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행 창비시선 12
이성부 지음 / 창비 / 1977년 7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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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골의 이성부. 청춘시절부터 이이를 좋아했다. 시인은 언제나 산을 좋아했다. 그의 시도 산악만큼 강건한 목소리를 지녔다. 시 어느 한 곳에서도 나약과 주저와 비겁의 몸짓을 발견할 수 없다. 나도 한 시절엔 이십대 초반이었고, 시절은 더 이상이 없을 만큼 암울했는데, 이때 불 같은 목소리의 시어들에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선배의 하숙방에 잠입해 동녘이 밝을 때까지 읽던 시인들이 신경림, 조태일, 황명걸, 김수영, 민영, 정희성, 황동규, 마종기, 정현종, 김명인, 이성복 같은 이들이었다. 금속활자 시대의 시집. 이들의 목소리는 각기 달랐으나 다행스럽게 서로 다름을 인정할 때였다.

  이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기 쉽지 않지만 이성부의 강건한 시어들은 언제나 정직해서 좋았다. 이 시집은 책꽂이 저 깊숙한 곳에 있다. 문제는 그걸 다시 끄집어 내기가 쉽지 않다는 거였다. 이성부를 다시 읽고는 싶지, 그렇다고 책꽂이를 다 뒤집는 이판사판공사판을 벌이고 싶지는 않지, 도서관 서가에도 없지, 그래서 선택한 것이 헌책방이었다.


  《백제행百濟行》에 실린 첫번째 작품은 <좋은 詩>. 시인이 쓴 시가 아니라 시인이 읽은 좋은 시를 노래한다.



  좋은 詩



  그대가 깊은 밤 渾身의 힘으로써 간추린

  이 한마디 말씀을,

  멈춘 시간의, 캄캄한 속을 빠지고 빠지다가

  진흙투성이가 되어 가까스로 다시 하늘 만나 숨쉬는

  이 한마디 말씀을,

  그 혼자만 무릎쳤던 기맥힌 기쁨을,

  내 또한 깊은 밤에 이렇게 엿듣고 있나니.


  이렇게 이렇게 가슴 뛰나니.

  그대 기쁨 세상에 들키고 말았나니. (1977. 전문)



  밤 깊도록 시를 읽다가 어느 시를 만나 갑자기 무릎을 칠만큼 기쁨을 발견하는 시인의 모습이 눈에 훤하다. 누가 있어 혼신의 힘을 써 한 줄의 노래를 만들었고 그것을 또한 알아보는 시인을 만났으니 원래의 시를 쓴 또다른 시인이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모든 시인의 소망이 누군가 자신의 시를 읽으며 애써 숨겨놓은 기쁨을 세상에 들키는 일이겠건만.

  《백제행》은 시인이 1974년에서 77년까지 쓴 작품을 위주로 실었다. 3부는 행사에 축하하는 시와 기념일 시를, 4부는 문청시절 또는 데뷔 초기에 쓴 작품 가운데 앞선 시집에 싣지 않은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3부와 4부는 굳이 새겨 읽을 필요는 없다.

  74년부터 77년이면 유신정권이 엄한 눈으로 국민들을 감시하던 시기. 그리고 경제적으로 거의 다 여유가 없는 팍팍한 살림을 살던 시기다. 어느 쪽으로 눈길을 돌려도 강퍅한 생활은 개선의 기미가 보이지 않았으며, 그럼에도 극소수 재벌 집단은 세상의 자본주의가 다 그랬듯이 고용인의 저임금을 담보로 차근차근 이익을 모아 투자, 다시 투자, 그리고 재투자를 해 나가던 시기였다. 당연히 일종의 필요악이었던 부패가 도처에서 발견되기도 하고 과도한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건강을 잠식했으며 이런 불평등은 다만 조금의 차이가 있을 망정 거의 대부분의 국민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소외였다.

  딱 이럴 때 기념비적인 비극이 1970년에 터진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면서 분사한 전태일. 이 사건은 그간 허무와 잠식과 순응에 길들여진 인텔리겐치아들의 참여의식을 높이는 결정적 계기가 되어 본격적인 리얼리즘의 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엄혹한 금지와 검열의 시기. 함부로 글을 썼다가는 백지로 출간되는 경우도 있었다. 끈질긴 금지의 시대. 당시의 시는 어떤 시가 되어야 했을까? 이성부는 대답한다.



  우리들 詩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슬픔,

  피흘리는 슬픔,

  등 돌리고 울음 감추는 슬픔,

  연탄가스에도 중독되지 않는

  가장 예리한 칼날로는 베히지 않는

  슬픔의 肉體,

  나자빠진 主題.

  우리들 한복판에서

  늘 우리들 모습을 새로 만드는

  슬픔,

  우리가 그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깨진 무르팍 호호 불고

  흙먼지 털털 털고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게 만들어야 한다.  (1977. 전문)



  이 시절에 나는 청소년기를 보냈다. 혈관 속에 피와 함께 농축 니트로글리세린이 포함되는 몇 년의 시간. 그러나 이 시기에 니트로글리세린을 폭발시키지 않고 얌전하게 하라는 공부만 하던 아이들은 절반 이상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해서 어여쁜 아내 만나 아이 낳고 잘 살다가 이혼당하기도 했다. 학교에서는 목총을 들고 사격과 총검술과 분열, 열병식을 검열했던 북괴 남침위협의 시기. 세상의 모든 미덕은 시키는 것만, 하라는 것만 하는 일에서 시작했다. 공장에서 프레스로 찍어내듯 비슷한 국민들을 양산하고 싶었지만 세상에 그런 건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것. 사람들은 겉으로 표를 내지 않아서 그렇지, 니트로글리세린은 아닐지언정 누구나 가벼운 기폭제 하나쯤은 가슴 속에 장만해두고 살았다. 그랬었던 거 같다.



  奴



  문 열고 소리치면

  긴 대답으로 서 있는 얼굴

  언제나 그렇게

  나에게서 나를 빼버리고 남는 얼굴.


  갈수록 나는

  몇 겹 부끄러움 몸에 둘러쓰고

  비틀거리거나

  자빠지기 일쑤로다.


  지나는 바람 불러 세워

  세상의 뜻을 맡기고

  그 살갗에

  내 볼을 비비며 껴안아도

  나는 끝내 빈껍데기일 뿐

  타는 입술일 뿐…….


  몇 살 먹은 絶望아.

  너는 요란한 소리로 나를 다스리는

  나의 원수로다,

  나의 마지막 남은 칼이로다.  (1974. 전문)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 다만 한 가지 북괴의 적화통일 야욕을 멈추지 않는 위기상황을 늘 겪어야 하는 특수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채택한 가장 효율적인 “한국적 민주주의”인 유신체제를 이어가야 하는 나라의 신문기자. 불온하다는 판단이 들면 그 판단을 누가 하는지는 몰라도 가볍게 자신이 쓴 기사 자리가 하얗게 빈 채 인쇄되어 나가야 하는 나라에서, 기자이기도 한 시인은 “낙원 속의 노예” 상태인 자신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성부는 저 아프리카 잔지바르 섬 출신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낙원 속 노예상태인 유수프가 아무 전망도 내놓지 못한 반면에, 한국적 민주주의의 낙원 속에서 우리가 느끼는 절망을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칼로 소유하기를 바라고 있다. 노예의 절망이 한 자루의 칼이라는 희망으로 뒤집히는 역전극의 시도. 이성부는 이런 시인이었다.

  시인이여, 편히 쉬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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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lgial 2024-02-15 06: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뜨거워지는군요. 선친이 시인의 고등학교 후배인데 마주친 적이라도 있는지 여쭤볼 길이 없습니다.
제 청소년기에는 이 분은 없었고, 김남주•김승희•고정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의성’은 오타입니다^^

Falstaff 2024-02-15 15:59   좋아요 1 | URL
멀리서나마 인연이 있는 시인이군요. ㅎㅎㅎ 멀지 않은 미래에 제가 시인을 먼저 만나서 물어보겠습니다. 오타 지적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수정했습니다. ^^

그레이스 2024-02-19 08: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몇 살 먹은 절망아!˝
이 부분 소름돋았습니다.

Falstaff 2024-02-19 12:19   좋아요 1 | URL
ㅎㅎㅎ 시집은 읽으면서 이런 시 한두 개 건지면 본전 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