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꼭두각시
윌리엄 트레버 지음, 김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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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잉글랜드 도싯 지방 우드컴엔 우드컴 파크라는 대 저택이 있어서 삶의 활기를 만끽하는 반면, 아일랜드 킬네이 주택은 무덤처럼 고요하다며 작품은 시작한다. 두 집안이 무슨 관계인지 보자.

  160여년 전이면 1820년대에 17세 영국인 소녀 애나 우드컴이 아일랜드 남자 윌리엄 퀸턴과 결혼해 아일랜드로 떠났다. 코크 주 로크에서 멀지 않고 페르모이에서도 멀지 않은 킬네이 저택에서 살면서 킬네이 최초의 과수원을 조성하는 등 열심히 살다가 그만 일찍 세상을 뜨고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만일 여주인이 살았다면 마흔 살 정도 됐을 무렵에 아일랜드에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기근이 들고 만다. 당시 아일랜드 인구 8백만 가운데 2백만 명이 굶어 죽었다고 기록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아일랜드 붉은 머리카락의 백인들이 대규모로 미국으로 가는 배를 탔다. 그때 퀸턴 가는 코크 주에 막대한 토지를 가진 대지주로 이름이 높았으며 여주인이 아낌없이 소작인들을 돌보아 덕망을 곳곳에서 칭송했음은 물론이다. 그러다가 대기근이 들자 이미 나이 든 퀸턴 씨 눈에 저택 저 너머 언덕에 죽은 아내의 혼령이 마치 저 어진 고다이바 부인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더니 세상의 땅은 농사를 직접 짓는 사람들의 것이니 골고루 나누어 주라고 산 남편에게 당부를 했다. 퀸턴 씨는 죽은 아내의 말을 따라 진짜로 땅의 대부분을 소작인들에게 주어버렸다.

  두 세대가 지난 후에 영국의 한 육군대령이 페르모이에 주둔했다. 이때 대령의 맏딸이 퀸턴가의 남자와 결혼해 아일랜드에 살면서 아들 윌리와 딸 제럴딘과 데르드러를 낳았고, 작은 딸은 영국인 보조 사제와 결혼해 딸 메리앤을 낳았다. 작은 딸이 결혼할 때 우드컴 집안은 결혼선물로 신랑에게 우드컴 마을의 종신교구 사제직을 맡겼다. 퀸턴이란 성姓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 뿌리를 둔 성인 퀴엔틴(타란티노?)에서 유래했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하도 오래된 일이라서. 이 책은 육군대령이자 우드컴 가문 중에서 낮은 우드컴 가족이라 저택의 정원을 산책하더라도 집 주인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집의 두 자매가 낳은 아이들, 윌리와 메리앤의 이야기이다. 슬픈 사랑의 이야기. 윌리엄 트레버가 늘 그렇듯이.


  이 책을 읽기 위하여 독자는 1910년대 아일랜드 독립 과정을 대강 알아둘 필요가 있다. 1910년에 영국 정치판의 중요한 논쟁 가운데 하나가 아일랜드 자치법안 문제였다. 이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아일랜드에서는 친영(자치)파인 얼스터 연합주의자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완전독립파) 간에 살벌한 폭력행위가 벌어졌고 깜짝 놀란 조지 5세는 법안 연기를 결정했다. 이러다가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아일랜드 남자들은 승전을 하면 독립을 보장할 것으로 믿고 영국군으로 입대해 목숨을 바쳤다. 하지만 자치 또는 독립이 얼른 일어나지 않아 아일랜드에서는 1916년에 사실상 독립운동을 개막하는 부활절 폭동이 일어났다. 이때 장면을 다룬 문학작품이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가 쓴 <켈트의 꿈>이다. 폭동 이후에 아일랜드에서는 마이클 콜린스를 주축으로 하는 자치파와 미국 태생의 민족주의자로 완전한 독립을 주장한 에이먼 데벌레라 파로 나뉘어 콜린스는 길을 가다가 총격을 받아 죽기도 한다. 이와 별개로 ‘블랙 앤드 텐즈’라고 불리는 영국의 아일랜드 왕립 경찰대도 스파이를 처단한다는 이유로 한 마을을 잔인하게 초토화시키기도 했다. 코크Cork 주는 독립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분쟁지역 가운데 하나로 ‘불타는 코크’로 불릴 정도였다. 그리하여 윌리 퀸턴의 가족 역시 블랙 앤드 텐즈에 의한 테러/학살의 표적이 된다.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의 제분소에 도일이라는 남자를 복귀시켰는데, 누군가가 마이클 롤린스가 퀸턴 가를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전했고, 도일은 나무에 목이 매달린 채 혀가 잘린 시신으로 발견된다. 이어서 퀸턴 씨의 저택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집안에 있던 가족들이 흉탄을 맞는다.

  윌리의 이야기에서 처음 나오는 장면은 개인교사인 킬개리프 신부가 윌리에게 라틴어를 가르치는 모습이다. 서른 살이 넘지 않았으나 윌리가 아는 가장 품위 있는 사람인 킬래리프 신부는 지금은 시카고에서 가톨릭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과의 일 때문에 성직을 박탈당했어도 여전히 로만 칼라를 달고 다닌다. 흔히들 성직박탈과 관련해서 그렇게 말하지만 더 총명한 사람들이라면 그건 과장된 이야기일 것이라 일축해버리고 만다. 나중엔 어떤 일 때문이었는지 밝혀지는데 그건 비밀로 해두자. 성직 박탈 신부는 가진 돈이 없어 숙박비 대신 윌리에게 가정교사를 하고 젖소를 돌본다. 결혼 때문에 집을 떠난 하녀 자리를 새로 채운 총명하고 충직한 새 하녀 조세핀은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하녀다운 거친 손을 가지고 있었다. 바람과 달리 조세핀은 집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제분소 직원으로 다리를 절어 전쟁에 나가지 못한 조니 레이시와 결혼하고자 일을 계속할 수 없다고 마님께 아뢴다. 그러나 몇 년 후 조니 레이시는 브라이디 스위니라는 아가씨와 결혼한다. 인생이 그렇지 뭐. 멀지 않은 곳엔 두 고모가 늙은 하녀 필로미나와 함께 산다. 큰 고모는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전장에 나간 남편이 전사하는 바람에 거의 처녀 수준이고, 작은 고모는 말 그대로 처녀다. 제분소의 데렌지 씨는 아일랜드에 별로 없는 신교도라 작은 고모에게 청혼할 수 있어도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 엄두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둘이 서로 은근히 좋아하는 건 물론이다. 결코 이루어지지 않지만. 엄마는 저 위에서 우드컴 집안 이야기할 때 페르모이에 주둔한 영국대령의 큰딸이다. 여기까지 소개한 등장인물은, 영국의 아일랜드 왕립 경찰대에 의한 학살에서 죽지 않고 살아난 사람들이다. 킬갤리프 신부는 가슴에 총알을 맞아 죽었는 줄 알았다가 겨우 살아났고, 두 고모는 여행을 떠나자마자 학살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죽은 사람은, 아버지 퀸턴 씨. 일곱 살 누이 제럴딘과 여섯 살 데르드러, 요리사 플린 부인, 정원사 오닐 씨, 그의 아들 선하고 신중한 팀 패디, 작은 고모가 키우는 개 여러 마리, 그리고 시커멓게 화장 당한 퀸턴 가문의 저택. 며칠 전에 윌리는 아버지와 마차를 타고 시내에 장보러 나간 적이 있다. 이때 펍에 들러 가벼운 요기를 했고, 아버지는 영국군 러드킨 중사와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가 리버풀에 있는 청과물 가게를 물려 받았다고, 제대한 다음에 그곳으로 가서 가게를 운영할, “마음에 드는” (아버지 나이로 볼 때)청년이라 했다. 러드킨 중사는 새로 복귀한 제분소 직원 도일과 함께 전쟁터에서 싸웠던 인물로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기억하시지? 이산하의 시집 제목, 《악의 평범성》. 악은 보통의,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날의 쇼크로 알코올 중독에 접어든 어머니는 “러드킨 중사?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손님들에게 농산물을 파는 모습이 상상이 되니? 악마가 사람이 된 거야.” 혹시 엄마가 직접 리버풀의 청과물 가게를 들어봤을까? 어머니는 계속 되뇌인다. “어째서 그는 저격당하지 않는 거야?” 어머니는 남편을 잃었으니 그렇다 치는데, 트레버 선생도 러드킨이 학살의 가장 중요한 배후라고 생각한다.


  인도를 영원한 식민지로 두고 싶어하는 영국 정부에 의하여 인도로 파견 나간 대령의 딸은 영국의 또다른 식민지인 아일랜드 코크에서 도무지 폐허가 된 퀸턴 저택을 재건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연상할 수밖에 없는 그 밤의 악몽 때문에 아예 킬네이에 살 수도 없어서 반은 폐허가 된 패트릭 스트리트로 옮겨, 윌리는 머시에 스트리트 시범학교에 다니고, 엄마는 쏟아지는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누구의 방문도 거절하면서 어둑한 방안에 앉아 아침부터 위스키를 마시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는 저격당하지도 않는 거야?” 이젠 이런 말도 없이. 윌리의 외조부모는 여느 부모와 마찬가지로 맏딸을 한없이 사랑했지만 아일랜드 맏딸한테 들르겠다는 편지를 맏따님은 깨끗하게 거절한다. 부모가 보낸 편지를 열어보지도 않았으니 당연히 회신도 없다. 걱정이 된 부모는 우드컴 파크 인근에서 종신 교구 사제의 아내로 있는 작은 딸에게 편지를 해, 너라도 언니를 찾아가 위로를 해주라고 요구하고, 자매 우애가 좋은 동생은 기꺼이 자신의 딸 메리앤을 데리고 아일랜드를 방문한다. 윌리는 시범학교에서 스스로 걸어나와 이제 기숙학교에 들어간 상태의 여름방학.

  메리앤. 이 사랑스런 아가씨에 관해서는 책의 맨 앞에 짧게 소개를 해놓았다.

  “우드컴 마을의 종신 교구 사제 부부의 하나뿐인 아이는 퀸턴가의 사촌과 사랑에 빠져 킬네아로 와서 사는 세 번째 영국 여성”이라고. 그러면 책은 윌리 퀸턴과 메리앤 우드컴의 애잔하고, 길고, 쓸쓸하고, 오래도록 고통스러운 사랑 이야기가 될 것임을, 우리 윌리엄 트레버 팬들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단 하나를 말할 뿐이다. 당신의 짐작이 맞다고. 나는 여기서 머뭇거린다. 스포일러를 만들지 않으려면 여기서 멈추어야 한다. 그러면 이젠 독후감도 끝내야 한다. 어쩔 수 없다. 하고 싶은 말을 언제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한 마디만 하자.

  빌 영감, 문제는 배추장수 러드킨이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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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3-12-13 06:5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포일러 ㅋ 폴스타프님이 이렇게 역사를 정리해주시니 이 책을 이해하기 더 쉬워진거 같습니다~!! 트레버의 장편들은 영국과의 갈등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가 많은것 같습니다.


아일랜드에도 배추가 있나요? ㅋ

Falstaff 2023-12-13 07:01   좋아요 1 | URL
러드킨은 아일랜드가 아니라 잉글랜드 리버풀 축구장 옆에 있는 배추가게 쥔이 됩니다. 장사는 겁나게 잘 됐지만 끝이 안 좋았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ㅋㅋㅋㅋ
트레버 자신이 아일랜드 태생의 잉글랜드인인 거 같습니다만 정확한 건 아닙니다. 눈치로 보아하니 그렇다는 말씀.

페넬로페 2023-12-13 1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배경이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습니다. 복수의 끝은 허무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지만 그래도 윌리의 입장에서는 러드킨이 문제가 아니었나 생각했습니다. ㅠㅠ

Falstaff 2023-12-13 16:23   좋아요 1 | URL
윌리야 몇 년 동안이나 엄마한테 귀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넋두리를 들었으니 그렇다 쳐도, 작가는 그래도 악의 근본을 밝히려 해봐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 아쉬움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