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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너비 스토리
앤 타일러 지음, 장영희 옮김 / 프레스21 / 2001년 5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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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앤 타일러는 퓰리처 상을 받은 <종이시계> 한 편 읽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생각이 바뀌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책방에서 앤 타일러가 쓴 <바너비 스토리>를 보고 주저없이 고른 이유는 <종이시계>에서 주인공 매기의 절친 세레나 남편의 장례식 장면에 나오는 대사가 콱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세레나는 남편이 살아 있을 때, 아직 건강할 때 조깅이라도 하라고 바가지 벅벅 긁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날 집에서 꼼짝도 하지 않더니 피리릭 병이 들어 중환자실에서 형편없는 몰골로 짧지 않은 시간동안 누워 있었던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고 세레나가 죽어가는 남편 맥스에게 악을, 악을 쓰기를,
“멋진 빨강색 운동복을 입고 뛰다가 갑자기 죽는 거하고, 온몸에 주삿바늘과 튜브를 잔뜩 꽂은 채 병상에서 죽는 거하고 뭐가 더 좋니?”
이때가 작년 초. 망치로 머리통을 맞은 것처럼 띵, 했다. 나도 취미라고는 음악 듣기와 책 읽기. 몸 꼼지락거리는 건 호환 마마만큼 싫어해 바야흐로 비만, 뚱보 대열의 앞자리를 깔고 앉은 거였다. 앞자리에 서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서도 움직이기 싫어 깔고 앉아 있었다니까 글쎄. 그리하여 나도 운동이란 것 좀 해보자, 라고 깊이 각성했다. 각성을 했지만 움직이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이 하긴 해야 하는데 첫 발 떼기가 그렇게 어려웠다니까. 그러다가 4월 초가 되고 아무 생각없이 체중계에 올라보니 여태까지 최고 기록이었고, 몇 달 있으면 죽으려나? 싶었다가 다시 퍽, 떠오르기를 “암만해도 멋진 운동복을 입고 뛰다가 심장마비로 죽는 게 온몸에 튜브와 주삿바늘을 꼽고 있다가 죽는 거보단 낫지?”
그래서 식목일, 4월 5일부터 근처에 있는 작은 대학 캠퍼스를, 아직 해 뜨려면 시간이 많이 남은 어두운 새벽에, 뛰지는 못하고, 걷기 시작했다. 처음엔 한 3킬로미터. 집에서 학교까지 왕복 2km. 합해서 5km. 5km도 걷고 나면 육수가 얼마나 빠지는지. 이후 장소를 대학에서 센강으로 바꾸어 9km, 10km, 13km, 15km 이렇게 추워질 때까지. 시속 4.7km에서 시속 6.7km로. 그리하여 올해 1월 1일 몸무게가 최고점 대비 13킬로그램 빠졌다. 여전히 일주일에 8일 술 마셔도 당뇨는 원래 정상이었고,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술 때문에 간 수치는 좋지 않았다. 체중을 8월 초까지 계속 유지했다가, 아무리 봐도 술이 너무 과했다. 스스로 판단하기에 약한 알코올 의존증에서 가운데 중, 중증 알코올 의존으로 넘어가는 거 같았다. 그리하여 일단 반 이하로 줄여보자. 술 줄이는 것이 악을 쓰고 운동하는 거보다 더 힘들다, 8월 초부터 독하게 술을 덜 마셨더니 오늘 아침 공복 체중이 5kg 더 줄었다. 그러면 18kg 이상을 감량한 거다. 이젠 웬만큼 걸어서는 땀도 안 난다. 충분히 시간을 들여 완만하게 줄여서 요요 같은 건 겪어보지 않았다. 이게 다 앤 타일러 덕분이다.
물론 안 좋은 점도 있다. 어떻게 다 좋을 수 있나 사람 사는 일이. 체중이 주니 술이 약해진다. 많이 못 마신다. 아무래도 힘이 좀 빠진 거 같다. 작아서 못 입던 옷이 이젠 포대자루가 됐다. 다음 달에 조카 결혼하는데 양복도 한 벌 사야겠다. 얼굴 예뻐졌다고 마누라 감시 눈초리가 매워졌다. 이것도 앤 타일러 덕분이다.
뚱보 여러분. 저도 뚱보였습니다. 독하게 마음먹고 살 빼 보셔요. 사는 게 조금은 덜 불행해집니다.
바너비. 화자 ‘나’다.
나는 용역회사 “척척 심부름 센터”의 직원이다. 노인, 장애인 같이 거동이 불편한 사람에게 노동력을 제공하는 회사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작품을 시작할 때는 3주일 모자란 서른 살. 그러나 결혼을 해서 처가의 방을 빌어 살았고, 딸 오팔을 낳았고, 이혼을 했고, 그럼에도 처가집에서 나가지 않고 견디다가 애인이 생긴 후에야 지하 셋방에 살기 시작했으나 애인과 헤어졌고, 전처와 딸은 내가 사는 볼티모어에서 필라델피아로 이사 가서 변호사 남편/새아빠와 함께 좋은 집에서 살고, 나는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고물차를 몰고 가 오팔과 함께 쇼핑을 하거나 조지 판스워스라고 하는 개하고 산책을 한 다음 점심을 먹고 집에 데려다 주고 다시 온다. 용역회사에서 머리보다 몸을 쓰는 일을 한다고 원래 빈민가 출신이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볼티모어에서 상당한 재산가, 구태여 말하자면 준재벌 정도의 부르주아 가문 출신으로 아직 졸업하지 못한 대학에서 졸업장만 따면 아이비 리그 출신인 형처럼 아버지가 위원장으로 있는 재단에 들어가 펜대를 잡으며 안락하게 살 수 있으나 단지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 거다.
대개 이런 부류에서 많이 발견할 수 있듯이, 10대 시절 나의 혈관엔 유별나게 다량의 니트로 글리세린 농도가 짙어서 담배는 피우지 않았어도 마리화나는 좀 했으며, 술을 즐기지는 않았지만 남의 집 창문을 열고 몰래 들어가 남의 물건을 슬쩍하는 일이 잦았다. 친구들은 주로 술과 야한 비디오 테이프에 집착했으나 나는 개인적인 것에 관심이 있어서 낯선 가족들의 어릴 때부터 찍은 사진이라든지 가슴에 다는 로켓 속의 작은 초상화 같은 거를 구경하는 데 홀딱 빠졌었다. 그리고 한 번은 상아로 만든 중국제 작은 조각품. 남녀가 교합하고 있는 무지 야한 조각이었는데 그건 그만 주머니에 넣고 내 침대 시트 밑에 보관하다가 결국 부서뜨렸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집주인이 어렵게 구한 예술품, 이라고 주장하는 걸로 가격도 만만치 않게 나가는 거였다.
비행 전문 청소년들은 결국 도가 지나쳐 이들을 체포하기 위해 방범 헬리콥터와 경찰차 몇 대가 뜨는 소동이 벌어졌고, 내가 이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지붕에서 나무로 건너 뛰다가, 아직 마리화나 약기운이 완전히 가시지 않아 그만 나무 줄기를 따라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이목을 끄는 사이, 함께 일을 저지른 친구들은 도망할 수 있었고, 나의 단독범행으로 걸려 큰일 날 뻔 한 것을 지역 유지였던 아버지의 뒷배경과 엄마의 이웃과의 사교술 덕에 범죄기록만 남기고 집에 돌아올 수 있었으나, 당시 합의금 8,700 달러는 서른 살이 넘도록 어머니가 툭하면 입에 올리는 족쇄가 됐고, 일종의 특수 교정학교에 들어가야 했으며,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취직할 곳이 없어서 결국 다시 아버지의 소개로 철물점 점원으로 들어갔지만 하루는 키 작은 아주머니 손님이 요구대로 합판을 톱질해 잘라주다가 그게 규정위반이라서 그 자리에서 해고당했는데, 손님 아주머니가 운영하는 회사가 바로 척척 심부름 센터라서 바로 다음 날부터 근무를 시작했으며, 하다가 보니 이게 적성에 딱 맞는 일이었다.
인생에 암울했던 어떤 해의 마지막날, 12월의 마지막 토요일이었다. 하필 똥차가 또 말썽을 부려 필라델피아 행 기차를 기다리다가 잘 차려 입은 남자를 보게 되고, 그가 한 여자한테 접근하는 것도 보고, 남자는 딸에게 급히 전해야 하는 딸의 여권을 필라델피아 역 대합실까지 대신 가져다 줄 사람을 고른다는 것도, 직접 가지 않는 이유는 아내가 파킨슨 병이라 오래 혼자 둘 수 없기 때문인 것도 알게 되었으며, 금발의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가 기꺼이 그러겠노라고 해서, 그녀의 뒤를 바짝 쫓게 되었다. 필라델피아 역에 내려 보니까 정말로 딸과 만나 서류를 전해주었는데 눈에 확 띄었다.
매주 토요일에 필라델피아에 혼자 살고 있는 엄마한테 들른다는 걸 알게 된 나는 다음 주에는 좀 깨끗한 옷을 입고 같은 시간에 역에 나가 드디어 그녀, 소피아 메이나드, 은행 대출계에서 근무하는 여성의 옆자리에 앉는 데 성공하고, 그녀가 커피를 사올 때 스웨터에 엎지르게 하는 데, 결론적으로 성공하여 말을 트고 가까워진다.
그리고 나의 직업에서 만나는 많은 노인 여성들, 노인 남성, 심인성 광장공포증인 30대 여성 등등. 또 중요한 것 하나 더. 엄마의 손에 들린 나의 족쇄 8,700달러. 전처 나탈리. 딸 오팔.
한 때는 구제불능의 문제아 청소년이었지만 지금은 지역 노인들이 가장 신뢰하는 젊은이인 나, 바너비 게이틀린. 노인들은 망설이지 않고 내게 집의 열쇠를 맡기고, 다락방을 청소시키고, 안 쓰는 가구를 지하실에 보관하게 하는데, 지하실 문을 열어 두었다가 고객들의 전재산을 훔쳐가도 그걸 누가 알겠느냐고. 그러나 세상은 험하다. 그리고 개중엔 따뜻하기도 하다. 이 문제아 출신 젊은이의 사랑과 천사와 늙음과 가족과 이것들을 다 합쳐서 사는 이야기. 전형적 미국식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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