀, 10만 달러의 현금을 아버지가 물어줘야 했다. LA가 지긋지긋한 유진. 그는 아버지에게, 아버지가 원하는 바대로 경영학을 공부하겠으니 뉴욕으로 보내달라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당부했고, 문제가 해결된 다음날 아침 곧바로 뉴욕행 기차에 오른다.


  세월은 쉬지 않고 흘러 벌써 7년 후, 아이비리그 가운데 한 곳인 컬럼비아 대학을 나와 공인회계사가 된 이유진. 뉴욕에서 회계법인에 들어가 활동적으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LA에서 온 전화를 직접 받지 못하고 며칠 후에야 받게 되는데, 아버지가 운영중인 술도매상에서 괴한의 총에 심장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즉각 비행기를 타고 LA로 날아가는 이유진. 이미 그림은 그려졌다. 흑백 간 갈등 사이에 낀 한국인 커뮤니티.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인종간 갈등을 유발시키는 집단. 독자는 읽으면서 저절로 선악의 배열과 사건의 전모를 눈치챘다는 것을 아마 작가만 몰랐던 듯하다. 작가의 이른 타계는 아쉽다. 그러나 마음에 들지 않은 작품을 좋다고는 할 수 없다. 아쉽지만.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4-02-26 0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찍 죽으면 올려쳐 지는 경향이 있긴하죠 ㅋㅋㅋ단호한 백작님 ㅋㅋㅋ

Falstaff 2024-02-26 16:56   좋아요 1 | URL
ㅎㅎㅎ 일정 나이 이상이면 먼저 죽는 게 형이라더군요. 먼저 죽었는데 지가 와서 절 안 해? 이렇게 말입죠. ㅋㅋㅋㅋ

stella.K 2024-02-26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름은 들어 본 것 같은데 이런 글을 썼군요. 저도 느와르는 별로긴한데 그래도 재밌게만 쓴다면야.
근데 문단계에선 나름 춰줬나 봅니다.
위무력증이 굶어죽는 거군요. 의학용어는 참...
근데 굶어 죽었다면 자발적이었단 걸까요? 거식증 같은. 암튼 정신과 치료를 받았다니 그 인생이
편하진 않았겠네요.

Falstaff 2024-02-26 16:58   좋아요 1 | URL
저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습니다만, 20주년 특별 ˝기념선집˝이 나왔다니 아주 혹해서 읽었다가, 아주 찍해버렸습니다. ㅎㅎㅎ
인터뷰 기사 읽고 심각한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그냥 뭐든지 평범한 게 제일이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