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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ㅣ 제안들 31
에두아르 르베 지음, 한국화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3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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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워크룸 프레스의 “제안들” 시리즈를 주목하고 있다. <탐욕>, <저 아래>, <아이는 왜 플랜타 속에서 끓는가>, <이아생트> 같이 한 방에 훅 읽어 치우기 버거운 작품들을 속속 내놓고 있는데, 물론 아닌 건 아니겠지만 진도 나가기 막막하더라도 진중하게 날 잡아 정독할 만한 작품이 많다. 그렇다고 아무거나 확 사서 읽기엔 조심스럽다. 르베의 <자살>은 도서관 개가실에 꽂혀 있는 게 눈에 들어와 보는 즉시 대출해서 읽었다. 별점을 주면 네 개는 좀 박하고, 그렇다고 다섯 개는 많은 거 같고, 뭐 이런 수준. 나는 재미있게 읽었다.
에두아르 르베는 1965년 1월 1일에 태어나, 나이 계산하기 쉬운 한 생애를 살았는데, 88년에 부모의 말씀을 잘 듣는 아들이라 고등경제상업학교에서 수학하다가 1991년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① “고등경제상업학교”는 경영대학원ESSEC이며, ②그림을 누구한테 배운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한 거다. 개인전도 하고 그러다가 1995년에 인도 여행을 한 다음부터 사진으로 진로를 바꾸어 사진과 작가로 활동하다가 2007년에 출판사 편집자에게 <자살> 원고를 송부한 며칠 후 진짜로 자살해버리고 만다. 이 책 <자살>이 바로 그 원고이며 2008년에 출간되었다. 겨우 마흔두 해를 살다 갔으면서도 참 바쁜 일생을 살았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까? 죽기 전에 <자살>이란 원고를 보내고 곧바로 정말로 죽어버리면, 처음 이 글을 작가가 죽기 전에 읽어본 사람은 세상에서 딱 한 명, 출판사 편집자밖에 없다. 그는 얼마나 황당했을까? P.O.L 출판사인데 애초에 르베가 자신의 원고를 이 출판사에 맡긴 이유가 조르주 페렉의 작품을 출판한 곳이라서였다고 한다(이 이야기는 3월에 한 번 더 할 생각). 그러고 보니 르베의 글이 페렉하고 결이 비슷한 것 같기도 하다. 만일 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진짜라면, 세상에서 가장 진한 농담 한 번 하고 간 작가가 이 에두아르 르베 아닌가? 이런 사람 있으면 그냥 아는 사람 수준을 유지해야지, 깊게 친교를 나누고 싶으면 진심을 다해 지지해줄 마음을 가져야 할 거 같다.
일은 8월의 어느 토요일에 벌어진다. 2인칭 소설이라서 ‘너’는 하얀 테니스 복을 멋있게 차려 입고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섰다. 집에서 조금만 걸으면 테니스 코트가 나온다. 동네에서 가장 큰 집에 달린 코트였으나 관리하는 사람이 없어서, 또는 있기는 있는데 그리 중요한 관리항목이 아니어서 클레이 코트 표면이 울퉁불퉁, 작업이 제대로 되어 있지도 않고, 심지어 어떤 때는 풀이 이곳저곳에 나 있다. 평소엔 동네 아이들이 모여 땅따먹기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말타기도 하는 곳이다. 당연히 네트가 늘어져 가운데 부분이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으나 동네의 심심한 아마추어는 이거라도 감지덕지 무료로 즐길 수 있으니 이 정도면 그래도 괜찮은 편이다. 그렇게 알고 사는 게 만수무강에도 좋다. 정원을 지나다가 ‘너’는 아름다운 아내에게, “아참 라켓을 두고 왔네. 이런 정신하고는. 잠깐만 기다려. 내가 얼른 갖고 올게.” 말하고 몸을 홱 돌려서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구든지 테니스 라켓은 현관 입구 수납장에 두는 것이 보통이라서 이 집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너’는 현관을 그대로 지나 지하실 방향으로 가더니 정말 지하 창고로 내려간다. 아내는 여름 오전의 기분좋은 더위를 즐기면서 아, 날씨가 좋기도 지랄이다, 최인훈의 <광장>에서 마로니에 교정 잔디밭에 자빠진 이명준 흉내를 잠깐 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렇게 크지 않게 총소리가 들렸다. 아내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다. 동시에 불길한 생각이 번쩍 들어 서둘러 집으로 달려들어가, 아이고 여보 어디 있소, ‘너’의 이름을 불렀지만 테니스 라켓을 두는 현관에도 없고, 침실에도 없고, 화장실에도 없고, 물이라도 마시러 갔나, 부엌에도 없어서 정신을 좀 차리고 두리번거렸더니 지하창고 가는 계단실 문이 열려 있는 거였다. 그 안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화약 냄새. 아내는 사실 그게 화약 냄새인지 몰랐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거였다. 아내가 바들바들 떨리는 걸음으로, 벌써 얼굴을 창백하게 변한 채로 한 발 한 발 내려가봤더니, 에그머니, ‘너’를 발견하고 말았다.
탁자엔 만화책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아마 ‘네’가 지상에서 전하는 마지막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는 만화이며, 해당 페이지겠지만, 세상의 어느 아내가 남편이 스스로 총을 쏴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 와중에 탁자 위에 펼쳐진 만화책을 들여다볼 생각을 할 수 있을까? 너는 권총을 쏴서 죽지 않았다. 사냥용 소총을 입에 넣고 이로 단단히 고정한 다음에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는 헤밍웨이 식 자살을 감행해버렸다. 소총으로 자살을 할 때 섣불리 심장이나 관자놀이 같은 곳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가는 발사할 때의 충격 또는 진동에 의하여 빗맞아 자살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걸 아는 너는 그런 실수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로 단단히 물고 있었던 거였다. 사실 자살에 실패하는 것보다 얼굴의 한 쪽이 날아가거나 심장을 멀쩡한데 왼쪽 폐 한 쪽이 거덜이 나서 평생 쌕쌕거리고 숨을 쉬어야 하는 팔자가 될까봐 더 걱정스러웠는 지도 모른다. 총구를 턱에 대고 발사했다가 실패를 하면 턱과, 혀와, 코와, 시신경이 총알 한 방에 몽땅 날아가서 씹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고, 냄새도 못 맡고, 보지도 못한 채 평생 괴물의 모습을 하고 살아야 하는 걸 알아서 애초에 시도도 하지 않았다. 하여간 ‘너’는 자살 하나만큼은 성공적으로 끝마쳤다. 그렇다고 축하한다는 말은 아니다.
아내는 네 몸 위로 쏟아져 큰 소리로 울었다. ‘너’는 들을 수 없었겠지만, ‘너’의 아내는 크게 울면서 ‘너’에게 몸을 던지고, 애정과 분노로 가득한 너의 가슴을 내려친다. 그렇다고 CPR은 아니었다. 피칠감을 한 ‘너’를 부둥켜안고 울다가, “어떻게 해, 어떻게 해” 또는 “개새끼야, 일어나” 부르짖다가 다시 울다가 네 위로 쓰러진다. 15분 동안 ‘너’의 아내는 똑 같은 일을 반복한다. 울다가, 부르짓다가. 15분이 지나 위층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린다. ‘너’의 부부와 함께 테니스를 치기로 약속했던 커플이다. 아내가 수화기를 들자마자 상대방은 말한다.
“안녕하세요. 안 나오셔서요. 무슨 일이 있나요?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가 대답한다. “그가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이렇게 화자는 사건을 먼저 보여준다. 이후 ‘너’의 열일곱 살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죽은 이후의 모습을 그려나간다. 애초에 ‘너’는 여든다섯 살에 죽기로 작정을 했다. 그리하여 미리 묘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우고, 생몰연도를 새긴 비석도 구상을 해 놓았다. 여든다섯이 되는 해까지 서양의 공동묘지에 자주 등장하는 나그네는 ‘너’의 묘비명을 보고 어처구니없는 사망연도, 죽음예언을 내려다보고 웃을 수도 있고, 무슨 경거망동인가 하면서 인상을 찌푸릴 수도 있다. 그러다가 드디어 그 해가 오면 아제는 ‘너’의 묘비명을 보고, 네가 죽었건, 여전히 살아 있건 간에 이미 죽어버린 것으로 간주하고 아무도 놀라운 눈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죽음, 특히 자살에 이르는 가장 능숙한 인도자는 우울증이라는 것을.
날로 심각해지는 ‘너’의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하여 ‘너’는 신경정신과 전문의의 처방을 받아 항우울제를 복용하기 시작했고, 안타깝게도 ‘너’는 항우울제의 부작용에 적응을 하지 못했다. 의사를 바꾸어 다시 처방을 받아도 마찬가지였고, 또다른 의사가 바꾸어준 처방약을 먹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너’는 견디지 못해서 진료와 처방약 복용을 끊어 버리기로 결심을 했고, 정말로 약을 끊었으며, 급기야 ‘너’의 목숨까지 끊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 속 이야기이다. 실생활에서 르베는 우울증과 관련없이 자신의 죽음을 퍼포먼스의 하나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냥 내 추측이다. 제일 큰 의심은 당연히 중증 우울증이겠지만 간혹 만날 수 있는 극단의 예술가들이 아주 간혹 저지르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퍼포먼스도 있으니. 아쉬운 일이다. 죽음보다 아쉬운 일은 세상에 없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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